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은 일제강점기인 1941년 12월에 현재 일본의 오사카 시히라노 구에 해당하는 오사카 부(大阪府) 나카카와치 군(中河內郡) 가미무라(加美村)의 조선인 정착 지역에서[2] 4남 3녀 중 3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가난 때문에 일본으로 건너갔으나, 광복 직후인 1945년 11월 귀환하여 경북 포항으로 이사왔다.[3]
학창 시절
당초 경제적인 사정으로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하려고 했다. 하지만 담임의 설득으로, 등록금이 면제되는 동안만 다닌다는 약속하에 동지상고 야간부에 입학하여, 3년 내내 수석으로 장학금을 받아 졸업하였다.[4][5] 그 후 서울로 가서 1년간 노동자 생활을 하다 독학을 하여 고려대학교 경영학과를 입학, 아침 청소부 생활을 하며 학비를 조달하며 졸업하였다. 대학교 2학년 재학중 군에 입대하였으나, 훈련소에서 기관지확장증으로 군대를 면제받았다. 3학년 때에는 고려대학교 상과대학 학생회장으로 선출되었고, 다음 해인 1964년에는 고려대 총학생회장 직무대행으로 한일 국교 정상화를 반대해 6.3 학생운동을 주도하다가 수배되었고, 이후 자수하여 계엄사령부에서 조사를 받았다.[6]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고 6개월간 서울교도소에서 복역하였다.
현대건설 시절
학생운동으로 복역한 전과 때문에 취직이 어렵게 되자 그는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정부의 부당한 ‘취직방해’를 비판하는 편지를 썼다. 대통령 비서진이 찾아와 “젊은 사람이 자기 힘으로 일어서려는 것을 막는다면 국가가 영원히 책임지게 된다”는 요지의 말을 전했고 그는 현대건설에 취직을 할 수 있었다.[7] 그는 면접에서 “건축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창조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7] 결국 1965년현대건설에 평사원으로 입사한다.
입사 1년차 때 태국의 파타니와 말레이시아 국경 나라티왓을 잇는 고속도로 공사 당시 폭도들로부터 금고를 지킨 일화로 입사한 지 2년도 되지 않아 대리로 승진한 것을 시작으로 29세 이사에 이어 입사 12년만인 1977년 35세의 나이로 현대건설의 사장이 되었으며, 1988년에는 회장이 되었다. 현대그룹 재직시절 세계에서 3번째로 긴 말레이시아 피낭 대교(연륙교)를 건설하고 이라크 화력발전소를 짓는 등 세계 각지에서 사업을 진행하였고, 사우디 아라비아로부터 수주했던 당시 세계 최대 규모의 공사였던 주베일 항만공사의 성공으로 한국에 큰 이익을 주었다. 그러나 1980년 9월 이란-이라크 전쟁이 터지면서 막대한 공사 대금을 제대로 받지 못하게 되고, 또한 1990년~1991년 이라크-쿠웨이트 전쟁으로 인하여 미수 채권의 회수가 어려워져 이로 인해 퇴임 9년 뒤인 2001년 현대건설이 워크아웃에 들어가는 원인을 제공했다는 주장이 있다. [8].
1992년 대선 시절 정주영 당시 현대그룹회장의 출마와는 반대로 민주자유당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정계에 진출해 현대 정주영 일가와의 관계는 좋지 못하게 되었다. 하지만 2007년 대선을 앞두고 정몽준의원의 입당으로 정주영 가문과 화해하였다는 보도도 있다.[9]
정계 입문
이명박은 14대 전국구 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하였다. 재산공개 직전의 아파트 소유권 이전 및 부동산 가격의 불성실 신고등으로 인해 비난을 받았다.[10][11] 하지만 행정경제위원회 소속으로 국정감사에서 날카로운 질문을 해 관료들로부터 “여당 의원인지 야당 의원인지 잘 모르겠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재벌의 소유집중 현상을 타파하기 위한 ‘대기업 소유집중 완화 특별위원회’ 설치를 제안하고, 정부의 북한 수해에 대한 미온적 태도도 추궁했다.[7] 그는 95년 지방선거에서 정원식 전 국무총리와 민주자유당 서울시장 후보 경쟁을 벌였다. “경선은 국민에게 약속한 것”이라고 주장해 경선을 하는 데까지는 성공했지만 결국 패했다.
그 후 15대 총선에서 종로에 출마하여 이종찬, 노무현에게 승리함으로써 15대 국회의원이 되었다. 그러나, 선거기획을 담당했던 김유찬이 7억원 가량의 선거비용을 누락하고 7천만원 정도의 비용만을 신고했다는 것을 폭로하였다.[12] 뒤이어 이명박 후보의 참모들이 김유찬을 해외로 도피시킨 사실까지 밝혀졌다.[13] 이명박 후보는 재판을 받는 와중에 스스로 의원직을 사퇴하였다. 1998년 3월, 주성영 검사에게 2년 6개월을 구형받았으며, 서울고등법원에서 400만원 형을 선고받았다. 당시 서울시장에 출마하겠다고 밝혔던[14] 이명박 후보는 고등법원의 판결에 대해 “법적 판결이라기보다는 정치적 판결로 보아 도저히 승복할 수 없다”고 주장하며 한나라당 서울시장 후보경선에 참여하지 않았다.[15]
대정부질문에서 “서울~부산 간 운송비가 부산~미국 LA 간의 해상운송비보다 높다”고 지적하며 500㎞ 길이의 지금의 ‘한반도 대운하’ 공약의 출발점인 경부운하 건설을 제안했다.[7]
금융 사업
이명박은 국회의원직을 사퇴한 뒤 미국에서 체류하다가 대한민국에서 금융 사업을 시작하였다. 엘케이이뱅크라는 금융 투자 회사를 설립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이때 동업자였던 김경준과 그가 설립한 BBK의 주가조작 사건과 관련하여 이명박이 연루되었다는 의혹이 있어 검찰이 수사를 하였고 2007년12월 6일 이명박이 BBK와 관련이 없다는 발표를 하였다. 이에 대통합민주신당과 민주노동당 및 민변 등은 검찰 수사를 인정할 수 없다며,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이명박의 주가조작 등 범죄혐의의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검사의 임명 등에 관한 법률안'(일명 BBK 특검법)을 12월 17일 국회에서 통과시키고 이에 따라 특별검사의 수사가 이뤄졌다. [16][17] 하지만 BBK 특검팀은 2008년2월 21일 수사결과 검찰에서와 같이 이명박에 대한 모든 의혹이 사실이 아니라고 밝혔다.[18]
32대 서울시장으로 재임하던 시절, 이명박은 청계천을 복원하였다. 취임 즉후 복원 작업에 착수, 1년 후인 2003년 7월 청계고가도로를 완전 철거하고 이후 2년 3개월간 복원공사를 벌여 2005년 10월 5.84㎞의 청계천을 복원하였다. 복원 과정에서의 문화유산 훼손, 동대문운동장으로 이전시킨 노점장 문제 등이 미완의 과제로 남았으나 4천여 회에 걸친 협상 끝에 20만 상인들의 협조를 이끌어 내 청계천을 시민 휴식공간, 관광명소, 생태자원의 보고로 완성하였다.[19] 타임스는 복원된 청계천이 마치 뉴욕의 센트럴 파크처럼 사람들의 쉼터 역할을 한다면서 아이로니컬하게도 도심의 흉물로 철거 대상이었던 청계고가는 이 당선자 자신이 대표로 있던 회사에 의해 건설된 것이라고 지적했다.[20] 하지만 자신의 시장 재임시절 공사를 완공하기 위하여 복원을 지나치게 서둘렀다는 비판이 있다. 복원과정에서 상류를 복원하지 않고 상수도 물을 사용하게 만들었으며, 발견된 문화재들을 파괴하고 훼손하는 등 제대로 다루지 않는 등 환경과 문화에 대한 고려가 전무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부실공사에 대한 문제제기도 있었다.[21][22]또한 당초 예상보다 많은 연간 74억의 유지비가 들어간다고 한다. [23][24] 청계천을 유지보수의 한계성때문에 새로 만들경우 2조원의 돈이든다.
청계천의 개발로 인해 청계천을 기반으로 생계를 유지하던 많은 사람들이 청계천을 떠나 어려운 생활을 하게 되었다는 비판도 있다. 청계천 사업 과정에서 양윤재 서울시 행정부시장이 재개발 편의를 봐주는 대가로 뇌물을 받아 구속되었다.
2004년7월 1일 이명박은 서울시의 대중교통 체계를 전면적으로 개편했다. 이 때 신설된 교통카드가 티머니 교통카드다. 버스 중앙차로제를 실시하고 버스의 번호는 지역에 따라, 색은 종류에 따라 체계적으로 재정비하였고, 이용 요금은 교통카드의 환승 횟수가 아닌 이동 거리에 비례하도록 변경하는 한편 준공영제를 도입하여 적자 노선을 운행하는 버스 회사들의 손해를 보전해주었다. 버스개편의 결과 버스의 통행 속도가 빨라졌고 대중교통 이용객도 증가하였다. 중앙버스차로제도 그에 의해 생겨났다. [25] 2007년, 타임지는 청계천복원과 버스체계 개편등을 이유로 이명박을 “환경영웅”중 한 명으로 선정하였다.[26] 새로운 교통 시스템이 서울시장 취임 2주년에 맞추어 급하게 도입되느라 도입 초기 혼란을 빚었다는 의혹과 준공영제 도입으로 인해 버스회사들의 적자를 보전하는 데에 수천억의 예산이 사용되는 것등으로 인한 비판도 있었다. 교통카드 사업자 선정과정에서 사업자를 사전 내정했다는 의혹도 있었으나 사실이 아닌것으로 밝혀졌다.
그는 서울대공원의 근무인원을 관람객이 많은 주말과 휴일에 더 늘리고, 미술관 등의 관람시간도 직장인 퇴근시간 이후로 연장했다. 이 과정에서 “평일 관람시간을 늘리고, 주말 개장을 하라”고 지시하는 게 아니라 “저녁에 박물관 좀 구경합시다. 주말에 가도 볼 수 있습니까”라고 돌려서 신호를 보냈고, 공무원들이 알아서 그 뜻을 깨달을 때까지 기다렸다고 한다.
“서울시를 하나님께 봉헌한다”는 종교적 발언으로 사회적 논란을 빚었다. 치적을 늘리기 위해 국제금융센터 건립을 지나치게 서둘러 금융 그룹 AIG에게 지나친 특혜를 주었으며 그로인해 AIG가 1조원 가량의 차익을 남기게 해주었다는 의혹을 받고 있었으나 이 부분도 특검을 통해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27]
재직 당시 5조원이던 서울시의 부채를 2조원으로 줄였다고 했으나, 그 발언이 사실이 아니라는 주장이 한나라당 경선 도중에 박근혜 후보측에 의해 제기되기도 했다.[28]
이명박 대통령 취임식 엠블렘의 명칭은 태평고(太平鼓)이다. 태평소와 북을 모티브로 삼아 만든 것으로 한국의 태평성대를 염원하는 희망의 울림소리가 온 세상에 뻗어나가는 이미지를 형상화한 것이다. 태평소는 음색이 매우 강하고 높을 뿐만 아니라 세상을 두루 편안하게 해준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고, 북은 가장 힘차고 박진감 넘치며 전진을 상징하는 악기라는 점에서 모티브로 채택했다고 한다.[31]
투표자 중 과반수에 육박하는 압도적인 지지율로 대통령에 취임한 이후 이명박은 기존의 이미지대로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인재를 뽑고 정책을 추진하였다. 고소득, 땅부자 내각이라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원하는 인재들을 등용하였다. 또한 50여개 품목 물가안정, 일찍 출근하고 늦게까지 열심히 일하는 공무원상 정립을 위해 노력하였다. 한미FTA와 같은 현안들에 대해서도 기존 정부보다 확실하게 추진할 것을 천명하였다.
그러나 세계적인 유가급등과 환율상승등으로 인해 물가가 상승하고 미국산 쇠고기 수입재개를 위한 협상에서 드러난 문제들, 쇠고기 반대 시위를 하는 시민들에 대한 강경진압으로 인해 이명박 대통령의 지지율은 최저 16%를 기록하였다.
정치에 입문한 1993년부터 그는 불성실한 재산공개로 비난을 받았다. 1996년에 이명박은 총선에서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는데, 선거비용을 속이고 증인을 해외로 도피시켰음이 밝혀져 선거법 위반으로 대법원에서 유죄판결을 받고 의원직을 상실하기 직전에 의원직에서 사퇴하였다.
그가 서울시장에 재직하던 당시에도 여러가지 의혹과 비판이 제기되었다. 대표적인 사건으로는 이명박 공짜 테니스 의혹 사건[32] 이 있으며, 그가 추진했던 청계천 복원사업, 대중교통 개편은 많은 호응을 받았고 세계적인 모델이 되었으나 재정지출의 증가로 인한 비판도 일각에서 일고 있다.
그러나, 이명박에 대한 주요한 비판은 그가 2007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이후에 나타났다. 한나라당 경선 상대였던 박근혜와 대통합민주신당 등 경쟁 정당들이 뉴타운 의혹, 위장전입, 자녀 위장취업을 통한 탈세 , 소유 빌딩 지하업소의 성매매[33]등 여러 의혹을 제기하였고 그중 일부는 사실로 확인되었으며, BBK 주가 조작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의혹은 그의 대선 행보에 심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변수로까지 거론되기도 하였다.
BBK 주가 조작 사건은 사건의 당사자인 김경준이 선거에 즈음하여 귀국함에 따라 이에 대한 검찰수사가 대선의 최대 변수로 떠올랐다. 김경준이 귀국하며 가져온 이면계약서등 이명박이 BBK와 관련되었다는 증거로 제출되었으나 검찰의 수사결과 이것은 위조된 것이고 이명박이 연루되었다는 증거가 없어 무혐의로 밝혀졌다. 하지만 정치권의 논란은 사그라들지 않았고 정동영을 비롯한 당시 대선후보들과 대통합민주신당등의 주장을 이명박이 받아들여 BBK사건 뿐만아니라 차명재산, 서울시장 시절의 특혜의혹등에 대한 이명박 특검법이 입안되어 특별검사의 조사가 이뤄졌다. 2008년2월 21일 발표된 특검의 수사결과 이명박에 대한 모든 의혹은 무혐의[34]로 밝혀지면서 BBK와 특혜의혹등은 일단락되었다. [35]
또한 주요 공약인 '한반도 대운하'와 관련하여 반대여론에도 불구하고 강행할 것을 시사하는 정부 관련자의 발언과 이에 대한 각계의 반발로 많은 논란과 비판이 일고있다. [36][37][38]
최근에는 대통령직 인수위원회가 영어몰입교육을 검토하다 진중권 등 일부 진보운동가들의 강한 반발에 부딪히기도 했다.[39] 또한 2008년2월 10일에서 11일 사이에 일어난 숭례문 화재와 관련해 서울특별시장 재임 시 숭례문 주변을 개방한 이유로 책임론이 부각되었으나 직접적인 연결고리가 불분명하여 이러한 비판은 설득력을 얻지 못하고 있다.
또한 국무회의 구성을 위해서 15인의 국무의원 후보자를 지명하였으나 그 중 3인이 부동산 투기, 논문표절, 자녀의 국적 문제등으로 인해서 자진사퇴를 하였으며, 인선과정에서 능력주의 실용인사 코드를 주장하였으나 고소영(고려대-소망교회-영남), 강부자(강남 땅부자) 인맥으로 채워진 편중인사라는 지적이 있었다.
한나라당 국회의원 이상득은 이명박의 친형이다. 1970년김윤옥과 결혼했으며, 이주연(1971년 ~ ), 이승연(1973년 ~ ), 이수연(1975년 ~ ), 이시형(1978년 ~ )의 네 자녀를 낳았다. BBK 의혹 관련하여 제기된 주식회사 다스의 대주주인 이상은은 이명박의 맏형이다.
첫댓글 저서가 저거밖에 안되? 교보, 영풍 가니깐 한 30개는 널렸던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