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무실 때 아버지는 코를 심하게 고셨는데, 가끔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잠꼬대를 하실 때도 있었다.
어머니께 물어보면 젊어서 생사고비를 많이 넘겨서
그런가 보다고 하셨다.
10•1 사건으로 대구와 경상도 지역이 난장판이 되었고
관공서도 문을 닫았을 때, 달성군청 말단 서기로 있던
아버지는 폭동의 주역인 공산주의자들과 연관되었을
큰처남이 살고 있는 처가가 염려되어 왜관 위 약목에 있던
처가를 3일 오후에 찾았다가 한 번의 항변 기회도 없이
경찰들의 포승줄에 묶여 왜관 경찰서로 끌려가고 말았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전, 미 군정 하에서 좌익으로 몰리는
것은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상황이라고 들었다.
왜관 경찰서에는 포승줄에 묶여 잡혀온 사람들이
끝도 없이 길게 줄 서있었고, 차례대로 한 명씩 심사관
앞에서 몇 가지 일방적인 질문에 대답하고 곧바로 좌우로
분류되었다. 왼쪽은 철창, 오른쪽은 집으로였다.
잡혀온 대부분이 왼쪽으로 심판이 났고, 앞에 한 명을
남겨둔 차례가 되었을 때, 아버지는 극심한 공포를
느끼셨다고 했다. 공산주의자 지역간부의 매제,
왼쪽으로의 분류를 피할 방법이 없었고, 그쪽에서
겪을 고초는 상상이상일 거라고 짐작되었기 때문이었다.
눈앞이 캄캄해지는 가운데 집에 있을 아내와 돐지난지
몇 달 안 된 아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절망에 빠져들던 그때,
"묵이 아이가? 묵이 맞제? 자네가 와 여기 있노?"
누군가 아버지 옆으로 다가오며 아는 척을 해왔다.
고향 구미에서 국민학교를 같이 다녔던 친구였다.
경찰이 되었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왜관 경찰서에
있는 줄을 몰랐다.
그 친구 덕분에 아버지가 현재 말단이지만 공무원이고
공산주의와는 무관하며 단지 처가 일로 잠시 들렀다가
잡혀온 것을 제대로 설명할 기회를 가졌고, 오른쪽으로
분류되어 곧바로 풀려났다.
우마차도 빌려 타고 트럭 짐칸에도 올라타서 대구 집으로 힘겹게 돌아갔다.
밤이 깊어서야 허겁지겁 돌아온 아버지는 집에 오자마자
곯아떨어지셨고, 어머니는 피곤한 일이 있었나 보다
생각했다고 훗날 그날을 그렇게 회상하셨다.
아침 일찍 일어나 남편은 볼일이 있다며 자전거를 끌고
일찍 나갔고, 그날 오전에 친정아버지가 땀에 흠뻑
젖은 채 숨을 헐떡이시며 마당에 들어서자마자
펄썩 주저앉으셨다.
"아부지~!!"
"야야 김실아... 김서방이... 김서방이... 잡히갔다...
우야노~~ 이 일을 우짜만 조캤노..."
울먹이며 다짜고짜 하신 말씀을 들은 어머니는,
"???...???... 김서방이 와에? 좀 전에 자전거 타고
나갔는데에... 그새 어딜 잡히갔다꼬에? 아부진
우얀 일로 아침부터 이래 달리 오시고?"
어안이 벙벙할 뿐이었다.
물부터 한 바가지 벌컥 드신 외할아버지로부터
자초지종을 다 들은 어머니는 일단 가슴을 쓸어내렸고,
"엄마는요? 큰오빠는요?"
"엄만 새언니가 돌보고 있을 끼고, 너거 오빤 내도
모리겠다. 집안을 풍비박산 낸 놈이 죽든 살든 낸도
모리겠다... 하이고, 인자 우째 살아야 되겠노... "
그 일이 있는 후 몇 해 뒤,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외할아버지는 돌아가셨고, 큰외삼촌은 그 사건 이후로
실종되어 소식이 끊겼고, 큰 외숙모는 남편 없이
시어머니 돌보며 딸 둘을 키우며 시골 살림 유지하느라
갖은 고생을 다하셨고...
내가 자라 방학만 되면 시골 외할머니를 찾았는데,
새벽마다 할머니는 여름이나 겨울이나 찬물 적신 수건으로
가슴이나 등을 닦아내셨다.
왜 그러시냐 여쭈어 보았더니,
그때 귀 옆에서 터진 육혈포 소리에 놀란 후로 펄펄
끓는 것 같은 담이 가슴으로 등으로 돌아다니기 때문이라 하셨다.
나이 마흔이 넘어 아버지의 삶에 관심이 생겨 아버지를
뵐 때마다 아버지의 살아온 이야기를 여쭙곤 했었는데,
46년 시월 그날의 이야기를 들은 날 밤에도 아버지는
비명을 내지르는 잠꼬대를 하셨다.
***
어른들의 살아오신 격동기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내가 세상에 지금 존재하고 있음이 얼마나 무한대의
기적 같은 일인지, 손에 땀을 쥐며 듣곤 했습니다.
해방 이후 이념과 사상의 극심한 대립을 거치고,
소련의 팽창정책에 편승한 김일성의 권력야욕과
그를 저지하기 위한 자유진영의 최전방이 되어 전쟁을
치러야 했던 대한민국, 중공군의 개입으로 결국 현재의
휴전선으로 고착된 지 70년.
폐허에서 출발하여 선진국 진입까지 수많은 위기를
극복하며 쉼 없이 달려온 지난 세월입니다.
우리의 부모 세대와 우리 세대는 훗날 대한민국
번영의 초석을 쌓고 금자탑을 만들어낸 훌륭한 세대로
역사에 남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정치 선진화만 이끌어낼 수 있다면...
앞으로의 미래가, 우리 후대들이 열어나갈 미래가
얼마나 더 장대할지 가슴 떨리게 기대됩니다.
첫댓글 쓰다보니 너무 길어 두편으로
나누었는데도 2편이 많이 길어졌네요.
개인의 가정사로 긴 지면을 사용해서
죄송합니다.
읽어주신 분들께 미리 감사 전합니다.
가슴떨리게 아풉니다.
긴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얼굴도 뵙지못한 저희 할아버지도 마을 촌장일때 6ㆍ25를겪으셨고,
북한군이 젊은 청년들을 끌고간다는 사실에 마을 젊은이들 산넘어 언양으로 모두 대피 시키고 휴전 된 후 마을젊은이들이 다수 무사한건 부역을 했기때문이라는.그래서 대표로 구금되셨었다는 얘기를 할머니께 전해 들었어요.
그 시절 가족이 무사했던 집이 몇이나 되었을까요.
가슴 아픈 우리역사이고 기억하고 되새기고 감사해야하는 분들입니다.
가슴아픈 어른들의 얘기를 잘 풀어놓으셨어요.
늘 안전 운전하시고...
주변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격동기를 넘던 기막힌 사연들이
하나둘이 아니었습니다.
격동기를 살아낸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그분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알게 되었지요.
공감하고 가족 이야기 나누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나마 다행입니다.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휩쓸려 아무 항변도 못하고
사라져 간 수많은 영혼들에게 미안한 생각이 듭니다.
아버님 수고 많으셨네요.
잘 읽었습니다. 건강하세요.
그 당시엔 정말 소용돌이에 휩쓸려
사라져간 수많은 영혼들이 있었지요.
그 편린 하나 기억나는대로 적어 보았습니다.
마음자리님도 대구가 고향으로 어느글에서 읽은적이 있습니다 . 저도 대구가 고향인데 그때 그시절 어른들한테 들었던 얘기가 아직도 생생히 기억 됩니다 ㆍ
이국땅에서 항상 건강하십시요 ㆍ
제 친척분들 중에도 홀로 사시는 아주머니들이 여러분 계셨습니다.
일제와 해방격동기, 6•25를 거치며
남편을 잃고 홀로 되신 분들이었지요.
감사합니다.
추소리님도 건강하세요~
어린 시절,
부모님과 대화가 오고 갔던 모습이
이 글을 통하여 여실히 나타납니다.
부모님의 제대로 된 사고와
그 슬하에서 배우고 익힌 마음님의 모습이 보입니다.
가족과의 다정다감한 님의 모습은 어린시절 부터 였다고 생각합니다.
어려운 힘든 시절을
우리 부모님 세대는 몸소 겪고 이겨내고
자녀들 교육에 혼신을 다하였습니다.
그런 덕으로,
우리는 좋은 세월에 살게 되었습니다.
글 감사합니다.
제가 막내라 사랑도 많이 받았고,
호기심과 궁금증이 많아 어른들의
삶에도 관심이 많았었습니다.
그때 들은 이야기들이 삶에 파도가
닥쳐들 때 큰 힘이 되어주곤 했었습니다.
긴글 읽어주시고 공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긴박했던 순간에 무사히 나오신 아버지
이야기에 가슴을 쓸어내립니다
저희 아버지도 나라 일을 하셨던분으로
끌려가서 죽기직전까지 매질을 당하는
고초를 겪으셨다고 해요
풀려난 뒤에 매질로 당한 상처때문에
죽음 직전까지 가셨다 살아나셨다고 말씀하셨어요
마음자리님 글을 읽으니 아버지 생각이 나서 눈시울이 붉어졌어요
제가 들었던 여러 어르신들의 이야기들 중에도 루루님의 아버님과 비슷한 사연을 가지신 분들이 있었습니다.
격동기에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어렵게 살아내신 그분들이 있었기에 지금 번영하는 대한민국의 초석이 다져졌습니다.
긴글 읽어주시고 공감 나누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생사를 넘나드는 긴장의 순간. 영화처럼 옛친구가 나타나 구해주셨군요.
정말 영화의 한 장면 같습니다.
아버진 여러번 영화의 한 장면 같은
그런 우연으로 그 시기에 살아 남으셨습니다. 그래서 늦게라도 제가
세상에 나올 수 있었구요. ㅎ
그런 아픈 가족사가 있었군요
그야말로 격동의 세월이었네요
우리 부모님 세대의 혹독한 희생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번영을 이룰 수 없었겠지요.
워낙 큰 격동기를 연이어 지나왔으니
아픔 없는 가족사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분들의 절실했던 삶의 이야기를
가족사에 기대 기록해보고 싶었습니다.
마음자리님은 부친께 들은 이야기를 실제 격은 사건처럼
글로 표현을 잘 하였네요.
대구 10월항쟁에 가담한 사람은 대구뿐만 아니라 경주.포항.왜관 칠곡.구미.김천까지
74년전 사건이라 현재 진실화해위원회에서 과거사 진위 결정을 내리는데 살아있는 유족이나 직접 보고들은 증언을 통해 가리고 있지만 워낙 오래된 사건에 대부분 고인이 되었으며 살아있다 하더라도 정신이 온전한 사람이 몇이 안되고 국회 특별법이 통과되어 한시적으로 시행령에 따라 가부를 결정하는 만큼 유족은 희생자의 억울한 한을 푸는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아버지께 이야기를 들을 때, 마치 제가
겪은 일인 듯 긴박하게 느껴졌는데
글로 써보니 그 느낌 만큼 쓸 수가 없네요.
오래전의 억울한 한을 어찌 다 찾아서
풀 수야 있겠습니까. 그래도 그 한을 풀어주고자 애쓰시는 분들께 감사함을 전합니다.
단숨에 읽었습니다.
참으로 가슴 아픈 가족사네요.
아버님께서 달성군청에 근무하셨군요.
고향이 달성군 하빈면이라
더 생생하게 와닿는 글입니다.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글
잘 읽었습니다.
그런 절박한 시대를 사셨던 분들이
지금은 다 돌아가시고 세상에 남은
자취가 없네요.
제 기억이 사라지기 전에 글로나마 기록해두고 싶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슬픈근대사 하나가 빨갱이 라는
용어가 아니었을까 합니다.
글의 모든 내용에 있어서 마음아픈 이해를 하게
됩니다.
다시는 되풀이되지 말아야할 산역사일 것입니다.
과거는 현재와 미래의 방향을 잡을 수 있는 귀한 경험 시간들의 집합 같습니다.
우리들의 후대들은 큰 시련없이 미래를 향해 쭉쭉 뻗어나갔으면 좋겠습니다.
마음자리님 글이 <태백산맥 > 을 읽는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
아버님께서 귀인을 만나셨네요.
큰외숙모의 삶이 안타깝습니다.
요즘 같으면 어럼없는 일이겠지요.
여러 삶의 모습들이 기적처럼
저를 만들어주셨습니다.
아버님을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구해준
그친구분이 계셨기에 마음자리님의 좋은글도
볼수 있게 된것 같습니다
여기 계신 모든 님들이 다 그런 기적같은 인연들 위에 살고 계신다는 생각을 하곤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