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초정(芳草亭)은 김천에서 청암사 가는 3번 국도 길, 구성면 상원리 연안이씨(延安李氏) 집성촌에 위치한 아름다운 정자로 1974년 12월 도유형문화재 제46호로 지정되었다. 1625년(인조3년)에 이정복(李廷馥)이 선조의 유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자신의 호(號)를 붙여 처음 세웠으나 그 위치는 지금보다 더욱 국도 쪽에 가까웠다고 한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2층누각 형태인데, 2층에 문을 달아 이를 걸어올리면 마루가 되고 내려 닫으면 방으로 쓸 수 있게 하였으며, 사방에 난간을 두른 형태이다. 이와 같은 누각 형태는 호남지역에서 자주 보게 된다고 하는데, 방이 양 끝에 배치되는 이 지역의 보통의 누각과는 다른 모습이다. 1689년(숙종15년) 건물이 퇴락하여 그의 손자 이해가 중건하였고, 1727년에 보수를 하였으나 그 후로 방치되다가 1735년 여름 홍수 때 유실되었던 것을 1788년 가례증해(家禮增解)를 저술한 이의조(李宜朝)가 다시 건립하여 지금에 이른다. 많은 시인 묵객들이 정자에 올라 주위의 경치를 찬탄한 다수의 시와 글귀를 남겼는데, 조선 후기 예법을 집대성한 ‘가례증해’ 판목은 도유형문화재 제67호로 지정되어 방초정 인근에 건물을 지어 따로 보관되어 있다.
뜰앞의 연못은 가운데에 두 섬(島) 모양의 가산(假山)을 배치하여 독특한 정원 형태를 이루고 있는데, 속칭 최씨담(崔氏潭)이라 하며, 건물 연못 수목의 배치 등은 조선시대 정원 조경 양식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더불어 이 최씨담에 대하여는 다음과 같은 흥미있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곧 임란 직전에 이 마을 이정복이 하로마을(김천시 양천동)의 17세 난 신부 화순최씨와 혼인을 하였는데, 당시의 풍습은 신랑이 처가에서 초행 혼례를 치른 후 신부는 해를 넘겨 시댁으로 신행을 가도록 되어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임진왜란이 일어나게 되자 신부는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죽더라도 시댁에 가 죽겠다며 앞당겨 신행길을 나서 마침 시댁 마을에 다달라 왜적(倭賊)과 마주치게 되자, 최씨가 정절을 지키고자 마을 앞 연못에 투신하여 자결을 하게 되었고, 그러자 신부를 따라운 노비(奴婢) 석이(石伊) 또한 투신하여 함께 죽었다고 한다.
겨우 초야만 치룬 신부를 졸지에 잃게 된 신랑은 이후 부인이 투신한 연못을 확장하여 최씨담이라 이름짓고, 자신의 방초정을 그 옆에 지어 이승에서 이루지 못한 부부의 인연을 영원토록 함께 하고자 하였는데, 그 뒤 1632년(인조10년) 나라로부터 어필(御筆)의 정려문(旌閭門)이 내려 정자 옆에 세워졌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사실은 위 이야기가 그저 예부터 전해 오는 단순한 전설만이 아니었음을 1975년 최씨 순절 후 340여 년에 연못을 준설하는 과정에서 확인하게 된다. 곧 준설 과정에서 못 가운데에서 비석 하나를 발견하게 되었는데, 거기 빗돌에 “충노석이지비(忠奴石伊之碑)”라고 새겨져 있었다 한다. 그 후 발견된 비석은 상전이었던 화순최씨의 정려각 앞에 세우게 되었는데, 석이가 화순최씨를 따라 자결한 다음에 그 충심에 감복하여 연안이씨 가문에서 노비를 위한 비석을 만들기는 하였으나 차마 세우지는 못하여 못 안에 던져 넣었던 것이 그 때에 발견되어 전설처럼 떠돌던 노비의 비석이 사실이었음을 비로소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2007년 8월 초 처음 방문 때 일행을 위한 해설의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