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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피낭 5 - 죄네할 드골르가를 지나 운하를 걸어서 성문을 지나 대성당으로!
어제 2026년 5월 13일 바르셀로나에서 아베 AVE 열차를 타고 북상해 프랑스 페르피낭에 도착해
호텔에 배낭을 맡긴후 로컬 기차를 타고 해변 도시 꼴리우흐 Collioure 에 다녀 왔습니다.
호텔 Urban by balladins 에서 하룻밤을 자고 5월 14일 아침에 체크아웃을 한후 배낭을 맡기고
나오는데 오늘은 페르피낭 시내를 구경한후 기차를 타고 스페인의 지로나로 갈 생각입니다.
시내에서 트램이나 버스를 타야 하는데..... 타는 방법은 1. 버스 운전수에게 현금이나 카드로 요금
을 낸다. 2 상점에서 버스표를 사서 탄다. 3 상점에서 교통 카드를 사서 타고 다 쓰면
충전한다. 4 버스에 탄후 기계에 와이파이 표시가 있는 컨택트 리스 신용카드를 터치해 요금을 낸다.
우리는 프랑스와 스페인에서는 가급적 걸어서 다니며 구경했으니..... 택시는 거의 타지 않았고,
시체스로 가는 시외 버스는 운전수에게 현금결제를 했는데.... 페르피낭
시내 버스는 호텔 리셉션의 주인에게 물어보니 기차역 안에 매점에서 버스표를 사면 된답니다.
1. 시내 버스표를 어디서 살수 있나요?
영어 : Where can I buy a bus ticket?
프랑스어 : Où puis-je acheter un billet de bus ?
스페인어 : ¿Dónde puedo comprar un billete de autobús?
2. 컨택리스 신용카드로 버스를 탈수 있나요?
Can I take a bus with a contactless credit card?
Puis-je prendre le bus avec une carte sans contact ?
¿Puedo tomar el autobús con tarjeta de crédito sin contacto?
그런데 크로아티아에서는 버스 운전사에게 현금으로 요금을 낼수 있었던 반면에 발트 3국에 가니
운전수가 돈을 받지는 않으며, 버스에 탄후 단말기에 신용 카드를 갖다 대니 결제가 되었는
데.... 물론 신용 카드에 와이파이 표시가 있어야 하며 와이파이 표시가 없는 옛날 카드는 안됩니다.
원래 어제 계획으로는 마요르카 왕궁을 먼저 보기로 했으니.... 기차역 앞에서 버스 1, 4, 5번을 타면
대로를 지나 Catalogne (Brasserie) 1 정류소에 내려서 다시 7번 버스 로 환승하여 Citadelle
정류소에 내려 쥘 베흐 브휴두스가를 걸어서 남쪽에 마조르크 (마요르카) 왕궁에 가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시간 여유가 있는데다가, 어제 저녁에 시내 정찰을 하였기로 오늘은 구글 지도를 보고 A4 용지에
그려온 지도를 들고 어제 갔던 죄네할 드롤르가 Avenue Du General de Gaulle 가를 걸어 갑니다.
프랑스는 드골 대통령의 이름을 딴 거리가 많은데... 샤를 드골( Charles de Gaulle) 은 프랑스의 레지스탕스
운동가, 군인이자 정치인으로 1945년 6월부터 반년간 임시정부 주석을, 1958년 6월 1일 총리가 됐고
1959년 1월 프랑스 대통령으로 취임했으며 1965년 재선했으나 1969년 국민투표에서 패한후 물러났습니다.
2차 세계대전 아라스 전투에서 기갑부대를 지휘해 롬멜의 유령사단에 성공적으로 반격
하였고 육군 차관을 지냈으며, 망명 프랑스 자유민족회의와 프랑스 공화국
임시정부를 조직했는데 성은 ‘골 (Gaulle)’ 이지만 한국에서는 보통 “드골” 로 씁니다?
드골은 릴에서 5명중 셋째로 태어나 독실한 가톨릭 신자 집안에서 자랐는데, 가문은
숱한 역사가와 작가들을 배출했으며 아버지는 예수회 대학 교수로 학교를
세웠고 아들에게 철학과 문학을 가르쳤으나.... 샤를은 군사학에 관심을 보였습니다.
1912년 생시르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제1차 세계대전에 중위로 참가해 최고 훈장을 받았는데, 베르됭
전투에 참가해 3번씩 부상을 입고 2년 8개월간 포로생활을 하는중 5회나 탈출을 시도
했으며 1918년 감옥에서 풀려나 페탱 참모총장의 직속장교를 거쳐 최고 국방회의 사무국장이 됩니다.
드골은 제1차 세계대전에 제4기갑 사단을 이끌고 랑 아브빌에서 독일군을 막았으며, 1927년과
1936~1938년 라인란트 점령군 소령으로 복무하면서 독일의 침공 가능성과
프랑스군의 허술한 방비상태를 알게 되었으며 2년간 중동에서 근무한후 중령으로 승진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드골은 제5군의 기갑여단 이끌고 전쟁에 참전하였고 1940년
5월 제4기갑사단 지휘관으로 부임했으며.... 2차례의 전차전에서
독창적인 이론을 적용했으니 정력적이며 대담하고 뛰어난 지휘관이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1940년 6월 폴 레노 총리 아래서 국방부 육군 차관이 되었으나, 독일과 휴전을 모색하고 있던 필리프 페탱
원수가 레노를 축출하고 프랑스가 독일에 항복하자 런던으로 망명해 자유 프랑스 민족회의를 결성합니다.
영국으로 망명한 드골은 6월 18일 런던에서 프랑스의 레지스탕스를 독려하였고, 나치 치하 프랑스인
동포들을 향해 이승만 처럼 라디오 방송을 내보냈으며 대(對) 독일 항전을 계속하자고 호소했으니,
1940년 8월 2일 비시 정부는 드골을 궐석재판에 세워 계급박탈, 재산 몰수와 함께 사형을 선고합니다.
처칠은 “드골은 독일과 전쟁에서 쓰라린 군사적 패배를 겪었음에도 자신이 프랑스 국민을 대표
하는양 내세운다” 고 비난했으며, 이든에게 보낸 비망록에서 드골을 “영국과 미국에
비우호적인 인사이며 공산주의에 동조하고 파시스트적인 성향도 지닌 사람” 으로 묘사했습니다.
루스벨트도 서신에서 “드골이 정직한 사람일지는 모르지만 스스로를 메시아라고 착각하는
‘구세주 콤플렉스’ 를 갖고 있는 것 같다” 고 반감을 표시했는데, 그러나 영국 각료들은
드골 지원 정책이 급변할 경우에 초래될 위험성을 경고하면서 드골 지원을 주장했습니다.
1945년 총리겸 국방상을 거쳐 1947년 프랑스 국민 연합을 조직하였고 1951년
제1당으로 성장했으나 1953년 당을 해체하고 정계에서 은퇴했는데,
드골은 1958년까지 프랑스 제4 공화정과 수시로 충돌하고 대립했습니다.
1958년 알제리 독립전쟁의 여파로 제4 공화국이 붕괴 위기에 처하면서 다시 정계에
나타나 그 해 6월 1일 총리에 올라 6개월간 전권을 위임받게 되는데.....
알제리인들은 7년간 150만명이 죽고서야 프랑스로 부터 독립을 쟁취하게 됩니다.
아메리카와 아시아 및 아프리카 120국 중에 완전한 독립국은 일본 정도이고 반식민지는 중국과 태국에 이집트
이며, 이탈리아에 일부 영토를 점령당한 에디오피아와 유럽인의 나라 남아프리카에 흑인 노예들을 이주
시킨 라이베리아 등을 제외한 110개국은 식민지였으니, 알제리 말고도 베트남과 아이티에 인도인들과
아프리카의 콩고와 남미비아 등... 수많은 나라들은 큰 희생을 치루고서야 식민지에서 벗어나 독립을 했습니다.
아시아와 아프리카에 식민지를 만든 프랑스는 베트남, 알제리, 기니 등에 대한 1870년대 이후의 식민통치와
징집, 징발에 대한 사과나 보상이 없어 이중 잣대라는 비판도 있으니.... 식민지 민중들의 인권을 짓밞은
역사적 죄에 대해 사과나 보상은 하지 않았는데 하기사 영국등 어느 국가도 진심으로 사과한 경우는 없습니다.
'알제리 독립 전쟁' 은 1954년부터 1962년까지 벌어졌는데 프랑스 의회는 전쟁이 끝난지 37년 만인
1999년 6월에야 "전쟁" 임을 인정했으며, 5월 1일 메이데이에 세티프에서는 5천명이 거리에서
프랑스 식민지 당국과 충돌해 수많은 사람이 체포되고 죽으니, 프랑스는 정규군외에 알제리인-
튀니지인 -모로코인 -세네갈인등 식민지 부대 병사들과 프랑스 외인부대 까지 보복 작전에 투입합니다.
본보기를 보이기 위해 “케라타” 라는 해안 마을에는 해군 순양함 뒤게- 트루앵 함이 함포사격
을 하고 내륙의 40개 마을에는 공군 급강하 폭격기가 폭탄을 퍼붓는 학살을 벌였으니....
당시 인구 4천명이 넘은 마을이 알제리 깃발을 내걸었다고 프랑스군의 무차별 폭격을
받아 “4천명 중에 겨우 3명만 살아남은 참사” 가 벌어지기도 했으니 참으로 잔혹 했습니다.
드골은 나치에 협력했던 언론인들을 처벌함으로써 잘못된 과거사를 심판하였으니, 900 종의 신문·
잡지 가운데 나치 독일에 협력한 694종에 대해 폐간이나 재산 몰수를 했고, 사관학교
재학시절 교수였던 필리프 페탱 원수를 포함 나치 독일에 부역한 사람들을 재판으로 처벌했습니다.
1958년 9월 28일 새 헌법이 국민투표를 통과하면서 제5공화국이 세워졌는데,
프랑스의 식민지는 독립을 하거나 새 헌법을 받아들이는 선택을 할수
있게 되었으니.... 기니는 독립하였으며 다른 식민지는 새 헌법을 받아들입니다.
그의 외교정책은 프랑스의 위대함을 지키기 위해 반미정책을 쓰고 중화인민공화국을 승인했으며,
핵무기 개발, 유럽 경제공동체의 추진과 영국 가맹 거부, 나토 군사 기구로
부터 탈퇴, 미국의 대(對) 베트남 정책 반대등 미· 소간에 있어서 독자적인 외교 노선을 전개합니다.
나치 독일의 부역자들을 처벌하였으나 알제리나 베트남에 대한 사과는 없었고, 식민지 국가 프랑스인
침략 전범을 처벌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비판의 여지가 있으며, 또한 나치 부역자와
비시정부 관계자를 숙청하는 과정에서 20만명 이상을 죽이면서 파시즘이라는 부정적인 평가도 있습니다.
미국에서도 재클린 케네디 등은 그를 부정적으로 봤으니 " 지나치게 자기중심적 이더라" 라고
봤으며, 재클린은 그를 가리켜 "병적일 정도로 자기 중심적인, 극단적인 사람"
이라는 평을 남겼고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구세주 콤플렉스’ 를 갖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1958년 9월 제5공화국을 수립하고 대통령으로 취임하였으며 1961년 알제리 민족자결정책을, 1962년
에는 알제리 독립을 인정하는 에비앙 협정을 각각 국민투표에 의해 가결함으로써 7년에
걸친 알제리 전쟁을 끝내는데.... 알제리인들은 독립전쟁에서 150만명이 죽고서야 독립하게 된 것입니다.
1963년 드골과 콘라트 아데나워 서독 총리는 정치, 과학, 문화와 군사적 협력을 위하여
마련한 조약을 맺었으며.... 동시에 드골은 영국이 유럽 경제
공동체에 들어오는 것을 막았고 1964년 중국을 인정하는 첫 서방 세력이 되었습니다.
1966년 나토로 부터 프랑스군을 철수시키고 나토 본부를 프랑스로 부터 옮기도록
했으며, 1967년 다시 영국의 유럽 경제공동체 가입을 막았는데.....
그는 독립적 핵무기 타격부대를 창조하고 미국의 베트남 전쟁에 비난하기도 했습니다.
1968년 프랑스 5월 혁명후 1969년 실시한 지방제도 및 상원에 관한 국민투표에서 패해 대통령직에서
사임하였는데, 저서에 《칼날》 이라는 군사 이론에 관한 것과 《회상록》· 《자서전》 등이 있습니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운하를 따라 올라가는데.... 천천히 걸어서 성문인 카스티예문
Le Castillet 에 도착하니 아직 문을 열지 않았기에(11시에 연다고 함) 여긴 조금
후에 보기로 하고 구시가지로 들어가 골목갈을 걸어서 페르피낭 대성당을 찾아갑니다.
이번 우리 여행은 이란전쟁 중에 하게 됐는데, 문득 프랑스 대통령이 자국의 배가 위협을
당했을 때 한 일이 떠오르니..... 동아일보 송평인 논설위원이 ‘송평인 칼럼’ 에 쓴
“대통령의 아는 체와 모르는 체 ” 라는 글이 생각나는데 글이 너무 긴지라 줄여서 적습니다.
어느 대통령이 “플라톤의 말대로 최악의 저질(低質) 들에게 지배당하지 않기 위해 투표하셨나요” 라는 글을
올렸는데, 플라톤은 그런 말도, 그런 취지의 말도 한 적이 없으니..... 플라톤이 ‘국가’ 에서 한 말은
“훌륭한 사람이 통치를 거절할때 받게될 가장 큰 벌은 자기 보다 못한 사람에게 통치받는 것이다” 란 말이다.
플라톤이 보기에 훌륭한 사람들은 돈이나 명예에 대한 욕심으로 통치하지 않는다. 플라톤은
명예욕 마저도 좋지 않은 것으로 봤다. 그래서 훌륭한 사람들이 통치를 거절할
경우 그에게 억지로 통치를 맡기려면 강제력을 동원하지 않을수 없는데 그게 벌 (penalty) 이다.
가장 큰 벌은 ‘자기보다 못한 사람 (the worse) 에게 통치받는 것’ 이라고 했으니 벌로 여기는 사람은 그것
만으로도 훌륭한 사람들이라고 하겠다. 플라톤이 “오늘날에는 서로 자기가 통치하겠다고 싸우지만”
이라고 쓴걸 보면 플라톤 시대에도 그런 훌륭한 통치자는 이데아적인 세계에나 있었으니 철인 (哲人) 이다.
프랑스 화물선이 호르무즈 해협에서 공격을 받은건 한국 화물선이 공격받은 날로 부터 하루 뒤다. 엘리제궁
대변인은 “프랑스가 공격을 받은건 아니다” 라며 화물선이 몰타 국적기를 달고 있었고 선원이 필리핀인
이라 했다. 나무호는 파나마 국적기를 달긴했지만 선원중 6명은 한국인이었으므로 한국이 공격받은 것이다.
프랑스 선사인 CMA CGM 은 “공격을 받았다” 고 밝혔다. 엘리제궁도 피격을 부인하지 않았다. 한국 선사인
HMM 은 어떤 발표도 직접 하지 않았다. 못 했을 것이다. 정부를 통해 “폭발이 있었다” 는 발표가 나왔다.
엿새가 지나 이뤄진 폭발 원인에 대한 발표도 선사가 아니라 정부가 했다. ‘공격이 있었다’ 는 뒤늦은 발표였다.
프랑스에서는 사고 직후 이란 순항미사일이 프랑스 화물선을 공격했다는 미국 방송 보도가 있었을 뿐이지만
공격 주체가 이란인지 여부에 대한 논란은 없었다. 우리 화물선에 대해서는 미국 대통령이 이란의
공격이 있었다고 밝혔는데도 정부는 미국 쪽에 더 알아보기는 커녕 비행체 잔해를 직접 조사한다며 들여왔다.
외교부는 지난달 27일에야 비로소 이란 대함미사일에 의한 피격이라는 발표를 했다. 그러나 혁명수비대에 의한
것인지 민병대에 의한 것인지는 알수 없다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청와대는 기자회견에서 이란이 의도한
것인지 아닌지 알수 없다는 또 다른 사족을 붙였다. 미군 처럼 그 지역에 정찰 자산을 갖고 있지 않는한
그걸 어떻게 알겠으며, 반대로 미군 처럼 지역에 정찰 자산을 갖고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그걸 어떻게 모르겠나.
프랑스는 자국 화물선이 공격받은 그날 즉시 지중해에 있는 샤를 드골 핵항모 전단을 수에즈 운하를 통해
이란 앞바다로 보냈다. 말 대신에 행동이었다. 공격을 부인한 이란 정부는 프랑스에 비난을 퍼부었다.
우리 대통령은 우리나라가 세계 군사력 5위 국가여서 핵을 가진 북한도 두려울게 없다는 듯
말하면서도 군함 한척 보내지 않고 있다. 우리 화물선이 또 피격돼도 계속 정밀조사만 반복할 모양이다.
자국민의 생사가 오간 문제에 대해 인도나 태국도 하는 공개 항의도 못하면서 어제 또 “우리 국민 대상
범죄, 끝까지 추적해 책임 물을 것” 이라고 했다. 이란은 미제 (未濟) 범죄자 처럼 영구히
‘추적 중’ 으로 남을 듯하다. 지도자가 남들 다 아는 걸 ‘벌거벗은 임금님’ 처럼 모른 척하면 그렇게 된다.
드골 대통령에다가 이란 전쟁등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구시가지 Vieille Ville 로 들어가서는 골목길을
계속 걸으니 저만치 페르피낭 대성당이 보이는데.... 페르피낭 대성당 (Basilique -Cathédrale de
Saint-Jean-Baptiste) 은 1324년에 건축이 시작되어 1509년에 완공된 카탈루냐 고딕 양식의 성당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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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내가 웃어야 내 행운도 미소짓고,
나의 표정이 곧 행운의 얼굴이다.
여유를 찾는 행복한 시간 만드시길 바랍니다.
당신에게 오늘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
늘 웃을수만 있다면....
인생은 반쯤은 이미 행복한 것일테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