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풍 너를 보니...
법정스님
늙기가 얼마나 싫었으면 가슴을 태우다 태우다 이렇게도 붉게 멍이 들었는가,
한창 푸르를 때는 늘 시퍼를 줄 알았는데
가을바람 소슬하니 하는 수 없이 너도 옷을 갈아 입는구나,
붉은 옷 속 가슴에는 아직 푸른마음이 미련으로 머물고 있겠지,
나도 너처럼 늘 청춘일줄 알았는데
나도 몰래 나를 데려간 세월이 야속하다 여겨지네...
세월따라 가다보니 육신은 야위어 갔어도
아직도 내 가슴은 이팔청춘 붉은 단심인데
몸과 마음이 따로노니 주책이라 할지도 몰라
그래도 너나 나나 잘 익은 지금이 제일 멋지지 아니한가
이왕 울긋불긋 색동옷을 갈아 입었으니
온 산을 무대삼아 실컷 춤이라도 추려무나
신나게 추다보면 흰바위 푸른솔도 손뼉 치며 끼어 들겠지
기왕에 벌린 춤 미련 없이 너를 불사르고 온 천지를 붉게 활활 불 태워라
삭풍이 부는 겨울이 오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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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나 사이
詩 / 이 생 진
아내는 76이고 나는 80입니다.
지금은 아침저녁으로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어가지만 속으로 다투기도 많이 다툰 사이입니다.
요즘은 망각을 경쟁하듯 합니다.
나는 창문을 열러 갔다가 창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고
아내는 냉장고 문을 열고서 우두커니 서 있습니다.
누구 기억이 일찍 들어오나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억은 서서히 우리 둘을 떠나고
마지막에는 내가 그의 남편인 줄 모르고
그가 내 아내인 줄 모르는 날도 올 것입니다.
서로 모르는 사이가 서로 알아가며 살다가 다시 모르는 사이로 돌아가는
세월 그것을 무어라고 하겠습니까.
인생? 철학? 종교?
우린 너무 먼 데서 살았습니다.
* 지나간 2019년 봄,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 최참판 댁 행랑채 마당에서 박경리 문학관 주최로 ‘제1회 섬진강에 벚꽃 피면 전국시낭송대회’가 열렸습니다. 60여 명이 참가한 이 대회에서 대상을 수상했던 낭송 시가 바로 이생진 시인의 이 작품입니다.
70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남성 낭송가의 떨리고 갈라지는 목소리에 실려 낭송된 이 시는 청중들로 하여금 눈시울을 젖게 하였습니다.
좋은 낭송은 시 속의 ‘나’와, 낭송하는 ‘나’와, 그것을 듣고 있는 ‘나’를 온전한 하나로 만들어주기 때문입니다. 내 몸의 주인인 기억이 하나둘 나를 빠져나가서 마침내 내가 누군지도 모르게 되는 나이...
나는 창문을 열려고 갔다가 그새 거기 간 목적을 잊어버리고 창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고, 아내는 무엇을 꺼내려고 냉장고에 갔다가 냉장고 문을 열어놓은 채 그 앞에 우두커니 서 있는 장면은 상상만 해도 앞이 막막하고, 울컥하지 않습니까?
시인은 차분하게 이 참담한 상황을 정리합니다.
우리의 삶이란? “서로 모르는 사이가 / 서로 알아가며 살다가 / 다시 모르는 사이로 돌아가는 세월”일 뿐이라고...
그리고 자책하는 목소리에 담아 우리를 나무라지요. 거창하게 인생이니, 철학이니, 종교니 하며 마치 삶의 본질이 거기에 있기나 한 것처럼 핏대를 올리는 당신들은 얼마나 어리석은가 하고...
진리는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는데, 우린 너무 먼 데서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아내와 나 사이’의 거리는 우리의 어리석음을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바로미터인 셈이지요.
<출처미상> |
첫댓글 좋은글~~ 감사합니다 늘 건강하세요 큰오빠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