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은 경술년 양력 3월 26일 오전 10시에 형장에 서서 기뻐하며 말하기를 나는 대한 독립을 위해 죽고 동양 평화를 위해 죽는데 어찌 죽음이 한스럽겠소 하였다. 마침내 한복으로 갈아입고 조용히 형장으로 나아가니 그의 나이 30세였다" 한국통사에 나오는 안중근 의사의 순국 장면입니다.
안중근 의사는 대한제국 말기에 활약한 계몽 운동가이자 군인이며 독립운동가, 평화적 아시아주의자였습니다. 1879년 9월 2일 황해도 해주목에서 태어나 1910년 3월 26일 중국의 뤼순감옥에서 순국하였습니다. 안 의사는 본래 천주교의 영향으로 교육 사업 등 민족의 계몽사업을 중심으로 활동하였으나 일제의 침탈이 국권을 빼앗는 수준으로 확대되자 항일무장투쟁으로 노선을 바꾸었습니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으로 망명한 후 의군을 조직하였습니다. 안 의사는 대한독립군의 장군격인 참모 중장으로 활동했습니다.
안중근 의사는 일제의 핵심 인물 이토 히로부미와 같은 세상에서 생존할 수 없는 악연속에 놓였습니다. 이토 히로부미는 일제의 초대 내각총리대신을 지냈으며 초대 귀족원 의장, 초대 추밀원(일왕의 고문역할) 의장, 초대 한국 통감을 역임한 인물입니다.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이 메이지유신을 시작으로 근대화된 나라를 만들고 제국주의적 성향을 갖추기 시작하면서 일본내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인물로 위치해 있었습니다. 이토 히로부미는 조선역사말기에 한반도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갖가지 사건에 연루돼 있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이토 히로부미는 조선말 조선을 침략하는데 일등 공신역할을 수행했습니다. 1884년 동학농민운동 당시 일본군을 출동시켜 농민군 학살과 진압을 주도했습니다. 1895년 을미사변(명성황후 민씨를 시해한 사건)과 1905년 을사늑약(한국의 외교권을 빼앗기 위해 강제로 맺은 조약), 1907년 정미 7조약과 대한제국 군대 해산, 고종의 강제 퇴위 등을 주도했던 그야말로 한반도 침략과 강제병합의 원흉 중의 원흉입니다.
한반도를 일제가 강제병합하는데 지대한 역할과 토대를 마련한 이토 히로부미.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이 정말 제거해야 할 대표적인 인물로 지목한 것이 바로 이토 히로부미였습니다. 그런 이토 히로부미가 1909년 10월 26일 중국 하얼빈에 러시아 재무상과 러일간 경제 회담을 갖는 목적으로 온다는 정보를 안중근 의사는 획득합니다. 안 의사는 25일 기차를 타고 하얼빈에 도착해 26일 거사를 거행합니다. 이토 히로부미를 태운 특별 열차가 역에 도착하고 환영인파속에 있던 그를 정조준합니다. 첫 발은 이토의 몸을 관통했고 안 의사는 계속해서 확인 사살을 실시했습니다. 이토 히로부미는 긴급하게 치료를 받았지만 20여분만에 숨이 끊어졌습니다. 안중근 의사는 즉시 체포되었고 코레아 우라(대한국 만세)라고 외쳤습니다. 안 의사와 안 의사를 도운 우덕순의사 조도선 의사 등 3명은 체포되고 러시아 검찰로부터 조사를 받은 뒤 10월 28일에 일본의 식민지인 관동주 뤼순 감옥으로 이송돼 수감됐습니다.
1910년 2월 14일에 일본인 재판장은 그에게 사형을 선고합니다. 당시 항소를 하자는 의견이 있었지만 항소할 경우 자칫 조선의 지사가 목숨을 구걸했다는 인상을 줄 수도 있다는 조언에 따라 항소를 포기합니다. 2월 14일에 사형이 결정되고 사형이 집행된 3월 26일까지 1달 12일은 안중근 의사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착찹한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안 의사도 사람인데 왜 여러가지 생각을 하지 않았겠습니까. 결혼해서 부인과 2남 1녀가 있는 몸이였습니다. 하지만 안중근 의사는 감옥안에서 서예와 <동양평화론>집필에 몰두했습니다. 안 의사는 대한의군의 참모중장 신분으로 총살형을 일제에 요구했지만 일제는 단순한 테러리스트로 간주해 교수형을 집행했습니다.
형집형 직전에 안중근 의사는 동양평화 만세를 삼창하고 싶으니 특별히 허락해 달라고 했지만 저지당했습니다. 백지와 백색 천으로 눈을 가린 뒤 마지막 2분동안의 기도를 끝으로 형장의 이슬이 되고 말았습니다. 당시 안중근 의사의 복장은 고향에서 온 비단 조선복을 입고 품속에는 성화를 넣고 있었다고 합니다. 안중근 의사의 사형에 임하는 태도가 너무나 침착해서 주변을 놀라게 했습니다. 평소와 조금의 차이도 없이 떳떳하고 깨끗하게 죽음에 임했다고 전해집니다.
안중근 의사는 유언으로 자신의 유해를 하얼빈 공원에 묻었다가 고국이 해방되면 그때 고국의 땅에 묻어달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안 의사는 "나는 천국에 가서도 마땅히 우리 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 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된 의무를 다하며 마음을 같이 하고 힘을 합하여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루도록 일러다오. 대한 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라는 말을 유언으로 남겼습니다.
안중근 의사의 유해는 안타깝게도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습니다. 김구 선생이 안의사의 유해를 찾기위해 시도했지만 암살당하면서 흐지부지 되어버렸습니다. 안 의사의 유해발굴에 호의적이었던 당시 중국 국민당의 장개석이 국공내전에서 패해 대만으로 도망하는 바람에 사실상 안 의사 유해 발굴은 중단되고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안중근 의사가 서거한지 벌써 114년이 흘렀습니다. 안의사가 그렇게 희구했던 고국의 독립은 이루었지만 고인이 그렇게 희망했던 진정한 독립은 아직 멀리 있습니다. 일제 친일파들의 청산도 이뤄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국적만 한국인인 친일 세력들이 나라 곳곳에 포진하고 있습니다. 요즘 일본을 찾는 외국관광객들중 한국인이 가장 많다는 것은 이제는 뉴스도 아닙니다. 한반도 역사상 유래가 없는 친일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습니다. 안중근 의사의 서거 114주년을 맞아 참으로 착찹한 심정입니다. 지금 한국에 살고 있는 이 시대 한국인들이 과연 제대로 된 역사의식을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일제 강점기때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초개처럼 생각했던 그 순국선열들을 과연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등을 생각할 때 요즘 한국의 현실이 너무도 우려스럽지 않을 수 없습니다.
2024년 3월 26일 화야산방에서 정찬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