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조선도 자사의 5.18 북한군 개입방송을 사과했으나 '사과'라는 이름으로 한 방송이 '광주에 북한군이 개입할 여지가 없었다'는 웃기지도 않은 '사과'였습니다. 그리고 임천용이라는 탈북자를 출연시켜 광주항쟁을 왜곡하고 폄하한 '정성민의 시사탱크' 진행자인 장성민도 자신의 방송에서 변명으로 일관하므로 다시 한 번 광주의 가슴에 못을 박는 천인공노할 행위를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민주당이 TV조선의 사과를 사과로 볼 수 없다고 반발한 것은 당연합니다. 채널A에 출연해서 북한군 툭수부대가 광주에 도착했다는 5월 23일, 북한군 출신으로 광주 5.18에 개입했다는 김명국은 당시 방송에서 5월 21일 북한을 출발한 50명이 21일 밤 남한의 서해안에 도착, 밤길을 걸어 23일 오전 광주로 잠입했다고 말했습니다. 나는 앞선 글에서 이 주장이 어떻게 신빙성이 없는지 조목조목 지적했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게재하는 광주의 5월 23일 상황을 봐도 광주 외곽에서 정체불명의 게릴라들이 광주에 잠입할 여지가 없다는 점은 확연히 나타납니다. 결국 TV조선이나 채널A 등이 북한군 출신이라는 탈북자들의 주장을 내보내기 위해서는 그들의 주장에 신빙성을 조금이라도 의심했으면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방송사고였다는 것입니다. 즉 나 같은 개인 블로거도 입수할 수 있는 검찰과 국방부 군검찰이 합동으로 조사하여 내놓은 수사보고서를 대현 언론사가 입수하지 못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이 보고서만 읽어봤어도 특정 탈북자들이 방송에서 주장하는 내용의 허구성을 즉석에서 지적하여 그들의 주장이 거짓이란 것을 입증할 수 있었다는 말입니다. 고로 나는 이 두 방송이 계획적으로 광주를 폄하하기 위해서 저지른 패악질로 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이 어설프게 사과라는 것을 했지만 그랫음에도 이들 보수언론들의 패악질을 용서하면 안 된다고 봅니다. 민주당의 다음 수순을 지켜보겠습니다. 아래는 5월 23일자 상황을 정리한 검찰보고서 전문입니다. 6편. 1980년 5월 23일 광주상황 34. 1980. 5. 23 - 외곽지역 상황 5월 23일 03시 36분경 송정리 삼양타이어 공장에 무장 시위대 30여 명이 기습을 시도하여 예비군 중대가 위협 사격을 했다. 06시경 녹동마을에 있는 7공수여단 33대대 숙영지(宿營地)에 무장 시위대가 접근하여 사격을 하였으나 특별한 충돌은 없었다. 해남에 주둔하고 있던 31사단 93연대 2대대는 5월 21일부터 5월 22일 사이에 수차에 걸쳐 무장시위대가 부대에 접근, 무기와 탄약을 요구하였으나 대대장이 거부했다. 이에 시위대가 "야간에 부대를 습격하겠다"고 돌아가자 2대대장은 부근 우슬재와 북평리에 병력을 매복시키고 시위대의 습격을 대비했다. 5월 23일 05시 30분경과 10시경 두 차례에 걸쳐 시위대와 계엄군 간에 총격전이 벌어져, 그 과정에서 박영철(남·27세), 김귀환(남·나이 불상)이 총격으로 사망했다. 10시경 광주시내 변전소 확보 지시에 의하여 광주변전소에 31사단 병력이, 계림변전소에 3공수여단 병력이 각각 투입되었다. 10시경 11공수여단 62대대 4지역대가 매복하고 있는 주남마을 부엉산 아래 광주-화순간 국도(國道)를 광주방면에서 화순방향으로 진행하던 미니버스가 정지 신호를 무시하고 질주했다. 부근을 순찰중이던 5지역대 5중대원들이 집중 사격을 하여, 버스에 타고 있던 박현숙(여·18세·신의여상 3년), 고영자(여·22세·일신방직공원), 황호걸(남·20세·방송통신고 3년), 백대환(남·19세 송원전문대 1년), 김윤수(남·27세·운전사), 김춘례(여·18세·일신방직 공원) 등 10여 명이 사망했다. 여단본부로 후송된 부상자 3명 중 홍금숙(여·17세·춘태여고 1년·)은 헬기로 후송되었으나, 성명불상 남자 중상자(重傷者) 2명은 공수부대원의 총격을 받고 사망했다. 35. 1980. 5. 23 - 광주교도소 부근서 총격전 08시 25분경 광주교도소 부근에서 3공수여단 병력의 총격을 받아 안병섭(남·22세)이 좌대퇴부 관통총상을 입고 사망했다. 10시 20분경 소방차에 탑승한 무장 시위대 수명이 광주교도소 부근에서 3공수여단 11대대와 교전 끝에 시위대 4명이 체포되고 소방차가 회수되었다. 19시경 2.5t 트럭 1대에 탑승한 무장시위대 40여명이 광주교도소 부근에서 3공수여단 13대대와 교전을 벌여 시위대 1명이 사망하고, 계엄군 1명이 부상을 입었다. 10시 50분경 해남 황산만에 무장 시위대 40여 명이 도로를 차단한 계엄군과 교전하여 시위대 1명이 사망하고 2명이 부상했다. 11시 10분경 영산포-나주간 도로에서 시위대 15명이 바리케이드를 치던 계엄군의 정지 명령에 불응하자 차량 바퀴에 사격을 가하여 그들을 체포했다. 36. 1980. 5. 23 - [계엄사 및 전교사 상황] 광주 진압작전 논의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5월 23일 08시 50분 진종채 2군사령관과 관계 참모를 참석시킨 가운데 전교사 충정계획을 중심으로 소요 진압작전 계획을 논의했다. 광주지역 시위자 중에는 가발 사용자와 복면한 자 등이 다수 포함되어 있고, 특히 서울에서 온 대학생이라고 자처하는 자 20여 명이 있는 등 북괴(北傀)의 침투를 의심케 하는 실태였다. 아래의 내용과 같은 전교사 충정계획에 대하여, 최소한의 희생으로 소기 성과를 달성하도록 용의 주도한 계획과 준비가 필요했다. 장기화될수록 선량한 시민의 대정부(對政府) 원성(怨聲)이 심화될 것이므로 작전이 조기(早期)에 착수되어야 한다.? 시민의 무기 자진 반납 기대, 시민과 폭도의 분리, 현지 지휘관의 가용시간(可用時間) 등을 고려, 작전은 5월 25일 02시 이후에 의명(依命) 개시하되, 기본계획의 승인과 작전 개시 시기 결정권을 현지 지휘관인 전교사령관에게 부여하도록 결정했다. 11시 33사단 101연대 2대대 소속 장교 25명, 사병 447명 육군본부의 광주지역 소요진압을 위한 부대투입에 명령에 따라 성남비행장에서 대기하다가, 동일 16시 계획 취소로 주둔지인 안양으로 복귀했다. 16시경 20사단 60연대는 송정리에서 상무대로 이동하고, 20사단 61연대는 7·11공수여단 임무를 인수하여 주단마을에서 광주-화순간 도로를 봉쇄했다. 20사단 62연대는 3공수여단의 교도소 방어 및 광주-화순간 도로 봉쇄 임무를 인수했다. 전교사 예하 학교 병력은 금당산, 톨게이트, 상무대, 통합병원, 극락교 일대를 점령했다. "3·7·11공수여단은 광주 비행장에 집결 보유하라"는 계엄군 배치조정 명령이 하달되었다. 37. 1980. 5. 23 - [광주시내 상황] 도청 앞에 사체(死體) 58구 전시 5월 23일 06시경부터 광주시내 일원에서 남녀 고교생들을 중심으로 시민들이 동참하여 청소를 실시했다. 07시경 시내 여러 병원에 분산, 안치되어 있던 사체를 모아 전남도청 앞에 58구가 전시되었다. 09시 35분경 전남도청에 학생수습위원회 본부가 설치되어 무기 회수 활동을 전개했다. 10시경 시민수습위원 15명 중 5명이 사퇴하고, 전남대생·조선대생 각 10명을 추가하여 30명으로 5.18사태 수습대책위원회를 확대 개편했다. 수습대책위원장에 윤공희 대주교가 추대되었다. 한편 김성용·홍남순·이기홍·조철현·조아라·이애신·위인백·이영생·조봉환·장기언·김천배 등은 남동 천주교회에 모여 도청 내 수습대책위원회의 무력함을 지적하고, '구속학생의 석방', '공수단의 책임자 처단', '계엄군의 사과'등 8개 항을 결의한 후, 전원 도청으로 들어가 시민수습대책위원회에 참석했다. 그러나 '무기를 회수하여 계엄당국에 반납하자'는 수습대책위의 입장과 이견을 보여 수습대책위에 합류하지 못했다. 내무국장실 옆방에서 회의를 가진 수습대책위에서도 무기 반납 문제로 의견이 대립되었다. 13시경 회수된 총기 3000여 정 중 200정을 수습대책위원 장휴동과 학생수습위원장 김창길이 계엄분소를 방문하여 반납하고 연행자 34명의 신병을 인수했다. 계엄분소 지휘관들과 협상을 벌였으나 수습위측의 요구사항 중 '예비검속자 및 연행자 전원석방 문제'에 대해 결론을 짓지 못하고 익일(翌日) 다시 의논하기로 했다. 15시경 전남도청 앞 광장에서는 5만여명의 시민이 모여 제1차 민주수호 범시민궐기대회를 개최했다. 16시경 정시채 부지사의 요청으로 학생수습위는 국장급 이상 전남도청 간부들의 출입을 허용하여 구용상 광주시장 주재로 전남도청·광주시청 국장 연석회의가 열려 장체(葬體)·식량지원 문제를 논의했다. 18시경 학생수습위 회의가 열려 김창길 위원장으로부터 계엄분소와의 협상 결과를 보고받고, 무기 반납 문제에 관하여 격론을 벌였으나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자료 출처> 서울지방검찰청·국방부 군검찰부 발표 5.18수사보고서 전문(1995년 7월 18일 발표) 이 수사보고서 36항에 [광주지역 시위자 중에는 가발 사용자와 복면한 자 등이 다수 포함되어 있고, 특히 서울에서 온 대학생이라고 자처하는 자 20여 명이 있는 등 북괴(北傀)의 침투를 의심케 하는 실태였다.]는 문장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문장은 '그렇다'는 확증이 아니라 당시 광주지역 계엄군 지휘부였던 전교사가 계엄사에 보고한 보고서에 들어 있는 문장입니다. 결국 진압군 측이 시위진압에 실패하면서 그 실패 이유를 '북괴 침투 의심'에도 돌린 것이죠. 현재 나오고 있는 북한군 개입설의 근거가 되는 문구이기도 합니다. 때문에 이 보고서를 근거로 검찰은 전두환 노태우 등을 불기소 처분합니다. 하지만 이들은 다시 5.18 특별법에 의해서 처벌을 받습니다. 결국 당시 김영삼 정부의 검찰은 광주를 피로 물들이고 집권한 전두환 일당의 면죄부를 위해 이 조사보고서를 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면죄부를 위한 조사보고서 어디에도 북한군의 개입 흔적을 찾을 수 없습니다. 특히 보고서 곳곳에 나타나는 계엄군들의 광주외곽 경비 실태를 보면 더 확실합니다. 이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1980년 5월 광주 1편, 5월 18일 상황 ☜
* 1980년 5월 광주 2편, 5월 19일 상황 ☜ * 1980년 5월 광주 3편, 5월 20일 상황 ☜ * 1980년 5월 광주 4편, 5월 21일 상황 ☜ * 1980년 5월 광주 5편, 5월 22일 상황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