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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페북에 올린 나름의 분석글인데 락칙에 곡성 보신 분들 많은거 같아서 올려볼라구요.
근데 페북에 올린거라 반말, 음슴체 있어요.. 문제되면 지울게요..
<곡성> 스포 다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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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간으로 봤는데 영화 시간 중에 절반은 다리 덜덜 떨면서 본 거 같다. 진짜 컬트, 호러, 좀비, 고어에 장르영화까지 가리지 않고 좋아하는 데 이건 진짜 진심 무서웠다. 들어갈 때 맥주 한 캔 들고갔는데 다 마시지도 못함. 덜덜떨어서......
-이제부터 스포 들어감-
내가 이 영화에 10점 만점에 13점을 줘야한다는 이유는 바로 포스트모더니즘(이하 PM.)의 확실한 이해, 이걸 영화판으로 끌어 들여온 감독에 대한 존경이다. 이정도로 잘 녹아낸 영화는 처음봄. 사실 영화도 많이 보지 않았지만은.
벌써부터 많은 리뷰들이 있기 때문에, 이미 많이 나왔던 이야기들은 잘라 쳐내겠다. 특히 ‘믿음’ 부분은 빼겠음..
1. PM.의 특징 중 하나는 장르 파괴다. 감독은 코메디와 호러의 사이, 호러와 스릴러의 경계, 현실과 판타지의 모호함을 기술적으로 잘 녹여냈다. 기사에서 이 영화는 코메디라고 얘기했던 감독의 말이 백 번 이해간다. 영화 중반부까지 나랑 같이 봤던 관객들은 줄기차게 웃었는데, 이건 하나의 장치가 된다. 뒤에 가면 졸라 무섭거든....
2. 감독의 패러디가 보인다. 사실 오마주라고 해야할지 패러디라고 해야할지 잘 모르겠는데 나는 패러디라고 하고 싶다. 첫 관람이라 보이는 건 히치콕과 엑소시스트다. 패러디는 같은 걸 쓰되 다른 의미를 가져야 한다. 포통 풍자와 비판으로 이어지긴 하지만 이건 문학에서만 확실시 된 부분이다. 즉 다른 장르는 그 경계가 모호하다고도 할 수 있고 어떤 이론이나 개념이 정확히 구졍됐다고 보기 힘들다는 것이다.
히치콕의 새는 까마귀나 나방으로 치환되는데, 영화 초중반부에는 같은 의미로 들어간다. 불길한 상징과 죽은 사체를 먹는 장면까지. 하지만 영화 결말부에선 전부 뒤집어진다. 그건 바로 천우희의 역할인 것.
엑소시스트의 경우 선과 악의 구분이 명확하다. 때문에 그런 장면 역시 선/악의 구도로 간다. 곡성의 경우 영화 초중반부까지는 동일하다. 하지만 역시 후반부에 가선 뒤집어진다.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믿음에 따라 이 역시 같은 장면을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있게 해준다.
이 부분에서 나는 패러디라고 부르고 싶다. 다른 의미를 가졌거든. 저 시퀀스들을 이렇게 표현해 낸 감독에게 경의를 표한다.
3. PM.의 특징 중 또 하나는 일상과 예술이 동일하다는 입장이다. 이는 모더니즘의 일상과 예술은 구분된다는 입장과 반대된다. 곡성에서는 우리가 믿는 것이, 보는 것이 현실인지 예술인지 구분지을 수 없게 해준다. 그건 인간으로 대변되는 곽도원의 역할 때문이다. 그와 함께 부사제도 한 몫 했다.
곽도원은 인간의 믿음이다. 곽도원은 일본인을 잡으러 갈 때 바위 위에서 놓쳐 울다가 웃는 듯한 표정을 짓는다. 그건 현실의 인간 상이다. 자신의 믿음을 행하는 데서 오는 쾌감. 곽도원을 비롯한 여러 인물들은 광적인 모습을 많이 보인다. 주로 폭력에 관련되어 나타났는데, 이는 믿음으로 정당화되는 폭력으로 얘기할 수 있다. 허나 그들이 우리와 다르다고 얘기할 수 있나? 이는 최근에 나타난 게이트와 비슷한 부분을 보인다.
부사제의 경우 기독교로 얘기할 수 있는데, 이는 예수=악마라는 공식을 성립함으로 부사제, 기독교 역시 믿지 못하게 된다. 이 역시 믿음에 관한 이야기와 연관된다.
또한 모든 대사가 사투리다. 이건 관객이 이질감과 동질감을 동시에 느끼도록 해준다. 다시 한 번 묻자면 이것은 예술인가 현실인가, 내 세상의 일인가 다른 세상의 일인가.
4. 어떤 웃음 포인트가 후반부에선 진지한 장치가 되기도 하고, 곽도원이 일본인을 죽이러 갈 때 관객은 즐거워한다. 전자는 웃음, 후자는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한다. 그리고 영화는 후반부로 갈수록 관객 스스로 자신을 의심하게 만든다. 자신이 재밌고 즐겼던 것을 어떤 중요한 가치로 바뀌는 순간, 관객이 느꼈던 이전의 카타르시스는 불편한 것이 되버린다. 곽도원이 일본인을 죽이러 갈 때의 카타르시스는, 일본인이 나쁜 놈이 아니었다는 말을 들으면서 자신이 느꼈던 카타르시스는 안도감과 함께 섞여 매우 불편한 것이 되버린다. 이후 악마의 존재를 알게 되었을 때는 관객 자신으로 하여금 어떤 감정을 느끼게 하는데, 이는 이분법적 사고에 대한 도전이기도 한다.
5. 굿 장면. 황정민은 선 굿을 하고 일본인은 앉은 굿을 한다. 우리나라 무당의 종류는 크게 세 가지다. 독경무, 강신무, 세습무. 독경무는 개인의 능력에 관계없이 읽거나 외는 경의 위력에 의존한다. 그래서 보통 앉아서 한다. 쉽게 앉아서 책을 읽는 무당이며 때문에 주로 최마의식을 주로 한다.
일본인은 독경무고 황정민은 세습무로 보인다. 세습무는 신내림 없이 단순히 가업을 이어받은 무당인데 때문에 춤이 세련되고 가다듬어진 경우가 많다. 그리고 세속적이다. 이러한 부분은 역시 영화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일본인과 황정민은 이 역할에서는 충실했다. 다만 이 역시 우리의 믿음에 관한 것이다. 그냥 싸그리 다 관객의 믿음을 전복시켜 버렸다....
6. 일본인의 경우 우리나라 역신의 폼을 빌렸다. 역신이란 천연두를 데려오는 신을 얘기하는데, 이와 연관되는 노래가 바로 처용가다.
처용가의 내용은 밤에 집엘 와보니 이불 밑에 다리가 네 개네? 두 개는 자기 아내의 것이고 남은 두 개는 누구거일까. 하지만 용서해 준다. 라는 내용이다.
여기서 아내는 다른 남자와 잠을 자는데, 이 남자가 바로 역신, 천연두이다. 천연두, 두창이라고도 하는데 이 질병의 증상은 발열, 수포, 농포성의 병적인 피부 변화를 특징으로 한다고 한다. 영화 내의 증상과 동일하다. 또한 일본인이 여자들을 탐하고, 당한 여자들은 병에 걸려 미쳐 죽게된다는 설정, 즉 잔다는 설정 역시 같다.
또한 살점을 뜯어먹는 설정은 좀비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지만 그보다는 걸신으로 보인다. 하지만 천연두의 입장에서 보자면 천연두신은 질병을 인간에게 옮겨 죽인다. 이를 잡아먹는다고 표현하기도 하는데, 이와 비슷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얘기하는 걸신과 천연두의 설정을 빌려 가져와서 현재로 구현해낸 것이다. 이 역시 감독의 대단함을 느낄 수 있는 부분.
악마는 그런 역신을 이용한다. 악마의 입장에서 역신은 벨제붑. 벨제붑은 파리대왕으로 불리며 질병을 퍼트린다. 뭐 어디서는 페스트(흑사병)를 가지고 얘기하기도 하는데, 뭐 비슷하다고 볼 수 있을라나..
7. 곽도원에게 딸은 어떤 존재인가? 딸은 마누라 대신이다. 딸이 곽도원을 위로하는 장면, 딸이 곽도원의 옷을 갖다주는 장면에서 크게 나타난다. 이건 누가 봐도 아내의 역할이지만 영화에선 딸이 마누라처럼 행동한다. 이를 역신과 함께 얘기하자면, 곽도원의 아내 역할을 하는 딸을 역신이 탐했고, 딸에게 역신(+걸신)이 들렸다는 것이다. 이런 짧은 부분마저 장치로 활용한 감독.
그 외 아직 판단하지 못하는 거.
1. 대나무숲에 어떤 의미가 있을 것 같다.
2. 천우희의 존재 <- 지역신이 맞는 거 같음.
- 천우희가 요만한 여자애 말이여? 할 때 손바닥은 위로 뒤집는데 일반 사람은 그러지 않는다. 다만 확실한 증거가 없어 보임.
3. 무당과 일본인은 협력자인가?
- 나는 협력자보다는 두 인물이 하나의 제물을 놓고 싸우는 것 같이 느껴졌음. 서로 내가 잡아먹을테야! 하고 싸우는 것 같은데 한 번 더 봐야 알 수 있을거 같다.
첫댓글 곽도언이 아니라, 곽도원인데요 ㅎ 분석의 타당도는 둘째치고 주연 이름도 제대로 모르는 리뷰가 많은 공감을 받긴 어려울듯. 처음엔 오타인줄 알았는데 글 시작부터 끝까지 줄기차게 곽도언 ㅜㅜ
그르네요 ㅋㅋ 수정할게요 감사합니다 ㅋㅋ
천연두 옮기는 역신이라는 부분과 딸이 아내 역할하는 것을 엮어 처용가와 연관된다는 해석은 상당히 흥미롭네요. 잘 읽었습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