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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블로그에 버젓이 올라와 있는거 하나 잡아 왔습니다. 검색하면 다 나옵니다.)
1893년 2월 23일 (丙子). 흐렸다가 해가 났다.
처음 두견새 우는 소리를 들었다. 새벽에 어머니의 제사를 지냈다. 여성(誠汝)이 갔다. 도숙(道叔) 왕천(王千)이 그 아들 대규(大圭)와 이경률(李景律), 김은경(金殷卿), 이서 유동환(兪東煥), 황생 동연(黃生東淵)과 함께 왔다. 황생이 서울에서 돌아오면서 13일 재동(齋洞)과 안동(安洞)에서 보낸 편지를 가져왔다. 이생 보성(李生輔性)이 왔다.
서울의 기별을 보니 양로연(養老宴)은 영조(英祖) 계사(癸巳) 때의 예(例)에 따라 세자궁(世子宮)에서 날짜를 나누어 시행하고, 또 내연(內宴)과 외연(外宴)을 길일에 베풀기로 하여, 외연(外宴)은 4월 20일이고, 내연(內宴)은 같은 달 22일로 잡았다. 청주(淸州)의 통어영(統禦營)을 남양부(南陽府)로 옮기고 해군통어영(海軍統禦營)이라고 부르고, 민응식(閔應植)을 해군도통어사(海軍都統禦使)에 제수하였다. 또 해연총제사(海沿總制使), 호위청대장(扈衛廳大將) 및 부장(副將) 등을 이전에 장신(將臣)을 지낸 인물로 제수하였다.
재상의 임명은 심합(沈閤), 沈舜澤)을 영상(領相)으로, 조합(趙閤, 趙秉世)을 좌상(左相)으로 삼았다. 학교에서 강학하는 일로 새로운 규약을 만들고 성균관(成均館)과 한가지로 반장(泮長), 성균관 책임자인 大司成이 돌아가면서 시험을 보이기로 하였다. 동학당(東學黨)이 그의 스승 최제우(崔濟愚)의 원통한 일을 설욕하려고 궁궐의 문에 엎드리자, 지평(持平) 조강환(曺康煥), 부호군(副護軍) 이남규(李南珪)가 상소를 하여 이단을 척결할 것을 청하였다.
8일 문무과(文武科)를 베풀고 조신(朝臣)으로 나이가 80인 사람들에게는 자급(資級)을 더해주고 나이가 20인 사람에게는 표리 한 벌 감을 내탕금으로 내리고, 사서인(士庶人)으로 나이가 80인 사람에게는 옷감을 내리고, 나이 20인 사람에게는 각각 한필씩 주고, 내탕금 30만 냥을 공계(貢契)와 시전(市廛)에 나누어 주고, 감옥의 문을 열어 죽을 죄를 지은[死罪] 자들도 모두 석방하였다.
3월 10일 수릉(綏陵), 숭릉(崇陵), 경릉(景陵)에서 친히 제사를 드리고, 4월 10일 전에 헌릉(獻陵), 인릉전(仁陵展)에 배알하고, 초시(初試)를 생략하고 정시(庭試)를 베풀어 5월 17일 과거급제자 명단을 발표한다고 하였다. 이생 사원(李生思元)이 와서 묵고, 왕천우(王千友)가 와서 묵었다. 윤부걸(尹富傑)이 왔다.
1893년 3월 초 7일 (己丑). 바람이 차고 매우 가물었다.
가야산(伽倻山)에 산불이 크게 나서 6~7일 동안 꺼지지 않았다. 세경(世卿), 은중산(殷中山), 김치명(金致明), 박원택(朴元澤)이 왔다. 죽죽동(竹竹洞) 윤복손(尹福孫)이 왔다. 성여(誠汝), 시중(時中)이 갔다. 덕실(德室)이 자신의 아버지를 뵈러 황곡(篁谷)에 갔다. 원택이 유숙하였다.
1893년 3월 17일 (癸己). 맑고 크게 바람이 불었다.
밥을 먹고 석운(石雲) 및 여러 손님들과 함께 원당(元堂)의 수석(水石)을 찾아갔다.
동남쪽으로 2리(里) 쯤에 있는데 마을 어귀에 있는 원당곡(元堂谷)에는 반석과 기이한 돌들과 맑은 물살이 부딪치고 여울이 일고 누운 폭포와 드리워진 폭포가 있어 쌍룡폭포(雙龍瀑布)라고 하였다. 그 아래 맑은 못이 있어 씻고 목욕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때 바람이 몹시 세차게 불어 동쪽 바위 아래로 바람을 피했다가 돌 위에 자리를 깔고 두율운(杜律韻)을 대고 함께 근체시(近體詩)를 지었다.
근처에 최영습(崔永習)의 집이 있어 술과 삶은 닭을 사와 먹었다. 석정(石汀)은 돌위에 앉아 높이 노래를 부르고 이 마을 이생 양현(李生養賢)이 화답을 하였다. 비록 사죽(絲竹)의 음악은 없었지만 유쾌하고 즐거웠다. 석운(石雲)이 유람할 때 필요한 도구를 옮겨와 술자리가 매우 풍성하였다. 화전[花糕]을 구워 술안주로 삼아 위아래 사람이 실컷 먹고 해가 저물어 서로 이끌고 돌아왔다. 지나다 문생(文生)의 학당(學堂)에 들러 어린 학생들이 글을 외우는 것과 지은 시를 보니 과연 들은 것과 같아 기뻤다.
지나다가 쇠를 불리는 용광로에 풀무질하는 것을 구경하였는데 가마솥・쟁기를 한창 만들고 있었다. 비록 기이한 기계는 없었지만 볼만하였다. 석운의 집에 돌아오니 덕산(德山) 윤동돈계(尹同敦桂)도 약속을 듣고 와서 모여 밤에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세경(世卿)이 먼저 돌아갔다.
1893년 3월 26일 (戊申). 맑았다.
박원택(朴元澤)이 왔다. 윤성빈(尹聖賓)이 와서 묵었다. 읍리(邑吏) 유규항(兪圭恒)이 감영의 기별을 보내왔는데 금백(錦伯, 충청감사)이 체직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누가 그 대신인지는 아직 자세하지 않다. 동학당(東學黨)들이 보은(報恩) 속리산 속[속리산 서쪽 장내땅]에 모여 있었는데, 순상(巡相, 충청감사)이 아전을 보내 정탐하니 모인 사람들은 27,000여 명으로 성채를 쌓고 깃발을 꽂고 군사훈련을 하면서 장차 왜양(倭洋)을 공격한다고 표방하였다.
영리(營吏, 감영의 아전)가 그 무리의 우두머리를 만나 사정을 묻고 또 당(黨)을 해체하고 돌아가 농사지을 것을 권하자, 대답하기를
“수십만 사람들을 어떻게 관의 명령으로 돌아가게 할 수 있단 말인가? 우리들은 비록 조그마한 무기도 없지만 막강한 왜양(倭洋)을 무찌르려고 한다. 각기 믿는 바가 있으니 누가 막을 수 있단 말인가?”
라고 하였다. 관문(關文)에 ‘이런 부류’란 글자[那類]가 있는 것을 두고,
“체면을 잃은 듯하다. 모두 같은 양반으로 하필이면 이와 같은가?”
라고 하였다. 관문에 물러가지 않으면 체포한다는 말에 저들은
“천하에 어떻게 수십만을 가두는 감옥이 있단 말인가?”
라고 하였다.
사방 봉우리 위에 두 방향으로 깃발을 세우고 돌 성채 안에는 진을 베풀어 놓은 듯하였다. 장내(帳內)의 주변 인가(人家)는 백 여 호(戶) 정도가 되는데, 집집마다 모여 앉아서 글을 읽다가 매일 사시(巳時)가 되면 돌 성채에서 훈련을 하고, 신시(申時)에는 끝내고 집으로 돌아갔다.
경포교(京捕校, 포도청의 포교) 7명이 가서 돌담 옆에 앉아서 망을 보는데 저들이 불러서 가보니, 왜양(倭洋)을 물리치는 모임[斥倭洋聚會]이라고 타이르고 노자 10냥을 주며 보내주었다. 그 우두머리는 문경(聞慶)의 이름을 모르는 최반(崔班, 時亨), 그 다음은 충주(忠州) 서병학(徐丙學, 學은 鶴의 오식), 청주(淸州) 송산(松山) 손병희(孫丙喜, 秉熙), 충주(忠州) 이국빈(李國彬), 운량도감(運糧都監) 이름을 모르는 충주(忠州) 전도사(全都事)라고 한다. 조정에서 대감 어일재(魚一齋, 允中)를 삼남도어사(三南都御史)로 삼아 청주와 보은 등지로 보내 기미를 살펴 처리하게 하였다고 한다.
1893년 3월 28일 (庚戌). 맑았다.
금백(錦伯, 충청감사) 조병식(趙秉式)이 체직되어 편지를 보내 작별을 고하였다.
‘동학당(東學黨)을 금지시키지 못하여 함사(緘辭)로 추고하라는 처분을 받고 아울러 체직되어, 조병호(趙秉鎬)가 새로운 백(伯)으로 임명되어 30일 교대한다’고 하니, 신속하게 올 것임을 알 수 있겠다. 삼남도어사(三南都御使) 어윤중(魚允中)은 이미 청주(淸州)로 길을 나서 보은(報恩)으로 향한다고 한다. 또 평기(坪基)의 큰 생질의 편지를 보니 풍동(豊洞)・평기(坪基)・장전(長田)의 여러 곳은 모두 편안하다고 한다.
다행스럽다. 동학의 시끄러움이 날로 심하여져 보은(報恩) 주둔지로 보은・상주(尙州) 등의 읍재(邑宰)들을 부르고, 읍재가 가지 않으면 이방吏(房)과 호방(戶房)을 잡아와 군량(軍糧)・군기(軍器)를 책임지고 내게 하였다. 또 토호와 부민(富民)들도 곤욕을 당한 사람들이 많았다. 또 금구(金溝) 원평(院坪)에 무리 수만이 모여 곧바로 인천(仁川) 제물포(濟物浦)로 달려갈 것을 표방한다고 오시(午時)에 박원택(朴元澤)이 와서 말하였다.
감영의 우편소(郵便)에서 감영의 기별을 가지고 왔다. 동학당(東學黨)들이 줄곧 창궐하여 순영(巡營)에서 관문을 발송해 여러 읍병(邑兵)을 징발하였다. 좌도(左道) 27개 읍과 하내포(下內浦) 7개 고을에서 모두 군사를 징발한다고 한다. 한참 농사지을 때 소란스러워 민간에서는 농사를 망치는 지경에 이를듯하니 걱정이다. 또 들으니 동학당들이 서울로 향해 서로 잇달아 점막에 도착하였지만 좁아서 몸을 들일 곳이 없어 모두 밖에서 노숙한다고 하였다.
현순좌(玄舜佐), 한초정(韓蕉亭), 서혜춘(徐惠春)이 왔다. 유진사(兪進士)가 왔는데, 혜거(兮居)의 아들로 상을 당한 사람이다.
1893년 4월 초 2일 (甲寅). 맑았다.
최성여(崔誠汝), 이군선(李君先)이 왔다. 아산(牙山) 재종제(再從弟) 도경(道卿)이 이생 명하(李生鳴夏)와 함께 와서 묵었다. 매전(梅田) 이훈재(李勛宰)가 돌아오는 편에 25일 보낸 집 아이의 여섯 번째 편지를 받았는데, 재동(齋洞, 金晩植) 형님께서 형조판서에서 체직되었다고 한다. 가평(加平) 이랑(李郎) 내외의 편지도 보았다. 이실(李室)이 얼마 전 낙태를 하였다니 매우 놀랍고 애석하다. 그간 양로연(養老宴)은 이미 지났다. 술과 음식, 음악으로 노인들을 즐겁게 하고, 또 내외연(內外宴)을 베풀어 임금님과 동궁께서 어제시(御製詩)를 지어 솜씨 좋은 사람에게 노래하도록 하고 관현(管絃)을 불게 하니 성대한 일이라 할 것이다.
일본 공사(公使) 오오이시 마사키(大石正基)가 북도(北道) 콩[黃豆]의 일로 임금을 뵙고 직접 말씀 드리겠다고 오만방자하게 굴어 온 조정에서 분하게 여겼는데, 일본(日本) 민당(民黨)들은 오오이시(大石)가 우리나라에서 배척을 당하였다고 하면서 또한 분하게 여겼다고 한다.
일이 장차 어떻게 될지 모르니 걱정스럽다. 동학당(東學黨)의 소란으로 서울도 흉흉하여 시장가게에서는 거래가 아울러 끊기고 부녀자들이 고향으로 많이 내려갔다고 한다.
1893년 4월 초 3일 (乙卯). 맑았다.
새댁이 조경익원탕(調經益元陽)을 다 복용하였다. 나는 흑노두(黑櫓豆)를 복용하기 시작했다. 도경(道卿) 이생(李生)이 갔다. 유규항(兪圭恒)이 감영의 기별을 기록하여 보냈다. 25일 보은군수(報恩郡守)가 장내(場內, 場은 帳의 오식)에 있는 동학당회소(東學黨會所)로 가서 정황을 물어보니, 모인 사람들이 7만 여 명이나 되고 그 무리 수백 명이 접장(接長) 4~5인을 끼고서 돌담 옆에서 문답하기를,
“조정에는 충언(忠言)을 하는 사람이 없고 밖에는 정직한 사람이 없으니 우리들이 왜양(倭洋)을 물리치기 위해 모인 것이고, 나라를 보전하고 백성을 편안하게[保國安民, 保는 輔의 오식] 할 계획이다”
라고 하니 그 말이 매우 장황하고 사람을 현혹하게 하였다.
또 말하기를,
“경재(卿宰)로서 모인 자가 수 백 명이 되고 수령(守令)은 천 명 가까이 된다. 인심이 절로 이와 같은데 해산할 수 있겠는가?”
라고 하였다. 깃발에 표지를 달았는데, 깃발 면에 모두 군현(郡縣)의 이름을 쓰고 군현의 글자 아래에는 모두 의(義)자와 경(慶)자로 표시를 하였다. 또 부유한 백성들에게 발통하여 양미(糧米)를 빌려갔다고 한다. 어제 매전(梅田)으로 돌아가는 인편에 집아이에게 네 번째 편지를 부쳤다.
1893년 4월 초 5일 (丁巳). 맑았다.
세경(世卿), 은경(殷卿), 이성도(李聖道), 인문식(印文植)이 왔다. 장전(長田) 별제(別提) 생질이 와서 묵었다. 풍동(豐洞)에서 보낸 편지와 평기(坪基)의 편지를 받았다. 풍동의 누님이 얼마 전 손녀 금희(金姬)를 잃었으니 참혹하다.
들으니, 보은(報恩)의 동학당(東學黨)들이 지난 달 26일 양남도어사(兩南都御史, 어윤중)가 직접 가서 회유하니 모두 사죄하면서, 곧은 마음으로 나라에 보답하고 결단코 다른 뜻이 없음을 상달하기를 청하며 왕의 비답을 받은 뒤에 곧바로 마땅히 해산할 것이라고 했다 한다. 병사(兵使) 홍재희(洪在羲)가 군대 300명을 이끌고 내려와 곧장 보은으로 향했다고 한다.
황간 탐문기(黃澗探問記)를 보니, 괴수(魁首) 최시형은 나이가 60남짓으로 상주(尙州)에 살고 서병학(徐丙學, (學)은 (鶴)의 오식)은 청안(淸安)에 살며, 창의소(倡義所)를 설치하였는데, 괴수의 깃발 부호는 ‘왜양(倭洋)을 물리치고 정의를 부르짓는다[斥倭洋倡義]’이고, 또 가운데가 황색인 작은 깃발을 항상 몸 가까이에 두었다.
청주(淸州) 사는 이국빈(李國彬)은 장군의 지략이 있는데 깃발의 부호를 붉은 색깔로 하여 높이 매달아 온 진영을 통솔하는 주장(主掌)으로 삼았다. 나머지 깃발은 모두 읍의 이름으로 하였다. 전라도(全羅道)는 모두 금구 원평에 모였으며, 괴수(魁首)는 보은(報恩)에 사는 황하일(黃河一), 무장접주(茂長接主) 손해중(孫海中)으로 만 여 명을 거느리고 21일 <보은으로> 올 뜻이 있다는 사통을 보냈다고 한다.
1893년 4월 초 7일 (己未). 맑았다.
별제(別提) 생질이 갔다. 원평(元坪) 김석운(金石雲)이 서울소식을 보냈다. 들으니 그의 둘째 아들과 손자 금린(金麟)이 서울에서 돌아오면서 집 아이에게 편지를 받아온 것으로, 바로 이달 2일 집에서 보낸 여덟 번째 편지이다.
임금께서 동학당(東學黨)들이 점점 소란스러워 특별히 윤음(綸音)을 내리고, 도어사(都御史)를 바꾸어 선무사(宣撫使)로 삼고 그로 하여금 직접 가서 윤음을 읽어주도록 하였다. 홍재희(洪在羲)가 군대 3백 명을 이끌고 보은(報恩)으로 향하였다. 이로써 도성의 소란과 유언비어가 크게 일어나 부녀자들 가운데 난을 피하는 자들이 성문을 가득 메우며 나갔다. 전보가 잇달았다. 지난달 보름날에 들은 바로는 보은에 모인 당(黨)들은 끝내 해산하지 않았다.
관서(關西) 함종(咸從)에서도 민란이 일어났는데, 기백(箕伯, 평안감사)이 부상(負商)의 우두머리 세 명을 죽이자, 현선달(玄先達)이라는 자가 천 여 명의 무리를 모아 난을 일으키려고 하였다. 대개 보은의 일을 듣고 때를 틈타 난리를 일으키려는 것이다. 북도(北道)의 회령(會寧)・종성(鍾城)에 민란이 일어나 아직도 그치지 않았다고 한다. 콩[黃豆] 관련으로 일본에 배상하는 문제로 일본의 민권당(民權黨)의 의론이 끓어올라, 천진(天津) 북양(北洋)으로 전보를 보내 조선이 규정을 어긴 실수를 북양이 중간에서 조정하기를 청하고, 또 원관(袁館)에 전보를 하였다.
우리 조정에서는 외무독판(外務督判, 判은 辦의 오식)과 주일공사(일본공사, 日本公使) 김가진(金嘉鎭)을 이조참의 김사철(金思轍)로 대신하고, 외무독판(督辦) 조병직(趙秉稷)을 대감 남병철(南秉哲)로 체직하고 다시 협상하여 타결하도록 했는데, 상황으로 보아 배상금은 9만원 내외가 될 것이라고 한다. 조운포(趙雲圃)가 왔다. 채생 규명(蔡生奎明), 규상(奎商), 규흥(奎興)이 왔다. 황석정(黃石汀)이 왔다. 김오겸(金五謙)이 왔다.
1893년 4월 16일 (戊辰). 맑았다.
오늘은 도미를 천신(薦新, 새 음식을 조상에 바침)하고 새벽에 죽은 아내 이씨(李氏)의 제사를 지냈다. 일관(日觀)이 가고 박인주(朴仁周)가 왔다. 석교(石橋) 김감역(金監役)이 내일 서울로 떠난다고 하기에 집 아이에게 다섯 번째 편지를 부쳤다. 읍리(邑吏) 유규항(兪奎恒)이 왔다가 감영의 소식을 전하였다.
1일, 선무사(宣撫使, 魚允中)가 전보로 보내온 윤음(綸音)을 받들고 공주영장(公州營將), 보은군수(報恩郡守) 이중익(李重翼)과 더불어 장내(場內, 場은 帳의 오식)의 동학당회소(東學黨會所)를 왕복하면서 성지(聖旨, 임금의 효유)를 읽어 밝게 회유하자 동학당들은 모두 감격하여 우는 자들도 있었다. 그 중에 서병학(徐丙鶴)이라는 자는 스스로 이 당에 잘못 들어왔다고 후회막급이라고 하면서 취회내역서(聚會來歷書) 한 통을 올렸는데, 대개 전 금백(錦伯, 충청감사) 조병식(趙秉式)의 탐학이 변을 불러일으킨 것으로 허물을 돌렸다. 또 말하기를
“호남(湖南)에 모인 당(黨, 금구원평취회)들은 우리들과는 다르니 절대로 뒤섞어 보지 말고 옥석을 가려 달라”
고 하였다. 드디어 3일, 모든 사람들이 해산하였다. 선무사는 곧바로 금구 원평의 회소(會所)로 갔다고 한다. 기지(機池) 사예(司藝) 김헌영(李憲永)이 와서 묵었다.
김후몽 시랑 학진에게 답하는 편지[答金後夢 侍郞鶴鎭書]
후몽 인형 집사(後夢仁兄執事)께.
형의 편지를 오랫동안 받지 못했습니다. 도은(陶潛), 중국 당나라 문인 도연명의 정운시(停雲詩)에 이르기를 ‘어찌 다른 사람이 없겠는가마는 그대를 그리는 마음 참으로 깊네. 원하는 말 얻지 못하였으니 포한(抱恨)이 어떠할까?’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매번 이 부분을 읽을 때마다 몇 번이고 탄식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이를 가지고 생각해보건대 제가 평소에 교분을 맺고 있는 사람들이 많기는 하지만 궁지에 몰린 사람에게 문안해 주기를 사람들마다 바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유독 우리 형에게만은 유감이 있었는데, 얼마 전 보내신 편지에 조리 있는 수십 줄의 절실하고 도타운 정성으로 몇 년의 막혔던 회포가 하루아침에 눈 녹듯 녹아 마치 영포(英布)가 집으로 나아간 것 같았으며, 저도 모르게 또 바람보다 과분함에 크게 기뻤습니다. 복 많이 받으시고 공훈과 꾀가 크게 드러났음을 알았으니 기대하던 끝에 어찌 기쁨과 위로되는 마음을 이길 길 있겠습니까?
저는 남소(南昭)에서 도깨비들에게 막힌 지 7년이나 되었다가 지금 고향으로 돌아가 죽으라는 명을 받았는데, 예로부터 영해(嶺海, 산골이나 섬)로 귀양 간 자들은 평생을 돌아갈 수 없었으니 저 같이 임금의 은혜를 만난 것이 어찌 다행히 아니겠습니까? 다만 약한 몸으로 여러 차례 풍상을 겪고 또 내포(內浦, 충청도 내포지방 곧 면천일대)의 생활에 익숙지 않은 채 수년을 지내다보니 머리가 빠지고 형상은 초췌하여 사람의 꼴이 아닌데, 만나는 사람들은 본래 그렇다고 여깁니다. 지금 자세하게 자주 꾸짖어 주시는 말씀을 받았으니 정에 과분한 꾸짖음은 아닌지요?
대저 현인(賢人) 군자(君子)들은 빈궁하고 영달한 상황에 처하여서는 모든 것들을 천명에 맡겨 두고 스스로에게 진실로 태연하였기 때문에 즐거움을 잃지 않고 몸과 정신이 절로 왕성할 수 있었습니다. 저 역시 명을 어찌 할 수 없다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도의(道義)를 즐기고 성경(誠敬)을 귀히 여기는 것에는 끝내 한 점도 실제로 터득하여 의지한 것이 없었던 까닭에 <마음을> 외물에 빼앗기어 한결같이 젖어드는 대로로 내맡겨두었으니 어찌 날마다 쇠모(衰耗)하지 않겠습니까?
저는 오랫동안 밖에 있어 조정의 일은 듣지 못해 지어 놓은 사적인 글은 야인의 한가한 말에 불과하여 남에게 보인 적이 없으며 어디를 통해 보여드릴 수 있을지 알지 못합니다. 진실로 부끄럽고 죄송하지만, 편지에서 말씀하신 임금을 이끄는 한 가지 일은 진실로 만물을 교화하는 근본이라고 하셨으나 전(傳)에 말하지 않았습니까?
“몸에 간직한 것을 미쳐 풀어내지 아니하고 남을 깨우치는 자 있지 않다[所藏乎身不恕, 而能喩諸人者, 未之有也]”
라고 말입니다.
저는 몸과 마음의 공부가 아직은 갈피를 잡지 못해 사치스럽게 임금을 바로 잡는 것(格君)을 말해도 누가 믿으려 하겠습니까? 일이나 단서에 따라서 선을 펴고 악을 막는 것과 같은 일은 <임금의 곁에서> 보도(輔導)하고 간하는 자들의 임무이지 야인(野人)이 할 바는 아닙니다.
가만히 생각하건대 임금을 이끄는 도리는 빈말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마땅히 어진 사보(師保)를 선발하여 덕의(德義)로 전하고 경전(經典)으로 가르쳐 큰 인물을 먼저 세우게 한 다음 좌우의 사람을 신중히 가려 선한 단서의 발로로 인하여 개도(開導)하고 그릇된 마음의 싹을 살펴 없앤다면, 성덕(聖德)이 날로 이루어져 절로 광명(光明)한 곳으로 오르게 될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보고 느끼는 것에서 얻는 것이 으뜸이오, 일로 인하여 경계하고 반성하는 것이 그 다음이 될 것입니다.
지금 무사(無事)한 때 말을 확고히 하는 동안에 옛 말씀을 줄줄이 꿰며 군덕(君德)을 면려하고 성학(聖學)을 면려하라고 지리하게 늘어놓습니다. 무릇 올리는 말이 이런 것을 말머리로 삼아 근본으로 거슬러 올라가지 않음이 없어 찬란하여 볼 만합니다만, 당세(當世)의 임금이 보고 한낱 문구(文具)로 여기고 살피지 않는다면 군덕(君德)에 무슨 보탬이 있겠습니까?
대저 일의 요체는 말이 반드시 간명하여야 하니 요・순・우(堯舜禹, 중국 고대 성군)가 서로 주고받을 때 그 요체는 정일(精一) 몇 구절에 지나지 않습니다. 부열(傅說, 중국 고대 은의 어진 재상)이 은 고종(高宗)에게 아뢴 것도 전학(典學) 몇 구절에 불과하였을 뿐입니다. 그 나머지는 모두 정치를 하는 방법을 논한 것입니다. 맹자(孟子)가 제 양공(齊梁公)에게 유세할 때 그치지 않고 거듭해서 말한 것은 바로 왕정(王政)을 닦고 백성의 산업을 제정하는 일이었습니다.
지금은 이와 반대이니 정일(精一)하고 지극한 요체가 되는 일을 다반사의 말로 마침내 그럴싸하게 꾸밉니다. 그러나 정치를 닦고 백성을 보호하는 일에 이르러서는 말을 많이 하여도 병통으로 여기지 않을 것인데 사공(事功)이라 여기고 생략해버립니다. 인주(人主)로 하여금 살펴보게 해놓고는 별안간 착수할 곳이 없게 만드니, 그 번다하고 간략함의 마땅함을 잃은 것은 아닌지요? 보내오신 말씀에 맹자(孟子)가 세 번이나 제왕(齊王)을 만났지만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맹자가 임금을 바로잡는 도리를 깊이 터득하였기 때문입니다.
대저 세 번 만났음에도 말하지 않았던 것은 비단 그 어긋난 마음을 고치게 할 뿐만이 아니라 말할만한 단서를 얻어 신중하게 말을 하려고 한 것입니다. 선왕(宣王, 齊宣王)이 환문(桓文, 齊桓公과 晉文公)의 일을 묻고 또 소를 바꾼 한 가지 일로 그 말의 단서를 통해 반복하여 경계하고 꾀어 왕도정치의 가운데로 들어가게 하였습니다. 진실로 왕도정치를 실행한다면 군덕(君德)에 있어서는 어떠합니까? 이때 제왕(齊王)의 막혔던 것은 거의 열렸습니다.
한번 말씀 드려보자면, 만약 훗날 군자(君子)가 제왕(齊王)을 만나 반드시 말의 단서를 기다리지 않고 먼저 임금을 바로잡는 말을 시작하여 천인(天人)이 만나는 즈음과 성명(性命)의 근원을 종횡으로 장황하게 늘어놓으며 자기가 배운 바를 다 말하고야 그친다면,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제왕(齊王)은 이미 하품을 할 것입니다. 그러한데 어느 겨를에 정치를 닦고 백성을 보호하는 일에 미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중용(中庸)에서 말한,
“도(道)가 밝지 못하고 행해지지 않는다”
는 것은 어질고 지혜로움이 남보다 뛰어난 폐단에서 나오는 것이라 생각이 되니 우리 형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의 거친 소견은 본래 이와 같아 지난 날 형과 의논할 때 의견이 조금 일치하지 않은 것은 바로 이러한 데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대체는 같지 않은 것이 없으니 형께서 저를 보시기를 마치 주자(朱子)가 진동보(陳同甫)를 대하듯이 하니 저 역시 대해주시는 것이 과분하여 감히 견주지 못합니다.
저는 이미 늙고 쓸모 없는 사람으로 죽기 전에 자리를 함께 하여 한번이라도 말씀을 나누지 못할까 걱정이 됩니다. 답장을 하면서 말이 많아져 결국 여기에까지 이르렀습니다. 편지를 띄우는 날, <형께서> 구레나룻을 흔들며 한번 웃으시면서 ‘이사람 광노(狂奴), 김윤식의 별호는 여전하구나’라고 말씀하실 것을 상상해 봅니다. 나머지 많은 것들은 다 쓰지 못하니 모두 살펴주십시오.
1893년 4월 18일 (庚午). 맑았다.
이군선(李君先)이 왔다. 평택(平澤) 홍랑(洪郞, 思弼)이 집의 종을 보내 집 아이의 편지를 전해 주었는데 지난달 28일에 쓴 일곱 번째 편지이다. 이는 은보(殷輔, 洪思弼)가 집으로 돌아올 때 가지고 온 것인데 은보가 그간 독감을 앓아 지금 전해준 것이다. 들으니 지난 달 그믐 사이에 동학(東學)의 소란이 있어 묘당(廟堂, 의정부)에서 군대를 보내는 것이 편리한지 아닌지를 의논하여 마침내 홍계훈(洪啓薰)을 파견하여 군대를 거느려 보내 도하(都下)가 흉흉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곧바로 동학당(東學黨)들이 물러나고 흩어졌다는 전보를 받고 민심이 가라앉았다고 한다. 교리 송정혁(宋廷奕), 은진(恩津) 김량한(金亮漢)이 암행어사(暗行御史)로 내려온다고 한다.
성취묵(成醉黙)이 와서 묵었다. 참석했던 양로연(養老宴)의 태평(太平)・풍예(豐豫)의 거조에 관하여 성대하게 말하였다. 두 번 세 번 술을 마시는 일은 소란스러운 때라 시행하지 않으며, 외도(外道)의 각 읍에서도 양로연(養老宴)을 베푸는데 25일에 있다고 한다.
1893년 4월 22일 (甲戌). 흐리기도 하고 해가 나기도 하였다.
새벽에 조모의 제사를 지냈다. 매전(梅田) 이경률(李景律)이 서울에서 돌아오면서 15일에 집 아이가 보낸 아홉 번째 편지를 전하였다. 들으니 5일에 선무사(宣撫使, 魚允中)가 진산군(珍山郡)에 도착하여 금구(金溝)의 회소(會所)에서 올라온 동학당(東學黨) 4백 여 명에게 객사(客舍) 문밖에서 깨닫도록 타이르니, 그들이 말하기를
“모인 당(黨)은 도주(道主) 최시영(崔時榮, 崔時亨)의 지시로 왜양(倭洋)을 물리치기 위함이다. 또 수령의 침탈로 고달프다”
라고 하였다.
도어사(都御史)가 거듭거듭 타일러 임금의 말을 선포하니 모두
“예예”
하면서 명령에 복종하고 즉시 돌아가 흩어졌고 금구에 모인 많은 사람들도 차례로 해산하였다고 한다. 다행한 일이나 이 당(黨)이 모이고 흩어지는 것이 일정하지 않아 걱정을 놓을 수 없기 때문에 선무사(宣撫使)가 아직은 돌아가 복명(復命)하지 않았다고 한다.
경리영 정령관(經理營正領官) 홍재희(洪在羲)가 군대 수 백 명과 소포(小砲) 세대[尊]를 이끌고 보은회소(報恩會所)에 이르러 포를 쏘면서 무력을 과시하니 당(黨)은 무서워 떨며 달아나면서 살아 돌아가기를 애원하였다. 선무사(宣撫使)가 어떤 사람에게 보낸 편지에서 대략 말한 바로는, 이번에 뽑아온 서울의 병사 일초(一哨, 100명)는 보은읍(報恩邑)에 주둔시키고, 일초(一哨)는 회인읍(懷仁邑)에 숨겨 놓았으며, 옥천 군수(沃川郡守)에게 병사 천여 명을 모집하라고 하였고, 또 본군(本郡)의 오위장 한경오(韓慶五)에게 3~4민정(民丁)을 뽑고 읍내에 포수와 한량들을 모아놓고, 만약 명령을 어긴다면 나아가 토벌할 것이라고 큰 소리로 말하고 이에 윤음(綸音)을 선포하였기 때문에 그 당(黨)은 머리를 숙이고 절로 달아났다고 한다. 승지 이건창(李建昌)이 상소하여 말하기를,
“민당(民黨)이라 일컫는 것들은 바로 난리의 근본이니 적을 적자(赤子)로 보아서는 안되고 마땅히 섬멸해야 할 것입니다”
고 하였다. 또 어 대감(魚台, 魚允中)이 밝게 타이른 것을 논박하면서 보내온 말이 타당함을 잃었고 상소의 말이 매우 많아서 상소문의 원본은 보관해두었다고 한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초기를 올려 당괴(黨魁) 서병학(徐丙學, 學은 鶴의 오기)과 전가(全哥), 운량도감 직책을 붙잡아 국문하여 사실을 알아내기를 청하자 임금께서 윤허하였다.
일본이 누른 콩을 배상할 것을 요구하는 일에 대해서는 처음 외서(外署)에서 4만원으로 말을 하자 이 또한 따르려고 하지 않아 6만원으로 더 보탰지만 이도 따르려고 하지 않고 저들은 상인을 철수시켜 귀국하였고 파병한 군선(兵船)으로 위협하여 부득이 11만원으로 정하였다. 북도(北道)의 손해를 물어주는 조항은 9만원이고 해서(海西)의 손해를 물어주는 조항은 2만원이다. 5일 시임(時任)・원임대신(原任大臣)이 회의차 입시(入侍)한 것은 동학당(東學黨)들이 물러간 뒤에 이후 잘 처리할 방법과 일본에 배상을 지급하는 일 때문이었다. 그러나 끝내 논의가 정해지지 못하고
“북쪽 건은 마땅히 조병식(趙秉式)을 징계하고 내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었고 서쪽 건은 당시 해백(海伯)이었던 오준영(吳俊泳)을 마땅히 징계해야 한다”
고 했다 한다.
양로연(養老宴)이 있은 뒤, 오는 11일 처음으로 잔치를 열었고, 13일 두 번째 잔치를 열었다. 모두 기생의 춤과 노래, 놀이 기구가 있었다. 8일 사용한 화구(火具)는 구입한 본 가격은 은 3천 냥이고 당일 화비(火費)로 들어간 돈은 80만 냥으로, 연일 쓰는 비용은 그 속에 포함되지 않았다. 화구 가운데에는 희자등(戱子燈), 가화등(假花燈), 불탑등(佛塔燈) 등의 이름으로 불리는 것들이 있었고 각종 상으로 준 것이 지난해에 비하여 곱절에서 다섯 곱절이나 되어 어쩔 수 없이 외국에서 돈을 빌려 마련하였다. 이건창(李建昌)의 상소에도 이를 언급하여 간하였다. 예산(禮山) 선달 강영로(姜永老), 온양(溫陽) 김생 헌식(金生憲植)이 와서 묵었다. 장운(壯雲)이 귀가했다.
1893년 5월 초 6일 (丁亥). 아침에 비가오더니 저녁에 개었다. 아침에 일어나니 아직 비가 내렸다. 주인과 손님이 걱정하며 앉아 있었는데 오후에 날이 개었다.
마침내 석운(石雲), 초하(蕉下), 도은(陶隱), 이생(李生) 태현(泰賢), 문생(文生) 추(錘), 월해(月海) 스님, 김일관(金日觀), 시동(詩童) 장성록(張成祿), 이우린(李又麟), 최생(崔生) 시철(時澈)과 함께 가야동(伽倻洞)으로 동행했다. 원당곡(元堂谷)을 경유하여 다시 쌍룡폭포(雙龍瀑布)를 보았다. 비 온 뒤라 물소리가 매우 커 전에 비해 더 좋았다. 이로부터 가야동에 도착하니 산길이 구불구불하고 곳곳마다 물소리가 귀를 시끄럽게 했다.
남연군(南延君)의 묘소에 도착하였는데, 이곳이 바로 가야사(伽倻寺)의 유적지이다. 산세가 웅장하고 사방을 에워싼 듯 멀리서 바라보니 맑고 깨끗했다. 옛부터 이 산은 왕기(王氣)가 있다고 일컬었는데 과연 이곳으로 묘소를 이장한 뒤 10여 년 뒤에 성인(聖人)이 탄생하고 이어서 용흥(龍興), 임금의 경사가 있었으니, 지관(地官)들이 풍수(風水)를 떠드는 것을 괴이하게 여길 것이 없다. 산을 가꾸고 소나무를 기르고 각(閣)을 짓고 비(碑)세우는 등의 일들이 능소(陵所)보다 덜하지 않았다. 보덕사(報德寺)는 동북쪽 기슭에 있었는데 역시 갑자년 이후로 나라에서 세운 것이다. 밤에 절에서 묵었다. 주지 각률(覺律)은 법호가 한송(漢松)으로 해월(月海)의 스승으로 일전에 경산(京山)으로 갔다. 승려는 30여 명이고, 불당(佛堂)과 승려들이 거처하는 집 외에 새로 지은 어필각(御筆閣), 칠성각(七星閣)이 있고, 또 여승 2명이 그 곁에 살고 있었다. 저녁에 황석정(黃石汀)이 쫓아왔는데 약속했던 사람이다. 윤성빈(尹聖賓)이 갔다. 현재 집이 교동(橋洞)에 있으니 이곳과는 10리(里) 쯤 되는 가까운 거리이다.
1893년 5월 16일 (丁酉). 가는 비가 뿌렸다. 종일 남풍이 불었다.
보리밭을 갈고 콩을 심고 사이사이 들깨를 심었다. 은경(殷卿)집 종이 서울에서 비로소 집으로 돌아와 집 아이가 9일 날 보낸 11번째 편지와 지난달 27일 날 보낸 10번째 편지를 받았다. 집 아이가 노자를 마련하지 못해 아직도 지체되어 머물고 있다고 한다. 지난달 17일 수릉(綏陵), 익종의 능에 왕께서 친히 제사를 지냈다.
28일 명릉(明陵), 숙종의 계비인 인현왕후와 인원왕후의 능에 왕께서 친히 제사를 지냈는데 민씨(閔氏)에게 모두 참여하도록 명하였다. 응제과(應製科)를 베풀어 100명을 뽑았고 또 문묘(文廟), 북관묘(北關廟)를 차례로 배알한다는 명이 있었고 또 삼선평(三仙坪)에서 왕께서 직접 군대를 사열한다는 명령이 있었다. 들으니 동학당의 괴수가 아직 잡히지 않았다고 하였다. 상주(尙州) 우복동(牛腹洞), 호남(湖南) 두류산(頭流山) 등의 곳에 자주 주둔하여 모인다고 하는데 조용하고 아무 소식도 들리지 않는다.
보은(報恩)에서 해산하여 돌아갈 때 선무사(宣撫使)에게 소장을 올려 당시 정사의 득실을 말하며 장차 안으로는 다스리고 밖으로는 물리치려고 한다[內修外攘]고 하였다. 선무사(宣撫使)가 지금 공주(公州) 쌍수(雙樹)에 있으면서 전 금백(前錦伯)의 장범(贓犯)을 조사하고 있는데, 동학당(東學黨)이 글을 걸어 말하길,
“장리(贓吏)를 죽이고 뇌물을 추심하여 민간에 되돌려 주지 않으면 장차 다시 모일 것이다”
라고 하였다 한다.
서양의 영국 ・독일・러시아・미국 다섯 나라가 각기 전권대신(全權大臣)을 파견하여 은밀히 일을 의논하였다고 하는데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동양(東洋)은 자못 그 때문에 걱정이 되고 의심이 된다고 하였다.
나는 오늘도 여곽탕을 복용하고 새댁은 대보탕 한 제를 다 복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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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宋洞에다가 北關廟를 건립 하였다. 송동은 북촌과 동촌 사이에 있는 곳으로, 北漢山 기슭에서 가장 깊고 조용한 곳이다. 그리고 이곳은 우암 송시열이 살았으므로 지금도 宋子洞이라고 한다. -매천야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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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3년 8월 초 7일 (丙辰). 맑았다.
천곡(泉谷)에서 새벽에 출발하여 김량(金良)까지 10리를 다다르니 해가 산꼭대기에 떠올랐다. 두계(杜溪)까지 10리, 돌자개(乭者介)까지 10리를 다다랐다. 여기서 독고개(獨古介)를 넘어 광주(廣州) 늑현(勒峴)까지 20리를 다다라 묘지기 신삼천(申三千)의 집에서 자고 중부(仲父)・중모(仲母)님의 산소를 돌보았다. 산소를 돌보지 않은지 벌써 10년 쯤 되었다. 우러러 소나무 삼나무에 기대니 슬픈 감정을 이길 길 없었다. 점심을 먹고 분원(分院), 자기 만드는 광주분원까지 30리에 이르러 상서(尙書), 판서 박온재(朴溫齋)를 방문하고 소식이 막혔던 끝이라 손을 잡고 회포를 풀었다.
찬술한 환재(瓛齋, 朴珪壽)선생의 가장(家)狀을 보여주셨는데, 해가 저물어 다 읽어볼 수가 없어 빌려가지고 왔다. 초경(初更)에 귀천(歸川) 천운루(天雲樓)에 이르니 온 집안이 조용하였다. 유장(裕章)이 오늘 아침 과거를 보기 위해 상경을 하고 구수(龜壽)는 계동촌(溪東村)으로 갔다. 지탄(芝灘)도 윗마을로 가서 안팎으로 물어볼 사람이 없었고 어떤 한 소년이 홀로 방에 깊이 잠이 들어 있었는데 그에게 물어보니 바로 유형(裕衡)이었다. 오늘 마침 춘천(春川)에서 왔다고 한다.
드디어 마을 사람들을 불러 각 집에 두루 알리자 마을 사람들이 차례대로 와서 만나니 자못 낯이 익은 사람이 많았고 연로한 사람들은 벌써 죽고 없었다. 예전의 어린아이들이 모두 의젓하게 성장을 하여 알아 볼 수가 없었다. 이윽고 구수(龜壽) 모자가 왔는데 구수도 꽤나 장대하여 기뻤다. 주경(周卿)과 유경삼(柳景三), 한성인(韓聖人), 한경복(韓景福)이 와서 만났다. 산정 노인(山亭老人)을 방문하니 노쇠하기 짝이 없었다.
조(趙)・홍(洪) 두 누이와 조씨(趙氏) 누이의 아들딸 넷이 앞에 나열하여 서니 모습이 모두 단정하고 묘하여 노인이 이로써 소일하였다. 넷째 종형수에게 절을 하였다. 유장(裕章)의 아내가 병으로 서울로 올라가 치료를 하는데 증상이 매우 가볍지 않다고 하니 걱정이다. 각 집마다 모두 묵은 근심이 있어 보고 있자니 매우 걱정스럽고 답답하였다. 좌랑(佐郞)・진사(進士)는 모두 서울에 있어 주관하는 사람이 없어 더욱 느낌이 쓸쓸하였다. 지난날의 광경을 회상하니 나도 모르게 한탄이 나왔다. 밤에 천운루(天雲樓)로 돌아와 묵었다. 두 나그네가 길을 잃어 우천시장(牛川場市)에서 묵었다.
1893년 8월 14일 (癸亥). 흐렸다. 오후부터 남풍이 불며 가는 비가 저녁때까지 뿌렸다. 추분절(秋分節)이다.
오늘 떠나려는데 김은경(金殷卿)은 관추위(觀秋圍)에 머물고 있고 인세경(印世卿)은 내가 외로울까봐 동행하였다. 어린 시중꾼 장운(壯雲)은 부르튼 발이 종기가 되어 은경이 탈 것을 주었다. 이에 사시(巳時)가 되어 출발을 하였다. 형제・숙질들과 이별하는 섭섭함은 말로 할 수가 없었다. 동작진(銅雀津)을 건널 때 시중꾼과 하인들은 작별하고 갔다.
과천(果川)을 지나니 가는 비가 뿌리고 바람이 불어 옷을 적셨다. 지지대(遲遲臺)에서 내려오는데 미끄러워 발을 댈 수가 없었다. 해가 저물어 하늘이 깜깜하고 위에서는 비가 내리고 아래는 땅이 질어 일행들이 여러 번 넘어졌다. 초경(初更)에 수원(水原) 북문 밖 객점에 도착하였는데 내일이 추석이다. 객점의 주인이 한창 떡을 굽고 제구(祭具)를 베풀었다. 근래 경향(京鄕)의 곡식 값이 까닭 없이 치솟고 있는 상황에서 햇곡식은 아직 수확하기 전이라 도처에서 허둥댔다. 중도의 밥값도 배나 뛰었다. 농사의 상황은 경기가 호남보다 낫다고 한다.
지난달 23일 밤에 비가 왔는데 팔도에서 같이 바람이 불었다고 한다. 양서(兩西, 황해도 평안도), 북도(北道), 영남(嶺南), 호남(湖南), 강원도(江原道)에 모두 바람의 피해가 있어 장차 흉년을 면하지 못할 것 같다. 오직 기호(畿湖) 지방은 조금 낫지만 밭곡식은 흉년을 면하지 못할 듯하고 채소와 과일도 흉년인 듯하다. 믿는 것은 오직 논곡식 뿐인데 비가 자주 와서 열매 맺은 것이 왕왕 싹이 터서 앞으로 수확할 때 손상을 많이 입을 것 같아 매우 걱정이 된다.
1893년 9월 초 6일 (乙酉). 맑았다.
김삼룡(金三龍)이 서산(瑞山) 사는 조학봉(曺學鳳)과 함께 왔다. 학봉이 시종하겠다 하여 왕천우(王千又)와 함께 연봉(蓮峯)을 넘어 백거(伯渠)를 방문하고 돌아왔다. 은경(殷卿)이 와서 재동 형님의 편지와 집 아이의 편지를 받았다. 김만제(金萬濟), 이재영(李載榮), 송정섭(宋廷燮) 등이 상소하여 안효제(安孝濟), 권봉희(權鳳熙), 장병익(張炳翼), 이건창(李建昌) 등 여러 신하를 탄핵하고, 또 선무사(宣撫使) 어성집(魚聖執, 允中)을 탄핵하였다고 한다. 어 대감은 정부초기(政府草記, 의정부의 간단한 보고)에 인명을 남살(濫殺)하였다고 하여 연일(延日)로 정배(定配)되었다. 이봉조(李鳳藻)는 보성(保城, 保는 寶)으로 찬배(竄配)되었다. 장병익(張炳翊)과 박시순(朴始淳, 승지로서 안효제安孝濟의 상소를 받들어 들이려고 했던 사람이다)은 모두 원찬(遠竄)되었다. 권봉희(權鳳熙), 안효제(安孝濟)는 모두 도배(島配)되었다. 삼사 연계(三司聯啓)와 대신 연차(大臣聯箚)로 인하여 권(權), 안(安) 두 사람은 모두 위리가극(圍籬加棘)의 형벌을 받았다.
대계(臺啓)는 아직도 성토중이라 한다. 이소(二所) 시관(試官) 조희일(趙熙一), 이태용(李泰容), 민상현(閔象鉉)은 제멋대로 사심을 품고 행사하였다고 하여 모두 도배(島配)되었다. 교리(校理) 여규형(呂奎亨)도 과장(科場)에서 협잡하였다고 도배(島配)되었다. 이소(二所)를 파방(罷榜)하고 즉시 구일제(九日製)와 관학응제(館學應製, 성균관에서 보이는과거)를 실시하여 두 차례에 걸쳐 감시 초시(監試初試) 170 여 인을 뽑았다. 또 9월초에 응제(應製)를 실시하여 추가로 초시(初試) 수십 인을 뽑아 파방(罷榜)의 수를 채운다고 한다.
8월 27일에 수릉(綏陵)으로 행행(幸行)하였다. 올해는 곧 선조(宣祖)가 회란(回鑾)한지 5회갑(回甲)이다. 영조(英廟) 이날에 경운궁(慶運宮)으로 행행(幸行)하여 진찬례(進饌禮)를 행하였는데, 지금도 이를 따라 행한다. 다음 달에 칭경(稱慶, 경사)을 포고하고, 각 전궁(殿宮)에 진찬(進饌)하고, 문무별시(文武別試)를 실시한다고 한다. 서울의 쌀 가격이 날마다 등귀하여, 온갖 물건들이 이 틈을 타서 따라올라, 조정의 의론은 양주(釀酒)를 금하려 하였다. 연로(沿路)의 적환(賊患)이 또 일어났다. 은경(殷卿)의 집에 내일 서울로 올라가는 인편이 있다고 하여 재동에 올리는 편지와 안동에 보내는 두 번째 편지를 부쳤다.
1893년 9월 13일 (壬辰). 맑고 달빛이 아름다웠다.
아침밥을 먹은 후에 석운(石雲)・도은(陶隱, 李敏夔)과 석운의 종씨(從氏), 사촌형 덕유(德有)・석운의 아들 중평(仲平)・석운의 손자 금린(金麟)과 함께 원평(元坪) 오른편 앞산인 대승산(大乘山)에 올랐다. 대승산은 그 지방 사람들이 병란을 피할 만한 땅이라 칭하는 곳이었다. 산의 돌이 우뚝 솟아 있어 등나무 덩굴과 댕댕이 덩굴을 부여잡고 올랐다. 3리쯤 가자 대승촌(大乘村)에 도착하였다. 깎아지른 산봉우리 아래 몇 집이 서로 의지하고 있었다. 모두 허성(許姓)의 양반들이었다. 채소와 과일을 심은 남새밭이 있어 자못 시골 정취가 있었다. 주인이 청주(淸酒)를 내오고, 뜰 안의 감을 따서 내놓았다. 대승(大乘)은 불가의 말로 생각건대 고찰유허(古刹遺墟)란 의미이다. 산 위에 옛 성터가 있는데, 민간에 전해 내려오는 말에 상왕(象王, 부처)이 도읍한 곳으로, 그래서 상왕산(象王山)이라 부른다고 한다. 상왕도 불가의 말이다. 산성은 생각건대 삼국시대에 쌓은 듯하였다. 멀리 바라보니, 바다와 포구가 띠처럼 둘러 있고 시야가 확 트였다. 산밭의 무[蘿葍]는 크기가 컸으며 들국화는 아직 피지 않았다. 이곳의 황화(黃花)는 아직 피지 않았다. 해가 서산으로 기울어 원평(元坪)에 도착하여 묵었다. 밤에 달빛이 더욱 아름다웠다.
1894년 3월 초 7일 (甲申). 흐렸고 비가 종일토록 왔다.
하사(下舍) 벽의 뼈대를 엮었다.
이생 방헌에게 답하는 편지[答李生邦憲書]
지난번에 여막에 갔다가 슬퍼하는 모습을 뵙고 돌아와서까지도 여전히 울적하였습니다. 덕을 사모함이 더욱 절실해질 때쯤 곧바로 당신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복제(服制)를 잘 견디신다니 매우 안심이 됩니다. 대개 보내신 편지의 정연한 수백 마디 말은 여러 번 읽어도 싫증나지 않습니다. 조금 나이가 많음을 미루어 문과(問寡)하는 지극한 뜻을 드리우셨는데, 저 같이 재주가 소략한 사람이 어떻게 당신의 바람을 채울 수 있겠습니까? 비록 그러하지만 의리는 강(講)을 하지 않으면 익힐 수 없으며, 붕우가 탁마(琢磨)하는 것은 옛날의 방법입니다. 만약 성대한 깨우침을 통해 좁은 저의 식견을 드러내지 않는다면, 끝내 바름으로 나아갈 날이 없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구하지만 스스로 그만둘 수 없습니다.
무릇 의리란 때를 따르고 사람을 따르는 것으로서, 곧 『중용(中庸)』의 시중(時中)을 말하는 것입니다. 보내주신 깨우침이 모든 걸 다 말씀하셨지만, 한 마디 말을 덧붙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군자는 궁(窮)하면 자기 몸을 홀로 선하게 하고[獨善], 현달하면 천하(天下)를 아울러 선하게[兼善] 합니다. 궁(窮)에는 궁의중[窮之中]이 있고, 달(達)에는 달의 중[達之中]이 있습니다. 그러니 홀로 선함[獨善]은 군자가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지만, 부득이한 것입니다. 그 가슴 속에 아울러 선하는 실질[兼善之實]을 구비하지 않음이 없으나 이것을 구비하고서도 명을 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군자는 자신에게 있는 것을 힘써 다할 뿐입니다. 선비는 비록 초라한 집에 살지만 천하의 일이 자신의 분수 안의 일이 아님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농사일을 하거나 판축(版築) 일을 하는 가운데서 나와 하루아침에 재상・보상의 자리에 올라 성대하게 막힘이 없는 것은 왜입니까? 평소에 축적한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고명(高明)께서 사람이 감당할 수 없는 근심에 처하고도 오히려 자신을 신칙하고 성실히 행하기를 근면하게 하며 게을리 하지 않아 족적이 안마당을 나오지 않지만 고금을 현양하고 시의(時宜)에 통달한 것은 얻은 바가 있는 것이 아니면 이와 같을 리 있겠습니까? 무릇 부자(夫子), 공자께서는 칼날을 밟거나 작록을 사양하는 것이 중용(中庸)보다 쉽다고 여겼으니, 중용의 어려움을 알 수 있습니다. 또 말하길, “중용을 택한다”고 하였으니, 중용이 일정한 물체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옛날, 송나라가 남하한 초기에 사람의 마음은 한(漢)나라를 생각하였고[思漢] 장수는 능력 있고 병사는 용감하여 이때에 이르러 한번 크게 일어나 옛것을 회복할 수 있을 만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주자(朱子)는 일생의 대의를 회복(恢復)에 두었습니다. 여러 세대를 거치는 동안 안락에 빠져 강타(江沱)의 인재들이 쇠락하여 스스로를 지키기에도 부족한데, 가사도(賈似道)는 도리어 척화(斥和)의 의리를 도둑질하여 망국을 재촉하였습니다. 우리나라는 임진왜란 때에 군신(君臣)이 모두 도망하여 두 능(陵)에 욕이 미쳤습니다. 이는 백세토록 반드시 갚아야 할 원수라 할 것이나, 일이 안정된 후 사계선생(沙溪先生, 金長生)은 화친과 우호를 닦자고 권하였습니다. 의리가 한가지만을 고집할 수 없음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우리 동방 선유(先儒)의 나아가고 머뭄[出處]에는 각기 당연한 바가 있었습니다. 수옹(遂翁)에 이르러 비로소 나아가지 않는 것을 의리로 여겼으며, 이것도 한 때의 일인데 이로부터 유자(儒者)의 철칙이 되어 200년 동안 따르고 고치지 않았습니다. 천하에 어찌 인판(印板) 같은 의리가 있단 말입니까? 이것은 다름 아니라 묘당(廟堂)에서는 성심으로 현자를 찾으려는 뜻이 없고, 유자에게는 포부를 갖고 널리 구제하려는 실질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허문(虛文)으로 서로 얽어매고 그대로 답습하며 감히 스스로 다르게 하지 못합니다.
저는 선현의 나아감이 중용인지 후현의 나아가지 않음이 중용인지를 알지 못합니다. 다만 지금은 습속이 이미 오래되어 대역량(大力量)・대견식(大見識)이 있지 않다면 가벼이 나아가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비록 나아가지 않는다 하더라도 반드시 나아가 쓰일 수 있는 실질[出用之實]을 갖춘 이후에 부끄러움이 없을 듯합니다. 모르건대, 고명께서는 어떻습니까? 저는 어려서 고아가 되어 배움의 기회를 잃었기 때문에 세상에 처하면 실수가 많고 집안에 있으면 단속이 없습니다. 때로 한번 생각해 보면 회한이 무궁합니다. 만약 궁행군자가 있다면 두려워하고 아끼며 그의 아랫사람이 되는 것을 사양하지 않을 것인데, 어찌 유자의 출처를 망령되게 논할 수 있겠습니까? 보내주신 편지에 그 단초를 열어주셨기에 참람하게도 이를 언급하였습니다. 진실로 중용을 선택하는 도[擇中之道]에 대해서는, 다만 본령을 가진 자만이 말할 수 있습니다. 본령이 없다면 어찌 중용을 선택할 수 있겠습니까? 고명께서는 살펴보시고 헤아리시리라고 생각합니다.
1894년 3월 19일 (丙申). 맑았다.
만지(晩芝) 동민 5인이 와서 담장을 쌓았다. 김삼봉(金三峯)이 나귀를 끌고 돌아 왔는데, 16일에 쓴 집 아이의 첫 번째 편지를 받았다. 또 간동(諫洞)에서 내린 편지와 평택(平澤), 가평(加平) 두 딸의 편지를 받았다. 재동(齋洞)의 우환은 여전히 차도가 없고 가평(加平) 이실(李室)은 병을 앓은 후에 시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용모가 상했다고 하니 애처롭다. 옥균(玉均, 김옥균)이 피살된 일을 자세히 물었더니 과연 홍종우(洪鍾宇)가 힘을 내어 공을 세운 것이었다. 상하이(上海)로 유인하여 총을 쏘아 죽였다. 또 이일직(李逸稙)・권동수(權東壽)란 자가 밀지를 받고 일본에 가서 영효(泳孝, 박영효)를 죽이려다가 발각되어 경찰에게 체포되었는데, 그런 가운데 권동수가 우리나라 공관으로 달아났다. 일본 정부에서 경찰을 공관으로 들여보내 잡아가자 서리공사(署理公事) 유기환(兪箕煥)이 우리나라를 욕보이는 것으로 여겨 즉시 우리나라로 돌아왔다. 영효는 일본 부자의 사위가 되어 선린의숙(善鄰義塾)을 세워 널리 학생을 불러 모으고 있다고 하였다. 호서좌도(湖西左道)에 동학과 서학이 크게 번성하여 무리를 모아 세력을 믿고 폐단을 많이 저질렀다. 저명한 사대부가 중에 욕을 보지 않은 집이 없었다. 이 지방은 평소에 동학(東學) 명색이 없었는데, 요즈음 들어 점점 전파되고 있다고 하니,매우 놀랍고 통탄스럽다.
새댁과 덕실(德室)은 각각 삼귀음(蔘歸飮)을 복용하였다.
1894년 4월 초 4일 (庚戌). 흐리고 새벽에 보슬비가 지나갔다.
오늘도 벽 바르기를 하였다. 목수 김여수(金汝壽) 등 5인이 와서 문짝 일을 하였다. 도은(陶隱)이 와서 묵었다. 원평(元坪) 석운(石雲)이 심부름꾼 아이 복준(福俊)을 보내 난초(爛鈔)를 빌려 갔다. 또 모레 서울로 가는 인편이 있다고 하여 집 아이에게 보내는 세 번째 편지를 써서 부쳤다. 듣기를, 호남(湖南)의 무장(茂長)・고창(高敞) 등지에 동학(東學) 수천 명이 깃발을 세우고 대포를 울리며 인가를 때려 부수고 있다고 한다. 이들 지역은 모두 저 무리가 평일에 불만을 가졌던 곳이다. 양호(兩湖)에서 발생하는 동학의 기세는 우려할 만하다.
1894년 4월 초 9일 (乙卯). 새벽에 안개가 끼었다가 맑았다.
집의 종 등이 가마를 가지고 왔다. 황곡(篁谷) 박진일(朴鎭一)이 서울에서 돌아와 초 2일에 쓴 집 아이의 네 번째 편지를 받았다. 경향(京鄕)이 두루 별고가 없고 집 매매와 돈의 변통이 모두 동요(東擾)로 인해 가로막혀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하여 걱정이 되었다.
호남(湖南) 동도(東徒)가 혹은 수천 명 혹은 만 명씩 무리를 지었고 소재하는 곳에서 소요를 일으켜서 사소한 원한을 보복하다가 점차 관부에 난입하게 되었다고 한다. 군대의 무기를 가져다가 기를 세우고 포를 울리며,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니 누가 어쩌지를 못하고 있으며,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으로 기호(旗號)를 삼았다.
안핵사(按覈使) 이용태(李容泰)가 병력을 모아 물러나는 무리를 섬멸하는 과정에서 양민이 많이 죽었다. 이것이 오히려 민심을 격동시켜 무리가 더욱 불어났다. 의정부에서는 임금께 아뢰어 홍재희(洪在羲, 改名 啓勳)를 서호 초토사(西湖招討使)로 임명하였다. 그는 경영(京營) 창포대(槍砲隊)와 잡색군(雜色軍) 1,500명을 이끌고 초 5일에 인천(仁川)을 출발하여 교선(轎船, 轎는 輪)을 타고 곧장 호남(湖南)의 군산(群山)으로 향하여 토벌을 기약하였다. 호서(湖西)의 경우 동도(東徒)가 사대부를 능욕하고 가옥을 때려 부수어 어떤 사람은 배상(賠償)를 지급하고 모면하기까지 하였다.
좌도(左道)의 여러 대가(大家) 중에 평소 무단을 행한 사람들이 다투어 그 속에 몸을 맡겨 화를 면하려 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의 무리가 날로 번성하여 깃발에 도사송(道師宋) 세 글자를 써서 횡행하기를 꺼리지 아니하였다. 심지어 부녀자를 빼앗아 가기까지 하였다. 순사(巡使), 감사가 각 읍에 병력을 동원하여 성을 지키도록 명하였다. 또 부보상(負褓商)을 징발하여 전선(電線)을 지키고 적정(賊情)을 정찰하게 하였다. 또 각 읍에 향약(鄕約)을 시행하고 무리를 모아 방어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모든 것들이 산산히 흩어져 통일성이 없고 빈말뿐으로 실효가 없다.
면천읍(沔川邑)도 14일에 일제히 모여 향약장(鄕約長)과 각동의 상존위(上尊位)를 세운다고 하는데, 모두 피할 생각만 하여 마치 일이 어린아이의 장난 같다. 어제는 동도(東徒) 100여 명이 원평(元坪)의 민가에 와서 묵고 오늘은 개심사(開心寺)로 향한다고 하였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동도(東徒)가 개심사로 가는 행렬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물어보았더니, 보현동(普賢洞) 이진사(李進士)가 평소 동학을 매우 엄하게 배척하여 동도(東徒)가 이것에 대해 원한을 품고 개심사(開心寺)에서 회의를 하고 그 집을 때려 부수려 한다고 하였다. 내포(內浦)는 동학(東學)이 가장 적었는데, 지금은 넘쳐나서 날로 맹렬하고 달로 왕성해지고 있다. 이것도 시운이니 매우 한심스럽다.
나는 오후부터 한기가 있었는데, 집으로 돌아오자 한기가 점점 더 심해져 종일 고통에 시달렸다. 학질 기운[瘧氣]이 다시 발생한 것으로, 이번이 두 번째[二直]이다.
1894년 5월 초 2일 (戊寅). 맑았다.
양찬환(梁贊煥), 현순소(玄舜韶), 인원유(印元有)가 왔다. 김언백(金彦伯)이 갔다. 아침 일찍 과부탕(果附湯) 1첩을 복용하였다.
원평(元坪) 종 노미(老味)가 내일 서울로 간다고 하여 집 아이에게 보내는 여덟째 편지를 부쳤다. 죽동(竹洞)에서 집 아이가 지난달 18일에 쓴 열 번째 편지를 부쳐 왔는데, 당진(唐津) 호생(扈生)이 서울 갔다가 돌아오는 편에 가져온 것이었다.
지난 25일에 간동(諫洞) 새집으로 이사하였는데 집은 모두 15칸 기와집으로 무릎을 펼 만 하다고 하였다. 재동(齋洞) 형님이 내행(內行)을 데리고 귀천(歸川)으로 행차하셨으며, 경향(京鄕)의 자질(子姪)들도 초 1일의 생신을 모시고 지내기 위해 모두 모였다고 한다. 집 아이도 갔는데, 오는 초 4, 5일에 경성으로 돌아온다고 하였다. 그리고 날마다 안쪽 혀끝이 문드러지고 이명(耳鳴)도 심해지는데, 이것도 돌림병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상초(上焦)에 풍화(風火) 병을 당해 바야흐로 청상전(淸上煎)을 복용한다고 하였다. 호남의 동요(東擾)가 갈수록 더욱 심해져 경군(京軍)도 패하였다.
27일 새벽, 교체된 완백이 전보를 했는데, 저들 무리의 선두가 감영에서 30일 거리인 두정(豆亭)에 막 이르렀는데 경군(京軍)의 소식은 일절 들리지 않아 어떻게 할 수 없다고 한다. 같은 날 다시 전보를 하였는데, 초토사는 지금 이곳에 없고 저들 무리의 선두가 이미 원평(院坪)에 도착하였으며 수하에 병사 하나가 없어 성을 지킬 방법이 없다고 하였다. 같은 날 전주 판관의 전보가 있었는데, 경군이 대패하여 저들 무리 중 일부는 정읍(井邑)에 주둔하고, 일부는 태인(泰仁)에 주둔하고, 일부는 영저(營底, 감영아래)를 향하여 오는데 그 기세를 막을 수 없으니 집안 권솔들은 지금 떠나보내고 자신은 죽음으로써 처신하겠다고 하였다. 같은 날 오후에 적이 완영을 함락하였지만 감영 본관(本官)은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한다. 전보가 불통되었기 때문이다.
적의 기세가 이와 같아 매우 걱정이다. 어찌 할 것인가. 여론을 들어보니 중국에 군대를 요청하려는 뜻이 있다고 한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소요를 더 심화시킬 것이니 우려를 금할 수 없다.
적도 가운데 정도령(鄭道令), 서총각(徐總角), 최사문(崔斯文)이란 자가 수괴가 되어 모두들 그 지휘를 받았다. <그들이> 각 부에 명령을 내렸는데, 다음과 같다.
“적을 대적할 때 언제나 군사는 칼날에 피를 묻히지 않고 이기는 것을 최고로 삼는다. 비록 부득이하게 싸우더라도 절대로 생명에 상처를 입히지 않는 것을 귀하게 여긴다. 행진하여 지나는 곳에서 사람과 물건에 해를 입히지 말라. 효제충신(孝弟忠信)하는 사람이 사는 촌의 10리 안에는 주둔하지 말라”
고 하였다. 또 12조의 경계령을 두었는데
“항복한 자는 대우를 받는다.
곤궁한 자는 구제한다.
탐오하는 자는 내쫓는다.
따르는 자는 경복한다.
달아나는 자는 추격하지 아니한다.
굶주린 자는 음식을 준다.
간교한 자는 그치게 한다.
가난한 자는 진휼한다.
불충한 자는 제거한다.
거스르는 자는 효유(曉喩)한다.
병자에게는 약을 제공한다.
앞의 12조는 우리들 학행(學行)의 근본으로 만약 영을 어기는 자는 지옥(地獄)에 가둔다”
라는 것이다. <그들이> 도리어 초토사(招討使)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네가 여기에 온 것은 왜인가? 임금의 총애를 믿고 오로지 군대의 위세에 의지하여 군사를 풀어 평민을 살해 약탈하니, 이것이 어찌 병사를 거느리는 방법인가? 우리의 이간질에 떨어져 무고한 김시풍(金始豐)을 살해하였으니, 네가 어찌 장수의 지략이 있는 자인가? 너는 지금 두 가지 길이 있다. 달아나면 살고 달아나지 않으면 죽는다. 두 가지 길을 살펴 처신하라”
고 하였다. 대개 완영(完營, 전주감영)의 교졸(校卒)들이 동당 체포를 빙자하여 촌락을 약탈하여 닭과 개까지도 남아나지 않고 심지어 부녀자를 욕보이기까지 하여 흐느껴 우는 소리가 길에 가득하였다. 그러므로 저들의 말이 이와 같았다. 반대로 비도(匪徒)가 지나는 지역은 털끝만큼도 범하지 않아 부민(富民)들이 기쁘게 군자금을 실어 나르고 있다.
관군이 고부(古阜) 도교산(道橋山)에서 패배한 후 적도들은 관군이 쉽다는 사실을 알고 더욱 거리낌이 없었다. 초토사(招討使)는 중과부적이었고 또 조지(朝旨)에 ‘거취를 신중히 하라’는 내용이 있어, 매우 늦게 출사(出師)하여 영광(靈光) 등지로 향하였다. 적도가 그 빈틈을 틈타 완영(完營)을 함락하였다. <군사> 한 명도 잃은 자가 없이 적이 완영을 점거하였고 도리어 초토사는 그 뒤에 있었다. 조정으로의 소식이 단절되어 전선(電線)이 다시 연결되기 전에는 도무지 승패 존망을 알 수 없으니 걱정이고 걱정이다.
오늘 아침 금백(錦伯), 충청감사 에서 교체된 조병호(趙秉鎬)가 편지를 보내 대략
“교체되어 영남으로 옮겨간다. 시국이 이와 같은데도 재주가 직위에 걸맞지 못하니 우려와 탄식을 이기지 못하겠다”
라고 말했다. 27일에 역적을 토멸한 것을 포고하고 진하(陳賀)하였는데, 옥균(玉均)을 죽여 없앤 일에 대한 것이었다. 홍종우(洪鍾宇)는 삼일제(三日製)에서 대과(大科)에 올랐는데, 대개 역적을 토포하는 공업을 이루었으니 장차 크게 쓰일 듯하다. 18일에 태묘에 전알하고 윤음(綸音) 1,000여 자를 내렸다. 그 대강은 다음과 같았다.
“탐학한 관리는 내가 백성이 상하여 이를 돌보듯 하는 뜻을 몸소 실천하지 않아 반란의 경보를 울리게 하였다. 도백(道伯) 김문현(金文鉉)에게는 간삭(刊削, 벼슬명단에서 삭제)을 시행하고, 고부군수 조병갑(趙秉甲)은 격식을 갖추어 붙잡아 오고, 안핵사(按覈使) 이용태(李容泰)는 찬배(竄配)하여 민심을 위로하되, 즉시 영을 내려 백성에게 선포하라”
는 것이다.
1894년 5월 초 4일 (庚辰). 맑았다.
이군선(李君先)이 왔다. 현순소(玄舜韶)가 와서 묵었다. 장운(壯雲)이 그의 집에서 돌아와 말하기를,
“기선 5척이 홍주(洪州) 내도(內島)에 정박하고 있는데, 청병(淸兵)과 우리나라 경영병(京營兵)10을 싣고 있다. 말로는 동당(東黨)을 토벌하기 위해 왔다고 하고서는 병대(兵隊)들이 상륙하여 촌민을 잡아들여 무수하게 구타하고 닭과 개를 때려죽이고, 또 어선을 나포하여 아산(牙山) 둔포(屯浦)로 물건을 실어갔다”
고 한다. 대개 둔포(屯浦)는 병사가 주둔하는 장소가 된 듯하며, 전선을 가설한 것은 경성과 양호(兩湖)를 연락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로 인해 연해 수십 리의 촌락들은 도망하고 흩어져 텅 비게 되었다. 매전(梅田) 이경전(李景典)의 편지를 보았는데, 그 사이의 서울 소식을 전하기를,
“지난 30일에 초토사(招討使)가 군대를 이끌고 완영(完營, 전주감영)으로 들어가 적을 공격하여 크게 쳐부수었다고 하는데 정확한 소식을 알 수 없지만, 사람들이 자못 통쾌해 한다”
라고 하였다. 비자(婢子) 갑년(甲年)의 세 살 된 딸 충업(忠業)은 사람됨이 총명하였는데, 갑자기 우물에 빠져 죽었다. 건져내어 현순소(玄舜韶)를 급히 청하여 살리게 하였으나, 야심할 무렵 끝내 구할 수 없게 되었다. 참혹하고 애석하였다.
1894년 5월 초 7일 (癸未). 맑았다.
세경(世卿)이 갔다. 백거(伯渠)가 와서 묵었다. 오늘 <학질을> 다섯 번째 치렀다. 금계랍을 복용하였는데, 어제보다 조금 많았다. 종일토록 몸의 기력이 심난하고 어지러웠다. 경영(京營) 병대(兵隊) 7~80명을 보았는데, 읍에서부터 남산로(南山路)로 나왔다. 아마도 홍주(洪州) 내도(內島)에서 상륙하여 둔포(屯浦)로 향하는 듯하였다.
1894년 5월 초 9일 (乙酉). 맑았다.
원회(元會)가 매전(梅田)에서 왔다. 경전(景典)의 편지를 보았다. 중국통령 섭사성(聶士成)과 제독 섭지초(葉志超)가 군대를 이끌고 우리나라로 원군을 왔다. 기선 5척이 홍주(洪州) 내도(內島)에 정박하였다. 이중하(李重夏) 영감이 협판(協辦)으로 승진하여 영접관(迎接官)이 되어 내도(內島)의 민가에 와서 묵으며 장차 아산(牙山)으로 향하려 한다. 금월 초 3일에 홍초토(洪招討, 洪啓薰)가 완영(完營)의 적을 공격하여 크게 쳐부수고, 500여 명을 참수하였는데, 그들의 두목 김순명(金順明)과 14세 아이 장사(壯士) 이복룡(李福龍)이 모두 참수되고 조만간에 성을 함락할 것이라고 하니 기쁨을 감출 수 없다. 면천(沔川) 우편 이서[郵吏] 최창규(崔昌奎), 율리(栗里) 이생 방헌(李生邦憲)이 왔다. 원유(元有)가 왔다.
1894년 5월 13일 (己丑). 반나절은 흐리고 반나절은 맑았다.
보리를 베고 앵두를 천신하였다. 이경전(李景典)이 와서 묵었다. 들으니,
“참판 엄세영(嚴世永)이 삼남염찰사(三南廉察使)에 차임되고, 판윤 이원회(李元會)가 양호순변사(兩湖巡邊使)에 차임되어, 경영병(京營兵)을 이끌고 은진(恩津)에 와서 주둔하였다. 참판 김종한(金宗漢)이 경기전(慶基殿) 어진(御眞)을 봉심(奉審)하기 위해 호남으로 내려갔다”
고 한다.
1894년 6월 초 7일 (壬子). 맑고 뜨거웠다.
박종열(朴琮烈)이 아산(牙山)에서 와서 묵었다. 영접관(迎接官) 이당(二堂) 이영(李令, 重夏)의 편지를 보았는데, 아산읍에 주둔하는 중국 군사의 숫자는 3,000여 명이고 호남에 내려가려는 군사는 800명이라고 하였다. 일본 공사(日本公使) 오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가 주상 전하께 글을 올렸다.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지금 열국(列國) 여러 나라들의 형세는 정치(政治), 교민(敎民), 입법(立法), 이재(理財), 권농(勸農), 장상(獎商) 등 부국강병의 방법을 쓰지 않음이 없습니다. 만약 성법(成法), 옛법만을 고수하여, 변통하여 권도에 통달하고 눈을 크게 떠 시야를 넓히고 자강(自强)을 힘써 도모하지 않으면, 어떻게 여러 나라가 둘러보는 가운데 서로 지탱하며 설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 대황제(大皇帝), 일본천황께서는 사신(使臣)에게 명하시어 귀국의 조정대신(朝廷大臣)과 회동하여 이 같은 방법을 강명(講明)하고 귀국의 정부와 서로 권유하여 부강한 실정(實情)을 힘써 열거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한다면, 비로소 휴척(休戚)을 같이하는 상호 우의가 시종여일할 수 있고 피차가 서로 의존하는 국면이 비로소 유지될 수 있을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전교를 내리시어, 판리교섭대신(辦理交涉大臣)에게 칙령(飭令)을 내리거나 대신에게 전권을 맡기시어 사신(使臣)과 회동하여 모든 것을 설명하게 하시어, 이웃간의 우의를 깊이 생각하는 우리 정부의 지극한 뜻을 저버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되면 전체적인 형세가 매우 바람직한 방향으로 흘러갈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또 외서(外署)와의 문답을 보니, 일본 사신은 호비(湖匪)가 일소되면 군대를 물릴 것이라고 말하였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어물어물 늦추며 얼버무리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1894년 6월 16일 (辛酉). 흐리고 맑았다. 천둥소리가 종일토록 요란하였지만 비는 오지 않았다. 어제도 그랬는데 매우 뜨거웠다.
본도(本道)의 전최(殿最)를 보았는데 한 성(省)이 모두 상(上)이었지만, 유독 면천(沔川)만 중(中)이었다. 탑실(塔室)이 학질을 앓았다. 평기(坪基) 큰 생질의 편지가 읍내에서 전해졌는데, 지난 그믐날에 쓴 것이었다. 각 집이 모두 편안하였다. 풍동(豐洞) 누님이 눈에 백태가 끼어 고생한다고 하여 걱정이 된다. 그렇지만 경손(慶孫)이 지난 초 9일에 성혼을 하였다고 하니 다행이고 다행이다. 도사 어윤호(魚允浩)가 일재(一齋), 어윤중의 편지를 보내왔는데, 지난달 초 7일에 선곡(宣谷)에서 쓴 것이었다.
1894년 7월 초 2일 (丙子). 연일 새벽 안개[早霧]가 끼었다. 더위의 기세가 더욱 심하였다.
발안(發安)에서 출발하여 30리(里)쯤인 과천(果川) 안영리(安迎里)에서 점심을 먹었다. 50리를 와서 서울 남문 밖에 도착하여 형님께 인사를 하였다. 가인(家人), 문인(門人) 등이 모두 모였는데, 형님은 이미 임금께 하직 인사드리고 우선 성 밖에 머물며 떠날 채비를 하고 계셨다.
1894년 7월 23일 (丁酉). 때때로 비가 내렸다. 처서절(處暑節)이다. 찌는 듯이 뜨거웠다.
외서(外署)에 나아갔다. 밤에 이현(泥峴), 진고개으로 갔다. 면천(沔川)의 경편(京便)에 화정(花井) 평서(平書)를 보았다. 호중(湖中, 충청도) 동학(東學)이 불과 같이 날로 번창한다고 하여 걱정이 되었다.
1894년 9월 초 7일 (庚辰). 맑았다.
외서(外署)에 갔다. 일본 공사가 편지를 보내 영남(嶺南) 동학의 격문을 보여주었다. 이번 달 25일에 안동(安東)에서 모여 일본 사람을 토벌하자는 것이었는데, 그 기세가 대단하였다. 양호(兩湖) 동학도가 무리를 모아 서울로 향하여 보름께 서울을 범하고자 한다고 하였다. 상소인(上疏人) 김기홍(金基泓)을 법무아문에서 불러들여 조사하며 물었더니 잡아떼며 실토하지 않았는데, 오늘 형추(刑推)시에도 사실대로 자백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나는 감기와 체증 느낌이 있어 불환금정기산(不換金正氣散)을 복용하였다.
1894년 9월 18일 (辛卯). 맑았다.
외서(外署)에 나아갔다. 기영(箕營) 파발꾼이 도계 장계(到界狀啓)를 가지고 올라올 때에 11일자 기영의 편지를 받았다. 먼저 출발한 발군 편에 초 6일자 편지도 도착하였다. 들으니, 호남(湖南) 비도(匪徒)가 호서(湖西)에 급보하여 일시에 깃발을 세우고 기계를 만들며, 열읍(列邑)에 전령을 보내 식량과 꼴을 준비토록 하여 장차 경성(京城)으로 향한다고 한다. 호서관찰사(湖西觀察使)가 그 이유를 치계(馳啓)하였는데, 비도(匪徒)를 비도(匪徒)라고 감히 가리켜 말하지 못하였으니, 그 기세를 알만하다. 한심하고 한심하다.
1894년 9월 28일 (辛丑). 맑았다.
외서(外署)에 나아갔다. 정부 회동에 나아갔다. 양호(兩湖) 비도(匪徒)가 번성하여 순무영(巡撫營)에서 심영병(沁營兵) 200명을 징발하여 은진(恩津)・노성(魯城) 등지로 보내어 도적을 격멸하겠다고 상주하였다.
1894년 9월 30일 (癸卯). 맑았다.
외서(外署)에 나아갔다. 일본 전권공사 이노우에 카오루(井上馨)가 오늘 신시(申時) 초에 폐하를 알현하였는데, 나와 궁내대신(宮內大臣)이 맞이하여 접대하였다. 삼남(三南)・기내(圻內)・관동(關東)의 동비(東匪)들이 한층 더 거세져 전보가 사방에서 날아들어 경병(京兵)의 파견과 일본 구원병의 요청이 연달았다. 그러나 군대가 도착하는 곳에선 비도(匪徒)들이 해산하고, 또 아침이면 동쪽에서 해산하였다가 저녁이면 서쪽에서 모이니 붙잡지 못한다. 안타까운 노릇이다. 호서선무사(湖西宣撫使) 정경원(鄭敬源)이 청풍(淸風)의 비도(匪徒)에게 붙잡혔다고 하니 놀랍고 분하다.
1894년 10월 21일 (甲子). 맑았다.
외서에 나아갔다. 상오(上午) 10점(點) 종이 칠 무렵에 정동(貞洞) 프랑스 영사관으로 갔다. 프랑스 영사 르페브르(盧飛鳧, Lefevres)에게 국서에 대한 답서를 전하는 일 때문이었다. 외서로 돌아왔다. 하오(下午) 1시 종이 칠 무렵에 운현궁(雲峴宮)을 예방하였다. 오늘은 10부(十府) 아문 대신(大臣)들이 운현궁에 모였다. 일본인 오카모토 류노스케(岡本柳之助) 등도 참석하였다. 태공(太公)께서 여러 대신들과 이노우에(井上) 공사를 격려하였다. 흉금을 열고 상대하였으며 일처리에 대해서도 상의하여 정하였다.
1894년 11월 초 9일 (辛巳). 맑았다.
외서(外署)에 갔다. 해서(海西, 황해도)에 동도(東徒)가 크게 일어나 13개 읍이 일시에 화를 당하였고, 적의 기세는 금천(金川)까지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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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군(水軍)이 아닌 해군(海軍)이라는 표현,
호수가 없으면 절대로 존재할 수 없는 표현들(湖中, 湖匪, 兩湖..),
프랑스 공사관을 영사관으로 표현한 부분(공사관을 영사관으로 고쳐 부른 건 을사조약부터라고 하는데 1894년에 영사관이라고 하고 있음.),
한반도에서는 절대로 성립할 수 없는 거리(30일 거리, 발안에서 서울까지 50리 등..),
집회장소에 모인 인파 규모,
탱자나무가 서식하지도 않는 한반도 흑산도에 유배를 보내놓고 가택연금형[加棘]에 처했다는 말도 안되는 내용 등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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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자료입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조금 전 질의응답게시판에서 삭제한 글은 좀 더 정리한 뒤에 다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