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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금고
할아버지는 종손 집안에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마가 넓고 입술이 단정한 선비 얼굴로 타협을 모르고 살았다. 그의 아버지는 집안의 어른이 장티프스에 걸리자 문병을 가려했다.
“여보. 형제가 아파도 오가지 못하는데, 가장이 조심하셔야죠.”
“내가 이 집안의 종손인데, 죽더라도 사람 도리는 다 해야지.”
“김 씨네 고집을 무슨 수로 말려.”
증조할머니는 앞치마로 눈물을 훔치고 장독대에다 정화수를 떠놓고 빌었다. 경주 김씨 상촌파는 지조를 근간으로 살고 있어, 김 씨네 성질이 대꼬챙이 같아 종가 회의를 하면 갈등이 많았다. 누구도 양보하려 들지 않는 강한 사람들 틈에 종가 며느리로 살아가는 여인도 점차 거센 여자가 되어갔다.
증조할아버지는 기어이 문병을 마치고 오자마자 눕고, 약도 효험이 없어 그대로 돌아가셨다. 마을의 삼분의 일이 줄초상이 났다. 좀 더 대차게 말리지 못한 것을 후회하지만 혼자 종가 집안을 이끌어 갈 일이 큰일이었다.
할아버지가 네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힘겹게 사는 것을 본 옆집 친척이 막내 네 작은 아들이 앓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곰곰 생각했다.
“갈래에 사는 막내 네는 제재소를 크게 하고 있어 밥술은 먹는데 그리로 양자를 보내면 배를 곯지는 않을 텐데, 말을 건네 볼까요?”
“내 새끼는 내가 끼고, 먹어도 같이 먹고 굶어도 같이 굶어야지요.”
종가집이라 땅은 좀 있어도 가장이 없이 보릿고개를 맞아 죽으로도 연명하기가 힘들어졌다. 고집을 부리다가 식구들 큰일 날 것 같아, 먼저 떠난 남편을 원망하며 허락을 했다.
“주철아. 그 집에 가면 흰쌀밥에 고깃국을 매일 먹을 수 있어.”
“엄마 보고 싶으면 어떻게 해.”
“그럴 땐 집에 왔다 가면 되지. 삼십 리뿐이 안 떨어져 있는데.”
작은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그를 데려갔다. 양아버지는 6살 주철에게 상복을 입히고 절을 하라고 했다.
“절 올려라.”
“네. 인사드립니다.”
절을 시키는 대로 넙죽 올리니 하얀 쌀밥과 소고깃국 먹어 보도 못한 맛난 반찬이 때마다 올라와 실컷 먹었다.
“주철이 얼굴이 뽀얗게 살이 오르니 더 잘생겨 보인다. 아들 장하기도 하지.”
“어머니 이 주먹에 살이 올라 뼈가 보이지 않아요.”
“그래 내 새끼. 얼른 많이 먹고 훌쩍 커야지.”
양어머니는 아들을 낳지 못하다 양아들을 얻으니 지극정성으로 키웠다. 하지만 양아버지는 하나둔 딸만 예뻐하고 양자에 대해 제재소 일만 시켰다. 가족이 보고 싶지만, 서로를 위해 참았다. 이 집에 넘쳐나는 음식을 보며, 나중에 잘 되어서 엄마도 모실 거라고 결심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난 후 진학을 시켜주지 않아 불만이 많았다. 와세다 강의록을 보며 키운 실력으로 그 대학에 다니는 동네 형을 따라 일본유학을 갔다. 가난한 고학생 다섯이 한 방에서 자취를 했다. 그도 서점의 책을 배달하며 학비를 보탰지만, 의예과 일 년 다닌 후 양아버지는, 뒷받침하기가 힘들다는 말씀에 1년 후 전과해서 토목공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로 왔다. 나이가 꽉 차서 혼인 말이 오고 갔다.
“얼굴은 관옥 같이 생겼는데, 이 손은 선비 손이 아닌데. 와세다 졸업장 가져와 봐.”
김 씨네 자존심을 건드리는 말에 다 깨버리고. 갈래 동네의 착한 여자나 데려다 살까하다가, 경기고녀를 나와 선생을 하는 할머니의 늘씬하고 기품 있는 자태, 성공한 학자 오성근 장인의 매력에 끌려 갈등이 일었다.
당시는 정신대에 끌려갈까봐 여자들이 결혼을 서두르던 때였기에 이 혼인 말이 오고가지 언감생심, 두 집안의 차이는 많이 났다. 좋은 자식을 보려면 장가를 잘 가야하니 할 수 없지. 수모를 당한 뭉툭한 손으로 졸업장을 보이고 결혼했다.
그 후 수풍 댐 건설 기사로 취직이 되어 강계에 갔다. 높은 월급을 받으며 수풍댐 건설을 지휘했다. 친척들이 일본에 징용으로 끌려가던 때인데, 기술자들은 빼주어 아내의 오빠들도 같이 있었고, 아들 태현도 강계에서 잉태했다. 할머니는 이 신혼살림하던 때가 제일 행복했다는 말을 자주했다. 그런데 회사 돌아가는 정황이 수상했다.
“일본이 언제 망할 것 같아?”
“일 년도 안 남았어.”
“처남 느낌도 그렇지?”
“자칫 강계에서 해방을 맞이하면 서울 집에 못 돌아갈 지도 모르지.”
일본의 패망을 예측하는 얘기를, 목소리가 큰 할아버지가 술자리에서 했다가 일본 관리의 귀에 들어간 것을 알게 되었다. 시끄러워질 것 같아, 사표를 내고 짐을 꾸려 서울로 돌아왔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해방둥이 태현을 낳았다. 나중에 일본이 망해서 내려온 사람들은 기차도 못타고, 짐도 못가지고 고생하며 뿔뿔이 흩어졌다. 할아버지가 가끔 절구통 이야기를 하신다.
“잉크도 얼어붙는 중강진의 추위에서 자란 단단한 나무를 정으로 쪼아서 보풀을 만들고 불을 놓아 태우면서 절구 확을 만든 잘생긴 놈이었는데.”
“그 무거운 걸 어찌 가져 와요. 옆집에 맡겨두길 잘 했지요.”
“맞아. 통일되면 찾아와야지. 당신 태현이 갖고 무 엄청 깎아먹었는데.”
“그래서 저렇게 중강진 추위처럼 지독하고, 무처럼 서늘한 놈이 나왔는지도 모르지요. 분명 큰 인물이 될 거예요.”
서울은 해방의 기쁨도 잠시 정치의 혼돈에 휩싸였다. 할아버지는 ‘용산지구 당장’이란 직책을 맡고, 야당에 뛰어들어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하지만 핍박은 심했고, 선거 유세 중 신익희 대통령 후보는 심장마비로 돌아가시고 장면 박사가 뒤를 이었지만 이승만 정권에 밀리기만 했다.
언더우드 박사 비서로 연희전문을 세우던, 오성근 장인의 ‘의성정’ 빈 터에 집을 짓고 정치 활동을 했는데, 무허가 건물 없애라고 매일 괴롭혔다. 앞날이 보이지 않고 혼란에 휩싸인 정치판에 환멸을 느끼고, 야당 지구당장을 떠나자 집을 헐어 내라고 쫓아다니던 사람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정치판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
민서는 그런 할아버지가 미웠다. 할아버지의 성격 때문에 가족들의 고생이 심했고, 타협을 모르는 피가 대대로 내려와 자신도 비슷한 구석이 있는 게 싫었다. 힘을 줄 때면 자기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혀도, 집안내력의 줄기를 타고 내려오는 것이 싫어, 반항을 제일 많이 했다.
장충동 ‘해태의 집’을 할 때도 할아버지 고집은 대단했다.
“다꽝 주세요.”
“단무지. 우리말을 써야지요. 음식은 남기지 말고 다 드세요. 많으면 아예 덜어서 싸가지고 가고. 환경 오염시키면 안 돼요.”
그런 말을 무한 반복하는 할아버지를 보며 민망했었다. 집안사람들은 두뇌가 명석한데 ‘모난 돌이 정 맞는다’고 직장에 들어가면 진짜 마음을 나누는 사람들 외엔 곁을 주지 않았다. 운전면허를 정주영 회장과 비슷한 때 따서 운전면허 번호가 천 단위라고 자랑하셨다.
메탄가스를 이용해 자동차를 움직이게 하겠다고 연구했지만, 실패를 거듭했고, 트럭을 사서 삼판에도 다니고 짐을 실어 나르는 일을 했다. 기술이 좋아 웬만한 것은 직접 고쳤고, 고물을 사방에서 들여와 집 창고에 쌓아놓았다. 저걸로 직접 자동차를 만들어 보겠다. 정주영도 했는데, 유학까지 한 내가 못할 리가 없다고 꿈을 꾸었다. 그러는 동안 집안은 고물상이 되어 갔다.
전쟁 통에 학교도 못 다니게 된 할머니는 옷수선 집을 운영해서 자식들을 가르쳤다. 웬만한 옷은 직접 만들었고 바느질 솜씨가 뛰어났다. 참 얌전한 어른인데 외골수 남편 때문에 힘들게 살았다. 독립운동가 학자 집안에 태어난 규수로 교과서에 나오는 인물이 될 조건이 충분했는데 불쌍한 할머니를 보면 할아버지가 더욱 미웠다.
당시 경기고녀 졸업생은 실력도 대단하고 프라이드도 엄청 났다. 집안이 좋고 일본으로 수학여행을 다녀오는 식의 학사운영에 재력이 있어야 다닐 수 있었다. 그래서 자존심 강한 할머니는 동창회에 일체 나가지 않았다. 나중에 작은 고모가 중매로 결혼을 하고보니, 경기 한 해 선배로 엑스 동생하자고 조르던 아들이라 두 집의 인연은 있는데, 서로 뒤늦게야 만난다. 고모부 아버지는 와세다 동문이어서 만나게 되어 있는 사람들은 어떤 길을 통해서도, 만나게 되는 걸 알았다.
할아버지 와세다 대학 동창회는 대략 김성수 고대 총장님 네 별장에서 하거나, 롯데호텔에서 해서 식구들을 가끔 데려갔는데 따라가면 무척 조심스러웠다. 이병철, 이건희 삼성회장님들이 후배들에게 좋은 선물을 많이 나눠주고 장학회 기금도 많아, 고모도 유학 갈 때 도움을 받았다.
할아버지가 농담도 잘해서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았는데, 동창회를 잘 안 나가서 할머니께 여쭤보았다.
“말도 마라. 동창회에서 기금으로 제주도로 놀러가자면서, 골프 칠 사람들, 낚시할 사람들, 등산할 사람들을 나누자고 하여, 친목 단체에서 이게 무슨 편 가르기냐고 자리를 박차고 나오셨어.”
세상과 타협하지 않으며 살던 할아버지였다. 당신에게 이삿짐을 옮기는 파란 상자를 준다. 여기에 필요 없는 물건을 담으라고 한다면 몇 상자나 나올까? 필요 없는 물건이란 것이 존재하는 걸까? 그것은 기준을 정하기 나름이다. 평생을 모아 놓기만 하고 버리는 것을 싫어하던 할아버지가 백수를 누리고 돌아가셨다. 그는 세상에 내놓는 쓸모없는 물건을 쓸모가 있다는 이름을 달아주느라 그렇게 오래 버티며 살 수 있었다.
그의 방엔 십 여 개의 시계가 있다. 벽에 걸린 괘종시계가 시간이 되면 종을 치고 뻐꾸기시계도 문을 열고 나와 울어댄다. 하지만 그 소리가 맞는 적이 없다. 각자의 시간이 다 다르게 돌아가고 있어서 그 방에 앉아 있으면 어지럽다. 지금 몇 시인지 도무지 알 수 없다.
견디다 못해 시계 좀 제발 버리라고 하지만 들어줄 리 없다. 제일 잘 맞던 시계가 약수터에 대를 세우고 비 맞지 않게 가리개를 쓰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넌 드디어 쓸모 있어졌구나! 이 시계를 버린 사람도 동네 사람이었을 테니 이것을 본다면 어떤 생각을 할까.
할아버지 방을 정리하다 낡은 금고를 발견했다. 까만 직육면체 상자에 손잡이와 번호판은 금빛이고 윤기가 흐른다. 이게 진짜 금일까 궁금증을 자아내는 매혹적인 유품이 장식장 문을 열자 깊숙이 들어 있었다.
용돈을 줄 때도 이 금고에서 꺼내주진 않으셨는데, 도대체 이 속엔 무엇이 들어있을까? 아무리 열려고 돌려봐도 열리지 않는다. 통장 비밀번호와 일치할까 싶어 맞춰 봐도 안 되고, 식구들의 생년월일을 돌아가며 넣어 봐도 안 된다. 평생을 모시고 살던 민서도 할아버지가 이 금고를 직접 눈앞에서 연 적이 한 번도 없다는 게 놀랍다.
소중한 물건은 무엇이든 쟁여두고 가장 안 좋은 것부터 쓰는 게 할아버지 생활의 철칙이다. 수건도 가장 낡은 것들이 다 떨어져야 다음 것으로 옮겨가 장롱에는 묶음 띠조차 풀지 않고 수건 곽조차 순서대로 두어 인생의 역사가 수건을 보아도 알 수 있는 분이다.
손수건도 새 것은 접어두고 낡은 것부터 쓰다가 떨어진 것은 돌돌 말아 목이 추운지 두르고 있다. 어느 날 손자가 기침을 하니 그것을 풀어 아기 목에 매주었다. 땀에 전 낡은 손수건을 두르고 있는 아들을 보던 언니의 표정이 이 시간 또렷이 살아난다.
조선시대 조상님으로부터 물려받은 것 같은 이 금고는 그래서 감히 함부로 일상생활에서 쓰지 않고 고이 모셔두었던 듯하다. 평상시 돈을 출납할 때 당신이 손수 짠 상자를 열고, 봉투 겉봉엔 ‘건강하십시다.’나 ‘축하합니다.’ 등을 쓰고 김주철 당신 함자를 꼭 써서 책갈피에 넣었다가 주셨다. 돈은 인물이 앞으로 오게 간추려서 단 한 번도 정리되지 않은 돈이나, 봉투에 넣지 않은 돈을 받아본 적이 없다.
아니, 금고에서 돈을 꺼내준 적이 단 한 번 있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할아버지가 엄마를 불렀었다. 금고는 열려있었고, 헝겊주머니를 주셨다.
“네 엄마 저승 노잣돈이다.”
“언제 동전을 이렇게 모았어요?”
“뭔들 가져갈 수가 있니? 멀고 험한 저승길 맨발로 걸어간다던데 이거라도 있으면 덜 힘들지 누가 아냐? 평생 고생만 시켰는데.”
그 때 금고에서 10원짜리 백 개가 들어있는 동전주머니를 꺼내주었는데, 황망한 상황이라 비밀번호를 생각할 틈도 없었다. 가장 자주 드나들었던 고모도 비밀번호를 몰랐다. 통장 등 금융자산은 아빠가 동사무소에 신청하니 다 볼 수 있는데, 집에 있던 금고는 볼 방법이 없다.
“저 속엔 금괴가 있을 거야. 아니 5만 원 권 다발이 꽉 차 있을 거야.”
“아니 금은보화를 사 모았는지 모르지.”
식구들은 모여 앉으면 열리지 않는 금고를 두고 별별 상상을 하다 고모들은 돌아가곤 했다. 그 후 고모들에게 유산상속을 해야 했다. 돈이 모자라 집문서를 잡히고 은행융자를 받으려는데 건물 등기부 등본이 아무리 찾아도 없다. 할아버지가 관리했는데, 꼼꼼한 분이니 잃어버렸을 리는 없다. 너무 잘 두어 못 찾는 것이라 여기고 서류 하나하나 돌아가며 넘겨보았다.
등기부 등본 사본이란 서류만 있을 뿐 진본은 없었다. 한 달간 그 방을 정리해 유품을 챙겼던 작은 고모가 다시 찾아보아도 없어 그거야말로 저 금고에 있을 것이라고 어떻게든 열어보려고 했다. 은행에선 집문서를 가지고 오라고 하고 금고는 안 열리니, 아빠가 화가 났다.
“이걸 도끼로 뽀갤 수도 없고 미치겠다.”
그는 다이얼 숫자가 있는 손잡이를 팍 치니 벌컥 열렸다. 그렇다. 세상은 무엇을 포기했을 때 한 발자국 나갈 통로를 열어준다.
왜 금고는 꼭 잠겼을 거라고 생각했을까? 금고 비밀번호를 안 가르쳐 주었던 것은 잠그지 않으니까 그런 건데 엄청난 것이 이 속에 있고, 식구들에게 비밀로 했을 것이라는 것을 기정사실화 했다. 금고 문이 열리자 서로 안을 보려고 고개를 디밀었다. 왜냐하면 문이 안 열리면 안 열릴수록, 그 만큼 대단한 무엇이 있을 것이라고 상상을 부풀려왔다.
과연 누구 말이 옳았는지 내기를 하자고 했다. 위에는 도장 열쇠 등 오래된 것이 들어있는데 중요해 보이지는 않았다. 얼른 나무 덮개를 치워보라고 고모가 야단이다. 아빠는 빙긋이 웃으며 식구들을 둘러본다.
“네 할아버지가 귀한 보물을 여기에 숨길만한 여유가 어디 있었니? 평생 고생만 하셨는데.”
“그러게요. 소중한 것이 있었으면 벌써 주셨지.”
아빠는 심드렁한 척 받아 넘기면서도 눈은 금고를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덮개를 치우니 현금은 없고, 누런 종이들이 차곡차곡 쌓여있고, 할아버지와 아빠 이름의 문패가 나왔다. 방배동 나란히 살던 주택에서 이사 올 때 떼어와 집에 대한 추억을 쓰다듬고 계셨나보다. 상당한 무게가 느껴져 금괴가 가득 들었을 거라고 주장하더니 실망했다. 낡은 반지. 목거리, 옥 팔지, 호박 달린 노리개 등이 나왔다.
아빠가 이거 끼어보라고 주는데 엄마 손가락에 딱 맞는 알 반지이다. 차곡차곡 정리된 것들을 넘긴다. 집 등기부 등본은 없다. 문득 비밀번호가 없었던 금고처럼 사본이라고 써놓은 서류에 뭔가 있을 것 같아 다시 들여다본다. 아! 붉은 인주가 찍혀있다. 사본은 검은 프린트로 나오니까. 혹시 손을 탈까봐 이런 기지를 발휘했나보다. 민서가 싫어하던 할아버지의 멋진 모습이 자꾸 드러난다. 홈 플러스 상품권을 발견한다. 이게 얼마나 묵었을까? 쓸 수는 있을까?
“내일 외할머니 병문안 가면 거기 홈 플러스 있으니 뭐 사봐. 못쓰면 말고.”
빈약한 내용물을 보며 문이 열리지 않을 때 상상하던 게 훨씬 행복했다.
“이 상품권으로 뭐 사다 먹을까? 외할머니, 뭐 필요한 것 있으세요?”
외할머니는 필요한 것은 다 있다. 증손들이 광장에서 노는 것 보는 게 제일 좋다고 한다. 상품권을 막내사위에게 주었다.
“이 상품권 어떻게 쓰면 좋을까?”
“10만원 어치 슈퍼보아다 먹긴 그런데요. 여기 빕스 식사도 가능하다고 찍혀있으니
거기서 점심을 먹지요.“
젊은 애들이 다 좋아한다. 외할머니는 이제 쉬고 싶다고 하여 병실로 휠체어를 끌고 들어가고, 사당역 ‘빕스’에서 먹기로 한다.
그 때 횡단보도 앞에 이중 충돌사고가 난다. 애들은 빕스에서 밥 먹는 것보다 더 흥분한다. 바로 앰블런스가 달려왔다. 장난감 119를 밀며 삐뽀삐뽀 노래 부르던 현실이 직접 사람을 실어 나르는 앰블런스가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아이들을 가자고 손목을 잡아 끄니 고함을 지르며 주저앉더니 손으로 그곳만 가리킨다.
무슨 연예인이라도 보듯 달려들려고 한다. 소방관도 아니고 소방차가 되겠다는 아이들은 들것으로 사람을 나르는 모습을 신기하게 바라본다. 남은 다쳐 위급상황인데 아이들에겐 흥미진진한 구경거리가 되고. 모든 게 현실과 생각은 차이가 있다.
식당에서 다행히 상품권은 쓸 수 있었고, 생일 식사 초대권에다 cj카드로 할인을 받으니 야간 보태서 열 명이 식사할 수 있었다. 돌아가셔서도 양식을 사주시는 할아버님의 선물을 받고 보니 만감이 교차한다. 고모가 쓰라고 드린 것을 금고에 쟁여두었다 이렇게 멋진 만찬을 대접해주는 할아버지.
엄마도 조그마한 알반지를 보며 좋아하며, 이 세상을 떠날 때 기뻐할 보물들을 어찌 숨겨놓을까 궁리해 본다. 행복은 기획을 잘해야 여러 사람을 즐겁게 하는 것이리라. 많고 화려한 것보다 이렇게 잔잔한 행복을 주는 할아버지는 정말 멋쟁이다.
그 많은 짐을 정리하고 아빠가 여생을 살 집을 만들기 위해 집수리에 들어갔다. 49재까지는 그 물건에 집착했던 혼령이 지키고 있는 것 같아 그대로 두다가, 대를 물려야 할 유품과 골동품들을 빼서 두고 고모를 불렀다. 유품들 챙겨 가라고.
일본사는 막내 고모는 가져가고 싶은데 무거워서 망설이더니 몇 가지를 챙겼다. 문패와 일본 유학시절 읽던 일본어로 된 누런 책 등이었다. 큰 고모는 직접 만든 물건과 연장을 챙기고 다 버리라고 했다.
하지만 작은 고모는 달랐다. 매일 와서 그 방 물건을 하나씩 정리하며 나르기 시작했다. 가져가는 것을 보니 낡은 비누 곽, 할머니가 직접 수놓은 자목련 액자 등이다. 여고 다닐 때 학교에서 수놓은 것이라는데, 정말 잘 놓았다.
그걸 보고 큰고모는 그러면 너희 집은 아버지처럼 고물상이 되고 만다고 뭐라 했지만 할아버지를 무척 좋아해 반은 할아버지 옆에서 지내던 효심의 발로를 누가 말리겠는가. 큰 고모 집엔 작년에 103살에 돌아가신 시어머니의 유품이 이미 쌓여 있어 웬만하면 이참에 정리해야지 나날이 좋은 물건이 나오는 세상에 둬봐야 사용할 일은 없다고 단언했다. 1주일 내로 정리하고 열쇠를 엄마를 주라고 야단이었지만 한 달을 그 방에서 무언가를 찾아갔다. 엄마는 여기가 친정인데 아무 때나 따고 들어오라고 열쇠 받기를 거부했다.
그렇게 반년을 보내고 집수리에 들어갔다. 설비 업자가 사다리차를 불러 3차를 실어냈다. 고물로 처리할 것이 많아서 고물상에 갖다 주니, 무료로 다 받아준 것을 보면 재생될 것이 꽤나 있었던 듯, 역시 쓸모 있는 물건이긴 했었나보다.
사다리차에 물건을 내버리던 날, 이제부터는 세 딸과 엄마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35년을 시집와서 살다보니 물이 들었다고 분명히 버릴 것을 제대로 분간하지 못할 것이라고 막내딸이 휴가를 내서 사다리차에 마구 내려 보냈다. 그녀들 집의 산뜻하고 간결함을 떠올리며 어느 정도까지는 모르는 척 했다.
그런데 장롱과 화장대에서 의견이 부딪혔다. 14년 전 이곳으로 이사 올 때 할머니가 시집올 때 해온 장롱에 애착을 보였지만 서랍 등이 잘 맞지 않고 낡아 설득해 버리고 사드린 장롱이라 쓸 만했다. 옷 방을 뜯어내고 그 옷을 거기에다 보관하고 싶어 하는 엄마에게 한샘가구로 붙박이장을 짜고 버리라고 세 딸의 성토가 시작되었다.
아무래도 아빠가 산 할머니 장이니까 결정을 해 달랬더니, 버리지 말고 지저분한 것을 그 장에 다 집어넣으라고 했다. 그리고, 집수리도 너무 대대적으로 하지 말고, 도배장판 하는 수준으로 하자고 하여 부부 간 집수리에 대한 의견의 차까지 있었다.
환갑이 지난 엄마는 이 작업들이 너무 부담스러웠다. 이미 입술이 터지고 잇몸이 부어 몸살이 났다. 이제 이 집을 고치면 살아생전 이 상가주택에서 사는 거지 또 다시 집수리는 못할 것 같다. 7식구가 살던 집에 조부모님이 이집에서 주무시다 평안히 돌아가시고, 딸들이 시집가면 부부가 3층 4층을 쓰고 옥상에 꽃을 가꾸며 살 것이다. 용평에 전원주택을 마련하여 그곳에서 야채 심어다 먹고 물 떠다 먹으며 왔다 갔다 하며 살 집이고보니, 집수리를 근본적으로 오래 살게 고치는 것이 목표였다.
그런데 한샘 직원이 견적을 뽑으러 들이 닥쳤다. 이서 언니가 불렀다. 아일랜드 식탁까지 있는 ㄷ자 주방 일체와 붙박이장 신발장까지 견적 뽑아온 것을 보니 금액이 어마어마했다. 엄마가 지금 마이너스 통장까지 써야하는데 이렇게 비싼 것을 어찌하느냐고 했더니 이건 세 딸의 선물이니 제발 저 낡은 장을 버리라고 고집을 피웠다. 그래도 그들의 살림살이 빤히 아는데, 무리였다. 한 집에 100만원씩만 내어 주방을 해 달라 하고 나머지를 캔슬시켰다.
딸들은 밤색으로 된 문과 테를 떼어내고 흰색 계통 문을 만들고 나머지는 벽지로 다 붙이라고 한다. 지금 유행은 그렇지만 노년의 삶이 어디까지인지 모르는데, 기본적인 것은 이것이니까 바꾸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여기는 늙은이 집이니까 너희 집이나 신혼부부 집으로 화사하게 꾸미라고 했다.
하지만 이번에 안 고치면 후회한다면서 설득해왔다. 상아색으로 문을 바꾸니까 집이 환하고 다른 집 같았다. 건설 회사를 평생 다닌 아빠보다 안목이 나았다. 몇 년 살고나면 도배할 즈음엔 이사를 해서 새롭게 시작했던 젊은 날의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 때는 5년마다 집을 늘려 수리를 하고 이사를 하는 것이 정례화 되었고 그러면서 살림을 늘렸다. 이제 여기서 평생 살 집을 마련하는 모습은 처연하다.
노년의 모습은 어떨까? 피트니스를 다녀도 도무지 줄지 않는 몸무게, 더 살이 찌진 말아야 할 텐데. 그저 꾸준히 운동을 하고 둘레 길을 걷고 탄수화물 섭취를 줄여야 하리라. 지금 아빠는 허리 무릎이 아프고 엄마는 혈압 약을 먹으며 살고 있는데, 아무래도 약의 개수가 점점 늘어나지는 않을까? 이제 짐도 늘리지 말고 건강관리하고, 여행 다니며 살 일만 남았다. 언제 떠나도 홀가분하게 정리하며 살 때다.
첫댓글 작품 한 점 탈고할때마다 엄청난 에너지가 소모될텐데 그랟 건강하시어 작품활동 하시니 참으로 존경 스럽 습니다
고마운 말씀!
동문회장 하느라 힘들 텐데 응원해줘서 감사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