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에 끼어든 알베르 까뮈
박옥희
반세기도 넘은 1966년 나는 기숙학교인 여자대학의 3회 입학생이었다.
피천득 선생의 수필 『인연』에 등장하는 성심여자대학이다.
각자의 소임을 맡은 아일랜드의 예수 성심회 수녀들이 그룹을 조직해 학교를 창립했다.
당시의 교수진은 피천득 선생을 비롯하여 정한모 시인 등, 쟁쟁한 분들이 호반의 도시 춘천의 산기슭에 자리한 학교까지 먼 길을 마다 않고 강의하러 오셨다.
화창한 3월의 어느 봄날, 나는 4명의 신입생들과 함께 기숙사의 방에 배정되었다.
2명의 예비 수녀와 당시 최고의 명문이었던 K여고의 수석 졸업생인 수재와 함께였다.
예비 수녀님들과는 섞이지 못하는 우리 둘은 자연스럽게 짝꿍이 되었고 항상 같이 다녔다.
그녀는 불문과에, 나는 국문과였지만 1학년 교양과목이 거의 같았고 주로 아일랜드 수녀님들이 담당하는 과목이기에 우리 둘은 차츰 더 친해졌다. 시간이 갈수록 더욱 가까워진 우리는 속마음을 주고받았다. 그녀는 마네의 그림 <피리 부는 소년>이 연상되는 미소년 같은 분위기였고, 유난히 커다란 두 눈은 무언가를 호소하는 듯한 애절한 눈빛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둘 사이는 더욱 깊어졌고 서로의 관심사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독서량은 나와는 비교되지도 않았고, 그 시절 영어와 불어 원서를 수월하게 읽어내었다. 특히 당시 갑자기 떠오른 실존주의 작가 알베르 까뮈에 심취해있었다. 취침 시간을 훌쩍 넘긴 깊은 밤까지 내 침대 옆에 의자를 끌어다 놓고 인생의 허무함과 무의미를 소곤거리고는 했다. 어쩌다 둘이 함께하는 주말에는 안개 자욱한 수녀원 주변의 오솔길을 산책하면서도 까뮈의 부조리를 들춰내고는 했다. 『이방인』을 설명해 주면서 왜 살아야 하는지 이유를 모르겠다고도 했다. 그 시절 나에게는 실존주의도, 부조리도, 너무 생소한 단어였다. 중학생 시절부터 읽기 시작한 펄벅의 작품이 유일한 외국 문학이었고 특히 유럽 문학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었다. 나에게는 <젊은 느티나무>를 쓴 강신재가 더욱 친숙한 작가였다.
여고 시절 『이방인』을 읽고 영향을 받아 세 명의 여고생이 자살했다는 사건을 풍문으로 듣고 소설 내용이 궁금해 나도 그 소설을 읽은 적이 있기는 하다. 무슨 말을 쓰고자 헸는지 짐작도 가지 않아 내 기억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둘 사이가 더욱 깊어지면서 그녀는 많은 사연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그녀의 대화상대로는 자격 미달인 나에게 중학교 시절부터 자살을 시도했다는 무서운 고백부터, 봇물을 터트리는 듯 쉴새 없이 털어놓았다. 나는 그녀의 가정환경까지 모든 것을 들어주어야만 했다.
외할아버지는 S대 철학과 교수였고 엘리트인 두 부모님의 불화에 집이 싫다고도 했다.
기다리던 주말이 되면 대부분의 기숙생들은 즐거운 마음으로 집으로 가는 청량리행 기차를 타러 기숙사를 떠났다. 그녀는 텅 빈 기숙사를 지키면서 한 학기를 보냈다.
2학기가 시작되었고 까뮈에 대한 그녀의 집착은 더욱 깊어져만 갔다. 때때로 자살을 암시하는 말과 더불어 나에게 도움을 바라는 의미의 말도 하곤 했다.,나는 그녀의 말을 일절 무시하는 것처럼 대했지만, 한편으로는 겁이 났고 설마 정말로 시도할까 무서웠다.
그해 11월의 끝자락 2학기 시험을 앞둔 어느 주말, 유난히도 첫눈이 소복하게 내리고 있었다. 학교로 돌아가는 춘전행 열차를 타기 위해 갔던 청량리역이 술렁거렸다. 무언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녀가 사라진지 3일째, 행방불명이 되었다는 놀라운 소식을 들었다.
기숙사에 도착하여 우리는 이미 싸늘한 시체가 되었다는 그녀의 어이없는 죽음을 알게 되었다. 3일 동안 행방이 묘연한 그녀를 찾기 위해 먼 이국땅에서 온 수녀님들이 급기야는 춘천에 주둔 중인 미군 부대에까지 도움을 요청했단다. 그녀가 발견된 장소는 기숙사 뒤 높은 굴뚝 바닥이었다. 사다리를 타고 꼭대기로 올라간 그녀는 굴뚝 안으로 뛰어내린 거다. 모두의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지만, 특히 수녀님들에게는 말문이 막히는 사건이었다.
거의 모두가 뜬눈으로 밤을 새웠고, 룸메이트인 나는 다른 방에서 수녀님들의 특별한 보호를 받았다. 다음날 아침, 유난히 충격을 크게 받은 학생들과 나는 청량리행 기차를 타야만 했다.
나와 성심여대와의 인연은 그날이 마지막이 되었다.
12월에 치뤄질 2학기 시험도 거부한 여러명의 학생들과 나는 다음 해 2월 각자 선택한 대학으로 뿔뿔이 흩어져 편입시험을 치루었다. 나는 집에서 가까운 명륜동에 있는 성균관 대학을 지원했다. 국문과에서 불문과로 전과를 했다. 불문과를 선택한 이유는 피어나는 꽃봉우리들을 죽음의 길로 몰아넣은 알베르 까뮈라는 사람에 대한 증오심 때문이었다. 과연 까뮈라는 작가는 어떤 인물일까.
무사히 2학년으로 편입은 했지만, 강의를 따라갈 수 있을지가 문제였다. 학창시절 프랑스 수녀님에게 배운 불어가 크게 도움이 되었지만, 프랑스 작가들의 사상이나 철학에 관해서는 감이 잡히지 않았다. 다행히 지금은 고인이 된 이가림 시인이 군 복무를 마치고 나와 함께 2학년으로 복학했다. 시인은 프랑스 작가들의 작품과 사상을 쉽게 설명해 주었고, 실존주의와 까뮈의 부조리 사상을 틈틈이 이해시키려 마음을 써 주었다. 시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나는 정확하게 감을 잡지 못한 채 대학 4년을 마쳤다.
세월은 흘렀고 나도 2남 1녀의 어머니가 되어 남편의 직장 따라 외국 주재원 생활을 하는 동안 까뮈 아저씨와 친구의 죽음은 가물가물 기억 속에서 사라져갔다.
막내딸을 초등학교에 입학시킨 후 빈 둥지 우리가 되자 다시 지난날의 일들이 되살아났다.
대학원에 도전장을 내었고 턱걸이로 입학이 허락되었다. 이번에는 보다 적극적으로 까뮈 작품에 매달렸다. 석사 논문은 까뮈의 사상을 내용으로 하기에는 능력 부족임을 느끼고 까뮈의 치밀한 소설기법을 주제로 선택했다. <작품 이방인과 전락에서의 인칭과 동사 문제>라는 제목으로 1983년 석사 논문을 발표했다. 친구의 죽음으로 인연 맺은 까뮈 아저씨의 세계를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고, 학위논문을 쓰게 되었다.
1995년 발표된 논문의 제목은 <까뮈 작품에 나타난 불교적 사고> 이다.
혼신을 다해 학위논문을 끝낸 나는 기진맥진했다. 까뮈씨와도 이별을 고하고 전공에 관계되는 모든 책들을 지하실로 이사 보냈다.
강산이 거의 두 번 변한 2012년, 나는 무료한 시간을 메꾸려 임헌영 교수의 인문학 강좌에 등록했고, 얼마 후 수필 쓰기에도 도전했다. 한국산문과의 인연으로 아저씨와도 다시 만나게 되었다.
지하실에서 잠들어 있던 책들은 긴 잠에서 깨어났고 다시 책장으로 돌아왔다. 그동안 몇 번을 시도했던 아저씨와의 결별은 여기서 포기하고, 나의 남은 시간을 내 인생에 끼어든 까뮈 아저씨와 함께할 것 같다.
『한국산문 』 2022. 10월호
불어불문학 전공
2013년 9월 한국산문으로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