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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군 순간의 방심, 북군에겐 ‘결정적 기회’
미국 남북전쟁(1861~1865):게티즈버그 전투(1863)
남군 리 장군, 북군 전력 과소평가 / 첫날 전투 승리하자 북군 압박 멈춰
한숨 돌린 북군, 대역전 최종 승전가 / 북군 주도권 장악 ‘남북전쟁 분수령’
남·북군 5만 명 넘는 사상자 발생해
미국의 남북전쟁은 1861~1865년 공업 위주의 북부 주(州)들과 농업 위주의 남부
주들로 분열돼 서로 싸운 ‘내전’ 성격의 전쟁이다. 객관적 전력상 매우 열세일 것으로 예상됐던 남군(南軍)이 초전에 기선을 잡았다. 그러나
중반전으로 접어들면서 북부가 링컨 대통령의 노예제 폐지 선언(1863. 1)으로 도덕적 우위를 점하고 인적 및 물적 자원 동원 능력이 향상돼
전쟁이 총력전 양상을 띠면서 전세는 북부군의 우세로 기울었다. 그러다 마침내 1865년 4월 북군(北軍)의 승리로 막이 내렸다. 북군의 전쟁
승리에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은 바로 가공할 살육전으로 전개돼 약 반세기 후에 벌어질 제1차 세계대전의 전조(前兆)로 평가되는 게티즈버그
전투(Battle of Gettysburg, 1863. 7)였다.
북군 지휘관들과 함께 한 링컨 대통령. |
■ 역사적 배경
오늘날 미국은 세계 최강국의 지위를 점하고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오늘의
미국을 가능케 했을까? 물론 광대한 영토, 엄청난 자원, 그리고 지속된 이민 물결 등을 발전의 원동력으로 꼽을 수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결정적인 것은 미국을 하나로 뭉치게 만든 역사적 사건이었다. 바로 1861년 4월 발발해 막대한 인적·물적 피해를 남기고 1865년 4월 북부의
승리로 끝난 남북전쟁(American Civil War)이다. 둘로 나뉠 뻔했던 미국은 이 전쟁을 통해 단일국가로 거듭나 세계로 비상할 수
있었다.
남북전쟁은 미국 역사에서 가히 대전환의 사건이었고, 그렇다보니 그 영향도 심대했다. 이 충돌로 무려 군인 62만 명이
죽었고 무수한 민간인 사상자들이 발생했다. 이러한 인명 피해와 더불어 건국 이래 미국 남부사회의 버팀목이었던 노예제도가 폐지됐다. 또한 식민지
시기 이래 미국 사회와 정치계에서 주도적 역할을 담당해 온 남부의 위상이 하락하고 이후 미국 역사의 주도권은 공업 지향의 북부로 넘어갔다.
덕분에 전후 미국은 빠르게 산업화를 추진할 수 있었고, 세기말에 이르면 세계 제일의 공업국으로 올라선다.
남북전쟁은 왜
일어났을까? 그 원인을 밝히는 작업은 시대에 따라 그리고 역사가 자신이 속한 계층과 상황에 따라 달리 해석돼 왔다. 전체적으로 노예제도, 정치적
갈등, 경제구조의 차이, 헌법 해석상의 차이, 그리고 감정 대립 등을 중요 요인으로 꼽을 수 있다. 전쟁 원인에 대한 다양한 해석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1850년대에 이르면 남부와 북부 간의 대립이 정상적인 대화와 타협이 불가능할 정도로 첨예화됐다는 점에 동의한다. 초창기
식민지 시기부터 형성된 지리적 지역주의가 세월이 흐르면서 배타적 지역주의로 변질됐던 것이다. 마침내 1850년대에 흑인노예제를 둘러싸고 발생한
대소 사건들로 인해 남북부 간의 갈등의 골이 더욱 깊어져서 급기야 충돌로 이어졌다.
1860년 대통령 선거에서 노예제 폐지를
표방한 링컨이 당선되자 그해 연말 남부의 7개 주가 연방에서 탈퇴해 남부연합을 수립했다. 이듬해 4월 섬터 요새에서 포성이 울리자 추가로 4개의
남부 주가 연방에서 이탈해 남부연합에 가담했다. 북부와 남부 양측은 그동안 누적돼 온 적대감과 증오심을 일거에 분출시키게 됐다. 1861년 4월
북부 23개 주와 남부 11개 주는 이후 4년여에 걸친 치열한 싸움으로 빠져들었다.
북군과 남군. |
■ 전개 과정
1860년 4월 남부연합의 군대가 고립돼 있던 북군의 섬터 요새를
포격하면서 전쟁의 불길이 붙었다. 전쟁 발발과 더불어 남부 측은 수도를 버지니아 주의 리치먼드로 옮겼다. 이에 따라 워싱턴과 리치먼드 사이를
흐르는 포토맥 강과 요크 강이 자연스럽게 양측의 국경선이자 전쟁 중반기까지 실질적인 주(主) 전장이 됐다. 북군은 주력인 포토맥군을, 남군 역시
주력인 북버지니아군을 이곳에 배치하고 전자는 매클레런 장군(전쟁 후반에는 그랜트 장군)이 그리고 후자는 리(Robert Lee) 장군이
지휘했다.
개전 초기 포토맥 강을 경계로 일진일퇴의 공방전이 거듭됐다. 1862년 여름부터 대소 교전을 이어온 양 진영은 마침내
1863년 7월 초 펜실베이니아의 게티즈버그에서 격전을 벌이게 됐다. 남북전쟁의 분수령으로 회자되는 이 전투에서 북부의 조지 미드 장군이 이끄는
포토맥군이 남부의 로버트 리 장군이 이끄는 북버지니아군의 필사적 공격을 결정적으로 패퇴시켰다. 이로써 워싱턴을 직접 공략해 남부의 독립을
승인받고 전쟁을 마무리 짓고자 했던 남부연합의 전략도 무산됐다.
게티즈버그 전투는 양군 간의 우연한 만남으로 시작돼 7월 1~3일
5㎞가량의 전선에서 파상적으로 전개됐다. 남군의 리 장군은 장기전으로는 승산이 없음을 인식하고 모험적인 작전을 시도했다. 다름 아니라 북군의
수도인 워싱턴을 직접 공격하기로 작정한 것이다. 7만6000명의 대군을 이끌고 리 장군은 북군의 방어선을 우회해 새너도어 계곡을 따라서 워싱턴
북쪽의 펜실베이니아로 진입했다.
갑자기 나타난 대규모 남군의 공격에 링컨 대통령은 약 10만 명으로 구성된 포토맥군에게 대응
명령을 내렸다. 그때까지 제대로 훈련되지 않은 북군은 인적 및 물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남군에 거의 승리를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다보니 남군
총사령관 리 장군은 북군의 전력을 과소평가하고 이렇다할 만한 공격 및 방어 전략을 수립하지도 않는 실수를 범하고 말았다. 당시 포토맥군에는 조지
미드가 신임 지휘관으로 부임해 부대의 전투력을 크게 향상시켜 놓은 상태였다. 공격의 방아쇠를 먼저 당긴 것은 북군이었다. 7월 1일 첫날의
충돌에서는 남군이 승리를 거두었으나, 2일과 3일 벌어진 결전에서는 최종적으로 북군이 승리했다.
첫날 승리의 여세를 몰아 쉼 없이
북군을 압박하지 않은 것이 리 장군의 결정적 패착이었다. 전쟁의 전환점을 이룬 결전답게 엄청난 사상자가 발생했다(약 5만 명: 북군
2만3000명, 남군 2만8000명). 당시 전장을 촬영한 사진들을 보면 게티즈버그의 들판에는 수많은 시체들이 처참하게 나뒹굴고 있다.
6·25전쟁 말기에 벌어진 백마고지전투처럼 전장의 초목들까지 산산조각난 처연(悽然)한 광경이다.
이 전투의 승리로 북군은 완벽하게
전쟁의 주도권을 장악했다. 이후 세 방향에서 남군을 거세게 몰아붙인 결과, 마침내 1865년 4월 초 남군 수도였던 리치먼드 남쪽의
피터즈버그에서 북군 총사령관 그랜트 장군은 남군 총사령관 리 장군으로부터 항복을 받아낼 수 있었다. 4년간에 걸친 전쟁이 북군의 승리로
마무리되는 순간이었다.
철도·전신 등 과학 신기술이 승패 갈랐다
산업혁명이 잉태한 기술 본격 등장 / 북군, 남군보다 철도 2배 이상 많아
병력·물자 수송 앞서고 통신도 빨라
개인 화기·대포 무장…100만 명 전사 / 초보단계 기관총·철갑선도 선보여
일렬전진 사라지고 엄폐·참호전 양상
남북전쟁을 묘사한 그림. |
남북전쟁 후기에 등장한 스펜서 소총. |
■ 무기와 무기체계
남북전쟁은 최초의 현대전이라고 할 수 있다. 당대인들은 의식하지
못했을지언정 이로부터 반세기 후에 벌어지는 제1차 세계대전의 전쟁 양상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무기와 전술 측면에서의 획기적 변화가 남북전쟁에서
발아(發芽)됐다. 비약적으로 발전한 화약무기의 위력이 여지없이 과시되면서 엄청난 인명 피해가 초래됐다. 초기에는 나폴레옹 전쟁 때처럼 선형으로
전진하는 전투 방식이 유행했으나, 중반 이후 화약무기의 위력이 발휘되면서 일렬 전진대형 및 밀집대형은 전장에서 점차 모습을 감추게
됐다.
이처럼 남북전쟁은 산업혁명이 잉태한 각종 과학기술이 본격적으로 동원돼 승패를 결정한 싸움이었다. 전쟁 중에
기관총·철갑선·잠수함 등과 같은 신무기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특히 전쟁을 통해 철도의 전장 활용 가능성이 분명하게 과시됐다. 전신망의 도움을
받은 철도의 활용으로 전장의 폭은 크게 확대됐고, 이전 전쟁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막대한 인원과 물자가 동원됐다. 전쟁 중 북군은 각종
공작기계를 활용해 약 170만 정의 소총과 7800문의 대포를 생산하는 저력을 발휘했다. 인명 피해도 엄청나서 약 62만 명이 사망하고 50여
만 명이 부상했다.
당시 양 진영은 비슷한 유형의 무기로 싸웠다. 전쟁 초반에는 모양과 구경이 다양한 전장식 활강 머스킷이 주를
이뤘다. 전쟁이 무르익으면서 강선식 소총의 보급이 늘어나고 미니에 탄환의 사용이 보편화되면서 사거리와 정확도가 향상됐다. 초보 단계이기는 하지만
기관총까지 전투에 동원됐다. 반(半)자동식 개틀링 기관총은 남북전쟁 동안에 발전을 거듭, 1분에 무려 600발을 사격할 수 있는 가공할 화기로
변했다. 그 결과 양측 보병부대는 기본적으로는 병사들을 밀집간격으로 늘어세우는 선형대형을 유지했으나, 필요시 산개대형으로 그리고 참호를 파고
엄폐물을 활용하는 방향으로 대응하는 것 외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무엇보다도 전쟁의 승패에 영향을 미친 것은 철도와 전신이었다.
19세기 중엽 유럽에서 일어난 철도 건설 붐이 대서양 너머 미국에도 빠르게 전해졌다. 워낙 넓은 영토를 갖고 있던 터라 미국에서 철도는 병력과
물자 수송에서 거의 절대적 존재가 됐다.
미국 전체적으로 1830~60년에 총 4만8000㎞에 달하는 철도가 부설됐다. 특히
남군에 비해 2배 이상의 철도를 갖고 있던 북군은 인원과 물자의 집중을 통한 전력의 우세를 꾀할 수 있었다. 게다가 1832년 모스가 발명한
전신을 활용한 덕분에 전후방의 지휘관들 간에 신속하고 원활한 정보교환이 가능하게 됐다.
남북전쟁 동안 등장한 특이한 신무기로는
증기기관으로 추진된 철갑선(ironclad ship)을 꼽을 수 있다. 1862년 3월 초 미국 버지니아의 햄프턴로즈에서는 양 진영의 철갑선이
마치 결투를 하듯이 함포 사격 대결을 벌였다. 강철판으로 뒤덮인 북군의 군함 모니터 호와 남군의 군함 메리맥 호가 주인공이었다. 이날 전함에
장착된 강력한 장갑 덕분에 양측이 발사한 포탄이 모두 튕겨져 나감으로써 대결은 무승부로 끝났다. 하지만 이는 이제 목선 전함의 시대가 끝났음을
알리는 결정적 신호탄이 됐다.
특히 북군의 모니터 호는 회전포탑(rotating gun-turret)과 스크루 프로펠러라는 놀라운
신기술을 장착하고 있었다. 회전포탑 덕분에 이제 전함은 해상에서 방향을 바꾸지 않고서도 사방으로 함포사격을 가할 수 있었다. 스웨덴 이민자
출신의 에릭슨(John Ericsson)이 발명한 스크루 추진 장치 덕분에 철갑선 건조가 가능해졌다. 증기력을 사용함으로써 이제 바람의 도움
없이도 자유롭게 항행할 수 있었다. 물론 철갑선의 두꺼운 장갑을 관통할 수 있는 함포용 신형 포탄이 모습을 드러내는 데는 그렇게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보병전술 측면에서도 남북전쟁에서 중요한 변화의 조짐이 나타났다. 최후의 구시대 전쟁이자 최초의 현대전쟁이라는
평가처럼, 남북전쟁은 18세기의 선형전술과 엄폐호에 숨어서 사격하는 현대적인 소부대전술이 동시에 구사된 과도기적 전장의 모습을 갖고 있었다.
대략적으로 전쟁 전반기에는 양측이 광(廣)정면에 선형으로 넓게 포진한 채 마주 서서 사격을 가하는 방식으로 전쟁이 진행됐다.
하지만 점차 살상력이 높은 무기들이 전장에 도입되면서 마주 서서 사격하는 것은 자살 행위나 다름없게 됐다. 이에 따라 어깨가 맞닿을 정도로
밀집돼 있던 보병 대열은 옛이야기로 변하고 개인별 간격은 점차 넓어졌다. 또한 적의 가공할 화력 앞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은 최대한 자세를
낮추거나 땅을 파고 들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제1차 대전을 특징짓는 깊고 길게 판 참호가 이제 전장의 일상적인 모습이
됐다.
개틀링 기관총. |
북군의 신무기 철갑선. |
■ 의미와 교훈
남북전쟁은 근대 역사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살육전이었다. 미국 백인 인구 6명당 1명꼴인 약 300만 명이 참전했고 이들 중 3분의 1에 해당하는 100만 명이 목숨을 잃거나 다쳤다.
살상력이 향상된 개인화기 및 대포의 도입으로 인명 피해가 급증했던 것이다. 연방이 성립된 후 50여 년의 세월을 거치면서 형성된 지역주의가
배타적 지역감정으로 격화되면서 남북부는 운명의 한판 승부를 피할 수 없었다.
전쟁 발발 전의 각종 지표상으로 볼 때, 남군은 북군의
적수가 될 수 없었다. 산업화의 노정에 있던 북부가 화력은 물론이고 병력에서도 절대적인 우세를 점하고 있었다. 남부는 전쟁 중반까지 상대적으로
강한 정신력에 의지해 북군과 대등한 싸움을 벌일 수 있었다. 하지만 1863년 7월 초 게티즈버그 전투에서 패한 이래로 자원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남군은 더 이상 정신력으로 버틸 수 없었다. 초기의 예상과는 달리 4년이라는 긴 기간 동안 이어진 남북전쟁은 1865년 4월 북부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무엇보다도 남북전쟁은 전쟁 승리를 위해서 국가의 인적 및 물적 역량을 총체적으로 투입해야만 하는 현대 총력전의
서곡(序曲)이었다. 이전까지 전투의 승패를 좌우했던 정신력과 군대의 사기는 점차 그 중요도가 낮아졌다. 무기의 성능과 화력이 크게 개선되면서
무조건적인 돌격은 대량살상으로 이어지는 지름길이 될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전쟁의 신이 남북전쟁을 통해 세계에 전한 경고의 메시지였으나,
애석하게도 유럽의 정치가 및 군 지도자들은 이러한 교훈을 간과하고 말았다. 그 결과는 반세기 이후 유럽의 파멸로 나타났음을 오늘날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
육군사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