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295
10월31일 [연중 제31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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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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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PmQBtOjL2To (김두중 베드로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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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채워져 있어야>
바람직한 영성생활, 복음서가 요구하는 신앙생활이 어떤 것인가 묵상하던 중에 여러 신앙의 선배들께서 강조하셨던 “기도하는 것은 사랑하는 것입니다.”라는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내가 받은 충만한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 내가 체험한 강렬하고 뜨거운 하느님 사랑이 자연스럽게 동료 인간들을 향해 흘러가는 것이야말로 제대로 된 영성생활이요 참된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 요청하시는 사랑은 곰곰이 생각해 보니 통합된 사랑, 조화가 이루어지는 사랑이더군요. 하느님 사랑 따로 이웃 사랑 따로가 아니라 하느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 사랑의 실천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그런 사랑 말입니다.
눈에 보이는 이웃들을 바라볼 때 허물과 죄 투성이인 인간 존재만을 바라볼 것이 아니라 그 나약한 인간 존재 안에 현존하고 계시는 하느님의 얼굴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형제들과의 때로 구차스런 일상생활을 살아나갈 때조차도 그 관계 안에서 거룩한 하느님의 얼굴을 발견해나가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을 만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과의 깊은 일치 안에서, 거룩한 성사 안에서, 엄숙한 전례 안에서도 동료 인간들, 특히 고통 속에 신음하는 이웃들을 생각해야할 것입니다.
구약 시대 전체의 결론은 결국 하느님의 한없는 자비요 사랑입니다. 복음서의 요약 역시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의 우리 인간을 향한 연민의 마음이요 목숨까지 내어놓는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인류에게 남겨주신 유일한 유언 역시 사랑입니다.
결국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지는 매일의 과제이자 평생의 숙제는 사랑의 실천입니다. 부단히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을 향해 발돋움하는 노력, 우리가 받은 놀라운 하느님 은총과 사랑을 배경으로 동료 인간들을 향해 손을 내밀어주는 노력,그리고 비록 마음에 들지 않는 결핍 투성이인 나 자신을 향한 연민의 마음...
언젠가 여름 캠프에 온 청소년들을 위해 배식을 해줄 때였습니다. 길게 줄을 선 청소년들이 식판을 들고 제 앞으로 다가오면 큰 가마솥으로부터 한 국자씩 퍼 담아줬습니다. 야외 체험 학습을 열심히 하고 온 뒤라 다들 배가 고팠던지 많이 달라고 했습니다.
손이 워낙 큰 저이기에 ‘오냐, 그래 많이들 먹어라’하며 팍팍 퍼줬습니다. 그러다 보니 나중에 문제가 터지고 말았습니다. 앞에 아이들에게 너무 팍팍 퍼주는 그 많던 국이 순식간에 바닥나고 만 것입니다. 결국 나중에 온 아이들에게는 더 이상 퍼줄 국이 없어 난감해 했던 기억이 납니다.
마찬가지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나란 그릇에 뭐든지 가득 담겨 있어야 그것을 동료 인간들에게 나눠줄 수가 있습니다. 내 안에 하느님 사랑이라곤 손톱만큼도 없는데, 내 안에 든 것이 없는지, 내 머릿속이 텅텅 비었는데, 내 영혼이삭막한데, 무엇을 이웃들에게 나눠줄 수 있겠습니까?
이웃들에게 하느님 사랑을 나눠주고 싶습니까? 고통 받는 이웃들에게 하느님의 따뜻한 위로와 충만한 은총을 건네주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다른 무엇에 앞서 나 자신을 하느님 사랑으로 가득 채워야 합니다. 내 내면, 내 영혼, 내 정신을 하느님 연민과 자비의 마음으로 충만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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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같은 생각을 이루어, 나의 기쁨을 완전하게 해 주십시오."
<복음 선포자들의 가장 큰 위로>
얼마 전에 제가 주기적으로 만나오던 신자들 한 팀 내에 분열이 생겨서 서로 갈라지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두 팀에서 각자 저를 만나고 싶다고 합니다. 그러나 저는 두 팀을 다 만날 힘이 나지 않습니다. 몇 년 동안 만나온 것이 허사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저도 어쩔 수 없이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라 저를 만나는 사람들이 그 복음을 받아들여 주님의 뜻 안에서 하나가 되는 모습을 볼 때, 제가 그 사람들을 계속 만나고 싶은 열의가 더 솟구치게 됩니다.
필리피서는 복음을 전하는 바오로 사도의 기쁨이 어디에 그 근거를 두고 있는지 잘 알려줍니다. 당시 필리피인들 사이에서 온전한 사랑이 아닌 이기적인 마음으로 복음을 전하는 이들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복음을 전하는 이들 중 “어떤 이들은 시기심과 경쟁심으로 그리스도를 선포”(필리 1,15)하기도 한다고 말합니다.
또 그들은 바오로를 시기해서 자신의 입지를 더 굳히려고 “이기심이라는 불순한 동기”로 복음을 전합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는 그런 사람들을 신경 쓰지 않습니다.
“아무려면 어떻습니까? 가식으로 하든 진실로 하든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니, 나는 그 일로 기뻐합니다. 사실 나는 앞으로도 기뻐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복음선포자들의 자질을 판단할 권리는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악을 선으로도 바꾸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그저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에 기쁨을 두어야 합니다.
이렇게 “뜻을 같이하고 같은 사랑을 지니고 같은 마음 같은 생각을 이룬” 사람들이 많아짐을 보는 것이 복음을 전하는 이들이 받는 보상, 즉 기쁨입니다.
지난 한 달 정도 강의가 많아 조금 피곤한 느낌이 듭니다. 그런데 그 일정을 모두 소화한 지금, 몸은 피곤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 뿌듯함이 올라옵니다.
‘사제는 사제를 필요로 한다’라는 책 제목이 있습니다. 무언가를 향해 앞으로 달려가다 보면 조금은 지칠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같은 방향으로 열심히 달리는 누군가를 보면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에 위로가 되고 힘이 됩니다.
제2차 대전 중 한 어린 영국 군인이 총에 맞아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동료가 그에게 마지막으로 할 말을 물었습니다. 그는 먼저 어머니에게 “아들은 고통 없이 기쁘게 죽었습니다”라고 전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자신이 다니던 교회의 주일학교 교사에게 “선생님의 가르침 덕으로 저는 그리스도인으로 편하게 눈을 감습니다. 감사합니다.”라고 전해달라고 했습니다.
그 병사는 어머니에게 말을 전하고 그 선생님을 찾았는데 그 선생님은 “사실 저는 주일학교 교사를 하다가 지쳐서 그만두었습니다. 그러나 다시 해야겠다는 마음이 생겼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씨 뿌리는 사람에겐 추수만큼 큰 위로가 없습니다. 복음선포자에겐 그 복음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는 것만큼 큰 힘을 주는 것이 없습니다.
어떤 이들은 위로해준다는 것이 오히려 저에겐 스트레스가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이들을 기쁘게 해 주는 유일한 방법은 그 전한 복음으로 같은 주님의 뜻과 생각을 품은 동료 복음 선포자로 태어나는 것을 보여주는 것뿐입니다.
복음 선포자의 가장 큰 위로자는 자신이 낳은 또 다른 복음 선포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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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오늘은 10월의 마지막 날입니다. 뉴욕의 단풍도 절정에 이르고 있습니다. 단풍이 아름다운 것은 내 마음이 아름다운 단풍을 바라볼 수 있는 여유가 있어야 합니다. 내 마음이 불안하면, 내 마음이 고통스러우면 단풍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볼 수 없습니다. 단풍이 아름다운 것은 조화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파란 하늘과 구름이 있고, 아름다운 호수와 계속이 있고, 한적한 산책로가 있는 곳의 단풍이 아름답습니다. 빌딩 숲 한 가운데 있는 단풍은 외롭기 마련입니다. 단풍이 아름다운 것은 멀리서 보기 때문입니다. 가까이에서 보면 단풍도 색이 바란 것도 있고, 벌레 먹은 것도 있기 마련입니다. 단풍이 아름다운 것은 빛이 있기 때문입니다. 빛이 없다면 마음에 여유가 있어도, 아름다운 산에 있어도 단풍의 아름다움을 볼 수 없습니다. 우리의 신앙도 그렇습니다. 하느님 은총의 빛이 없다면 우리의 신앙은 결코 아름다울 수 없습니다. 우리의 모든 행동과 우리의 모든 삶은 하느님 은총의 빛 속에 있어야 아름다울 수 있습니다.
10월의 마지막 날을 보내면서 얼마 전에 읽었던 ‘선악과와 십자가’의 이야기를 함께 묵상하고 싶습니다. 무엇이 우리를 하느님께로 인도할까요?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알았고 하느님과 같아질 것 같았지만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습니다. 인류 역사에 드러나는 폭력, 전쟁, 살인, 갈등과 분열은 ‘선악과’를 몰라서가 아닙니다. 그 선악과를 자기 뜻에서 드러냈기에 그와 같은 고통과 갈등이 생겼습니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가 선악과를 몰라서 예수님께 비난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선악과를 자신들의 기준에서 받아들였고, 선악과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들을 죄인으로 취급했습니다. 국회의원들이 국민이 지켜보는 국정감사의 현장에서 낯부끄럽게 삿대질을 하면서 싸우는 것은 선악과를 자신들의 이익에 맞추어서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본당의 공동체가 서로 갈라져서 다투는 것도 선악과를 몰라서가 아닙니다. 그 선악과를 자신들의 입장으로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어느 가장의 슬픈 독백입니다. “저는 가족을 위해서 이른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몸도 안 돌보고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제 아이들이 제게 와서 이렇게 대들면서 말하였습니다. ‘아빠! 아빠가 우리를 위해서 해 준 것이 뭐가 있어요? 덩달아 제 아내도 제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당신이라면 이제 지긋지긋해!’ 저는 이 말을 들으면서 큰 충격에 빠졌습니다. 욱하는 성격에 한바탕 싸움하고 이혼하였습니다. 그러고 나서야 제 잘못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제가 집에 돌아가서 아이들에게 해 준 말이라고는 오직 한 가지였습니다. ‘야! 공부나 잘해!’ 그리고 제 아내에게 해준 말은 ‘밥 줘! 나 피곤해! 당신이 알아서 해!’ 이 세 가지 말 뿐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 가정에 선악과는 있었지만, 십자가는 없었습니다.
우리를 하느님께 인도하는 것은 ‘십자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그 십자가를 다르게 해석하면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입니다. 그 십자가를 지는 것이 너무나 고통스럽고 힘들어서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니 동산에서 밤을 새워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독백하셨습니다. “아버지 하실 수 있다면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강도당한 사람을 치료해 주고 여관까지 데리고 갔던 착한 사마리아 사람은 십자가의 삶을 살았습니다. 가진 재물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고, 빚진 것이 있다면 4배고 갚겠다고 했던 자캐오는 십자가의 삶을 살았습니다. 본인도 걸인이면서 더 어려운 걸인들에게 밥을 나누어 준 최귀동 할아버지는 십자가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분의 십자가는 ‘꽃동네’로 열매 맺었습니다.
자기의 생각과 당연히 상대도 같은 생각 하고 있을 것(선악과)이라는 착각이 바로 가정을 깨어 놓았습니다. 내가 상대되어주는 것(십자가)이 사랑의 출발점입니다. 이 말을 마음속 깊이 간직하면서 우리와 우리 가족 모두가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 안에서 예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실천할 때 우리는 하느님께 가까이 갈 수 있습니다. “무슨 일이든 이기심이나 허영심으로 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십시오. 저마다 자기 것만 돌보지 말고 남의 것도 돌보아 주십시오.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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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4,12-14: 선을 베풀어야 할 사람들에 대하여
예수께서는 사랑과 동정을 받아야 할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어야 하는지를 말씀하시면서, 바로 당신이 공생활 중에 가난하고 억압받으며 소외된 사람들을 가까이하셨듯이 우리도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선과 사랑을 베푸는 것이 가치가 있다고 하신다.
이러한 사람들을 향하여 팔을 벌려야 한다고 하시면서 그에 대한 보상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해 주실 것이라고 하신다. 예수님의 말씀은 무엇보다도 우리가 모두 서로 사랑하는 마음을 갖고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나눌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 가정에서도 부모가 자녀들을 볼 때, 모든 자녀가 아무런 문제 없이 잘 살기를 바라는 것은 당연하다. 마찬가지로 모두 한 형제자매인 우리 중 어떤 자녀도 불행하게 살아가는 것을 하느님께서는 원치 않으신다. 진정한 형제애로 서로 나누며 살아가라 하신다.
나눔을 통하여 그 사람은 자기의 것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행위를 통하여 더 큰 것을 얻게 되고, 영적으로 더 성숙하게 되며, 하느님께서는 더욱 풍성히 갚아주실 것이라고 하신다.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에서도 말했지만, 이 세상에 나의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진정 무엇이 있는가? 거의 없다. 이 지상의 삶에서 쌓아두고 감추어 둔 것은, 내가 세상을 떠나면서 동시에 인연을 마감하고 다른 사람의 손으로 넘어간다.
그러나 주님의 뜻에 따라, 그분이 그것을 나에게 맡겨주신 뜻에 따라서 올바로 관리하고 주님께서 뜻하시는 대로 잘 사용하게 되면, 그래서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과 나눈 것은 나의 죽음과 함께 다시 살아나서 모든 것이 나를 반기며 영원한 행복으로 초대할 것이다.
이러한 삶은 어떤 커다란 일이나 사건을 통해서만이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매 순간 깨어있을 수만 있다면, 그것은 언제나 가능하다. 그것은 아주 작은 사건이나, 별로 가치가 없어 보이는 일에서조차 우리는 그것을 실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은 나의 것을, 나의 시간을 그들과 나눔으로써 더 큰 성숙을, 기쁨을 체험하는 것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닌가? 그리스도인들은 이렇게 사랑과 봉사로 스승이신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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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인천교구 정천 사도 요한 신부님]
만일 누군가에게 맛있는 식사를 한 끼 대접해야 한다면, 가장 먼저 누구를 초대하고 싶은지 떠올려 봅시다. 그동안 이래저래 신세를 져 온 은인들이 아닐까요?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 도움을 준 형제나 친척, 업무와 관련된 부탁을 흔쾌히 들어준 직장 동료, 고민을 진지하게 들어 주고 조언해 준 친구들이 떠오릅니다. 한편 내가 잘 보여야 할, 또는 잘 보이고 싶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직장 상사, 영업에서 매우 중요한 고객, 존경하는 스승님, 그 밖에도 사회적으로 나에게 도움이 될 만한 지위의 사람들을 초대하고 싶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과 이루는 관계가 기본적으로 ‘주고받는’ 상호적 관계라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무엇을 받았으니 보답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이고, 또 무엇을 받을 기대감에 먼저 주기도 하는 것이겠지요. 그런 이해관계가 없는 사람은 그저 ‘나와 상관없는 사람’일 뿐, 그에게 무엇을 주거나 베풀 필요성을 잘 느끼지 못합니다.
예수님 말씀을 우리식으로 바꾸어 봅시다. “네가 점심이나 저녁 식사를 베풀 때, 네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을 부르지 마라. 그러면 그들도 다시 너를 초대하여 네가 보답을 받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보답이 예상되는 초대는 하지 말고, 오히려 보답을 전혀 기대할 수 없는 이들, 곧 ‘나와 상관없는’ 이들을 초대하라고 주문하십니다.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 예수님의 논리에 따르면, 보답이 예상되는 초대는 그 보답을 받음으로써 끝나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보답은 더 크고 유익하므로, 차라리 그것을 얻고자 현세의 보답을 포기하는 편이 훨씬 복되다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게 베푸는 자선이 절대 손해 보는 일이 아님을 일깨워 주십니다. 그 결과가 당장 눈앞에 보이는 이득과는 거리가 멀지만, 하느님 나라의 보상 점수는 그렇게 계속 쌓여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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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님]
‘유유상종’이란 말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내게 잘해 주는 사람에게 끌리고, 나하고 관심과 취미가 맞는 사람과 어울리기 마련입니다. 남녀가 서로의 차이를 매력으로 느껴 평생의 동지가 된 부부도 있겠지만, 그 서로의 다름이 쉽게 상처가 되고 다툼이 되기도 합니다.
예수님 시대나 우리 시대나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식사를 하며 친교를 다지는 일은, 나를 중심으로 사람들을 만나는 방식입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잘해 주는 이유는 그도 나에게 잘해 줄 것이라는 믿음이 깔려 있는 것이고, 밥을 한 번 사고, 선물을 줄 수 있는 여유도 그와 관계를 이어 가면서 내가 얻게 될 보답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꼭 그것이 물질적인 보상이 아니더라도 정서적인 위로나 보상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인간관계는 쉽게 끊어집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런 우리의 관계의 정석을 깨십니다. 잔치를 베풀 때에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고 하십니다. 이유는 생각보다 단순합니다. 진정한 이웃 사랑은 조건 없는 나눔과 베풂이고, 그 사랑의 행위 자체로 기쁨을 누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이들은 결코 나의 호의를 같은 방식으로 갚을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물질적 보답은 못해도 나를 위하여 기도해 주고, 사람들 앞에서 나를 칭찬하고, 진심으로 고마워하며 진정한 사랑의 소통을 이룹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이기심이나 허영심을 버리고, 겸손한 마음으로 자신을 낮추고 남을 돌볼 것을 바라십니다. 오늘날 혼례와 장례 때 부조를 하는 일이 마음의 진정한 표현이 아닌, 채무 형태로 바뀌는 세태를 생각하면, 내 주변에서 정말 힘든 이웃과 애정과 동정을 나누는 일이 그리워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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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이기양 요셉 신부님]
“네 친구를 부르지 말고 가난한 이들과 장애인들을 초대하여라.”
<우리가 잔칫상에 초대할 사람은>
사람들은 자기와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여 살기를 좋아하고 편안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부유한 사람들은 부유한 사람들끼리, 또 교육 수준이 높은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끼리 모여 살려고 하는 사회적 흐름이 강해져 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어른들만의 문제는 아니고 아이들도 마찬가지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자기네들 수준과 맞는 친구들끼리는 잘 지내지만 처지가 전혀 다르다거나 자기들보다 뒤처지는 친구는 소위 따돌려버리는 경우들을 봅니다.
왕따를 시킬 뿐만 아니라 주변을 힘겹게 만드는 모습이 우리가 사는 이 시대입니다. 이런 우리의 현실이 바른 모습이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이 모습들을 과연 어떻게 보고 계실까요? 그에 대하여 오늘 복음은 모두가 함께 잘 살아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 한 사람이 예수님을 초대하면서 평상시에 친분이 있던 친구들과 형제들, 또 친척들만을 초대했던 것 같습니다. 이 사람들은 늘상 자기들끼리 왕래를 하면서 내가 한 번 내면 다음번에는 네가 한 번 내는 식의 삶을 살아왔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을 자기들의 잔치에 초대했다는 자체가 아주 큰 파격이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자기들끼리의 사이를 더 돈독하게 하는 방법으로 예수님을 초대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런 분위기와 아랑곳없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계시지요. 비슷한 사람끼리 모이지 말고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같이 소외된 사람을 부르라고 가르치십니다.
그들이 그것을 갚지는 못하겠지만 하느님께서 대신 갚아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시지요. 가난한 사람들을 배려하지 않고 자기네들끼리만 주고받으며 지내는 것에 대해서 경고하시는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을 대하며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지내야 하겠는가를 묵상해 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편한 이웃들을 만나 친하게 왕래하며 지내는 것을 하지 말라는 말씀이겠습니까? 그런 극단적인 뜻은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가난한 사람에 대한 배려를 항상 잊지 말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은 친구들과 즐길 줄만 알았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과 나눔이나 베풂은 생각지도 않고 있었습니다.
자기들끼리만 잘 먹고 나누고 친하게 지내는 것은 하느님 보시기에 그리 공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정작 우리가 죽은 후에도 빛이 되고 우리의 죄를 보속해 줄 수 있는 것은 가난한 이웃에 대해 얼마나 내 것을 나누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특히 요즈음 사회는 약육강식의 논리가 지배하는 자본주의의 사회입니다. 이 사회는 약육강식의 논리를 우리에게 강요하고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그 가치관을 따라갑니다. 그래서 잘난 사람들끼리 어울려 사는 것에 대해서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고 심지어는 그렇게 살지 못하는 것을 비관하기도 합니다.
또 가난하고 삶이 힘겨운 사람들에 대해서는 그들의 능력이 그것뿐이라고 비하하며 자기들과는 수준이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배척하고 외면하지요. 이는 너무나 복음적이지 않은 삶의 태도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그렇게 대하는 우리 사회는 참으로 비복음적이며 신자들 역시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끼리 먹고 마시고 즐기며 친교를 맺는 일을 해서는 안 될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불편하다는 이유만으로, 또 가난하다는 이유만으로, 수준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성당 공동체에서조차도 그들을 배척하거나 외면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또 많은 사람들이 자기 구역 사람들끼리만 모임을 만들고 친교를 가지려고 합니다. 그런 생각 자체도 복음적이지 않은 것이지요.
오늘 예수님께서는 부족한 사람을 배려하며 모두가 함께 잘 살 수 있는 공동체를 우리에게 제시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차별 없이 대하시는데 우리가 어찌 이웃을 차별할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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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교구 고병수 요한 신부님]
교구 사회복지회에서 ‘정다운 가게’를 열었다. 중고 물건을 수집해서 싼값에 팔아 남는 수익금으로 어려운 이웃을 돕자는 취지에서 이루어졌다. 실무자가 내게 기증품 몇 점을 요구해 왔다.
기꺼이 승낙하고 집에 가서 쓸 만한 물건을 찾아보았다. 당장 쓰지는 않지만 그래도 쓸 만한 물건을 내어놓자니 아까운 마음이 들었다. 그래도 사제의 체면도 있고 해서 용기를 내어 한두 점 물건을 내놓았다. 그리고 나눔과 베풂의 참된 의미를 되새겨 보았다.
얼마 전 텔레비전에 자신도 어렵고 힘든데 아낌없이 남과 나누고 베풀며 살아가는 형제 이야기가 방영되었다. 그는 어릴 때 사고로 몸 한쪽을 쓰지 못하고 눈도 실명 직전에 있었다. 하지만 그는 한 손으로 악기를 켜면서 외로움에 지친 양로원 노인들과 보육원 어린이들에게 아름다운 소리를 전해준다.
또한 중풍으로 누워 지내는 이들에게 한 손으로 어깨와 허리를 정성껏 주물러 준다. 어렵고 힘든 이들이 있는 곳이면 힘든 몸을 이끌고 달려가 나누고 베푸는 것이다. 이로써 그들의 닫힌 마음을 열어주고, 살아갈 수 있는 희망과 용기를 준다.
그렇다. 참된 나눔과 베풂은 여건과 상황이 다 갖춰지고 있는 데서 퍼주는 것을 뛰어넘는다. 그 정도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나눔과 베풂은 주님께 받은 은혜를 보답하는 행위이자 자신에게 있고 없음을 넘어 어렵고 힘든 이에게 다가가 살아갈 수 있는 용기와 힘을 전해주는 고귀한 행위인 것이다.
이로써 주님의 은혜에 보답하고, 다시 그분께 삼십 배, 백배의 은혜를 받는 가장 은혜로운 행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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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루카 14,12-14)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어떤 선한 행위를 할 때, 아무런 보상을 바라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하십니다. 때로는 나의 선한 행위를 다른 사람이 알아주기를 바라거나, 내가 어떤 일을 했으니 그에 따르는 보상을 기대하려는 유혹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또는 상대방에게 대우해 준 만큼, 상대방도 나에게 그에 합당한 대우를 해 주어야 한다고 여기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사람이 알아주건, 알아주지 않건,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의 행위를 추구해야만 합니다.
하느님께 드리는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대부분 청원 기도가 아닙니까? 내가 바라는 것을 이루어 달라는 청원 기도는 인간 마음의 어쩔 수 없는 표현이지요. 그렇지만 기도의 결과에 집착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느님께 청할 것은 청하되, 그 결과는 하느님의 뜻에 맡겨야 한다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수난 직전 처절하게 고뇌하시며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것을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십시오”(마르 14,36).
우리는 최선을 다하여 할 일을 다 하고, 모자라는 것은 주님께 청하고, 그 결과는 주님 뜻에 맡겨야 하겠습니다. 비록 지금 당장 들어주시지 않는다 하더라도 실망하지 말고 꾸준히 노력해 나갈 때, 언젠가 주님께서 당신 방법대로 들어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리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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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님 말씀처럼 갑작스럽게 비극적인 참사로 세상을 떠난 젊은이들을 위해 부활하신 주님께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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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하느님 닮은 당신만 있다면>
루카 14,12-14 (가난한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초대한 바리사이들의 한 지도자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점심이나 저녁 식사를 베풀 때, 네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을 부르지 마라. 그러면 그들도 다시 너를 초대하여 네가 보답을 받게 된다.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
<하느님 닮은 당신만 있다면>
당신의 무엇을
바라지 않습니다
당신의 무엇이
없어도
다만 당신을
바랄 따름입니다
당신의 무엇이
아니라
바로 당신이
하느님을 닮았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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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이 참사에 우리가 건네야 할 위로와 격려>
오늘 독서와 복음에서 억지로 공통점을 찾는다면 위로와 격려를 받건 보답이나 상급을 받건 받는 것에 대한 가르침이라는 점입니다.
이에 대해 생각하다가 받는 나와 받지 않아도 되는 나 가운데 어떤 내가 더 낫고, 어떤 내가 되려고 노력해야 할까 생각해봤습니다.
예를 들어, 돈을 받는다든지 도움을 받는 것과 풍족하여 돈이나 도움을 받지 않아도 되는 것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라면 우리는 후자를 선택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필요 충족 차원에서는 받을 필요가 없는 상태, 그래서 받지 않는 편이 받는 것보다 낫습니다.
그런데 사랑의 차원에서는 어떻습니까? 주고받는 것이 없어도 되겠습니까? 그런 관계는 사랑이 전혀 없는 관계가 아닙니까?
이런 면에서 격려와 위로를 서로 주고받는 것은 사랑이고 격려받을 필요가 없을 정도로 뭐든지 자신만만하고, 위로받을 필요가 없을 정도로 다복하여 ‘나는 격려와 위로 따위는 필요 없어!’라고 하는 것보다 격려와 위로가 필요한 상태가 오히려 더 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보답을 받는 것은 어떻습니까? 보답도 받는 것이 받지 않는 것보다 낫습니까?
사랑을 역시 기준으로 할 때 보답을 바라고 뭘 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것은 일종의 거래이고 심지어 뇌물이며 그래서 그런 행위로는 보답을 받아도 행복하지 않고 보답을 받지 못하면 받지 못해서 행복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주고받는 것을 이런 식으로 얘기하는 것은 철학자들이 인생의 지혜를 논하는 정도에 불과하고 인간끼리 주고받는 것을 논하는 것이니 신앙적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사랑을 인간끼리 주고받을 때 그 사랑을 인간적인 사랑이라고 함과 같이 위로와 격려도 인간에게서 받고자 할 때 그것은 사랑일지라도 받은 것이 인간적 사랑에 그치고 하느님의 위로와 격려를 대신하는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적인 위로와 격려는 하느님의 위로와 격려를 대신할 수 없는 것이고, 인간적인 사랑이 하느님의 사랑을 대신하는 거라면 그것은 받아도 충분하지 않고 어쩌면 불행입니다.
지금 우리는 또다시 젊은이들이 떼죽음을 당한 대참사를 경험하고 있는데 이들 부모에게 우리가 심심한 위로와 격려를 표해야겠지만 우리의 인간적인 위로와 격려로는 그 부모들에게 부족할 것입니다.
이럴 때 우리 신앙인은 신앙인다운 위로와 격려를 해야 하는데 오늘 바오로 사도는 그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격려를 받고 사랑에 찬위로를 받으며 성령 안에서 친교를 나누고 애정과 동정을 나누는” 것으로 얘기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격려와 위로를 받을 때 우리가 받은 그 같은 위로와 격려를 다른 사람에게 해줄 수 있을 것이고, 이번 참사자들의 부모들에게도 같은 위로와 격려를 해줄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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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하느님께 바치는 좋은 예물>
이태원 참사로 세상을 떠난 모든 이가 하느님의 자비로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를 기도하며 유족들에게 위로와 평화가 함께하기를 빕니다. 치료를 받는 분들의 빠른 쾌유를 희망합니다.
“성인의 무심한 은혜는 보답을 요구하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성인은 자기가 은혜를 베풀었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보답을 바라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잘 안 됩니다. 내가 베푼 것은 꼭 기억하고 남이 나에게 베푼 것은 곧 잊어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아예 보답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라고 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잔치를 베풀 때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행복하다”.(루카14,14)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지금 당장 보답을 받지 못하지만, 우리가 베푸는 하나하나는 하느님께 바치는 좋은 예물이 됩니다.
저는 미국에 있을 때 아무 대가를 바라지 않고 행려자들을 위해 무료급식을 하는 분들을 만났습니다. 본당에서도 한 달에 두 번 봉사활동을 가지만 그들을 돕는다는 것보다 함께하는 기쁨이 더 크게 다가왔습니다. 매번 정성껏 마련한 음식이 모자람이 없었다는 것도 하느님의 안배입니다.
행려자들 앞에서 목사님은 열심히 주님의 말씀을 선포하지만 저는 그런 용기를 갖지 못했습니다. 기회가 좋든 나쁘든 구애 없이 말씀을 선포한 바오로 사도의 열정이 그리웠습니다. 그저 음식을 전해주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위신 체면에 매여 있는 저를 보았습니다. 어찌 되었든 화려한 잔칫상을 뒤로하고 그들과 함께하는 분들은 행복합니다. 그들의 수고와 땀으로 천국의 곳간이 가득 채워질 것입니다.
가끔 유유상종이라는 말을 떠올립니다. 같은 무리끼리 서로 왕래하며 사귄다는 뜻입니다. 그야말로 끼리끼리입니다. 마음이 통하는 사람끼리만 모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이 다가 아닙니다. 믿는 이들은 그것을 극복해야 합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뿐 아니라 부족하고 허물이 많은 사람과도 함께 해야 합니다. 그들의 상처를 싸매주고 필요를 채워줄 수 있어야 합니다. 아무런 내색도 없이 그리고 요구도 없이 하느님을 바라보며 모두를 품기를 주님께서는 기대하십니다. 끼리끼리가 아니라 소외된 이를 먼저 챙김으로써 하느님을 차지하는 행복을 누려야 하겠습니다.
성녀 소화데레사는 “나는 무엇이든 다 하느님을 위해서 합니다. 이렇게 할 때 아무런 손해도 볼 수 없고, 또 남을 위해 치른 수고는 언제나 한결 좋게 하느님께서 내게 갚아주심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무엇을 하든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고 그것을 기뻐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가난한 이들을 찾아 나서는 일은 그리스도인의 소명이고 그들을 위한 행동은 보속이고 회개입니다. 보상을 바라지 않는 섬김의 삶에로 나설 때입니다.
사람에게서 인정받는 것보다 전적으로 하느님을 선택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속을 환히 꿰뚫고 계십니다. 그리고 부족함을 채워주십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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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4년 소치 동계 패럴림픽 폐회식과 2018년 평창 동계 패럴림픽에서 선보인 힘찬 크로키 퍼포먼스를 기억하십니까? 이 퍼포먼스의 주인공인 화가는 그림을 다 그린 후 발로 낙관을 찍었지요. 바로 수묵 크로키라는 자기만의 영역을 개척한 의수 화가 석창우입니다.
그는 1984년 29,000볼트 고압 전류에 감전되어 두 팔을 잃었습니다. 이때의 나이는 29세. 너무 젊은 나이에 소중한 두 팔을 잃은 것입니다. 이 상실감이 얼마나 컸을까요? 그런데 어느 날 4살인 자녀가 그림을 그려달라고 졸라서 참새를 그려줬다고 합니다. 이것을 시작으로 의수 화가로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그에게 하늘에서 건강한 두 팔을 다시 준다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한참을 생각하더니 특유의 담담한 어투로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안 받아요. 내가 양팔과 헤어진 것이 운명이라면 의수로 그림을 그리게 된 것은 바로 숙명입니다.” 그러면서 팔이 있었던 29년보다 팔 없는 30년의 삶이 더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을 아쉬워해 봐야 무엇하겠습니까? 가지고 있는 것에서 행복의 이유를 찾는 노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한 행복에서 주님께서 강조하셨던 나눌 수 있는 사랑의 실천도 가능하게 됩니다.
보답을 기대하지 말고 초대하라는 내용의 비유를 말씀해주십니다. 사실 사회생활에서 초청받고 초청하고 하는 것은 아름다운 풍습입니다. 초상이 나면 초대하지 않았음에도 장례식장을 찾아가 문상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만약 ‘보상’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어떨까요? 즉, 초청하는 이유가 초대받기 위한 것이고, 문상가는 것도 나중에 초상났을 때 문상하러 올 것을 대비하는 것으로 말입니다. 이런 것은 선행의 장사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내가 ‘보상’ 받을 수 없는 사람을 초대하라고 하십니다.
가난한 사람,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말씀하시지요. 이렇게 보상받을 수 없는 사람을 초대하는 것이 진정한 선행이고 자선 행위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순수한 사랑의 행위로 하느님 나라에서 충분한 보상을 받게 된다고 하십니다.
가지고 있는 것을 찾아보십시오. 혹시 이것들을 나눌 때, 보상받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가지고 있는 것 자체를 감사의 마음으로 볼 수 있다면, 이를 나누는 것도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으로부터 보상받지 못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쓸데없는 행동을 한 것이 아닙니다. 더 큰 선물을 가지고서 주님께서 보상해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지고 있는 것을 아무런 사심 없는 순수한 사랑의 마음으로 나눌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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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어떻게 살아야 하나?>
-사랑이 답이다-
“주님, 저에게 생명의 길 가르치시니,
당신 얼굴 뵈오며 기쁨에 넘치리이다.”(시편16,11)
엊그제 이태원 압사 참사에 대해 할 말을 잊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자문하게 됩니다. 세월호에 이은 대 참사입니다. 있어서는 안 될 대 참사입니다. 이처럼 만추의 아름다운 계절에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마음이 후둘후둘 떨립니다. 10월31일 오늘 “핼로윈 데이”라는 우리와 무관한 유럽과 미국인들의 축제가 못마땅하기 짝이 없습니다.
어제 오후 10시20분 현재 사망자 154명 부상자 132명이고 사상자는 더 늘어날 것이라는 새벽 뉴스입니다. 대부분 10대-20대 젊은이들이고 빈소마다 무너진 부모들의 통곡이 가득하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새벽 지인 자매로 부터의 메시지도 마음 아팠습니다.
“신부님, 이태원 사고로, 노엘이 반 친구가 하느님 품으로. 김민경이라는 아이입니다. 기도부탁드립니다.”
내일 11월 위령성월 첫날은 모든 성인 대축일입니다. 끝은 시작입니다. 참으로 온 국민이 참회하는 마음으로 10월의 끝 날을 보내고 내일 11월 모든 죽은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위령성월 첫날부터 깨어 다시 시작해야 하겠습니다. 새삼 기도의 계절, 가을은 회개의 계절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11월 한 달은 이태원 참사로 죽은 젊은 영혼들을 위한 연미사 봉헌하려 합니다.
어제는 제 경우도 각별한 날이었습니다. 제가 가장 사랑했던 둘째 베네딕도 형님의 14주기 기일미사를 형 댁에서 봉헌하였습니다. 14년전 2008년 11월 강론집을 찾아 당시 장례미사(11.3)때의 강론을 읽으면서 감동했습니다. 그때나 14년 후 오늘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한결같이 써온 제 강론에 스스로 놀랐습니다.
오랜만에 본 조카들도 성실하게 살아 온 모습들이 참 고맙고 반가웠습니다. 주님의 은총에 감사했습니다. 매일 밤1시 전후로 기상하여 하루를 시작하기에 오후는 꽤 피곤했지만 끝까지 함께 했습니다. 하루를 충만히 가족들과 함께 지낸 후 늦게 수도원에 들어왔고 “잘 도착하여 잡니다. 감사합니다!” 원장에게 귀원을 알렸습니다.
“안녕히 주무세요.”
새벽에 잠깨어 읽은 답신의 평범한 메시지도 마음에 깊은 평화를 주었습니다. 사랑밖엔 답이, 길이 없습니다. 참으로 말없는 마음으로 깊은 위로와 격려의 기도와 사랑이 절실한 만추의 계절 가을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잔잔한 말씀이 깊은 평화를 선사합니다. 공동체는 어디나 문제를 지니고 있기 마련이요, 바오로 사도가 서간을 보낸 필리비 교회도 예외는 아닌 듯싶습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 안에서 격려를 받고 사랑에 찬 위로를 받으며 성령 안에서 친교를 나누고 애정을 나눈다면, 뜻을 같이하고 같은 사랑을 지니고 같은 마음 같은 생각을 이루어, 나의 기쁨을 완전하게 해주십시오.”
필리비 신도들과 하나 된 바오로에게 이들의 사랑의 친교는 바오로의 기쁨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음을 봅니다. “나의 기쁨을 완전하게 해 주십시오.”라는 청이 참 절실하게 들립니다. 마치 우리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 안에서 더욱 순수하고 깊은 사랑을 하라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바오로를 통해 주님은 우리 모두 아가페 순수한 사랑을 명하십니다.
“무슨 일이든 이기심이나 허영심으로 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십시오. 저마다 자기 것만 돌보지 말고 남의 것도 돌보아 주십시오.”
오늘 바오로 사도를 통한 주님의 이 말씀, 하루의 양식인 말씀으로 삼아 마음에 담고 실천하시기 바랍니다. 참으로 예수 성심을 닮아갈수록 이런 마음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더욱 구체적으로 불쌍한, 가난한 사람들을 초대하라 하시며 아가페 순수한 사랑의 절정을 보여 주십니다. 당시 사람들은 하루 두 끼 식사를 했습니다. 아침 겸 점심, 그리고 저녁식사입니다. 오늘날은 너무 많이 자주 먹는 것 같습니다.
“네가 점심이나 저녁식사를 베풀 때, 네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을 부르지 마라. 그러면 그들도 다시 너를 초대하여 네가 보답을 받게 된다.”
이런 끼리끼리 있는 이들끼리 주고받는 초대를 즐겨 찾지 말라 하십니다. 이런 관행에서 단호히 떠나 참으로 필요한 이들에게 무사한, 대가를 바라지 않는 순수한 사랑의 실천을 즐겨 행하라는 것입니다. 아낌없이 주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예전 초등학교 교사시절 아이들에게 참 많이 선물했고 그림으로 그려 나눴던 참으로 감동적인 “아낌없이 주는 나무”라는 책이 생각납니다. “눈속에서 3개월”과 “어린왕자”란 책과 더불어 평생 보관하며 읽고 싶은 책이요 읽을 때 마다 감동을 선사하는 책입니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같은 순수한 사랑을 실천하라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권고 말씀과 다음 이 말씀도 마음에 깊이 담고 생활하시기 바랍니다.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 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너희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
이런 바라는 일 없이 나누고 베푸는 사랑의 삶을 즐겨 실행하는 사람들이 의인들이요, 이런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주님 친히 보답해 주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참으로 주님께 희망을 둔 아름다운 사람들이요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이런 사랑과 희망의 사람들로 변모시켜줍니다. 저절로 화답송 시편을 고백하고 싶은 마음이 됩니다.
“주님, 제 마음은 오만하지 않나이다.
제 눈은 높지도 않사옵니다.
감히 거창한 것을 따르지도, 분에 넘치는 것을 찾지도 않나이다.
오히려 저는 제 영혼을 다독이고 달랬나이다.
제 영혼은 마침 젖 뗀 아기, 어미 품에 안긴 아기 같사옵니다.
이스라엘아, 주님을 고대하여라. 이제부터 영원까지.”(시편131,1-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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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루카14,13)
<누구를 위한 초대였고, 무엇을 위한 초대였는가?>
이태원에서 많은 이들을 초대했습니다. 초대의 주체가 누구이고, 누가 주관했는지는 모르지만, 엄청난 희생 앞에서 그 초대가 '누구를 위한 초대였고, 무엇을 위한 초대였는지?' 반문해 보게 됩니다.
전 세계가 똑같이 겪은 코로나 팬데믹!
그로 인해 엄청난 희생자가 나왔고, 우리의 모든 일상을 잠시 멈추게 했던 그 코로나 팬데믹이 모든 인간에게 던진 분명한 메시지가 있었고, 저는 그 메시지가 '우리가 지금 멈추지 않으면, 인간만을 위한 탐욕과 욕심을 멈추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죽을 수 있다는 커다란 경고', 그 경고가 바로 코로나 팬데믹이 전 세계 인류에게 던진 메시지였다고 생각합니다.
나라와 국민을 위해 일하고 있는 책임 있는 분들이 조금만 더 관심을 갖고 그 초대에 응답한 사람들을 바라보았다면, 충분히 막을 수도 있었고, 일어나지도 않았을 참사였다고 생각하니, 더 마음이 아프고 화가 납니다. 이미 많은 이들이 그 초대에 응답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그에 합당한 대처를 하지 못한 대통령이나 정부나 정치인들과 같은 기성세대 책임 있는 분들의 불성실함 때문에 많은 젊은이들이 희생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로움과 평화와 기쁨입니다."(로마14,17)
'누구를 위한 초대이고, 무엇을 위한 초대인가?'
우리는 삶의 자리에서 누군가를 초대하기도 하고, 또 누군가의 초대에 응답하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그 초대가 마음 맞는 사람들끼리 먹고 마시기 위한 초대가 아니라, 나의 이익만을 위한 초대가 아니라, '돌아올 것을 바라지 않고 베푸는 나눔의 초대'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번 참사로 희생된 이들의 영혼과 그 가족들을 위해 함께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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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youtu.be/GjFXtMSdH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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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1)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루카 14, 13)
어처구니없는
이태원 참사로
너무 화나고
아픈 시간을
보냅니다.
우리 시대가
다시 서로를
배려하는 건강한
사회이길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너의 불행이
곧 나의 불행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참된 삶이
무엇인지를 묻는
우리에게
주님께서는
초대를
말씀하십니다.
우리를
창조하신 분이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아낌없는 초대로
우리 존재의
사랑을 다시
깨닫게 됩니다.
구분하지 않는
사랑을 실천하시는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신앙은 고정관념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나그네처럼
떠나야만 하는
사람들입니다.
무엇을 위한
삶인지를
다시 물어야
합니다.
관계에 너무
불충실한
우리 삶입니다.
정신없이
살아가는
우리에게
더 중요한 것이
무언지를 다시
보게 됩니다.
아픔의 소리
울음의 소리처럼
비명과 절규에
마음의 문을
닫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사랑이었습니다.
절망을
치유하는 것은
사랑뿐입니다.
사랑은
끊어지지 않고
이어져 있습니다.
삶의 중심은
언제나
사람입니다.
사람에 대한
사랑은 초대이며
보호입니다.
이태원 참사의
교훈으로
우리 시대가
서로의
보호자가 되는
배려의 사회이길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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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루카 14, 14)
우리의 인간관계를
되돌아보게 됩니다.
우리는 어떤 이들과
어울리며 살고 있는지요.
우리의 삶을
정직하게 받쳐주는
이들은 오히려
가난한 이들이었습니다.
귀하고 천함을
따지고 가리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었지를
제 삶속에서
깨닫게됩니다.
너와 나의
가난함을
받아들이는 것에서
복음은 구체화됩니다.
함께하는 것이
진정한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행복이란
보답할 수 없는
이들을 기쁘게
초대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잇속을
계산하지 않는
초대야말로
진짜 초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예외 없이
주님께 초대받은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초대의 또 다른 이름이
가난한 이들을 위한
배려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삶을
뜨겁게 부활시키는 주체가
가난하신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보답을 바라지 않는
십자가의 예수님이
더더욱 아름답게
다가오는 행복한 하루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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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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