껍데기 친구, 진짜 친구
변호사 엄상익
고등학교 시절 주위를 보면 부잣집 아들이 참 많았다. 같은 반의 앞자리에는 두산그룹 회장이자 전경련 회장인 박용만이 앉아 있었다. 그 외에도 쌍용그룹, 삼양사그룹, 녹십자그룹, 한화그룹 등 부유한 집 아이들이 많았다. 부유한 집 아이들은 대체로 성품이 온유하고 착했다. 부모의 교육도 철저한 것 같았다.
그 시절 박정희 대통령과 사범학교 동기이고 정계와 재계를 주름잡고 있던 분의 외아들이 같은 반이었다. 부잣집 아들답지 않게 검정교복의 색이 바래고 옷 솔기가 해진 옷을 입고 양철 도시락에 싸 온 점심도 소박했다. 남의 눈에 띄지 않고 더욱 낮게 처신하도록 교육을 받은 것 같았다.
물론 예외도 있었다. 대부분 가난하던 그 시절 고교생이 빨간 스포츠카에 예쁜 여학생을 태우고 서울 거리를 폭주하기도 했다. 그런데 부잣집 아들에게 기생충처럼 따라붙는 아이들도 있었다. 겉으로는 친구지만 실제로는 부하였다. 그 인연으로 대기업에 들어가기도 하고 거기서 출세의 사다리를 타고 사장이 된 경우도 있었다. 중고등학교 동창인 한 친구가 나의 법률사무소를 찾아왔다. 그가 기운 없는 얼굴로 내게 이런 말을 했다.
“김 회장 그 친구 말이야, 중학교 때부터 평생 우리들 몇 명이 그렇게 모시면서 도와줬는데도 너무 인색해.”
그가 안타까웠다. 부자는 사람보다 돈을 사랑하기 때문에 부자가 된 게 아니었을까. 그들이 친구였던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부자 친구를 평생 따라다니던 또 다른 친구가 나의 사무실을 찾아왔다.
그에게는 섭섭함만 남아 있었다. 그는 중학 시절부터 재벌가 아들의 주먹을 쓰는 부하 역할을 하는 바람에 대기업에 들어갈 수 있었다. 친구인 회장의 심복이 되어 룸쌀롱을 드나들고 여자관계에 문란하다가 공금을 건드려 파면당했다. 친구가 회장을 하는 재벌그룹에서 임원을 한 친구들이 나중에 하는 말을 들어보면 모두 친구인 재벌 회장이 얼음같이 차다고 얘기했다. 그들은 과연 친구였을까?
변호사를 하다 보면 진짜 친구가 어떤 존재인지를 깨닫는 순간이 있다. 한 조폭 두목이 감옥에 갇혔다. 그의 조직원은 물론 그와 관계를 맺었던 모든 사람들이 면회를 가지 않았다. 그를 접촉한 사람은 검찰의 수사 대상이 되기 때문이었다.
유일하게 한 사람이 위험을 무릅쓰고 조폭 두목을 도왔다. 그는 건달 출신이 아니었다. 조폭 두목과 어려서 가난한 동네에서 한 시절을 같이 살았던 인연일 뿐이었다. 한 사람은 조폭 두목이 됐고 다른 한 사람은 시인이 되어 강원도 산속에서 가난하게 살고 있었다. 혼자 조폭 두목을 돕는 그 시인이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세상이 모두 욕하고 등을 돌려도 나는 그 친구를 도울 거예요. 남들은 그 친구가 살인하고 조폭 두목이라고 손가락질을 하고 돌을 던져도 나는 친구라고 생각해요. 함께 욕을 먹고 돌을 맞아 줄 겁니다.”
가난한 시인이 갑자기 눈이 안 보여 수술을 앞두고 있었을 때 그 조폭 두목이 남몰래 돈을 보낸 적이 있었다고 했다.
나의 친구가 아닌 사람은 내가 그의 뒤를 늘 쫓아다녀도 그는 나를 떠나고 만다. 진짜 친구는 내가 붙들지 않고 평소에 떨어져 있어도 필요할 때면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