톱과 귤 / 유희경
— 고백
톱을 사러 다녀왔습니다 가까운 철물점은 문을 닫았길래 좀 먼 곳까지 걸었어요 가는 길에 과일가게에서 귤을 조금 샀습니다 오는 길에 사면 될 것을 서두르더라니 내 그럴 줄 알았습니다 귤 담은 비닐봉지가 톱니에 걸려 찢어지고 말았지 뭔가요 후드득 귤 몇 개가 떨어져 바닥에 굴렀습니다 귤을 주워 주머니마다 가득 채우고 돌아왔습니다 아는 얼굴을 만나 귤 몇 개 쥐어주기도 했습니다 한두 개쯤 흘린 것 같은데 찾아보지 않았습니다 그냥 그 귤이 자라 귤나무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귤을 심으면 귤이 자라나나요 그건 모르겠습니다만 귤 나무가 자라면 이 톱으로 가지치기를 해야겠다고 혼자 웃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가지고 온 귤은 모두 꺼내두었는데도 그 뒤로 한 며칠 주머니에서 귤 냄새가 가시지 않아요 톱이요? 톱이란 게 늘 그렇듯이 쓰고 어디다 잘 세워두었는데 어디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 시집 『이다음 봄에 우리는』 (아침달,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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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희경 시인
1980년 서울 출생. 서울예술대 문예창작과 졸업
200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시집 『당신의 자리―나무로 자라는 방법』 『우리에게 잠시 신이었던』 『이다음 봄에 우리는』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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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건을 사는 일은 반복적이면서도 언제나 새롭다.
사려고 걱정했던 것 말고 뭔가를 더 추가하는 것도 흥미롭다.
길가엔 언제나 물건들이 쌓여 있고, 그중 어느 것인가에 끌려 우리는 계획에 없던 것을 사게 된다.
“오는 길에 사면 될 것을 서두르”는 이상한 순간적 심리가 작동하는 까닭이다.
이렇게 해서 구매한 물건들의 거의 불가능한 조합이 이루어진다.
톱을 사러 갔다가 귤도 사게 되는 것이다.
톱과 귤의 어울리지 않는 이질적 만남은 우리의 생활이 얼마나 파격적인가를 알려준다.
귤 봉지가 톱니에 걸려 찢어지고 귤이 쏟아지는 것도 이러한 파격의 연장이다.
그리하여 귤이 바닥을 굴러다니는, 방금 전까지 예측할 수 없었던 순간들이 눈앞에서 태연히 펼쳐진다.
그뿐 아니다. 삶은 이상한 것이다.
애초에 작정하고 샀던 톱은 사용 후 어디에 두었는지도 모르게 잊히지만 우연히 샀던 귤은 아니다.
귤을 모두 꺼내놓은 지 며칠이 지나도 웬일인지 “주머니에서 귤 냄새가 가시지 않”는다.
예정에 없던 귤은 오히려 하나의 사건이 되고 쉽게 사라지지 않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 이수명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