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공동체를 사랑하십니까? ; ‘홀로’가 아닌 ‘함께’라는 진리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생존하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시인은 이렇게 말한 후에 그 특권을 누리는 자들에 대해 생각합니다. “주의 집에 거하는 자가 복이 있나이다. 저희가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그들과 함께할 수 없는 시인은 그들을 부러워합니다. 세상 어느 것도 하나님의 집에 거하는 복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 .......”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연히 이런 갈망을 본능적으로 느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도 교회의 사역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그 모든 특권을 갈망하지 않는다면 영적으로 심각하게 잘못되어 있는 것입니다.1) 저는 항상 이 주제에 관하여 말하고 싶었습니다. 그동안 우리 주위에 신앙고백을 하면서도 교회공동체를 사랑하지 않는 친구들을 많이 접하며 느꼈던 답답함을 이제야 풀어보려고 합니다. 말로만 하는 사랑! 개념 속에만 존재하는 사랑은 믿지 않습니다. 행함으로 결과 되지 않는 믿음은 진리의 세계에서는 아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란 너무 강력한 파워가 있어서 우리의 의지를 끓임 없이 일으키고, 우리의 마음을 감화시켜, 우리가 믿는 것을 향해 단일하게 나아가게 하지, 우리의 이성적 동의만 얻은 채 다른 삶을 살도록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이것을 두고 회심은 전인적인 것이다. 라고 이야기합니다. 거듭난 신자가 교회공동체와 관계를 맺으며 신앙생활을 해나가는 영역역시 그렇습니다. 제가 생각할 때 그것은 별도의 학습이 필요하지 않은 새 생명의 본능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너무나 다양하고 파괴적인 세상의 사조들과 제대로 되지 못한 가르침이 난무함을 감안하여 이일에 대하여 하나부터 풀어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저는 지금 미국교회에서 유행하고 한국이 수입중인 포스트모던 아래의 해체주의적인 교회의 모습에 대해 이야기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없음의 탈을 쓴 문제 많은 우리들의 이야기를 하려는 것입니다. 1. 잘못된 3가지 유형의 공동체를 대하는 모습 가. 종교적 부담을 해소하는 곳 사람이 동물과 다른 독특한 점은 바로 ‘신의식’이라고 합니다. 비록 하나님께 배역하여 타락한 사람의 마음속에는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는 완전히 무능할지라도 무언가 절대자와의 관계를 바라는 심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다양한 종교성으로 나타나며 참된 신앙적 태도를 갖지 않은 채 본인 스스로가 느끼는 나름의 종교적 부담감을 자기식으로 해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의 판단으로는 기독교 안에도 그런 분들이 참 많습니다. 대개 이런 경우 나름의 열심과 충심을 가지고 교회 생활을 하지만, 교회 공동체와 깊이 관계 맺는 것은 원하지 않는 경우입니다. 과도기적 과정의 경우만을 예외로 할 수 있을 뿐 신앙의 원리에서 중간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성경에선 예수그리스도를 전적으로 따르는 것만 등장하지, 반쯤 따르는 경우는 없습니다. 신앙이란 크건 작건 미숙하건, 다양한 성향으로 표출되건 그 자체로 새 생명의 모습으로 태어나 성장해 나가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를 자기식 해결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절대로 거듭난 신앙의 모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극장처럼 예배를 관람하고 돌아가기만을 반복하며 교회 공동체와 관계를 맺지 않는다면, 그 공동예배시간에 스스로는 진심과 전심으로 참여한다 할지라고 그 참됨을 의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극장식 교회생활은 성경에 전혀 없는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매우 기형적입니다. 더욱 위험한 것은 본인의 이러한 성실한 공동예배 출석이 자신이 신앙의 의무를 어느 정도 잘 수행하고 있다는 방패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온전하지 못해도 온전함을 향해 늘 나아갑니다. 새로운 문제없는 자기식 신앙생활의 안주는 끼어들 자리를 주면 안 됩니다. 자신의 신앙인격이 공동체 안에서 드러나고, 발각되고, 보완되어야 합니다. 안 그러면 주일 오전시간과 다른 나머지 시간의 나를 교정 받는 것은 불가능해집니다. 온전한 그리스도인으로써의 성화의 길은 없다고 보시면 됩니다. 이러한 경우를 박영돈 교수님2)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적나라한 모습을 직시하기를 두려워한다.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달아나 공동체 속에 숨는다. 신앙공동체를 자신에게 안위를 안겨 주는 방편으로 교묘히 이용한다. 자신이 공동체의 일원이기에 공동체의 신앙과 영성을 공유한 것으로 착각한다.”3) 고 이야기 합니다. 더욱 알아듣기 쉽게 이야기 해보겠습니다. 우리 교회에는 가족모임이라는 소그룹모임이 있습니다. 이것은 공동체적으로 준비된 성도의 교제의 장입니다. 아래에 자세히 이야기 하겠지만 그곳은 다른 사람을 향한 관심과 사랑이 시작 되는 곳입니다. 인격적인 만남이기 때문에 이곳은 쉽지 않습니다. 차라리 몸으로 때우는 봉사는 쉬운데 여기서는 나와 다른 다양한 사람을 매주 들어야 하기 때문에 어렵습니다. 그런데 그 곳에서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그런데 가족모임을 고의적이고 지속적으로 하지 않는 것은 상당히 자기몰입적인 태도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반드시 타인을 향한 사랑으로 결실 됩니다. 그 타인의 첫 사람이 교회의 지체들이 아니겠습니까? 자기에게만 몰입되어 신앙을 영위해나가는 것은 신앙조차도 자신의 만족을 위하여 이용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지극히 해로운 죄악속에 있는 것입니다. 지금 이 모습 속에 있다면 신중히 자신을 돌이켜야 할 것입니다. “옛 사람의 자기중심적 성향이 마치 고슴도치의 고약한 가시와 같이 서로를 찔러 아프게 하므로 교제를 불가능하게 한다. 자기중심적 옛 사람은 타자를 자기만족을 위한 것으로 취급하지 참된 인격으로 대하지 못하게 한다.”4) 우리의 개인주의적인 이기심이 신앙의 영역을 조종하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도리어 신앙은 자기를 부인하고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으로 세워지는 데에 만족과 감사가 있게 합니다. 홀로 거룩함의 고수가 되려하지 마십시오! 그런거는 없습니다. 홀로 뭔가 깨달은 고승 같은 얼굴로 교회를 거닐지 마십시오! 신앙은 다른 사람에게 먼저 다가가 웃어 주는 것입니다. “나 홀로 거룩함을 추구하는 고독한 신앙생활은 결코 옛 자아를 극복하지 못한다. 이기적 경건은 자기중심성을 초월하지 못하기에 영적 우월주의를 조장하며 공동체의 덕을 세우기보다 갈등과 분열을 야기하는 역기능을 한다.”5) 나. 같은 것을 공유하는 동호회 같은 곳 참 신자라 할지라도 ‘교회의 하나 됨’, ‘성도의 교제’와 같은 말들을 엉뚱하게 이해하는 경우가 아주 많습니다. 우리는 좀 더 하나님 중심적으로 사고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 받았으니 이제 우리끼리 잘 모여서 잘 지내자! 라는 생각입니다. 얼핏 보면 좋은 말 같지만 그 안에는 어떻게 잘 지내는지에 대한 이해가 상이합니다. 성도의 사랑이 완전히 자기식으로 이해되어 실천됩니다. 성도의 사랑의 관계는 하나님의 사랑과 마찬가지로 거룩한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그 사랑은 진리와 짝하여 실천되어야 합니다. 그 모든 내용과 근본과 방식에 있어서 말입니다. 도리어 많은 분들이 이해하고 실천하려는 사랑은 현대 심리학과 비슷하며 포스트모더니즘과 비슷한 모습입니다. 관용의 정신과 무조건 듣고 호응해주는 그런 모습들 말입니다. 이러한 거룩이 배제된 사랑은 하나님의 뜻을 함께 찾기보다는 함께 잘 어울려 지내는 데만 초점을 두어 마치 동호회를 연상 시킵니다. 신앙적인 것들을 많이 공유하여 서로 친하게 지내지만 여기에 뭔가 하나님스러운 것은 빠져있습니다. 하나님이라는 단어는 사용하지만 그분의 뜻은 함께 추구되지 않습니다. 이 경우도 또 하나의 종교적 기만입니다. “성경에 의하면 교회는 종교클럽이나 우정을 돈독히 하고 연합 사업에 참여하는 같은 마음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의 자발적인 단체가 아니다. 도리어 그것은 성령의 능력에 의하여 형성되었고 그의 말씀으로 다스려지는 그리스도와 성령의 제도이다.”6) 또한 이런 경우에는 본 글이 공동체를 강조하기 위한 글이지만 주중에 홀로 거룩하신 그 분을 독대하는 습관의 중요성을 강조해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가 ‘교제’란 이름으로 모였지만 신자가 자신 안에 ‘내용’ 이 없는 경우는 교제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홀로 시간을 보내지 않는 사람은 다른 사람과 만나서도 진정한 의미의 교제를 할 수가 없습니다. 신앙적 수다를 떠는 동호인의 관계에서 벗어나 성령의 교통하심이 있는 성도의 교제가 되려면 언제나 홀로 말씀 앞에서 기도하는 사람이기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고독 속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신앙의 성숙 없이 교제에만 의존하여 공동체의 영성에 기생하는 존재로 전락한다. 그런 사람은 교제에 긍정적인 기여를 하기 보다는 공허하고 피상적인 교제를 조장하는 데 일조한다.”7) 다. 교회를 신앙생활의 옵션으로 아는 것 사랑에 빠진 사람에게 상대방을 보고 싶어 해야 한다. 헤어지기 아쉬워해야 한다! 라고 가르쳐야 한다면 그것은 우스운 일이 될 것입니다. 사랑에 빠진 이에게 그것은 배우지 않아도 행하게 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거꾸로 말로는 사랑한다고 하면서 전혀 보고 싶어 하지 않거나 헤어짐을 아쉬워하지 않는다면 상대방은 그 말은 진실성을 느끼지 못할 것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로 태어난 사람은 함께 부름 받은 교회 공동체를 사랑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며 교회는 무시하고 홀로 집에서 성경만 본다면 그의 신앙은 반드시 왜곡되고, 고집적이 될 것입니다. 말로 교회의 중요성을 부인 하는 사람이 적지만, 실제로 가끔씩 교회에 나가주면서 신앙고백은 그럴 듯하게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지성으로 교회론을 읽어봤는지는 몰라도 마음으로는 그렇게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실제로는 교회 생활이라는 것은 자신의 신앙생활의 옵션 정도로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와 함께 살지 않고도 끄떡없이 잘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이들이 참신자라면 사탄에게 지독하게 속고 있어 자신이 그 자체로 얼마나 엄청난 죄속에 있는지 무감각해 져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 보수적인 침례교회의 과거 기록에 보면 교회를 나오지 않는 것을 가장 질 나쁜 죄중에 하나로 여겼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이 죄는 보통 다른 모든 죄까지 은폐하는 역할을 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죄를 짓기 시작하면 그 사람은 곧 교회에 안 나오기 시작할 것임을 누구나 쉽게 예상 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8) 신자라 할지라도 자동으로 죄짓기를 멈추지 못하며, 그 가운데 회개하며 그리스도만을 의지하는 회심의 일생을 사는 것이 신자의 모습인데 하나님의 영광에 감화될 특권을 버리고 공동체 가운데 보호 받을 특권을 내던지며 홀로 무뎌진 죄 속에서 기억속의 신앙을 쫓아 고집스럽게 불순종 가운데 거하는 불쌍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는 교회 없는 그들이 교회로 돌아온다면 아주 행복할 것 같습니다. 2. 나는 왜 지역교회를 사랑하는가! 가. 찬양공동체 1) 하나님의 영광의 아름다움을 함께 찬양 빛이 있어도 어둠은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어둠은 그냥 어둡기만 했지 그 빛이 바로 코앞에 있어도 빛이 얼마나 따뜻하고, 찬란하게 빛나는지 어둠은 완전히 무감각합니다. 그런데 그 어둠이 깨어납니다. 이제 빛을 인식할 뿐만 아니라. 빛 가운데 거합니다. 어둠의 깊이만큼 빛의 밝음은 더 고귀하게 드러납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받은 교회의 모습입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우리 은혜의 아버지를 알아보는 가슴이 생겼습니다. 이제 마땅히 우리는 함께 그 분을 찬양합니다. 서로 알지 못하고 스쳐 지나갈 무수한 인연들이 지역교회 가운데 모여 함께 우리 아버지를 찬양합니다. 함께 그 분께 무릎 꿇고 그 분을 예배합니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구원의 목적으로 볼 때, 한 개인을 지칭하여 관계하시는 개념은 찾기 어렵습니다. 물론 아브라함이나 다윗 같이 구속사적 맥락에서 그 다리 역할을 하는 인물들이 있지만, 하나님의 신부로 당신의 백성으로 하나님께서 항상 지칭하시고 부르시고 사랑하시던 대상은 ‘우리’였습니다. 그 영적 이스라엘인 교회는 공동체입니다. 하나님의 공동체입니다. 우리는 각 사람이 하나님 앞에 부름을 받았지만, 더 크고 온전한 ‘우리’라는 견지에서 이 신앙을 이해해야 합니다. 이것은 특별히 개인주의가 공인받은 현 시대에게 낯선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우리는 함께 그 분을 예배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하나님의 총회가 그분의 임재 앞에 서 있다. 총회, 즉 교회가 된다는 말은 함께 하나님을 경배한다는 것이다.”9) 2) 하나님의 영광의 절정의 구속사역에서 드러남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으로 그 분은 영원히 찬양 받기에 합당하십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은혜의 영광을 나타내신 특별한 사랑이 여기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이 특별한 은혜 가운데에서 우리 하나님의 영광이 더 세밀하고, 풍부하고, 온전하게 나타나셨습니다. 마치 이 타락한 세상만이 그 분의 놀라운 은혜의 영광이 펼쳐지기에 적합한 캔버스와도 같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구원하신 우리 주님을 찬양합니다. 우리 각인에게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고 소중한 사실입니다. 우리 가운데 이루어진 그 사실을, 우리 안에서 성취되어진 그 은혜를 우리는 영원토록 함께 찬양 할 것입니다. “창조주의 영광은 특별히 구원역사 속에서 드러난다. 구약의 큰 주제는 자기 백성의 구원을 통해 드러나는 하나님의 영광의 최종적 입증이다.“10) 나. 순종공동체 1) 그리스도의 주되심 “예수님은 주님이시다.(고전12:3) 이것은 기독교에서 가장 중심되고 본질적이며 구별되는 선언이다. ........ 새롭게 거듭난 모든 신자들의 마음에는 언제나 순종하고자 하는 무언가가 있다.“11) 복음 메시지는 처음부터 끝까지 순종하라는 메시지입니다. 불신자일 때는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1:15)고 명령을 받고, 신자가 된 후에는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행하신 은혜의 사역과 더불어 ‘그러므로’(롬12:1,엡4:1,빌2:1...) 순종의 삶을 살 것을 명령 받습니다. 이 은혜를 오해 할 경우 순종에 대한 거부감을 갖는 경우가 있습니다. 불신자일 때와 마찬가지로 누구도 나에게 명령할 수 있는 대상은 없다고 생각하고 싶어 하는 것 같습니다. 은혜의 원리가 마치 내 맘대로 하나님과 관계 맺으며 주님을 내 뒤처리 해주는 분으로 이해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구약이건 신약이건 그렇지 않습니다. 왜 순종하라는 메시지가 복음(기쁜소식)인가 하면 하나님께 순종할 수 없는(하고 싶지도 않고) 어둠에서 건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는 것이 죄인데, 그 죄로부터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복음입니다. 죄에게 순종하는 죄의 종에서 예수를 믿어 그 분을 주인으로 섬기는 의의 종이 되었기 때문에 복음입니다. 이렇게 신자의 본분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니 당연히 그렇게 부름 받은 ‘우리’는 함께 하나님께 순종하는 공동체인 것입니다. 기독교의 가장 구별되는 메시지는 예수님이 주님이시다! 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선전하는 것이 ‘교회’입니다. 그것을 살아내는 것이 ‘교회’입니다. 우리는 함께 모여 주님께 무엇을 순종해야 할지 ‘말씀’을 듣고 함께 ‘교제’하며 어떻게 순종해야 할지 서로 권면하고, 격려하여 함께 순종해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어 나가는 공동체입니다. 이곳에서 은사를 따라 서로를 섬기는 복된 원리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은 우리를 공동체에 연합시킨다. 그것은 성령의 공동체이며, 거기서 우리는 제자도의 길을 따라 서로 섬긴다.”12) 어떤 작은 지체도 소홀히 여길 수 없는 한 몸으로써 교회로 함께 순종하기에 함께 자랍니다. 우리는 순종이 없이는 주를 알 수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순종은 주님께서 예비해 놓으신 커리큘럼의 가장 중요한 필수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를 때 그분은 우리를 가르치신다. 순종이 우리의 마음을 열어서 깨닫게 한다. 또한 그 깨달음은 우리 마음에 순종의 염원을 일으킨다. ....... 우리는 순종하는 체험으로 하나님이 보이신 기쁘신 뜻을 살피도록 부름 받는다.”13) 우리는 주의 말씀에 함께 순종하기 위해서 모여 있습니다. 2) 말씀하심과 징계 “칼빈이 천명하듯이, 복음은 선포될 뿐 아니라 들려지고 지켜져야 한다.”14) 우리는 옹기종기 둘러 앉아 지금도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듣습니다. 이것은 혼자 성경 보는 것과 다른 차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세우신 당신의 설교자를 통하여 교회에 지금도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행동강령이라는 정보를 취득하기 위해 설교를 듣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알며, 그 분의 살아있는 말씀을 통해 그 분을 대면하여 무릎 꿇기 위해(순종하기 위해) 말씀 앞에 함께 모여 있습니다. 여기에 공동체만의 또 하나의 은혜의 수단이 있습니다. 바로 ‘교회의 권징’입니다. 권징은 하나님의 살아있는 권위인 말씀의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만일 강단에서 어떤 행동이 죄이며 해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선포되고 가르쳐졌는데 실제로 버젓이 거기에 역행하는 행동들을 하는데 교회가 두 눈뜨고 멀뚱히 지켜만 본다면, 강단에서는 그렇게 말했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안살아도 된다! 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땅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론적이고 그저 교리적인 것으로 치부되는 것입니다. 즉 교회의 징계는 선포된 말씀이 끝까지 살아있도록 교회가 연약한 성도를 돕는 것입니다. 칼빈의 말을 좀 더 자세히 들어 봅시다. “각 사람이 자기가 하고 싶어 하는 대로 행하도록 허용된다면 대체 교회가 어떻게 되겠는가? 그러나 교리를 전하는 일 외에 사사로운 훈계와 교정 등 교리를 유지시켜 줄 수 있는 일종의 보조 기능들을 덧붙여서, 그 가르쳐진 교리가 헛되이 되지 않도록 하지 않으면 결국 그런 일이 일어나고 마는 것이다. 그러므로 권징은 그리스도의 교리를 대적하여 일어나는 자들을 억제하고 누그러뜨리는 고삐와도 같으며, 또한 별로 관심이 없는 자들에게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박차와도 같고, 때로는 좀 더 심각하게 타락해 있는 자들을 그리스도의 영으로 온유하고도 부드럽게 채찍질하는 아버지의 채찍질과도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을 제어하는 데에 관심도 적절한 수단도 없기 때문에 끔찍한 황폐의 위험이 교회를 위협하기 시작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이를 치유하는 일이 필요하다는 것이 필연적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자,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께서 명하신 유일한 치유책이요 또한 경건한 자들 사이에 항상 사용되어온 것이다.”15) 교인 눈치를 보는 현대의 교회에 대부분 징계가 사라졌지만, 또한 극소수의 교회들에선 부당하게 성경적이지 않은 이유로 징계를 행사하기도 해서 여기에 대한 좋지 않은 이미지가 있는 것도 같습니다. 그렇지만 중심 원리를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누구에게 벌주기 위해서 징계를 옹호하는 것이 아닙니다. 첫째로 그것은 성경이 명하는 바이며, 둘째로 그렇기 때문에 유일하게 적절한 해답입니다. 권징은 권위의 주체가 ‘나’가 되는 세상에서 성도를 구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며, 하나님이 거룩하시듯 우리 교회도 거룩해야 함을 더 온전히 추구하는 것입니다. 고의적이고 지속적인 죄악을 ‘연약함이란 이름의 방패’ 속에 숨겨주지 않는 것입니다. 성도라 할지라도 끓임 없이 무엇이 ‘죄’ 인지 들어야 합니다. 교리 책 속의 객관화된 남의 죄가 아니라, 우리의 모습에서 엉뚱하게 치닫고 있는 우리의 삶속에 ‘죄’가 무엇인지! 그것은 죄니까 돌이키라는 권면을 계속 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각자의 삶속에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징계를 받는 것이 어떻습니까? 징계하지 않으시면 사생아라 했는데 과연 우리 아버지께서 우리들을 인도하심 어떻습니까? 우리의 욕망에서 난 기도들을 우리 주님이 모두 들어주셨다면, 우리가 지금 여기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 주님이 우리의 잘못된 소망들을 엎어버리지 않으셨다면 우리가 여기서 겸손히 주만을 바라고 주님만으로 만족 할 수 있는 자리에 있을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 주님이 너무도 미숙하고 어리석은 마음을 깨버리시려고 시련의 시간을 주지 않으셨다면 우리가 하나님께서 살아 계신지 어찌 알 수 있었겠습니까! 주님이 징계로 적절히 우리를 보호해 주지 않으셨다면 우리가 왜 더 사악한 죄인으로 타락하지 않고 이렇게 지낼 수 있습니까! 우리는 이러한 마음으로 교회 공동체 가운데 서로를 사랑하고 염려하는 마음으로 각별히 권면하고 대화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끈질기게 매달릴 수 있어야 합니다. ‘쟤는 쟤고 나는 나야’가 아닙니다. 때로 불신자에게 전도 할 때 보다 사랑하는 여자에게 매달릴 때 보다 죄에 빠지는 형제에게 더 매달려 사랑으로 권고해야합니다. 또한 이러한 이해 가운데서 모든 성도의 교제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은혜란 자신의 죄된 욕구까지 포함하여 모든 것에 언제나 ‘예’가 되는 자유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죄에 대해 더 이상 염려할 필요가 없다. 새로운 공식 즉 자기들은 죄를 범하고 하나님은 용서해 주신다는 공식을 가진 은혜가 자기들에게 주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은혜의 사도 바울은 그 반대로 주장하고 있다. 그는 말하기를, 은혜란 ‘아니오’라고 말하라고 우리에게 가르친다고 한다. 왜냐하면 참 자유가 어디에 놓여 있는지 즉 참 자유는 죄와 타락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절제된 삶속에 있다는 것을 은혜는 우리에게 보여주기 때문이다.”16) 다. 성화공동체 1) 그리스도로 함께 연합됨 성도의 하나됨은 같은 시공간 안에서 인격적인 만남을 통해 확인되지만, 먼저 그리스도로 인한 진리 속에 근원을 둡니다. 우리 각인이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분과 함께 죽고 함께 살아 그 분의 의로움이 우리의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다면, 그 그리스도와 연합된 우리 한명 한명은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도 서로 간에 연합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신적인 사실로써 인간적인 방식으론 모방할 수 없는 내용입니다. 그리스도와 연합된 교회 안에는 개인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피로 사신 교회가 있을 뿐입니다. 물론 우리 각인이 독특하고 귀한 인격체로써 주님을 대면하지만, 개인으로써 주장될 신앙의 공간은 없다는 의미입니다. 오직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를 향하여 자라가도록 각인이 서로를 담아 지어져 가는 것입니다. 이것의 신적인 근본이 그리스도로 인하여 우리가 함께 연합되어 있다는 진리입니다. “성령께서 그리스도께 연합시키는 모든 자를 또한 그리스도 안에 있는 다른 모든 사람과 연합시키기 때문이다. 성령은 하나님을 우리의 아버지가 되게 하면서 우리를 하나님 가족의 형제와 자매로 만든다. 하나님의 구원을 아는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서 그것을 아는 것이다. .......성령은 우리를 그리스도께 연합시키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소유된 자들에게 연합시키는 것이다.”17) 2) 사랑으로 함께 연합됨 우리 각인이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 간에도 서로 연합되어 있다면, 그 결과는 ‘사랑’으로 연합된 실제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가 단순히 성경을 공부하러 모이는 성경학교가 아니라는 것과 동일한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끼리 모여 있자는 기독교 동호회도 아니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역시 극장식 예배를 보고 흩어지는 어떤 행사에 관한 것도 아닙니다. 이제 죄인들이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어 사랑하지 못해서 사랑하려고 난리를 치는 전쟁이 일어나게 됩니다. 하지만, 그러한 고민과 불만 자체가 사랑해야한다는 양심의 소리의 시작이며 여기서 순종의 시간을 보내면서 성숙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순종하려 하지 않는다면 평생 ‘우리 교회는 사랑이 없어’ 하면서 투덜이 스머프가 되어 살 것입니다. 프란시스 쉐퍼는 ‘그리스도인의 표지’라는 글에서 다른 복잡한 거 없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한 가지 진정한 표지는 모든 참된 그리스도인 형제들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라고 설득력 있게 전했습니다. 마치 사도 요한처럼요 그렇기 때문에 이 명령은 그 능력을 약속 받은 명령이라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랑으로 우리를 용서하시고 받아주신 화평의 하나님을 우리 가슴속마다 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그리스도의 백성 안에서 그분의 영의 임재와 사역에 의하여 인치심을 받는다. 그의 은혜의 열매에 의하여 그리스도의 영은 우리를 성부 하나님께 이끌며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함께 묶는다. 성령이 우리 마음속에 부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다른 사람을 위한 불타는 사랑으로 표현된다.(롬5:5;요일3장). 화평역시 사랑의 열매이며, 하나님과 화목함으로써 얻어지는 화평은 우리를 다른 사람들과 화평하게 한다. 우리가 서로 나누는 이 은혜가 우리를 다른 신자들과 연합시킨다.”......“’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바울이 여기서 사용하는 단어는 ‘힘써 지키라’는 번역이 주는 느낌보다 강력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 단어가 실제로 의미하는 것은 하나님 자신의 하나됨에 대한 우리의 전적인 헌신이다. 우리는 한 하나님을 섬기기 때문에 하나가 되어야 한다. ........ 그분의 사랑에 응답하는 사랑은, 사랑의 근원이 되시는 그분께 우리를 이끄는 것만큼이나 분명하게 우리를 서로에게 이끌 것이다.”18) 그러니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진리에 뿌리박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먼저 형제)와의 관계에서 더 사랑이 많고, 그리스도를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스러운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화는 혼자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성화란 교회 없이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화는 교회공동체적 시각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거룩에서 성장한다는 것은 사랑에서 성장한다는 것이다. ........ 진정한 거룩에서의 성장은 함께 하는 성장이다.”19) 3) 성도의 교제로 연합됨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교회 안에서 형제를 사랑하겠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함께 성장해 나가겠습니까? 바로 성도의 교제를 통해서입니다. 정확히 가족모임이라는 소그룹을 지목하고자 합니다. 우리 중 누구도 교회의 구성원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불가능한 것이며, 또한 우리의 권한도 아닙니다.) 오직 우리 주님만이 선택하시고 하나의 지역 교회로 우리들을 불러 모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란 ‘나와 다른’ 사람들의 집합소입니다. 사람들과 반복되는 인격적인 만남을 꾸준히 갖지 않는다면 다른 형제와 나와의 다름의 간격이 드러날 기회가 별로 없습니다. 따라서 상대방을 이해하고 받아줄 기회도 적습니다. 상대를 들을 기회를 의도적으로 상실한 채 어떻게 형제를 사랑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또한 그 형제 안에 있는 우리 주님을 확인할 기회도 없습니다. 항상 만나서 잡다한 이야기만 한다면, 주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가 우리 대화의 주제가 되지 않는다면, 우리 삶에 간섭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우리 대화의 주제가 되지 않는다면, 또한 그것이 언제나 사모되지 않는다면 우리가 특별히 ‘교회’로 모여 교제해야하는 이유가 있을까요? 교회의 정체성은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는 공동 예배를 통해서 확인됨과 같이 우리가 소그룹으로 모여 함께 말씀 하신 바를 나누는 교제를 통해서도 드러납니다. 이것은 당연히 성경말씀이나 신학에 대해 우리의 견해를 나누는 토의나 담론이 아니라, 각인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밀착된 손길을 찬양하고, 고백하고, 회개할 때에 그 가운데 나타나시는 하나님의 호흡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때로 교훈하셔서 순종하게도 하시고, 서로를 듣게도 하시고, 형제를 사랑하는 마음을 길어내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교제 가운데 역사하시는 성령의 교통하심입니다. “나와 너 사이에 계신 성령을 누리지 못하면 내 안에 계신 성령도 온전히 경험하지 못한다. ....... 성령 안의 교제는 성령충만한 교회의 핵심요소이다. 이러한 인식 때문에 초대교회에서는 성도의 교제를 교회의 본질로 보았다. 존 스토트는 에베소서 5:18-21절을 강해하면서 성령충만의 첫째 사인(sign)은 교제라고 했다.”20) 이러한 성도의 참된 교제 안에서 우리들의 죄도 발각이 됩니다. 고해성사가 아닌 서로를 사랑하고 받을 준비가 된 교제 속에서 우리의 죄들은 고백되어지고 서로 경고를 받으며 서로 보호를 받습니다. 순종의 문제가 개인의 취향이나 선택이나 여건의 문제가 아니라 ‘죄’의 문제란 것이 성령의 도움으로 고백되어 집니다. 비슷한 문제를 묻어두던 다른 지체가 도리어 회개하는 역사도 일어납니다. 우리의 너무 커 보이는 연약함 속에 서로 격려하며 함께 주를 따르는 길을 잘 가기를 다짐합니다. 물론 항상 이런 분위기가 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적어도 이런 것을 쫓아 모임을 열기를 추구해야 합니다. 가족모임은 교회가 정한 공동체적 소그룹입니다. 자기랑 마음 맞는 사람들만 만나서 교제하는 사람은 언제나 영적인 어린아이 일 수밖에 없습니다. 구성원이 모두 마음에 들지 않아도 공동체적인 성격의 모임 가운데 함께 하실 성령님을 의지하여 겸손하고 진실하게 교제에 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곳에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려는 마음,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으려는 우리의 마음이 다룸을 입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도의 교제는 성화에 있어서 특별하고 결정적인 위치를 갖고 있습니다. “교제를 떠나서는 죄를 극복할 수 없다. 죄죽임(mortification)은 고립된 개인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교제 속에서만 가능하다.”21) 이것은 또한 온 회중이 모이는 공동예배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공동예배처럼 중요하며, 또한 공동예배의 연장선상에 있어서, 온 교회가 모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 하나님의 임재 앞에 함께 무릎 꿇어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에서 그것을 좀 더 세밀하게 공동체적으로 인격적인 사귐을 진리 가운데서 갖는 것이 이러한 성도의 교제이기 때문에 그렇고, 또한 이것은 적용되어지는 말씀이라는 의미에서도 그렇습니다. 들은 말씀을 어떻게 적용할는지 우리 관계 속에서 먼저 교제되어 지는 것입니다. “성경적인 참 제자도에는 소규모 그룹을 통해 의도적으로 상호 권면을 할 수 있는 상황(말3:16; 딤후2:2; 딛2:2-6; 히3:12-13)과, 개인의 경건 생활과 자기의 제자도를 실천할 수 있는 상황(시1;고전9:24-27;딤전4:16)을 만들어 주는 것도 포함된다. 말씀 사역의 98퍼센트는 이처럼 공식적이지 않은 일반 상황에서 일어나고 있다고 주장해도 좋을 것이다.22) 3. 결론 : 교회는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해야 하는 곳 제가 초신자 때에 아무런 정리된 지식을 갖고 있지 못했지만, 당시 속해 있던 교회를 바라보며 교회는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해야 되는데 여기는 그러지 못한 것 같다! 라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물론 저는 제가 생각한 그것이 무엇인지도 자세히 말할 수 없었지만, 그 때 이후로 그것은 저의 비전이 되었습니다. 온갖 종교적 모습을 다 가지고서도 얼마든지 인본주의적인 교회가 될 수 있다는 것도 뼈저리게 실감하였습니다. 특히 성도의 교제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점점 비인격화되는 교회공동체 속에서 죄는 득세하고, 그것을 권면할 관계는 없고, 사랑도 없는데 아무 문제없듯이 잘도 교회를 출석하는 사람들 속에서, 또 반대 극단에서는 교제란 이름으로 신앙말잔치를 꽃피우거나, 아니면 잡담만 늘어놓거나 부침개나 부쳐 먹기만 하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함께 사모함은 없는 모습이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너무 미숙하고 흠이 많은 사람을 불러주셔서, 예수가족교회에서 지난 1년간 청년부 가족장을 하며 고민도 많이 하고 많이 배웠습니다. 그간 생각한 바를 성도님들과 함께 나누고자 하는 마음으로 정리해 보았습니다. “제사장이 성소에서 나올 때에 구름이 여호와의 성전에 가득하매 제사장이 그 구름으로 말미암아 능히 서서 섬기지 못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이 여호와의 성전에 가득함이었더라”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왕상8:10,11/ 엡2:22] 1) 마틴 로이드 존스. 설교와 설교자. p239. 복 있는 사람 2) 박영돈 교수는 고신대원 교의학 교수이다. 3) 박영돈. 성령충만, 실패한 이들을 위한 은혜. p281. SFC 4) 박영돈. p278 5) 박영돈. p280 6) 에드먼드 클라우니. 교회. p65. IVP 7) 박영돈. p282 8) 마크 데버. 건강한 교회의 9가지 특징. p253. 부흥과 개혁사 9) 클라우니. p134 10) 클라우니. p135 11) 존 맥아더. 참된 무릎 꿇음. p33,173. 살림 12) 클라우니. p65 13) 클라우니. p158,165 14) 클라우니. p120 15) 존 칼빈. 기독교 강요.(하) p272.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16) 알프레드 포이리에. 교회갈등의 성경적 해결방법. p332. CLC 17) 클라우니. p64 18) 클라우니. p73,90 19) 클라우니. p102 20) 박영돈. p276 21) 박영돈 .p279 22) 포이에리. p334 |
출처: 교회는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 해야 하는 곳 원문보기 글쓴이: 에스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