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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손기정
일제강점기부터 대한민국 정부 수립 초기까지 활약했던 대한민국의 육상 선수이며,
대한민국 운동선수 최초로 올림픽을 제패한 한국 체육계의 선구자다.
2. 초년 시절
1912년 10월 9일, 평안북도 의주부 광성면 민포동(現 신의주시 민포동)(중종 14)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평안도 철산군으로 귀양을 간 뒤 그곳에 정착했다.]에서
아버지 손인석(孫仁錫)과 어머니 김복녀 사이의 3형제 중 막내 아들로 태어나, 고향에서 소년기를 보냈다.
위로 맏형 손기만(孫基萬)과 둘째 형 손기용(孫基用)이 있었다.
어린 시절 당시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그랬듯이 매우 가난했는데,
손기정은 이 당시에 호떡을 매우 좋아했으나, 당시 호떡이 꽤 비싸서(5전) 많이 사 먹을 수가 없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그래서 손기정은 학비와 용돈을 벌기 위해 길거리에서
옥수수나 참외 장사를 하기도 하고 우동집에서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했다.
집과 학교가 2km 거리에 있었는데 어린 시절부터 그 거리를 매일 달려 다녔고,
심지어 노는 시간에도 압록강변을 달려 다녔을 정도로 뛰는 것을 좋아했는데,
이 때 막연하게 운동 선수가 되고 싶다는 꿈을 가졌다고 한다.
손기정의 모친 김복녀 여사는 어린 아들이 운동보다는 공부로 성공하길 바랐고,
아들이 달리지 못하도록 잘 벗겨지는 여자용 고무신을 신겨보기도 했다.
그럼에도 손기정은 고무신을 새끼줄로 묶어서 달렸고,
새끼줄에 발목이 쓸려서 피가 나도 아랑곳하지 않고 달렸다고 한다.
이런 손기정의 재능을 눈여겨본 당시 담임교사였던 이일성이 손기정에게 육상 선수가 될 것을 권유했고,
약죽보통학교 5학년 때부터 육상선수로 활약했다.
고향 신의주에서 열린 육상대회 장거리 종목에서 1, 2위를 다툴 정도로 실력 있는 선수였다.
하지만 보통학교 졸업 후 생계가 막막해져서 육상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는데,
1932년 이일성 선생이 그를 일본에서 학업과 일을 병행할 수 있게 했다.
그러나, 고된 노동으로 도저히 학업을 이어갈 수가 없게 되자, 6개월 만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때 어느 회사의 점원으로 취직하여 학업과 육상을 병행할 수 있었는데,
그 회사의 사장은 당시 신의주시에서 동익상회를 하던 공정규로,
안과의사 겸 국어학자 공병우 박사의 부친이었다.
손기정은 이곳에서 일을 하며 쉬는 날에는 압록강변을 달리며 연습했다.
1932년, 경성부에서 열린 제 2회 동아 마라톤에 출전했는데
서울의 복잡한 지리를 몰라서 삼각지 로터리에서 길을 잃었고 아쉽게 2위를 했다.
그러나 이 경기 이후 인생이 바뀌었는데,
당대의 걸출한 마라토너들이 배출된 양정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할 수 있게 되었다.
당시 양정고등보통학교 육상부 중장거리팀은 한반도 내에서만 유명했지만, 기록만 보면 세계적 수준이었다고 한다. 운동에 전념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자, 더욱 마라톤 훈련에 매진했고, 그 결과 이듬해 제3회 동아 마라톤에서는 우승을 차지했다.
1935년, 도쿄 메이지 신궁대회에서 마라톤 풀코스에 처음 출전하여,
2시간 26분 42초이라는 비공인 세계 신기록으로 우승을 차지한다.
이 기록은 비공인이긴 하지만, 세계적으로 마라톤 풀코스에서 최초로 2시간 30분의 벽을 깬 사례이다.
공식 세계신기록으로 인정받지는 못했는데, 당시 비서구권에서 열린 대회는
대회 운영이나 코스 길이를 신뢰할 수 없었던 일이 비일비재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듬해 열린 조선육상경기대회에서도 역시 1위를 차지하며 단번에 장거리 육상의 기대주로 떠올랐다.
이 당시 13개의 대회에 출전하여 10번의 우승을 차지했다.
여담으로 메이지신궁대회 마라톤 종목은 손기정을 시작으로 이후 3개 대회 연속으로
한국인들이 1위 자리를 내주지 않았다. 1935년 손기정-1937년 유장춘-1939년 오동우가 그 주인공들이다.
이후 1936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경기에 동갑내기이자 양정고등보통학교 동기였던
남승룡과 베를린 올림픽 대표 선발전에 참가했다.
일본 육상계에서는 당연히 순수 일본인을 뽑고 싶어했겠지만,
실력자라는 것에 이견이 없는 손기정과 남승룡을 떨어뜨리기엔 눈치가 보여서 대표팀으로 발탁했다.
헌데 일본 육상계는 4년 전 1932 LA 올림픽 당시 일본 국적으로 출전했던 조선인 선수 김은배, 권태하가
일본 선수의 페이스 메이커를 해주려던 전략을 무시하고 각각 6위, 9위에 랭크되었던 악몽이 있어서,
일본 육상팀은 이 대회에서는 반드시 일본 선수를 많이 뽑으려고 했다.
그러나 대표 선발전에서 1위에 남승룡, 2위에 손기정이 랭크되자,
일본 대표팀은 억지를 부려서라도 이 둘을 탈락시키려는 속셈으로 수작을 부렸다.
현지에서 컨디션 조절을 하고 쉬어도 모자랄 판에,
그렇게 일본 육상팀의 억지로 전대미문의 2차 선발전 현지 테스트가 열렸고,
이것도 모자라 일본 측에서는 이 둘을 탈락시키기 위해 일본 선수 2명을 더 후보로 추가시켰다.
그러나 그렇게 꼼수를 부리고도 레이스 내내 일본 선수 2명이 이 둘을 따라잡지 못하자
일본 선수들은 몰래 코스를 이탈하면서 지름길로 가는 반칙까지 저질렀고,
이를 본 손기정과 남승룡은 분노하며 반드시 이기자고 다짐하고 달렸다고 한다.
결국 2차 선발전에서도 손기정과 남승룡은 사이좋게 1, 2위를 나눠 가졌다.
그리고 지름길을 이용해 뒤늦게 들어온 일본 선수들은 분노한 남승룡에게 폭행을 당했다고 한다.
시원시원하고 활발한 손기정에 비해 남승룡은 조용하고 차분한 성격이었다고 전해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렇게까지 했을 정도면 화가 얼마나 났을지 짐작할 수가 있다.
당연히 일본에서는 "조선인들이 대일본제국의 대표라는 것이 말이 되느냐?"라는 반발의 목소리가 있었지만,
이 둘이서 별 말 없이 실력으로 찍어내려 주니 그런 의견은 쏙 들어갔다.
1936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출발 사진. 맨 왼쪽에서 달리는 선수가 손기정이다. |
이후 올림픽 본선 경기에서 '2시간 29분 19초'로 당시 올림픽 신기록을 기록하며 금메달을 획득했다.
같이 출전한 남승룡은 동메달을 획득했다.
사실, 손기정의 금메달에 가려져 있기는
하지만 남승룡도 막판에 스퍼트를 내면서 무려 30명을 추월하여 3위로 골인하는 대단한 모습을 보여줬다.
골인 직후 모습 |
손기정이 받은 1936 베를린 올림픽 금메달(등록문화재 제489호)[11] |
손기정은 금메달을 받은 다음 날 아돌프 히틀러와 만났다.
그는 이 순간을 "160cm인 내 키에 비해 그의 손은 크고 억셌으며, 체구는 우람했다.
그리고 독일을 이끌어가는 통치자답게 강인한 체취를 풍겼다."고 회고했다.
기록된 바에 따르면 손기정은 한민족 인물 중에서
히틀러와 공식적으로 대면한 유일한 인물이다.
체육인으로서는 최고의 영광이라 할 수 있는 올림픽 금메달을 땄지만,
그가 올림픽 경기 직후 친구에게 보낸 엽서에는 "슬프다"(당시 한글 표기로는 '슬푸다')라는 석 자가 쓰여 있어,
많은 한국인들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시상식 사진을 보면 1위와 3위로 각각 단상에 올라선 손기정과 남승룡 모두 어두운 표정을 지은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손기정은 묘목[13]으로 가슴의 일장기를 가리고 있다. 남승룡은 어떻게 해서든 바지를 명치까지 끌어올려 일장기를 가리고자 하였다. 인생에서 가장 기뻐해야할 날에 오히려 슬픔에 사무친 나라 잃은 두 청년의 감정이 그대로 전해져 오는,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콧날이 시큰해질만한 사진이다. 은메달을 수상한 뒤의 영국 선수[14]의 밝은 표정과 대조적이다. 동메달을 차지했던 남승룡은 훗날, "기정이가 우승해서 금메달을 땄다는 사실보다, 묘목을 받아 그것으로 일장기를 가릴 수 있다는 것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라고 회고했다.
가슴에 있는 일장기를 삭제한 사진을 실어서 동아일보가 정간당한 일장기 말소사건도 유명하다.
이런 판국이니 조선총독부가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조선총독부는 엄중한 통제와 감시 속에 그를 귀국시켰고,
이 탓에 올림픽 영웅에 걸맞는 환영 인파는 찾아볼 수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손기정이 정말로 찬밥 대우를 받은 것은 절대 아니다.
손기정은 일련의 사건을 통해 일제 치하 조선의 대중들에게 암묵적으로 큰 인기와 존경을 얻었으며,
이 당시 국내의 신문광고, 특히 의약품, 식품 광고는
손기정의 올림픽 금메달을 축하하는 메시지를 담는 광고가 많았다.
특히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과자 광고에는 '이 과자를 먹고 쑥쑥 커 손기정과 같은 사람이 되겠다'라는 식의
카피라이트가 유독 많았다.
소설 《상록수》의 저자 심훈은 손기정의 우승을 찬양하며 "오오 조선의 남아여!"라는 시를 짓기도 했다.
안타깝게도 이 시는 심훈이 같은 해인 1936년 9월 갑작스럽게 장티푸스에 걸려 병사하면서
그의 마지막 시가 되었다. 시의 전문은 심훈 문서에 있다.
손기정의 마라톤 우승은 당시 일본 식민지 치하 조선인들에게 열광적인 반응을 얻었고,
시골의 아낙들도 올림픽이 무엇인지 알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손기정은 스포츠 영웅이 되어 금의환향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상술된 사건 때문에
떳떳이 활동할 수 없었다.
일장기 말소 사건을 통해 조선 민중의 민족의식 강화를 바짝 경계하던 조선총독부는 아무 죄 없는 손기정에게
사복경찰을 붙여서 감시했고, 손기정은 심적으로 무척 괴로웠다고 한다.
풍문에 따르면, 의지의 승리를 찍은 영화 감독 레니 리펜슈탈과 심지어 아돌프 히틀러까지도
손기정에게 상당히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그 이유는 손기정이 우승했음에도 불구하고 경박하게 굴지 않고
일견 우울한 듯 보일 정도로 과묵한 태도를 유지했기 때문이다.
올림피아에서 손기정이 꽤 비중을 차지하는 것으로 보았을 때
리펜슈탈이 이 동양인 선수에게서 정말로 깊은 인상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둘은 1956년에 다시 만나게 된다.
한편 아돌프 히틀러가 손기정을 '동맹인 일본의 국민'으로 간주해서 좋은 인상을 받았다는 말도 있는데,
사실 이는 잘못된 정보이다.
전쟁 당시 동맹국이란 것만 알고 있으면 나오는 오류로, 올림픽 당시에는 독일에겐 일본은 적국이었다.
1차 대전의 일본 제국은 승전국 포지션으로 이것저것 뜯어갔기 때문에 공산주의와 일본을 견제한다고
중국 국민당군을 정예화 시켜놓은게 독일이다.
이 군사적 지원 때문에 중일전쟁 초기에 질질끌리게 된 원인 중 하나이니 말 다한 셈이다.
또한, 히틀러는 출전 소속만 일본으로 되어 있을 뿐 손기정이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주지하고 있었다. 베를린 올림픽에서 손기정이 우승하자 독일 방송들은 이렇게 보도했다.
1936 베를린 올림픽 우승 이후 일본에서 우승 소감을 녹음한 내용이 레코드로 남아 있는데,
말투에서 손기정의 고향인 신의주 억양이 배어나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이 내용은 손기정의 자발적인 발언이 아닌
일본에 의해 미리 준비된 원고를 읽는 것에 불과했기에, 손기정의 진심이 담겨 있다고 보긴 어렵다.
올림피아슈타디온 베를린의 수상자 명패에는 '손기정' 대신 '손 기테이(SON, Kitei)'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와 관련된 사건으로 1970년에 신민당 제7대 국회의원이었던 박영록이 야간에 베를린 올림픽 기념관에 불법 침입하여 기념비에 새겨져 있던 손기정의 국적을 훼손하여 불법 침입, 절도 및 공공재산파손혐의로 체포영장이 발부되었으나, 체포되기 전에 한국으로 도망치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박 의원이 무엇을 훔쳤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서독 경찰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JAPAN이라는 글자를..." 국적을 한국(KOREA)으로 고치기 위해 이 5개 문자를 다른 우승비에서 떼어모았으니 명백한 기물파손이며 도려낸 일본(JAPAN)의 문자는 그대로 들고 도망갔으므로 절도 혐의도 적용됐지만 시대가 시대이다 보니 송환되어 처벌을 받지는 않았다.
국제 올림픽 위원회는 선수 시절과 은퇴 후의 국적이 달라졌다고 해서
이름이나 국적을 은퇴 후 기준으로 수정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식민지 출신 선수가 종주국 대표로 나와서 메달 딴 건 손기정, 남승룡 말고도 많으며,
그들 역시 종주국 선수로 기록에 남아있다. 혹시라도 은퇴 전에 독립해서 독립국 선수로 나오는 경우도,
독립 전후의 국적을 다르게 기록할 뿐이다. 민족, 출신지, 정체성, 올림픽 이후의 활동 다 필요 없고
오직 대회 당시 소속 하나만 보는 것이다. 이런 사례를 공식 인정할 경우
국적 변경을 요구하는 다른 사례들이 쏟아져 나올 것이고,
각국은 외국 대표 선수라도 조금이라도 자기 나라와 관련이 있는 선수는 자기 나라로 고쳐 달라고 요구할 가능성이 높으며, 이럴 경우 국적 분류가 완전히 흔들리기 때문이다.
한 번 기록되면 평생 따라가는 정도가 아니라 역사가 지속되는 동안 남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 IOC에서는 공식적으로 'Kitei Son, Japan'으로 기록하고 있다.
대신 약력에는 당시 일제 치하에 있던 한국인 출신이었음이 강조되며, 후일 일어난 일장기 말소사건까지 기록되어 있다. 2011년 12월 9일에 국제올림픽위원회는 손기정의 '대한민국' 국적은 인정했지만,
역사 왜곡(Historical Distortion)을 방지하기 위하여 약력에 있는 국적 자체를 바꾸지는 않았다.
그 뒤 손기정은 1937년 양정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보성전문학교 상과(商科)에 입학했다.
당시 보전에는 재정학을 가르치는 홍성하(洪性夏) 교수가 체육부장을 맡고 있었다.
홍 교수는 뜨거운 민족주의자여서 학교 스포츠를 장려하여 학생들의 사기를 진작시키자는 지론을 갖고 있었다. 그 지론으로 인촌 김성수(金性洙) 교장을 설득,
1937년에 전조선의 중등학교를 졸업하는 우수 운동선수들 다수를 뽑아 상과에 수용하였다.
손기정은 보성전문학교 육상부를 대표하여 1937년 봄에 조선학생육상연맹이 주최하는 2개 대회에 출전, 보성전문의 우승에 기여하였다. 그 대회 중 하나는 4월 25일에 거행된 조선학생 수원~경성간 역전경주대회.[23] 당시의 학제는 3월 졸업, 4월 입학이었으니까 입학한 지 며칠 되지 않아 5명이 이어 달리는 보전팀 최종 주자로 시흥~서울운동장 간을 역주, 7개 팀 중 최선두를 달려 보전을 우승하게 했던 것이다. 그리고 6월 5~6일에는 서울운동장에서 조선학생육상대회가 거행되었는데 첫날엔 1,500m, 이튿날엔 5,000m에서 우승하였다. 당시 보전엔 박찬규, 백승욱, 인강환 등 장사들이 즐비했다. 이들이 포환, 원반, 해머던지기 등에 활약한 데다 손기정의 장거리 우승을 더하여 보전은 종합우승을 달성하였다.
이렇듯 손기정이 보전에서 눈부신 활약을 펼치자, 조선총독부는 이를 골치 아프게 생각했다.
당시 1930년대 중반에 조선인 학생이 진학할 수 있는 고등교육기관 가운데
조선인이 교장인 학교는 보전뿐이었고, 교수들 가운데엔 창문을 닫게 하고 한국어로 강의하는 이도 있었다.
그런 학교에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손기정이 재학하면서 육상대회에서 활약하자
그는 하루 아침에 영웅이 되어 보전에는 그를 중심으로 서클이 형성되었다.
조선총독부는 손기정이 보전에 다니는 것을 꺼렸고, 조선에 있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래서 총독부의 관헌은 손기정을 주야로 감시하였고,
이를 견디다 못한 손기정은 1937년 2학기에 반강제로 보성전문을 중퇴하고
일본 내지로 건너가 도쿄의 메이지대학 전문부 법과에 편입하였다.
그런데 도쿄에서도 일본 관헌은 손기정이 마라톤을 달리고 육상경기대회에 출전하는 것을 막았다.
해마다 양력 정초엔 도쿄~하코네 간 대학대항역전대회가 거행되었다.
손기정을 맞은 메이지대학은 그 역전에서 성적을 올리게 되었다고 좋아했으나 그는 달릴 수가 없었다.
일본 관헌이 공중 앞에서 손기정이 달리는 것을 금지했던 것이다.
결국 손기정은 메이지대학 전문부를 졸업한 후 1944년까지 조선저축은행에서 은행원으로 일해야 했다.
지도자·체육행정가로서의 활약
태극기를 들고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는 손기정 |
해방 이후 10월 조선체육회가 개최한 '자유해방 경축종합경기대회'에서 손기정은 기수를 맡게 되었다.
일장기를 달고 올림픽에서 슬픈 우승을 해야했던 손기정은 개막식에서 태극기를 들고 감격에 겨워 마냥 눈물을 흘렸다.
손기정은 대한민국의 체육계에 큰 공헌을 했다.
그는 각각 1947년과 1950년에 감독으로서 보스턴 마라톤에서 우승한 서윤복과 함기용을 훈련시켰다.
1948년에 대한체육회 부회장 겸 1948 런던 올림픽부터 1964 도쿄 올림픽까지 마라톤 대표팀 감독으로 역임했고,
KOREA의 이름으로 처음으로 참여한 올림픽에서 개막식 기수로 당당히 태극기를 들고 입장하였다.
이후 1963년에 대한육상경기연맹 부회장을 역임했으며 1966 방콕 아시안 게임에서 한국 대표단장으로 참가하였다.
1971년에는 올림픽 위원회(KOC) 위원, 1981년부터 1988년까지는 1988 서울 올림픽 조직 위원을 역임하였다.
1983년에는 <나의 조국 나의 마라톤>이란 제목의 자서전을 발간하고 1936 베를린 올림픽 당시의 상황과 심정을 밝혔다.
1988 서울 올림픽 개회식 당시 성화를 들고 주경기장에 들어서는 모습 |
손기정의 인생 후반부에서 특히 기억되어야 할 장면은 1988 서울 올림픽 개회식에서 성화 최종 봉송 주자로 뛴 것을 들수 있다. 사실 손기정은 성화 최종 봉송 주자가 아닌 성화 점화자로 예정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당시 한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다 당연히 손기정이 성화를 점화할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덕분에 극비에 부쳐져야 할 최종 점화자가 너무나 쉽게 예상되는 문제가 있었다.
결국, 손기정이 경기장으로 성화를 들고 들어오는 역할을 하고
이후 1986 서울 아시안 게임에서 스타덤에 오른 육상선수 임춘애가 넘겨받은 뒤
최종적으로 1명의 체육인과 2명의 일반인이 성화를 점화하였다.
손기정의 외손자인 이준승의 회고에 따르면 손기정은 본인이 당연하게 최종 성화 점화자로 선택될 거라 생각했는데
대회 직전에 이게 뒤집히자 의자까지 집어던지며 격노했다고 한다.
그의 증언에 따르면 성화봉송 때 자신이 있었고 멋있게 달리기 위해 1년이나 훈련했다고 한다.
하지만 대회 영상에서 볼 수 있듯이 손기정은 결국 자신의 역할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당시 영상을 보면 손기정은 가슴에 당당하게 태극 문양의 1988 서울 올림픽 엠블럼을 달고 정말 어린아이처럼 좋아하면서
펄쩍펄쩍 뛰며 성화봉송을 했다. 유튜브에서 영상으로도 볼 수 있다.
손기정의 영광은 그 후에도 계속되었다.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 마라톤에서 황영조가 금메달을 따는 그 순간, 손기정이 그 현장에 있었다.
황영조의 골인 순간에 잡힌 손기정 모습. 한국 올림픽 최고의 순간이라 할 수 있다. |
공교롭게도 황영조가 마라톤에서 우승한 날과 손기정이 우승한 날은 8월 9일로 똑같다.
'''황영조가 결승점에 골인하는 순간,
바르셀로나 올림픽 공식 중계방송은 관중석에 있던 손기정을 '손기정'이라는 이름과 함께 1936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라는 자막과 함께 비춰줬다.
그야말로 한국 올림픽 최고의 순간이었다고 할 수 있다.
황영조는 손기정이 자신의 정신적 지주였다고 밝히기도 했다.
또한 시상이 끝난 직후 경기장에서 지켜보던 손기정이 황영조를 만나 격려하는 장면도 유명하다.
이때 황영조의 두 손을 부여잡고 눈물을 글썽이는 손기정의 사진은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다.
당시 은메달이 일본, 동메달이 독일 선수라 폐막식 때 태극기 양 옆으로 일장기와 독일 국기가 나란히 올라갔는데,
이걸 보고 손기정은 "56년 전 그날, 한국인인 내가 일본 국기를 달고 독일에서 금메달을 땄는데,
그 3개의 국기가 나란히 올라갔다"고 감격하기도 했다.
1996년에 촬영된 사진 |
1996년 가을 강형구(손기정기념재단 공동이사장) 화백의 작업실을 방문한 손기정이 강 화백의 그림 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다. 강 화백은 캔버스에 베를린 올림픽에서 우승한 젊은 손기정의 얼굴을 담았다.
의외로 축구계와도 접점이 있다. 1950년대에 조선방직 대구공장(대구방직)의 상무이사로 재직했었는데, 대구방직이 1951년 1952 헬싱키 올림픽 선수 선발을 겸해서 열린 전국축구선수권 대회에서 당시 한국 축구의 최강팀이었던 육군 특무대를 이기는 파란을 일으키자 김창룡 특무대장이 조선방직의 단장이 누군가 호출했더니 바로 손기정이었다는 얘기가 있었다.
2.5. 사망
1997년부터 다리의 동맥경화증 때문에 잘 걷지 못하여 바깥 출입을 할 수 없었다.
그래도 2000 시드니 올림픽에서의 남북대표팀 공동입장, 2002 한일 월드컵 4강 진출에 이어 2002 부산 아시안 게임까지 지켜보았지만, 그토록 바라던 조국의 통일은 끝내 보지 못한 채, 2002년 11월 15일에 지병이던 만성 신부전증과 폐렴으로 인한 숙환으로 타계했다.
사후, 국립대전현충원 국가사회공헌자 묘역에 안장됐으며, 체육훈장 청룡장이 추서되었다. 모교인 양정중학교•양정고등학교[33]의 옛 터가 있는 서울특별시 중구 만리동(서울역 뒷쪽)에는 손기정 기념공원이 만들어졌다.[34]
손기정공원에는 손기정기념재단도 있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1979년 5월 손기정은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기념관 건립 의사에 따라 기념품 1,500여 점을 국가에 기증했고, 육영재단은 서울특별시 광진구 능동의 어린이회관에 '손기정 전시관' 을 지어 2005년도 기념품을 보관 및 전시하고 있다.
2005년, 한 독일인이 손기정에게 헌정하는 앨범을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