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이여, 내 말을 귀담아 들으라 (욥기 33장 1절 – 33절) 33:1 그런즉 욥이여 내 말을 들으며 내 모든 말에 귀를 기울이기를 원하노라… 3 내 마음의 정직함이 곧 내 말이며 내 입술이 아는 바가 진실을 말하느니라… 6 나와 그대가 하나님 앞에서 동일하니 나도 흙으로 지으심을 입었은즉 7 내 위엄으로는 그대를 두렵게 하지 못하고 내 손으로는 그대를 누르지 못하느니라 8 그대는 실로 내가 듣는 데서 말하였고 나는 그대의 말소리를 들었느니라 9 이르기를 나는 깨끗하여 악인이 아니며 순전하고 불의도 없거늘 10 참으로 하나님이 나에게서 잘못을 찾으시며 나를 자기의 원수로 여기사 11 내 발을 차꼬에 채우시고 나의 모든 길을 감시하신다 하였느니라 12 내가 그대에게 대답하리라 이 말에 그대가 의롭지 못하니 하나님은 사람보다 크심이니라 13 하나님께서 사람의 말에 대답하지 않으신다 하여 어찌 하나님과 논쟁하겠느냐 14 하나님은 한 번 말씀하시고 다시 말씀하시되 사람은 관심이 없도다 15 사람이 침상에서 졸며 깊이 잠들 때에나 꿈에나 밤에 환상을 볼 때에 16 그가 사람의 귀를 여시고 경고로써 두렵게 하시니 17 이는 사람에게 그의 행실을 버리게 하려 하심이며 사람의 교만을 막으려 하심이라 18 그는 사람의 혼을 구덩이에 빠지지 않게 하시며 그 생명을 칼에 맞아 멸망하지 않게 하시느니라 19 혹은 사람이 병상의 고통과 뼈가 늘 쑤심의 징계를 받나니 20 그의 생명은 음식을 싫어하고 그의 마음은 별미를 싫어하며 21 그의 살은 파리하여 보이지 아니하고 보이지 않던 뼈가 드러나서 22 그의 마음은 구덩이에, 그의 생명은 멸하는 자에게 가까워지느니라 23 만일 일천 천사 가운데 하나가 그 사람의 중보자로 함께 있어서 그의 정당함을 보일진대 24 하나님이 그 사람을 불쌍히 여기사 그를 건져서 구덩이에 내려가지 않게 하라 내가 대속물을 얻었다 하시리라 25 그런즉 그의 살이 청년보다 부드러워지며 젊음을 회복하리라 26 그는 하나님께 기도하므로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사 그로 말미암아 기뻐 외치며 하나님의 얼굴을 보게 하시고 사람에게 그의 공의를 회복시키시느니라 27 그가 사람 앞에서 노래하여 이르기를 내가 범죄하여 옳은 것을 그르쳤으나 내게 무익하였구나 28 하나님이 내 영혼을 건지사 구덩이에 내려가지 않게 하셨으니 내 생명이 빛을 보겠구나 하리라… 31 욥이여 내 말을 귀담아 들으라 잠잠하라 내가 말하리라 32 만일 할 말이 있거든 대답하라 내가 기쁜 마음으로 그대를 의롭다 하리니 그대는 말하라 33 만일 없으면 내 말을 들으라 잠잠하라 내가 지혜로 그대를 가르치리라 (개역개정) 오늘의 성경 본문은, 욥이 당한 고난의 원인을 두고 친구들 간에 벌어진 3차례의 변론(4-31장)이 끝나면서, 그 자리에 참관하여 모든 내용을 듣고 있던 엘리후가 참여한 변론(32-37장)의 첫 번째 내용입니다. 세 친구들이 편협하고 도식적인 인과응보 논리만을 반복하며 욥을 정죄할 뿐 욥의 주장을 꺾지 못한 것을 지켜본 엘리후는, “나도 내 의견을 보이리라…내가 말을 하여야 시원할 것이라. 내 입을 열어 대답하리라”(32:17,20)며, 자신이 변론에 끼어들 수밖에 없는 답답한 마음과 당위성을 밝힙니다(32장). 엘리후의 변론은 네 차례에 걸쳐 진행되는 데, 오늘의 본문인 33장의 첫 번째 변론에서는 “욥이여, 내 말을 귀담아 들으라. 잠잠하라, 내가 말하리라”(33:31)며, 욥의 무죄 주장과 하나님이 자기 사정을 외면하고 듣지 않으신다는 욥의 불평을 반박하며, 하나님의 의로운 섭리와 행사를 증언합니다. 34장의 두 번째 변론에서는, 왜 하나님은 공평하지 못한 고난으로부터 자신을 놓아주지 않는가에 대한 불평으로 마치 하나님은 공의롭지 않다는 욥의 주장을 반박합니다. 35장의 세 번째 변론에서는, 왜 하나님이 자신의 무죄에 대해서 상을 주시지 않느냐는 불평에,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의 무익성과 응답 없는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적 주권을 증언합니다. 36-37장의 네 번째 변론에서는, 하나님의 의로우신 섭리와 통치에 대한 찬양과 경외로 마무리합니다. 엘리후의 변론은 세 친구들처럼 욥이 당하는 재앙의 원인으로서 인과응보 논리를 적용하지 않고, 재앙을 통해 얻는 유익으로서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를 강조한 것이 다릅니다. 그러면서도 엘리후 역시, 친구들처럼 욥의 회개를 촉구한 것과 욥의 아픔과 고통에 대한 연민의 마음이 없었다는 것이 세 친구들과 같았습니다. 우리가 고통당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흔히 저지르게 되는 잘못과 조심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다시금 생각해보게 합니다. 1. 욥에 대한 변론을 어떻게 시작합니까? 엘리후는 욥과의 변론에 앞서서, 자신은 하나님 앞에서 “나는 결코 사람의 낯을 보지 아니하며, 사람에게 영광을 돌리지 아니하리니, 이는 아첨할 줄을 알지 못함이라”(32:21-22) 곧 “이 논쟁에서 어느 누구 편을 들 생각은 없습니다. 또 누구에게 듣기 좋은 말로 아첨할 생각도 없습니다.”(새번역)라고 밝혔습니다. 그러면서 “그런즉 욥이여 내 말을 들으며, 내 모든 말에 귀를 기울이기를 원하노라. 내가 입을 여니 내 혀가 입에서 말하는구나”(33:1-2)라는 말로, 엘리후는 욥에게 자기 말에 경청해줄 것을 요청하며 첫 변론을 시작합니다. 엘리후가 이렇게 조심스러운 어투의 말을 한 것은, “나는 연소하고 당신들은 연로하므로, 뒷전에서 나의 의견을 감히 내놓지 못하였노라”(32:6)고 했던 고백처럼, 욥이나 세 친구들이 나이로나 사회적으로나 자신보다 어른이었다는 점이 많이 부담스러웠던 것 같습니다. 따라서 엘리후는 왜 욥이 자신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지와 자신이 어떤 자세로 변론에 참여하는지를 다시금, 첫째로는 “내 마음의 정직함이 곧 내 말이며, 내 입술이 아는 바가 진실을 말하느니라”(33:3) 곧 “나는 지금 진지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진실을 말하려고 합니다.”(새번역)라며, 어떤 궤변과 허황된 말이 아닌 “정직”한 마음과 “진실”된 자세로 변론하겠다고 밝힙니다. 둘째로는 “하나님의 영이 나를 만드시고, 전능하신 분의 입김이 내게 생명을 주셨습니다.”(33:4)라며, 엘리후는 세 친구들처럼 지혜롭지 못하거나 바르지 못한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이 인도해주시는 지혜로 변론하겠다고 밝힙니다. 과거 세 친구들이 자신들의 편협한 논리로 재앙의 고통을 겪는 욥을 일방적으로 정죄하며 질타하자, 욥이 “너희는 다 재난을 주는 위로자들이로구나. 헛된 말이 어찌 끝이 있으랴? 네가 무엇에 자극을 받아 이같이 대답하는가?”(16:2-3)라고 분노했던 것을 기억했던 것인지, 엘리후는 욥에게 “그대가 할 수 있거든 일어서서 내게 대답하고, 내 앞에 진술하라”(33:5)며, 언제든지 자기 말에 이의가 있다면 어떤 반박을 해도 좋다는 제안으로 변론을 시작합니다. 셋째로는, “나와 그대가 하나님 앞에서 동일하니, 나도 흙으로 지으심을 입었은즉, 내 위엄으로는 그대를 두렵게 하지 못하고, 내 손으로는 그대를 누르지 못하느니라”(33:6-7)며, 엘리후는 욥이나 자신이나 하나님 앞에서 동일한 피조물로서 어떠한 “위엄”도 권세도 없는 자신이기에 어떤 우월의식 없이 허심탄회한 자세로 변론하겠다고 밝힙니다. 이것은 자신이 더 나아서가 아니라 흙으로 지음 받은 보잘 것 없는 존재로서 동일한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지만, 오직 주권자가 되시는 하나님의 권세만을 의존해서 변론하겠다는 겸손한 고백입니다. 욥이 자신의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하나님은 나처럼 사람이 아니신즉, 내가 그에게 대답할 수 없으며, 함께 들어가 재판을 할 수도 없고, 우리 사이에 손을 얹을 판결자도 없구나”(9:32-33)라며 답답함을 호소했던 탄식 앞에, 엘리후가 공정한 판결을 해보겠다는 고백이기도 했습니다. 욥이 자기 변론을 마치며 “나를 창조하신 바로 그 하나님이 내 종들도 창조하셨다.”(31:15,새번역)고 했던 고백처럼, 당시 사회적 신분 차이가 분명한 시대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서 인격적으로 서로를 차별하지 않는 동등한 의식으로 살아가겠다는 이들이 진정한 신앙인들입니다. 대체적으로 믿는다고 하면서도, 어떤 명분과 이유를 찾아서라도 자신이 더 우월하고 대단한 존재인 것처럼 행세하려는 것이 인간의 불신앙이고 죄악입니다. 엘리후가 1차 변론을 시작하면서 “욥이여, 내 말을 들으며, 내 모든 말에 귀를 기울이기를 원하노라.”(33:1)고 했던 고백에서, “내 말”은 욥이 했던 물음들에 대한 자신의 의중을 제시하겠다는 표현이라면, “내 모든 말”은 욥이 했던 말에 대한 옳고 그름을 판결하겠다는 표현으로 봅니다. 따라서 엘리후는 1차 변론을 마무리하면서 다시금 “욥이여, 내 말을 귀담아 들으라.”(33:31)며, 자신의 변론이 끝난 것이 아니라 2차 변론으로 이어질 것을 암시합니다. 그러면서 “잠잠하라, 내가 말하리라. 만일 할 말이 있거든 대답하라. 내가 기쁜 마음으로 그대를 의롭다 하리니, 그대는 말하라. 만일 없으면 내 말을 들으라. 잠잠하라. 내가 지혜로 그대를 가르치리라”(33:31-32) 곧 “내가 말하는 동안은 조용히 듣기만 해주십시오. 그러나 하실 말씀이 있으시면, 내가 듣겠습니다. 서슴지 말고 말씀해 주십시오. 나는 어른이 옳으시다는 것을 드러내고 싶습니다. 그러나 하실 말씀이 없으시면, 조용히 들어 주시기만 바랍니다. 그러면 내가 어른께 지혜를 가르쳐 드리겠습니다.”(새번역)라고 밝힙니다. 엘리후는 자신의 변론이 욥의 세 친구들처럼 욥을 공격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욥이 탄식한 말의 의미를 밝혀주려는 것이라고 합니다. 2. 욥의 어떤 주장을 반박하며 충고합니까? 대화라는 것은, 상대방의 말에 조목조목 반박하는 것이 아니라, “욥이여, 내 말을 귀담아 들으라.”(33:31)는 당부처럼 진실한 마음으로 동등한 입장에서 상대방의 말을 잘 듣는 자세가 우선되어야 합니다. 엘리후는 “그대는 실로 내가 듣는 데서 말하였고, 나는 그대의 말소리를 들었느니라”(33:8) 곧 “내 귀가 당신의 말을 어찌 한마디인들 놓쳤겠소. 당신이 하는 말을 나는 다 들었소.”(공동번역)라며, 욥과 세 친구들의 모든 변론을 지켜보며 그 말한 것을 다 들은 입장에서 욥이 했던 몇 가지 말의 문제점을 좀 말하겠다고 했습니다. 엘리후는 욥의 어떤 말을 문제점으로 지적합니까? 첫째로, 엘리후는 “이르기를, 나는 깨끗하여 악인이 아니며, 순전하고 불의도 없거늘, 참으로 하나님이 나에게서 잘못을 찾으시며 나를 자기의 원수로 여기사, 내 발을 차꼬에 채우시고 나의 모든 길을 감시하신다 하였느니라”(33:9-11)며, 욥이 일관되게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며 주어진 고난에 의문을 제기하며 불평한 것을 두고, “내가 그대에게 대답하리라. 이 말에 그대가 의롭지 못하니, 하나님은 사람보다 크심이니라”(33:12)고 반박합니다. 욥이 했던 말들인 것은 분명 맞지만, 엘리후는 욥이 한 말보다 과장된 표현을 통해서 하나님의 공의를 무시한 비 신앙적인 태도로 질타합니다. 그러나 욥은 “누가 깨끗한 것을 더러운 것 가운데에서 낼 수 있으리이까? 하나도 없나이다”(14:4)라며, 인간의 죄성을 분명하게 인정했습니다. 욥은 하나님 앞에서의 자신의 절대적인 의를 주장한 것이 아니라, 친구들의 일방적 정죄에 대해 그들이 지적한 죄악을 저지른 적이 없다는 입장에서의 자기 무죄의 주장이었습니다. 또한 친구들의 인과 응보적인 정죄처럼 고난의 원인이 될 만한 죄가 없음에도 어려움을 당하는 것을 호소했을 뿐입니다. 욥은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부인한 적이 없습니다. 단지 원인을 알 수 없어 이해할 수 없는 고난에 대한 답답하고 비통한 마음을 토로했을 뿐입니다. 엘리후는 하나님을 향한 욥의 탄식 자체를, 연약하고 무지한 인간이 감히 하나님께 대해 항거하고 항변하는 것으로 보았고, 이러한 욥을 교만하고 하나님을 거스르는 자로 보았습니다. 엘리후 자신은 세 친구들보다 자신이 낫다고 보았을지 모르지만, 결국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같은 성향의 신앙인이었습니다. 둘째로, 엘리후는 “하나님께서 사람의 말에 대답하지 않으신다 하여, 어찌 하나님과 논쟁하겠느냐?”(33:13) 곧 “그런데 어찌하여 어른께서는, 하나님께 불평을 하면서 대드시는 겁니까? 어른께서 하시는 모든 불평에 일일이 대답을 하지 않으신다고 해서, 하나님께 원망을 할 수 있습니까?”(새번역)라고 욥을 반박했습니다. 욥이 원인을 알 수 없는 자신의 고난에 담긴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를 알기 원했지만 알 수 없는 것에 대한 자신의 답답함의 호소를, “내가 주께 부르짖으나 주께서 대답하지 아니하시오며, 내가 섰사오나 주께서 나를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다”(30:20)라고 했던 것을, 하나님을 향해 “불평”과 “원망”으로 “논쟁”하고자 했던 것으로 엘리후는 보았던 것 같습니다. 듣는 입장에서는, 엘리후도 세 친구들처럼 충분히 그렇게 볼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엘리후 역시도 세 친구들처럼 어려운 상황을 탄식하고 호소하는 욥의 처지를 이해하고 위로하려는 태도는 전혀 보이지 않고, 욥의 잘못만을 지적하는 고압적인 판결자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다른 사람의 아픔과 고통을 공감한다는 것이, 그만큼 참으로 어렵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러면서도 엘리후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침묵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 “하나님은 한 번 말씀하시고 다시 말씀하시되, 사람은 관심이 없도다”(33:14) 곧 “사실은 하나님이 말씀을 하시고 또 하신다고 하더라도, 사람이 그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지 못할 뿐입니다.”(새번역)라며, 하나님은 말씀하시지만 인간이 주의를 기울이지 못하기 때문에 듣지 못하는 것이라고 밝힙니다. 또한 하나님과 인간의 소통하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이라며, 엘리후는 “사람이 침상에서 졸며 깊이 잠들 때에나 꿈에나 밤에 환상을 볼 때에, 그가 사람의 귀를 여시고 경고로써 두렵게 하시니”(33:15-16) 곧 “사람이 꿈을 꿀 때에, 밤의 환상을 볼 때에, 또는 깊은 잠에 빠질 때에, 침실에서 잠을 잘 때에, 바로 그 때에, 하나님은 사람들의 귀를 여시고, 말씀을 듣게 하십니다. 사람들은 거기에서 경고를 받고, 두려워합니다.”(새번역)라고 증언합니다. 고대 사회에서는 하나님께서 “꿈”과 “환상”으로 사람들에게 “경고”한다고 믿었습니다. 엘리후는 하나님의 “경고”를 가리켜서, 인간을 정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의와 구원을 이루시는 주권적인 섭리라며, 먼저는 “이는 사람에게 그의 행실을 버리게 하려 하심이며, 사람의 교만을 막으려 하심이라”(33:17)고 했고, 다음으로는 “그는 사람의 혼을 구덩이에 빠지지 않게 하시며, 그 생명을 칼에 맞아 멸망하지 않게 하시느니라”(33:18) 곧 “하나님은 사람의 생명을 파멸에 빠지지 않도록 지켜 주시며, 사람의 목숨을 사망에서 건져 주십니다.”(새번역)라고 밝힙니다. 3. 엘리후는 욥의 고난을 어떻게 해석합니까? 엘리후는 욥이 겪는 질병의 고통이 친구들의 주장처럼 그가 저지른 죄악으로 말미암은 심판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성숙한 신앙을 갖게 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라는 것을 어떻게 증언합니까? 악창으로 신음하는 욥의 고통을 “혹은 사람이 병상의 고통과, 뼈가 늘 쑤심의 징계를 받나니”(33:19)라고 말하면서, 이 때문에 입맛을 잃은 것을 “그의 생명은 음식을 싫어하고, 그의 마음은 별미를 싫어하며”(33:20)라고 했고, 나아가 먹지 못해 살이 빠져 피골이 상접한 앙상한 모습을 “그의 살은 파리하여 보이지 아니하고, 보이지 않던 뼈가 드러나서”(33:21)라며, 결국 병세가 악화되어 거의 죽게 된 상태를 “그의 마음은 구덩이에, 그의 생명은 멸하는 자에게 가까워지느니라”(33:22)고 안타까워합니다. “멸하는 자”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죽음을 선포하는 천사를 상징합니다. 엘리후는 과거 욥이 “하나님이 나와 같은 사람이기만 하여도 내가 그분께 말을 할 수 있으련만, 함께 법정에 서서 이 논쟁을 끝낼 수 있으련만, 우리 둘 사이를 중재할 사람이 없고, 하나님과 나 사이를 판결해 줄 이가 없구나!”(9:32-33,새번역)라며 하나님과 자신 사이에 중재자가 없는 것을 탄식했던 것을 기억해서인지, 하나님께서 “중보자”로 보내실 한 천사를 통해 죽음의 위기에 처한 욥을 구원하실 것을 선언합니다. “만일 일천 천사 가운데 하나가, 그 사람의 중보자로 함께 있어서 그의 정당함을 보일진대, 하나님이 그 사람을 불쌍히 여기사 ‘그를 건져서 구덩이에 내려가지 않게 하라. 내가 대속물을 얻었다.’ 하시리라”(33:23-24) 곧 “그 때에 하나님의 천사 천 명 가운데서 한 명이 그를 도우러 올 것입니다. 그 천사는 사람들에게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상기시킬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천사에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가 무덤으로 내려가지 않도록, 그를 살려 주어라. 내가 그의 몸값을 받았다.’”(새번역)라고 하시며, 욥의 잃어버린 건강을 회복하게 하실 것을 “그런즉 그의 살이 청년보다 부드러워지며, 젊음을 회복하리라”(33:25) 곧 “그렇게 되면, 그는 다시 젊음을 되찾고, 건강도 되찾을 것입니다.”(새번역)라고 엘리후는 선언합니다. 엘리후는 때로 하나님께서 육체적인 질병의 고난을 허락하신 목적을, “그는 하나님께 기도하므로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사, 그로 말미암아 기뻐 외치며 하나님의 얼굴을 보게 하시고, 사람에게 그의 공의를 회복시키시느니라”(33:26) 곧 “하나님은 그를 다시 정상적으로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새번역)라며, 고통의 연단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영적인 회복을 위한 하나님의 의로우신 주권적 섭리라고 증언합니다. 연약한 인간은 고난을 통해서 비로소 하나님을 찾는 “기도”를 하게 됨으로써 하나님과의 관계와 교제가 회복되며, 또한 이로써 하나님 앞에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게 될 것을 “그가 사람 앞에서 노래하여 이르기를, 내가 범죄하여 옳은 것을 그르쳤으나 내게 무익하였구나”(33:27) 곧 “그는 사람들 앞에서 고백할 것입니다. ‘나는 죄를 지어서, 옳은 일을 그르쳤으나, 하나님이 나를 용서하여 주셨습니다.’”(새번역)라고 했습니다. “내가 범죄하여 옳은 것을 그르쳤으나 내게 무익하였구나”라는 표현은, 옳은 것을 왜곡해서 죄악을 저지른 결과는 범죄 이외에 다른 어떤 것도 얻은 것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엘리후는 고난을 극복함으로써 하나님의 은혜를 다시 체험한 이들이, 과거 자신이 하나님을 불신했던 어리석음을 뉘우치는 회개의 고백을 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고난을 통한 하나님의 섭리로 구원함을 받은 이들은 주님께서 자신을 구원해주신 은혜를 감사하며 찬양하게 될 것을, “하나님이 내 영혼을 건지사 구덩이에 내려가지 않게 하셨으니, 내 생명이 빛을 보겠구나 하리라”(33:28) 곧 “‘하나님이 나를 무덤에 내려가지 않게 구원해 주셨기에, 이렇게 살아서 빛을 즐기게 되었습니다’ 하고 말할 것입니다.”(새번역)라고 증언합니다. 결국 엘리후는 세 친구들의 편협한 신앙 논리처럼 고난이 단순히 죄에 대한 보응이라고 보지 않고, 하나님이 은혜와 구원으로 인도해가는 연단의 과정이라고 밝힙니다. 따라서 엘리후는 고난은 죄에 대한 징계의 의미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로서 더 큰 축복을 주시기 위한 연단의 의미라는 것을, “실로 하나님이 사람에게 이 모든 일을 재삼 행하심은, 그들의 영혼을 구덩이에서 이끌어 생명의 빛을 그들에게 비추려 하심이니라”(33:29)고 증언합니다. 고난의 신비에 감춰진 하나님의 오묘하신 섭리와 궁극적인 계획은 인간을 구원으로 이끄시려는 자비하심에 있기에, 엘리후는 욥에게 고난 중에 불평하고 좌절하기보다 참고 인내할 것을 촉구합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엘리후가 자기 변론을 시작하면서 왜 “욥이여, 내 말을 귀담아 들으라.”(33:31)고 했는지를 아시겠습니까? 엘리후는 욥이 변론한 내용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도 “내가 기쁜 마음으로 그대를 의롭다 하리니”(33:32) 곧 “나는 어른이 옳으시다는 것을 드러내고 싶습니다.”(새번역)라고 고백한 것처럼, 욥의 고난을 그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로 해석했습니다. 엘리후는 세 친구들처럼 무조건적인 인과응보 논리로 욥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고난을 받는 것이라고 정죄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고통의 징계적 가치를, 세 친구들처럼 보응 사상에 근거하여 죽음에 이르는 책벌로 본 것이 아니라, 죽음으로부터 사람을 지키고 보호하기 위한 하나님의 경계 수단으로 엘리후는 보았습니다. 질병 역시도, 세 친구들처럼 죄를 지은 것에 대한 심판의 벌이 아니라, 엘리후는 무엇이 올바른지를 알려주어 죄로부터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만을 목적하도록 하는 상징적 수단으로 보았습니다. 똑같은 문제와 상황도, 전혀 다른 시각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을 엘리후를 통해서 깨닫게 됩니다. 엘리후는 세 친구들이 했던 완고하고 폐쇄적인 신앙 논리로 욥을 정죄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엘리후의 논리가 전부 옳은 것은 또한 아니었습니다. 이 땅을 살아가는 어떤 사람의 논리도 완전하지 않고, 모두가 논리적인 결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또한 깨닫고 인식해야 합니다. 따라서 끊임없이 우리를 선동하고 미혹하고 들어오는 잘못된 신앙 지도자들의 논리를 절대화하는 잘못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으로 분별하는 지혜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왜 사도 요한이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요일4:1)고 했는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사도 베드로 역시도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미리 알았은즉,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려 너희가 굳센 데서 떨어질까 삼가라.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벧후3:17-18)고 했던 말씀을 가슴에 새기는 이들이 복됩니다. 우리가 “욥이여, 내 말을 귀담아 들으라.”(33:31)는 의미를 깨닫는다면, 다른 사람들의 말에 맹신적으로 맹종하는 잘못된 자세에서 벗어나서,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지혜”로 자신과 사람들을 살리는 올바른 생명의 길을 걸어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