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과 불의 역사 , 용인도자기
그 명백 잇는 마순관 명장, 용인서 재도약 꿈꾸다
''도자기' 하면 보통 이천과 여주, 경기도 광주가 먼저 떠오른다.
대부분 사람의 머릿속에 그려지는 이미지다.
이천 등의 이미지가 워낙 강한 탓에 도자기 문화의 발상지가 용인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적을 것으로 예상된다.
그럼에도 처인구 이동읍 서리에는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가마터 중 가장 오래된 '서리 고려백자 요지'가 자리하고 있으며,
용인 전역에는 50개 가마터가 있다.
이처럼 용인 도자기의 기원과 지리적 조건, 그리고 앞으로 가능성까지, 이 모든 이야기를 용인시 제1호 공예 명창이자
향토민속 4호에 이름을 올린 마순관 명장에게 직접 들어봤다.
의문 하나, 산속에 웬 가마터가?
처인구 이동읍 서리에는 고려시대 초에 형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세계 최대 규모로 알려진 사기 가마터가 존재한다.
1989년 사적 329호로 지정된 서리 고려백자 요지가 그 주인공이다.
이 가마터는 잘못 만들어진 도자기를 한데 모아둔 적치장으로, 1984년 발굴 당시 길이가 83m에 달해 초대형 규모로 여겨진다.
여기서 드는 의문, 산속인 서리는 당시 오지나 다름없었는데 이토록 큰 가마터가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와 관련, 마 명장을 이렇게 '추측'했다.
지금의 남사읍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다는 설이 있어요.
실제로 그곳 땅속에서는 패류(조개 등 껍데기를 갖는 수생 무척추동물) 같은 게 발견되기도 하죠.
옛날에는 수송 수단이 육지보단 해상이었던 만큼 서리에서 생산된 도자기가 강줄기를 거쳐 바닷가로 운송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바닷배에 실린 도자기들은 서해와 맞닿은 고려의 수도 개성으로 운송된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서리 가마터에는 왕실에서 썼던 제기(祭器, 제사 때 사용하는 그릇)가 발굴된 만큼 이러한 가설에 힘이 실리고 있다.
의문 둘, 왜 도자기의 메카였을까?
두 번째 의문, 왜 용인에선 도자기 산업이 성행했을까?
실제 고려시대 초기부터 조선시대 말까지 건설된 총 50개의 가마터가 용인 전역에 남아있다.
전국적으로 봤을 때 가장 많다.
이처럼 용인이 과거 도자기 산업의 중심지였던 이유는 풍부한 산림과 좋은 흙을 갖췄기 때문이로 풀이된다.
도자기는 섭씨 1300도의 온도로 견고하게 구어줘야 만들 수 있다.
이때 전통가마에선 소나무 장작의 불이 필요한데, 떌감으로 활용한 용인의 산림 자원이 풍부하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도자기에는 좋은 흙이 필요하다.
일례로 점토 속 철분 함량이 가장 적은 백토는 백자의 원료로 사용된다.
백자는 청자, 분청사기, 옹기 중 최상급으로 여겨지는 만큼 백토 역시 가장 좋은 원료로 취급된다.
이러한 백토는 용인 지역에 많이 분포돼 있다는 게 마 명장의 설명이다.
따라서 도자기에 대해 강한 애착심을 가진 일제는 용인의 특산물을 도자기 원료인 고령토로 정하기도 했다.
도자기 대명사에서 밀려난 용인
안타깝게도 지금의 용인은 도자기를 대표하는 도시로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현재 그 명성은 이천과 여주, 그리고 경기도 광주가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역사만큼은 용인이 더 길다.
이례로 경기도 광주에는 왕실에 도자기를 공급하던 사옹원 분원이 설치됐으나 이는 조선시대 일이다.
여주는 일제강점기에 가마터가 크게 융성했으며 이천은 주로 옹기를 중심으로 한 가마가 존재했다.
즉, 고려 초기부터 도자기 산업이 발달한 용인보다 이들 지역의 도자기 역사는 상대적으로 늦게 형성된 셈이다.
하지만 일제로부터 우리나라가 독립된 이후 상황이 달라졌다.
마 명장은 '우리나라 도자기를 좋아하던 일본인들이 한국에 와 도자기를 샀다'며 '하지만 용인은 이천이나 여주,
광주보다 도로가 늦게 깔린 만큼 서울에 살던 도공이나 도예가들이 이천, 여주 등에 자리 잡았다'고 말했다.
이어 '그러다 보니 일본인들이 여주나 이천, 고아주로 도자기 고나고아 투어를 다녔다.
우리나라도 일본인들을 대상으로 가마에 불 때는 모습을 보여주는 등 관광 상품을 만들었다'며
'돈벌이가 되다 보니 그곳의 도공과 도예가들이 늘어났다'고 설명했다.
용인의 반전은 지금부터
그러나 마 명장을 용인에서도 다시 도자기 산업이 빛을 발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에버랜드와 민속촌 등 용인이 가진 관광 자원으로 사람들을 끌어모을 수 있는 요소가 충분하다.
이에 투어버스를 활용해 이동읍 등 용인의 남부 지역의 가마터와 도자기 산업과 연계한다면 하나의 관광 상품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과거와 다르게 용인의 교통 체계는 상전벽해라 불릴 ㅈ어도로 발전하고 있다.
특히 서울과의 접근성은 물론, 충청도 지역과의 교통 편의성마저 좋아ㅈ지고 있다.
이처럼 용인의 입지적 여건이 휼륭한 만큼 마 명장은 용인의 도자기 산업을 알릴 수 있는 활동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 서울에 가려면 4시간은 걸렸지만, 지금은 1시간이면 갈 수 있잖아요.
그만큼 용인의 생활 여건이 좋아졌으니 도자기 산업도 함께 성장했으면 좋겠습니다.
이를 통해 더 큰 경제적 효과로 이어지길 바랍니다.'
용인의 도자기 역사를 설명하던 마순관 명장은 시종 일관 진지함을 감추지 않았다.
그의 말투와 표정에는 용인의 도자기를 알려야 하며, 그 명맥을 이어가야 한다는 사명감이 뚝뚝 묻어났다.
이처럼 그의 인생은 용인의 도자기와 떼려야 뗼 수 없는 삶이다.
동네 어르신들한데 듣던 '천재' 소리, 명장의 길로
지금이야 휴대폰, 장난감, 스마트TV 등 어린아이들이 가지고 놀 것이 널렸지만, 마 명장은의 유년 시절은 달랐다.
1954년 생인 그가 5~6세 때는 1960년, 아직 6.25 전쟁의 상흔이 남은 데다 시골 동네에는 유달리 할 것이 없었다.
그래서 뒷동산에 서 흔히 말하는 흙장난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가 놀던 곳은 마침 일제가 용인의 특산품으로 고령토를 차간 처인구 백암면 고안리다.
어쩌면 그는 태어났을 떄부터 용인의 도자기와 함꼐할 운명이었을지도 모른다.
더욱이 예술적 감각이 풍부했던 부친의 피를 이어받았는지, 그가 만진 흙은 어느새 강아지가 되고, 순식간에 고양이가 되기도 했다.
'천재다, 천재', '손재주 하난 기막히네'라는 동네 어른들의 창찬에 마 명장의 손에는 흙이 항상 묻어 있었다.
명장을 알아본 명장, 묵묵히 도자기를 굽다
그리고 군대를 다녀오고 난 뒤 고향에는 작은 변화가 생겼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도예가인 고 한익환 선생이 마 명장의 고향에 가마터를 만든 것이다.
한익환 선생 역시 고안리의 질 좋은 흙을 눈 여겨 봤던 것이다.
어린 시절, 흙으로 고양이나 강아지를 만들었던 그 기억을 떠올린 마 명장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고자
한익환 선생의 공방에 문을 두드렸다.
한익환 선생도 그의 손재주를 담번에 알아차렸다.
그렇게 1979년 마 명장은 한익환 선생의 수제자로 도자기를 만들기 시작했다.
도자기에 문양을 새겨넣는 등 도예가로서의 감각과 도자기를 굽고 만드는 도공으로서의 감각을 모두 갖춘
한익환 선생에게 도자기 기술을 배웠다.
힘든 일도 많았다.
도예가로서 명성이 높지 않았던 탓에 많은 돈을 벌 수 없었다.
1985년 자신의 첫 공방을 차렸지만, 도자기에 대한 대중적인 관심이 부족한 만큼 경제적 어려움을 겪으며 이곳저곳 보금자리를 옮겼다.
그래도 묵묵히 도자기를 빚었다.
이 일은 마 명장이 가장 사랑하고, 가장 잘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특히 회화처럼 평면 예술과 다르게 도자기는 무언가를 만들고 여기에 그림을 새겨넣는 종합예술이다.
이 먀력 덕분에 마 명장은 인고의 세우러을 견딜 수 있었다.
'흙이 주는 정서가 있어요'
이처럼 도자기를 너무 사랑하는 마 명장은 지금으로부터 6년 전 지금의 자리(원삼면 사암리)에 공방을 열었다.
1층은 공방, 2층은 갤러리, 3층은 화실로 구성된 이곳에서 마 명장은 체험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특히 주말만 되면 '가자'는 부모와 '가라'는 아이 사이에서 벌어지는 기싸움을 보며 마 명장은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다.
'5~6세 아이들이 흙 만지기를 굉장히 좋아하죠.
하지만 요즘 아이들은 아파트 생활권인 데다 장난감과 놀이기구마저 플라스틱과 철이다 보니 흙을 만질 기회가 없어요.
하지만 흙이 주는 정서가 있어요.'
마 명장이 어릴 때 흙장난한 것처럼 이곳을 찾은 어린 아이들도 찰흙을 가지고 노는 데 푹 빠진다.
일례로 6년 전 이곳을 찾은 한 여성은 '집에 빨리 가야한다'며 자녀를 보챘지만, 아이는 찰흙 만지기에 정신이 쏠렸다.
심지어 먼저 간다는 엄마의 엄포에도 아이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여기서 할아버지(마 명장)랑 논다'고 말해 죄중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그는 도자기를 빚다가 장난을 치면 열심히 만든 조형물이 무너질 수밖에 없다'며 '아이들이 흙을 만지기 시작하면
조용해 지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생전 장난감을 어질러 놓고 치우지 않은 아이들도 이곳에 오면 정리 정돈을 깔끔히 하고 간다'고 말했다.
그가 지역 행사를 백방으로 뛰는 이유, 용인의 명맥을 잇자
마 명장의 꿈은 용인 도자기의 명맥을 잇는 것이다.
사실 그는 처음 도예에 입문했을 때 도자기 산업이 발달한 이천과 광주에서 기술을 배우려고 했다.
하지만 도자기 문화의 발상지인 용인의 명백을 이어야 한다는 한익환 선생의 말에 마 명장은 사명감으로 용인에 뿌리를 단단히
내리고 있다.
포은 문화제 등 지역 행사에서 다양한 프로그램과 전시를 이어가는 것도 용인의 도자기 명맥을 잇겠다는 그의 당찬 포부에서 비롯됐다.
물론이 명맥을 잇겠다고 선뜻 나서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미 명장은 이에 굴하지 않은 채 도자기 문화의 발상지인 용인을 알리는데 앞장서고 있다.
고려시대, 조선시대까지만 해도도자기 산업은 말 그대로 최첨단 산업이었습니다.
공교롭게도 지금의 용인도 최첨단인 반도체 산업이 들어오고 각종 관광 자원으로 외국인들도 많이 올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의 전통문화인 도자기 산업을 용인에서 활성화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