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가 꿈꾸다 / 민명자
# 돼지, 1
나, 돼지. 아니, 옥자예요. 돼지에게도 이름이 있냐고요? 네, 주인님이 지어주었어요. 영화 <옥자>를 생각하며 지었대요. 내 친구들도 이름이 있어요. 내가 사는 곳은 저 푸른 초원이에요. ‘초원의 돼지 하우스’라고 하지요. 돼지가 왜, 돼지우리 안에서 살지 않고 초원에서 사느냐고요? 나는 ‘초식돈’이거든요. 주인님을 잘 만난 덕분이지요.
나, 더럽지 않아요. 나랑 내 친구들은 우유와 풀을 먹고 살아요. 그러니까 똥, 아니, 변 냄새도 그리 심하지 않아요. 풀 향기가 난대요. 먹은 대로 배설하는 게 인지상정 아니겠어요?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우리가 애초부터 우리에 갇혀 산 건 아니었지요. 사람들이 살과 뼈를 얻으려고 우리를 좁은 우리 안에 가둔 채 가축으로 길들이고, 우리는 그 안에서 몸 비비대며 먹고 싸고, 그러다보니 더러운 동물로 전락한 것이지요. 닭들이 몸도 움직일 수 없는 비좁은 닭장에서 제 알 한 번 품지도 못하면서 달걀 기계 노릇을 하는 거나 다를 게 없지요. 순전히 사람들을 위한 헌신 아니겠어요? 나의 주인님은 우리에게 목욕탕과 분만실과 그늘막도 마련해 주었어요.
나, 미련하지 않아요. 게으르지도 않아요. 주인님이 “옥자야, 이리와~”하고 부르면 얼른 알아듣고 쫄랑쫄랑 뛰어가지요. 달릴 줄도 알거든요. 뒤뚱뒤뚱 꿀꿀, 그렇게만 살진 않아요. 더럽다, 미련하다, 이런 건 다 인간님들이 만들어 놓은, 순전히 인간님들의 눈으로 본 돼지 세상이고 돼지 모습 아닌가요? 반려견이나 반려묘만 있고 반려돈은 없으란 법이 있나요?
# 돼지, 2
너, 돼지, 아니, 옥자라고 했지? 그래, ‘초원의 돼지 하우스’는 예전에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보았어. “돼지는 내 인생의 전부”라고 말하는 주인님과 함께 있으니 행복하겠구나. 네 주인은 또 말하더구나. 돼지는 자신의 꿈이자 미래라고. 그래서 자기 일생에 그 하우스 하나 만들었다고. 너는 주인이 간식을 주려고 부르면 빠르게 달려가더구나. 하긴, 네 말이 맞아. 돼지는 게으르고 느리다는 것도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편견인 게야.
너와는 달리 영화의 주인공 옥자는 유전자 조작으로 태어난 슈퍼돼지야. 그 새끼돼지들이 세계 각국으로 한 마리씩 보내져. 겉으로는 그럴듯하게 자연친화적인 환경과 생명을 내세우지만 실은 상업주의에 물든 인간의 탐욕이 숨어있지. 그 중 한 마리가 강원도 산골소녀 미자와 살게 되는 거야. 할아버지와 단둘이 살던 미자는 옥자랑 가족처럼 평화롭게 지내. 옥자 이빨도 닦아주고 발바닥 가시도 빼주고 과일도 나눠먹어.
옥자는 덩치가 무서울 만치 크고 얼굴은 하마처럼 생겼지만 성격이 온순해. 눈물도 흘릴 줄 알아. 미자가 절벽에서 떨어져 위험한 순간에는 옥자가 제 몸을 던지는 기지를 발휘해서 구하기도 하지. 그렇게 자연 속에서 정을 나누며 십여 년을 지냈는데 결국 큰 일이 벌어지고 말아. 뉴욕 인근의 다국적 기업 ‘미란도’에서 옥자를 데려가려는 거야. ‘베스트 슈퍼돼지 세계대회’가 명분이지만 옥자가 뽑힌다한들 홍보용일 뿐, 막판에는 거대한 도축공장에서 안심, 등심, 목살, 부위별로 조각조각 토막 나서 목숨을 잃을 게 뻔하지.
돈에 눈먼 인간들이 돈(豚)을 돈벌이 수단으로 삼는 거야. 그 횡포에 맞서는 미자는 옥자를 지키려 우여곡절 끝에 뉴욕까지 가게 돼. 좌충우돌 필사적인 구출작전이 펼쳐지는 거야. 여기에 ‘동물해방전선(ALF)’ 요원들이 힘을 합쳐. 옥자가 도살되려는 아슬아슬한 찰나에 미자가 ‘미란도’측에 금돼지를 던져주고 구해내는 장면이 여러 생각을 하게해. 금돼지는 할아버지가 옥자를 내주는 대신 받은 것이지. 제 새끼를 살리려 도살장에서 옥자 쪽으로 몰래 밀어내는 부부돼지는 또 어떻고. 짐승이 보여주는 부모사랑에 마음이 짠했어. 덕분에 그 어린 돼지는 목숨을 보전하고 미자네 식구가 되지.
# 돼지, 3
초원의 옥자야. 너랑 네 친구들, 그리고 슈퍼돼지 옥자를 보면서 나는 생각했어. 조지 오웰의 <동물 농장>을. 소설에서는 동물들이 인간의 횡포에 맞서지. 수퇘지 메이저 영감은 인간의 착취에 길들여진 동물들의 잠자던 의식을 일깨워. 인간악습에 물들지 말아야 한다며 ‘영국의 동물들’ 노래도 가르쳐 줘. “우리가 해방되는 그날 영국의 들판은 더욱 밝아지고 강물은 더욱 맑아지리라.”고. 그렇지만 늙은 메이저는 사흘 뒤, 잠자다가 숨을 거두고 말아.
살아있는 동물들은 그 노래를 잊지 않아. 부당한 처사에 성난 동물들은 농장주 존스를 쫓아내버려. 동물들은 우선 일곱 계명부터 정하고 이상적인 동물공화국 건설을 꿈꾸지. 그 첫째 계명은 “두 발로 걷는 자는 모두 적이다.”이지. 둘째 계명은 “네 발로 걷거나 날개가 있는 자는 모두 동무다.”라네. 그들은 인간 흉내를 내지 말자고 다짐해. 옷을 입거나, 침대에서 잠을 자거나, 술을 마시거나, 다른 동물을 죽이는 일을 배격해. 그들을 이끌어가는 동물이 바로 돼지들이야.
이 소설이 스탈린 시대의 정치를 풍자한 우화라는 건 널리 알려져 있지만, 나는 조금 궁금해. 조지 오웰은 많은 동물 중에서 왜, 하필, 돼지를 우두머리로 내세웠을까. 동물농장에서 돼지들이 차츰 인간들이 하는 짓을 답습하는 걸 보면 조지 오웰도 돼지를 긍정적으로 본 것만은 아닌 것 같아. 하여튼, 순수한 이상주의자 스노볼은 영영 추방당하고, 권력지향의 독재자 나폴레옹은 다른 동물들 위에 군림하면서 인간과 뒷거래까지 하고, 교활한 달변가 스퀼러는 통계조작까지 해.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라는 마지막 계명도 무색해져.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간의 불평등은 여전하고, 억압과 착취와 권모술수 등 못된 인간들이 하던 짓을 그대로 자행해. 일곱 계명도 교묘하게 단어를 바꾸는 속임수로 자기들 행동을 합리화하고 본질을 변질시키지. 뭐니 뭐니 해도 소설의 마지막 문장이 서늘해. “이미 누가 돼지이고, 누가 인간인지 구별할 수 없었다.”라는.
# 우리, 돼지들
옥자야. 시간은 흐르고 시대는 바뀌어도 인간들이 돌고 도는 세상의 쳇바퀴는 그다지 변치 않는 것 같아. 참으로 어이가 없어서 잊히지 않는 일이 있어. 아, 글쎄, 나랏일하시는 어떤 높은 분이 “민중은 개·돼지로 보고 먹고 살게만 해주면 된다”고 했다네. 99% 민중이라니, 신분제를 공고화해야 한다니…. 어쩌니. 나도, 앞집 아저씨 옆집 아주머니도, 이 동네 할아버지 저 동네 할머니도, 졸지에 멍멍이 꿀꿀이가 되고 만 거야.
영화대사를 본뜬 것이라지만 공인(公人)이 어찌 그리 사려 분별없이 함부로 말할 수 있담. 뇌리에 잠재한 평상시 인식이 문제인 게지. 그분이 잊은 게 있어. 호모사피엔스로서의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지만 동물의 종(種)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을, 모든 민중은 두 발 달린 동족이거늘 자신도 그 테두리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무엇보다도 선량한 민중이 있으매 자신이 높은 자리에서 일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아무리 하찮게 보일지라도 민중은 힘이 세다는 사실을.
그런데 말이야. 안하무인 잘난 분들도 돼지꿈을 꾸면 길몽이라고 혹시 로또복권이라도 사지 않을까. 인격을 지녔다고 자부하면서 돈격(豚格)을 마음대로 올렸다 내렸다 하는 인간들이 많거든. 돼지를 보면 혐오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혀를 쯧쯧 차면서도 그 살코기 앞에서는 입맛을 다시거나 어떤 때는 복돼지라고 추켜세워. 그래서 저금통이 된 돼지친구들은 손때 묻은 돈을 꾸역꾸역 받아먹어. 알량한 동전 나부랭이가 몸속에 가득차면 그 안에 있는 것 탈탈 다 털리고 빈 몸뚱이가 되지. 돼지는 죽을 때도 실눈으로 살짝 웃어야 굿판에서도 대접을 받아. 인간들은 웃는 돼지 머리를 골라서 무자비하게 뎅겅 잘라 상 위에 올려놓고는 입에 돈을 물려주면서 운수대통을 빌어. 모든 생명은 어차피 한 번 죽지만 죽어서까지 인간의 몸을 위해 제 몸을 남김없이 바치는 게 돈(豚), 바로 그대들의 운명이라네.
옥자야. 여자는 남자하기 나름이 아니라 돼지는 사람하기 나름인 게야. 너는 주인 잘 만나 살아있는 동안이나마 초원에서 편히 먹고 자며 평화를 누리지만 슈퍼돼지 옥자는 물질만능에 찌든 인간들이 생명의 존엄성을 경시하고 만들어낸 욕망의 상징물이잖아. 아, 또, 나폴레옹이나 스퀼러 같은 돼지들이 소설에만 있겠니.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 현대판 동물농장 곳곳에 그런 리더가 많을수록 구성원의 삶은 암담해지지. 지도자가 세상을 보는 시각과 마음가짐에 따라 민생의 질도 달라지기 마련이니까.
옥자야. 뜨거운 냄비 속 같던 한해가 어느새 가고 새해가 성큼 왔네. 지난해엔 위대한 대한민국이 아닌 헬조선에서 경멸과 수모를 견디며 살아야 했던 다수의 을남을녀들에겐 팍팍한 일들이 도를 넘었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는 게 좋을까. 그저 세상 탓 할 것 없이 비속하고 잡스러운 행태에 눈귀 더럽히지 말고 제자리에서나마 껑충껑충 뛰기라도 해볼까?
아니야. 더 나아가야해. 새해는 마침 ‘황금돼지 해’라지? 누구에게나 꿈꿀 권리가 있어. 그것은 살아있다는 증거이니까. ‘시절이 하 수상하여 매화가 필둥 말둥 할지라도’ 우리가 가야할 길을 찾아 당당히 가는 거야.
하여, 나는 꿈꿔. 1%의 개·돼지에게 휘둘리지 않는 대한민국이 되기를. 암울한 현실에 몸 적시고 침묵으로 저항하는 뭇사람들이 희망의 신발 끈 질끈 동여매고, 굴신(屈身)했던 허리 쫙 펴고, 힘내서 마음껏 달릴 수 있기를. 발 딛고 서있는 땅이 비록 거친 들판일지라도, 어둠을 헤치고 하늘로 치오르는 일출처럼 빛나는 도약을 위하여, 2019의 새로운 고지를 향하여, 다 함께 꿈꾸며 용기 있는 행군을 할 수 있기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