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옛날에도 장애를 가진 사람이 많았을까? 이제는 장애를 가지고 있어도 한 사람의 인격체로 대접을 받아야 한다는 인식이 퍼져있습니다. 물론 아직도 많은 어려움을 겪으며 지내야 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요즘도 시위가 그치지 않고 있는 현실을 보면 뭔가 좋아졌다고는 하나 부족한 점이 많다는 것을 느낍니다. 물론 정상인이 느끼는 것과 장애를 가진 본인이 느끼는 것과는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당하지 않고서야 어찌 그 아픔을 다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정상인이 그들의 필요를 온전히 느끼기도 힘들고 그러니 그것을 채워주기도 어려울 것입니다. 사회가 발전할수록 그 필요가 점점 더 채워지기를 바랄 뿐입니다.
‘민석’과 아들 ‘현재’ 두 식구 주변에 현재를 돌보며 오라비 민석의 여유 있는 시간을 보장해주는 현재의 고모 ‘하영’과 장애인 활동지원사 ‘기철’ 그리고 민석의 애인(?) ‘수원’이 등장하여 이야기를 이끌어갑니다. 한 사람씩 처한 상황을 풀어봅니다.
민석 : 작가였지만 장애를 가진 아들을 돌보려 글쓰기를 포기합니다. 가끔 강의를 나가지만 주로 민석이와 함께 지내는 시간이 많습니다. 그리고 짬나는 시간에 수원이 경영하는 꽃집에 가서 쉬다 옵니다. 물론 그 사이 하영이가 현재를 지킵니다. 또 기철이가 같이 지내기도 합니다. 그렇게 평범한 일상을 지내다가 어느 날 자신의 불치병, 어쩌면 아들보다 더 고통스럽고 나아가 점점 죽어가는 병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현실로 나타나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짐이 되어갑니다. 가장 걱정되는 것은 바로 아들입니다.
현재 : 신체장애를 가지고 있지만 비교적 밝게 지냅니다. 장애를 가지고 있지만 성장은 계속됩니다. 성인이 되어간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 하나가 이성에 눈을 뜨는 것과 몸이 성적으로 반응을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도 모르게 발기가 됩니다. 어떻게 해결해야지요? 어느 이성이 자기 같은 장애인을 좋아하고 안나주고 키스를 해줄 수 있겠는가 하는 현실적인 고민이 생기게 됩니다. 아버지가 목욕을 시켜주는데 발기가 됩니다. 부끄럽기도 하고 어찌할 바를 모르지요.
하영 : 인간관계에 상처가 있습니다. 특히 이성관계에서 비롯된 듯합니다. 남녀교제, 원하면서도 그 상처가 더 이상의 교제를 막고 있습니다. 원하지만 진전이 없습니다. 어쩌면 두려워서 스스로 기피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오빠를 도우며 현재를 보살피는 것으로 위안을 받기도 합니다.
기철 : 복지관 소개로 알게 된듯합니다. 그렇게 시작하였지만 지금은 현재의 둘도 없는 친구입니다. 문제는 기철이 자신이 정신적인 장애를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감정표현을 거리낌 없이 표출하는데 때로는 그 감정조절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을 긴장시키기도 합니다. 심성이 악하지는 않지만 그런 경우 상황 통제가 어렵게 되기도 합니다.
수원 : 남편이 있음에도 이름만 남편인 듯합니다. 한번 나타나지도 않습니다. 집에나 오는지도 모릅니다. 아마 혼자 지내는 것 같습니다. 서류에만 존재하는 남편이라고 할까요? 민석과는 처음 작가와 독자로 만난 것 같습니다. 관계가 사랑으로 발전되었습니다. 서로 위로해주며 의지가 되었겠지요. 민석의 병을 알고 나서도 더 헌신적으로 곁을 지키려 합니다.
장애를 가진 자식을 둔 부모의 바람입니다. 자식보다 하루만이라도 더 살자. 장애를 가지고 홀로 산다는 것, 어렵지요. 요즘은 사회 안에 복지시설이 많이 준비되어 있고 또 제도가 구비되어 있기에 도움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요구하는 조건에 합하려면 여러 가지 조건들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럴지라도 제도적인 뒷받침이 있다는 것만도 다행입니다. 점점 더 좋아질 것을 기대합니다. 그러나 부모의 바람은 자기 슬하에서 돌봄을 받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시설과 혜택이 준비되어 있다 하더라도 부모의 사랑의 손길을 따라갈 만한 돌봄은 없을 것입니다. 그 부모가 죽음을 앞두고 있다면 본인 아픈 것보다 자식 생각에 마음이 천근만근 될 것이 분명합니다.
사람의 가장 치명적인 수치는 아마도 대소변을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는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 가장 개인적인 용무를 남의 손에 의지해야 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자신을 버려야 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몸이 아파서 일어난 현상입니다. 본인으로서는 이겨낼 도리가 없습니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발생한 일입니다. 가장 기본적인 생리현상인데 그래서 가장 개인적인 처리가 필요합니다. 이것을 스스로 통제하지 못하면 사느니 죽는 게 낫다고 여깁니다. 창피하고 자존심이 나락으로 떨어집니다. 존재의 의미를 상실합니다. 마지막으로 택할 수 있는 존엄사, 인간으로서 지키고 싶은 자존심입니다.
몇 가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장애인의 사랑과 성 문제, 장애인의 생활 독립, 존엄사 인정 여부, 사회적 복지제도와 나아가 가족의 확장문제 등 앞으로 우리 모두 보다 깊이 생각하고 해결해나가야 할 숙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영화 ‘나를 죽여줘’(Kill me now)를 보았습니다. 이렇게 멀쩡하게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