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깊어갑니다. 가고 싶은 곳들이 늘어납니다. 이미 머릿속에 들어 있는 목적지들 중 선택하는 일이 보통 고민이 아닙니다. 행복한 고민입니다. 대구수목원 국화축제, 공주 마곡사와 팔공산 단풍, 은행나무 단풍으로는 운곡서원, 문광저수지, 곡교천, 부석사, 수다사, 도리마을, 통일전, 팔공산길 등등. 사실 화담숲 단풍을 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이미 10월 중순부터 11월 12일까지 입장권이 모두 매진이라 부득불 잊어야 합니다. 전국의 단풍 명소는 워낙 복잡하기에 가급적 피하고, 상대적으로 적은 인원이 찾는 곳을 찾아 평일에 다닙니다. 그래서 그리 복작대지 않는 환경에서 완상할 수 있습니다. 위에 얘기한 곳들은 이미 수차례 다녀온 곳들이지만, 지난번에 먹었던 맛있는 요리를 한 번 먹었다고 피하지 않듯, 그 맛의 기억 때문에 더 찾게 되듯, 이러한 명소도 가면 갈수록 좋아지는 것 같습니다.
사실, 가을이 되면 굳이 이런 곳을 일부러 찾지 않더라도 집 근처만 해도 눈길 머무르는 멋진 곳들이 많습니다. 대구 본가에서 걸어가도 좋은 월광수변공원, 달비골이 그러하고, 우리 집 근처의 형곡공원, 도리사 느티나무길, 원평공원 앞 송정대로의 은행나무와 메타세쿼이아길, 낙동강체육공원, 지산샛강생태공원 등등. 예전엔 가까이 있는 것들의 소중함을 몰랐던 것 같습니다. 관심의 대상 또한 편협했던 것 같습니다. 아이들 어릴 때 여행을 많이 다녔지만, 자연을, 문화재, 명승을 즐긴다기보다는 가족과 함께 한다는 행위 자체가 주였음을 뒤늦게 깨닫습니다. 그러함에도 아이들이 장성해 다시 찾은 그곳에서 어릴 때 기억이 난다고 하면, 보람도 느껴집니다. 이제 보는 것, 듣는 것, 먹는 것, 그를 통해 느끼는 사소한 것들 포함 모든 것들이 소중하게 느껴지기에 여행의 의미가 더욱 크게 와 닿습니다. 아내는 주중 매일 강의가 있고, 큰 아이는 둘째를 출산 한지라, 당분간은 홀로 여행이 주겠지만, 둘째 손자가 어느 정도 크면 일곱 식구가 모두 함께 다니며 추억을 만들고 정서 함양에 힘을 더할 겁니다. 당분간은 동물이 있는 곳, 풀장이 있는 곳 등 아이들 중심으로 여행지를 잡아야겠지만요.... 하여튼, 이제 얼마 남지 않은 가을, 많이 돌아다녀야겠습니다.(이미 꽤 다닌 것도 같습니다만...) 이제부터 며칠간은 사전답사 갔던 대구수목원, 팔공산으로 깊은 가을을 즐기러 어머니 모시고 다닐 겁니다. 이 계절, 가을처럼, 제 나이도 이제 깊어가는 가을입니다. 아래 모셔온 글 중 마지막 부분, ‘내 나이 가을에 겸손의 언어로 채우겠습니다.’대목이 오래 남을 것 같습니다.
청남대, 대청호오백리길에서 가을을 느꼈습니다.
https://blog.naver.com/bornfreelee/223253065941
결혼 34주년 기념 나들이는 포항 스페이스워크에서의 후들거리는 긴장감으로...
https://blog.naver.com/bornfreelee/223252978616
절정이 아니라 시작이었던 31일의 팔공산 단풍
https://blog.naver.com/bornfreelee/223252938942
만시자탄이었던 문광저수지 은행나무길 나들이
https://blog.naver.com/bornfreelee/223250987872
송정동 은행나무길도 짧지만 강렬합니다.
https://blog.naver.com/bornfreelee/223256015138
국화축제 시작 직전의 대구수목원
https://blog.naver.com/bornfreelee/223254501158
내 나이 가을에 서서(모셔온 글)==========================
젊었을 적
내 향기가 너무 짙어서
남의 향기를 맡을 줄 몰랐습니다.
내 밥그릇이 가득차서
남의 밥그릇이 빈 줄을 몰랐습니다.
사랑을 받기만 하고
사랑에 갈한 마음이 있는 줄 몰랐습니다.
세월이 지나 퇴색의 계절
반짝 반짝 윤이 나고 풍성했던
나의 가진 것들이 바래고
향기도 옅어 지면서
은은히 풍겨오는
다른 이의 향기를 맡게 되었습니다.
고픈 이들의 빈 소리도 들려옵니다.
목마른 이의 갈라지고
터진 마음도 보입니다.
이제서야 보이는
이제서야 들리는
내 삶의 늦은 깨달음...!
이제는
은은한 국화꽃 향기 같은
사람이 되겠습니다.
내 밥그릇 보다
빈 밥그릇을 먼저 채우겠습니다.
받은 사랑 잘 키워서
풍성히 나눠 드리겠습니다.
내 나이 가을에
겸손의 언어로 채우겠습니다.
----- 이해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