신라 영토에 고구려 고분이? ‘세기적 발견’에 학계 충격
1985년 1월 영주 비봉산을 답사하던 한 학자의 눈에 도굴 현장이 나타났다. 대형 봉분 밑으로 뚫린 구멍으로 안을 들여다본 학자의 눈에 대형 벽화들이 나타났다.
“소백산 밑으로 벽화 발견은 드문데?” 교수는 이 유적이 국보급을 넘어서는 세기적 발견임을 한눈에 알아챘다.
발견을 알리는 기자회견장엔 당시 방송 3사가 모두 동원돼 생방송으로 현장을 중계했고, 이튿날 전국 도하 일간지의 헤드라인은 ‘영주 벽화고분 발견’ 기사가 장식했다.
발굴 과정에서도 흥미로운 자료들이 잇따라 발표되며 전 국민의 관심을 모았다. 옛 신라 영토에서 발견되었으니 당연히 신라고분으로 여겼던 이 무덤이 고구려계 고분이었다는 사실에 학계는 더 놀랐다.
1985년 새해 벽두에 온 국민의 관심을 받으며 역사학계를 깜짝 놀라게 했던 영주 순흥 벽화 고분으로 떠나보자.
◆동서 3.5m·남북 2m·높이 2m 굴식 돌방무덤=우선 무덤 내부를 들여다보자. 고분은 횡혈식석실로 다른 말로 ‘굴식 돌방무덤’이다. 즉 무덤 내부가 돌방으로 되어 있어 사면 벽에 벽화를 그릴 수 있는 구조다.
무덤은 동서 3.5m, 남북 2m, 높이 2m로 동서로 긴 장방형을 이루고 있다. 벽화는 석회를 바른 네벽, 연도(羨道), 좌우벽, 시상대(屍床臺) 측면 등에 그려져 있다. 묵선(墨線)으로 윤곽을 잡고 그 안에 붉은색, 노란색 등의 색채를 사용했다.
동벽엔 서조도(瑞鳥圖)와 산그림이 그려져 있는데 원근감이 결여되었고 완성도는 그리 높지 않다. 북벽엔 산악도, 새그림, 연꽃이 그려져 있다.
서벽엔 뱀을 쥔 역사도(力士圖)와 집 그림, 버드나무 그림이 남아 있다. 역사도는 이 무덤을 지키는 수호신 역할을 하고 있으며, 여기에 등장하는 나무는 한국 최초 버드나무 그림이라고 한다.
남벽엔 어형기(魚形旗)를 쥐고 있는 인물상과 묵선으로 처리된 꽃문양이 남아 있다. 여기에 총 9자의 글씨가 등장하는데 내용은 ‘己未中墓像人名□□’명이다.
이외 연도 동벽에는 반라(半裸)의 역사도와 시상대의 측면에는 연꽃 문양이, 또 다른 측면에 창을 쥔 인물상이 그려져 있다.
한편 무덤 내부에서는 모두 7구의 인골이 확인되었는데 시상대에서 2구, 그리고 서북쪽에서 5구의 인골이 확인되었다.
◆신라 땅에서 발견된 고구려고분에 학계 충격=왕릉급 무덤도 아니고 부장품도 거의 남아 있지 않은 도굴묘에 왜 학계는 그토록 열광했을까. 이제 그 무덤이 가지는 역사적 의미를 들여다보자. 처음 이 무덤은 신라묘로 추측했는데 그 이유는 바로 인근에서 신라 최초 벽화고분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태장리에서 발견된 신라묘 ‘어숙지술간묘’(於宿知述干墓) 때문에 순흥리 고분도 신라 묘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이 고분을 발견 발굴한 이명식 전 대구대 교수는 “벽화의 화풍이 고구려 고분벽화의 영향을 받은 흔적이 많이 보인다”며 신라고분보다는 고구려고분설에 무게를 두고 있다. 무덤의 ‘산악도’가 고구려의 덕흥리고분, 무용층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벽에 남겨진 ‘기미’(己未)라는 명문도 이 학설의 무게를 실어주었다. 많은 논란이 있지만 학계에서는 이 ‘기미’를 서기 539년으로 추측한다. 이 시기는 장수왕의 남하(南下) 정책에 의해 고구려의 영역이 소백산, 흥해까지 연결되던 시절이었다. 학자들은 바로 이 시기에 영주에 거주하던 고구려의 무인이나 호족이 이 무덤을 축조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 고구려의 세력들은 진흥왕이 한강 유역을 회복하는 551년까지 40년간이 지역을 지배했다.
◆무덤 내에서 인골 7구 발견 ‘순장’ 여부 놓고 논란=무덤에서 발견된 7구(혹은 9인)의 유골도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유골은 시상대 위에 남녀 2구, 다른 곳에서 5구가 발견되었다. 시상대 위의 남자는 40대 중 후반이었고 여자는 10대 후반이었다.
주목을 끈 것은 나머지 5구도 모두 17세 정도 여성이었다는 점. 처음엔 가족묘로 인식되었으나 유골 연구가 진행되면서 순장(殉葬)으로 결론이 모아졌다. 일반적으로 순장하면 왕릉급에서 발견되는데 지방 호족의 묘에서 발견되었고, 당시(539년)에는 지증왕이 순장을 금지하던 시기여서 많은 의문을 낳고 있다.
그림에 나타난 삼지창과 거기에 매달린 물고기 모양의 어형기(魚形旗)도 관심을 끌었다. 이 어형기는 일본의 ‘고이노보리(鯉のぼり) 축제’ 때 심벌로 사용되고 있는데 학자들은 이 축제가 고구려에서 한반도를 거쳐 일본으로 건너간 것으로 보고 있다. 실제로 일본 학자들이 이 벽화를 접하면 너무도 익숙한 깃발 모습에 충격을 받는다고 한다. 이 어형기는 지금도 일본의 깃발 장식에 많이 응용되고 있다.
◆영주시 고분탐방로·벽화고분박물관 등 추진=현재 남아 있는 삼국시대의 벽화고분은 모두 60여개. 이중 90%가 고구려 지역인 북한에 분포하고 있다. 남한은 백제고분 2기, 가야고분 1기, 신라고분 1~2기 정도가 남아 있다.
순흥리 벽화고분이 가지는 역사적 의의는 결코 간과 할 수 없다. 사면 가득 벽화로 채워진 고분은 매우 드문 현상으로 쌍용총과 무용총 일본의 다카마쓰 고군에서만 발견되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순흥리 고분벽화는 세계적 고분들과 견줄 수 있을 만큼 의미가 크다. 이 벽화에는 삼국시대 당시의 종교관, 내세관과 신라와 고구려의 문화 교류 흔적을 살필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이에 영주시는 올해 2월 ‘순흥 벽화고분’의 체계적인 관리와 보존·정비를 위한 영주 순흥 벽화고분 종합정비계획을 수립했다.
시는 내년부터 2033년까지 사업비 113억 원을 투입해 순흥 벽화고분 가치 보존, 관광자원 기반 마련을 위한 각종 사업을 추진할 계획이다.
이 계획에 따라 ▶문화재구역 사유지 매입 ▶벽화고분 보존을 위한 연구계획 수립 등의 학술연구 ▶주변 고분군 발굴조사 및 정비 ▶고분 탐방로 신설 ▶전시 고분 설치 ▶벽화고분 모형관 보수 ▶벽화고분 박물관 건립 등 계획을 추진한다.
박남서 영주시장은 “순흥 벽화고분은 소백산 죽령을 둘러싼 고구려와 신라의 패권 다툼을 보여주는 문화유산”이라며 “지역의 문화자산을 잘 보존·정비하고 활용해 영주시의 새로운 랜드마크로 만들어나가겠다”고 밝혔다.
영주 순흥벽화고분 모습. 영주시 제공
위에서 본 영주 순흥벽화고분 모습. 영주시 제공
뱀을 쥔 역사 모습. 영주시 제공
국학중앙연구원 제공
어형기 모습. 영주시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