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덕이 죽었으나 아들이 없었다. 여러 신하들이 의논한 후, 왕의 족질 주원을 왕으로 세우려 하였다. 그 때 주원은 서울 북쪽 20리 되는 곳에 살았는데, 때마침 큰 비가 내려 알천의 물이 불어나 주원이 건너올 수 없었다. 누군가가 “임금이라는 큰 지위는 실로 사람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인데, 오늘 폭우가 내리니 하늘이 혹시 주원을 왕으로 세우려 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지금의 상대등 경신은 전 임금의 아우로서, 덕망이 높고 임금의 체통을 가졌다”고 말하였다. 이에 여러 사람들의 의견이 일치하여, 그로 하여금 왕위를 잇게 하였다. 얼마 후 비가 그치니 백성들이 모두 만세를 불렀다.
"복두를 벗은 것은 위에 있는 이가 없다는 뜻이요, 흰 갓을 쓴 것은 면류관을 쓸 징조이며, 12현금을 든 것은 12대손의 왕위를 이어 받을 조짐이며, 천관사 우물로 들어간 것은 궁궐로 들어갈 상서로운 조짐입니다."
"위에 주원이 있는데 어찌 상위에 있을 수 있겠소?"
왕이 말하자 아찬이 말했다.
"비밀히 북천 신에게 제사지내면 좋을 것입니다."
왕은 이에 따랐다. 그 얼마 후 선덕왕이 세상을 떠나매 나라 사람들은 김주원을 왕으로 받들어 장차 궁중으로 맞아들이려 했다. 그의 집은 북천 북쪽에 있었는데 냇물이 갑자기 불어나 건널 수가 없었다. 이에 왕이 먼저 궁궐로 들어가 왕위에 오르니 모든 대신들이 따랐으며, 새 임금께 축하를 드리니 이가 원성대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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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원은 명주에 물러가 살았다. 그는 왕위에 올랐으나, 이때 여산은 이미 죽었으므로 그의 자손들을 불러 벼슬을 주었다.
삼국시대 당대의 사서(삼국사기·삼국유사)에는 명주군왕 작위나 식읍 지역 이름이 나오지 않지만, 고려조선 초기 동해안 강릉 지역 민간 전승과 문중 고문서로 이어져 오다가 15~16세기 조선 국가 지리지(《동국여지승람》 및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관찬 문헌의 형태로 정리·기록되었다.
후손 김첨경(金添慶)이 강릉부사로 부임하여 실전(失傳)되었던 시조 김주원의 묘소를 재확인하고 수축(修築)한 과정에 관한 기록이 전해진다. 이 기록은 《강릉김씨세보(江陵金氏世譜)》의 서문과 제문(祭文), 그리고 강릉 지역 유교 사적 기록 및 묘갈명 등에 상세히 수록되어 있다.
명주군왕릉에 상하(앞뒤)로 배치되어 있는 2기의 봉분 중, 위쪽(뒤쪽)에 위치한 봉분은 김주원의 부인인 '명주군왕비(溟州郡王妃)' 강릉 박씨(江陵 朴氏)의 무덤이고, 앞쪽(아래) 봉분이 명주군왕 김주원의 묘이다. 묘역 석비 등에 '왕비묘재후(王妃墓在後: 왕비의 묘는 뒤에 있다)'라는 명문이 기록되어 있어 이를 명확히 밝히고 있다.
1565년(명종 20년) 부임한 후손 김첨경이 묘역을 정비할 당시는 조선 후기의 이념적 예법(좌우쌍분 또는 자좌오향 우상/좌상 관념)이 교조적으로 고착되기 전으로, 풍수적 영맥(嶺脈)과 도장 풍습이 두루 반영되던 시기였다. 그러나 명주군왕릉의 상하 2기 배치는 김주원 부부의 실제 사망 순서나 도장 원칙보다는 16세기 묘역 재정비 과정의 공간적 특성에 따른 결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김주원과 왕비 강릉 박씨는 8세기 후반9세기 초(신라 하대) 사람이다. 당시 신라 사회에서는 부부 봉분을 상하로 쌓아 돌호석(둘레돌)을 두르는 형태의 전후 상하분(前後 上下墳) 형태가 드물었으며, 실전(失傳)되었다가 약 700~800년이 지난 16세기 중반에 봉분이 수축되었기 때문에 부인 박씨가 실제로 나중에 죽어 도장을 했는지는 명확한 기록이 없다.
1565년 김첨경이 현장에서 실전된 묘역을 수소문하여 확정할 당시, 해당 입지에는 산기슭 경사를 따라 내려오는 계단식 봉분 구조가 이미 존재했거나 조성되어 있었다. 당시 풍수 관념상 용맥(龍脈)이 내려오는 위쪽 봉분을 혈(穴)의 중심이자 산기운을 먼저 받는 상석(上席)으로 보아 주체(왕비)를 모시고, 아래쪽 봉분을 남편(김주원)으로 모시거나, 반대로 지형적 주석물 배치를 위해 상하로 나눈 형태로 정비되었다.
김첨경이 강릉부사로 부임하여 시조의 행적을 추모하고 묘소를 찾고자 염원하던 어느 날 밤,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났다. 머리에 금관을 쓰고 위엄 있는 왕의 복장을 한 거룩한 노인(김주원)이 나타났다. 노인은 김첨경에게 "내가 바로 너희들의 시조인 명주군왕이다. 오랜 세월 동안 산천이 변하여 내 묘소를 찾는 이가 없고, 풀만 무성하게 잡목 속에 묻혀 있구나"라며 탄식하였다.
꿈에서 깬 김첨경은 이를 범상치 않게 여겨, 이튿날 즉시 관아의 아전들과 지역 사정에 밝은 노인들을 소환하였다. 김첨경은 부 관내 여러 골짜기의 오래된 무덤과 지명 전승을 조사했다. 탐문 결과, 성산면 보광리 일대의 주민들 사이에서 예로부터 "저 골짜기는 왕이 묻힌 곳이라 하여 '왕능골'이라 부른다", "조상 대대로 저 산자락의 대형 봉분에는 신령한 기운이 있어 함부로 나무를 베거나 훼손하지 않았다"는 구전이 내려오고 있음을 확인했다.
김첨경은 관원 및 문중 친족들과 함께 보광리 왕능골로 직접 향했다. 현장에 도착해 보니 꿈속에서 노인이 일러준 대로 산세의 용맥이 힘있게 내려오는 기슭이었으며, 거대한 상하 2기의 봉분이 덩굴과 잡목에 가려진 채 오랜 세월 방치되어 있었다. 주변 지형과 지방 전승, 묘역의 규모, 그리고 신라 시대 왕족·귀족 분묘의 형태를 종합적으로 검증한 김첨경은 이 무덤이 시조 김주원과 왕비 강릉 박씨의 묘소임을 확신하였다.
김첨경은 즉시 사재와 관의 지원을 모아 잡목을 제거하고 묘역을 넓게 봉축(封築)하였으며, 봉분과 묘표석을 다시 세웠다. 이어 1565년(명종 20년), 김첨경은 이 탐문 과정과 현몽의 전말, 그리고 재확인된 시조의 혈통을 정리하여 강릉 김씨 최초의 족보인 《강릉김씨세보(을축보)》를 간행하고 서문에 이 기록을 남겼다. 이로써 실전되었던 신라 하대의 명주군왕 묘소는 조선 중기 이후 오늘날의 '강릉 명주군왕릉'으로 공식적으로 재정립되어 전해 내려오게 되었다.
현대 (1980년대 이후~현재)에 와서 강원도 기념물(1971년 지정) 지정 이후 문중(강릉김씨 대종회)과 지자체에서 능역을 정비하는 과정에서, 봉분의 토사 유실을 막고 무덤의 위용을 높이기 위해 현대식 기계 가공 화강암으로 12지신상이나 문양이 새겨진 둘레돌(병풍석/호석)을 둘러쌓고 상석과 바닥 석재를 깨끗하게 교체하였다.
둘레돌(호석)과 제향 공간의 매끈한 화강암 석물들은 최근 몇 십 년 사이에 현대적 공법으로 조성된 신식 석물이다. 실제 지정 문화재로서의 가치는 이 현대식 석조물 자체에 있다기보다, 8~9세기 신라 하대 고분으로서의 매장 입지 및 역사성, 그리고 16세기 이후 이어져 온 조선 시대 묘역의 전통적 배치 구조에 있다.
만약 내부 매장 시설이 보존되어 있다면, 신라 하대(8~9세기) 명주(강릉) 지역을 지배했던 최고위 진골 귀족의 무덤이라는 역사적 위상에 비추어 '굴식 돌방무덤(횡혈식 석실묘)' 구조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 8세기 후반 신라의 고위 귀족 및 지방 호족 묘제는 경주뿐만 아니라 지방에서도 널리 굴식 돌방무덤 양식을 채택했다.
명주군왕릉이 위치한 묘역은 평지나 완만한 구릉이 아니라, 산자락의 경사각이 매우 가파른 능선(맥선) 상에 위치해 있다. 사람이 걸어서 들어갈 수 있는 거대한 돌방(석실)과 길고 깊은 출입구(연도)를 수평으로 만드려면 뒤편의 산을 깊게 파내어 대규모 평지를 확보해야 하는데, 명주군왕릉 묘역의 지형은 그러한 대형 석실을 매장할 깊이나 평지 공간 자체가 전혀 형성되어 있지 않다.
1565년 조선 시대에 후손 김첨경이 묘를 재정비할 당시, 이미 경사면에 존재하는 작은 무덤 자리(또는 얕은 석곽/돌덧널) 위에 조선 시대 사대부 묘제 양식으로 흙을 단처럼 쌓아 올려(계단식 축대) 현재의 상하 방형 봉분을 만들어 넣었다. 즉, 거대한 지하 석실을 만든 것이 아니라, 가파른 비탈면 위에 축대를 쌓고 봉분을 돋우었기 때문에 지형적으로 굴식돌방무덤의 크기가 나올 수 없는 구조이다.
돌덧널무덤(석곽묘)은 신라 삼국통일 이전인 5~6세기경 전형적으로 유행했던 무덤 양식으로, 김주원이 활동했던 8세기 후반~9세기 초 신라 하대(통일신라 후기)의 주류 묘제 양식이 결코 아니다. 신라 하대의 왕공귀족 묘제는 굴식 돌방무덤(횡혈식 석실묘)이나 화장묘(뼈단지)가 주를 이루며, 양식사적으로 돌덧널무덤이 들어설 수 있는 시기가 아니다.
학계 및 향토사학계 일부에서도 강릉김씨 문중의 시조 묘역 창출(창작) 가능성을 충분히 개진하고 있으며, 수원 백씨 시조 백우경(白宇經) 묘 전설과의 구조적 유사성은 매우 핵심적인 비판 포인트이다. 백우경 묘 사건과 비교하여 명주군왕릉이 16세기 문중 차원의 '조작 및 문중 역사 재창조' 결과물일 가능성을 개진하고 있다.
조선 성종~선조 대, 특히 16세기는 성리학적 종법 질서가 정착하면서 각 문중이 족보 편찬(세보 간행), 시조 묘소 수색, 사당 건립에 혈안이 되던 시기였다. 백우경 묘(수원 백씨)도 조선 후기 문중에서 정맥을 입증하기 위해 신라 시대 인물인 백우경의 묘를 전설과 현몽에 의지해 임의로 지정·정비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명주군왕릉(강릉 김씨) 역시 1565년(명종 20년) 강릉부사 김첨경이 700~800년 동안 실전(失傳)되었던 묘소를 '꿈속 현몽(現夢)'과 '마을 노인들의 구전'만으로 찾아내어 성역화했다. 실증적 문헌이나 고고학적 지표 없이 꿈과 민간 전승에만 의존하여 시조 묘로 확정지었다는 점은 백우경 묘 등의 위작/조작 사례와 정확히 동일한 구조이다.
1565년 묘소를 확정하고 족보(을축보)를 펴낸 김첨경은 단순한 후손이 아니라 당시 '강릉부사(江陵府使)'라는 해당 지역 최고 행정관/지방관이었다. 관의 권력과 행정력을 동원하여 특정 산자락(보광리)의 고분을 시조 묘로 성역화하고, 관찬 지리지나 문중 기록에 이를 공식화하는 과정이 수월했을 것이다. 당시 지방관으로 부임한 후손이 가문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지역 내 임의의 방치된 옛 고분(또는 신라/고려시대 무덤)을 시조 묘로 '지정'했을 개연성이 높다.
앞서 다룬 강릉 김씨의 명주군왕릉(김주원 묘), 수원 백씨의 백우경 묘, 그리고 경주/순창 설씨의 설총 묘에 이르기까지 공통된 역사적 정체 형성 패턴을 공유한다. 실전(失傳): 고려~조선시대를 거치며 시조/선조의 무덤 위치가 유실됨. 현몽(現夢): 문중 후손의 꿈에 선조가 나타나 위치를 암시함. 지정 및 정비: 주변의 주인 없는 신라/고려시대 고분을 시조 묘로 확정하고 석물을 단장함.
첫댓글 及<宣德>薨, 無子. 群臣議後, 欲立王之族子<周元>. <周元>宅於京北二十里, 會, 大雨, <閼川>水漲, <周元>不得渡. 或曰: “卽人君大位, 固非人謀, 今日暴雨, 天其或者不欲立<周元>乎? 今上大等<敬信>, 前王之弟, 德望素高, 有人君之體.” 於是, 衆議翕然, 立之繼位. 旣而雨止, 國人皆呼萬歲.
<三國史記 元聖王條>
선덕이 죽었으나 아들이 없었다. 여러 신하들이 의논한 후, 왕의 족질 주원을 왕으로 세우려 하였다. 그 때 주원은 서울 북쪽 20리 되는 곳에 살았는데, 때마침 큰 비가 내려 알천의 물이 불어나 주원이 건너올 수 없었다. 누군가가 “임금이라는 큰 지위는 실로 사람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인데, 오늘 폭우가 내리니 하늘이 혹시 주원을 왕으로 세우려 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지금의 상대등 경신은 전 임금의 아우로서, 덕망이 높고 임금의 체통을 가졌다”고 말하였다. 이에 여러 사람들의 의견이 일치하여, 그로 하여금 왕위를 잇게 하였다. 얼마 후 비가 그치니 백성들이 모두 만세를 불렀다.
<삼국사기 원성왕 즉위년조>
伊湌金周元, 初爲上宰, 王爲角干, 居二宰. 夢脫幞頭, 著素笠, 把十二絃琴, 入於天官寺井中. 覺而使人占之. 曰 “脫幞頭者, 失職之兆, 把琴者, 著枷之兆, 入井, 入獄之兆.” 王聞之甚患, 杜門不出. 于時阿湌餘三[或本餘山]來通謁, 王辭以疾不出. 再通曰 “願得一見”, 王諾之. 阿湌曰: “公所忌何事?” 王具說占夢之由, 阿湌興拜曰 “此乃吉祥之夢, 公若登大位而不*<遣,遺>我, 則爲公解之.”
이찬 김주원이 처음 상재(上宰)가 되고 왕은 각간으로 차재가 되었는데 복두(귀인이 쓰는 모자)를 벗고 흰 갓을 쓰고 12현금을 들고 천관사 우물 속으로 들어갔다. 꿈이 깨자 사람을 시켜 점을 쳐보니,
"복두를 벗은 것은 관직을 잃을 징조요, 가야금을 든 것은 칼을 쓰게 될 조짐이요, 우물 속으로 들어간 것은 옥에 갇힐 징조입니다."
했다. 왕은 이 말을 듣자 심히 근심하여 두문불출하였다. 이 때 아찬 여삼[어떤 책에는 여산이라 했다]이 와서 뵙기를 청했으나 왕은 병을 빙자하고 나오지 않았다. 다시 아찬이 청하므로 왕이 이를 허락하자, 아찬이 물었다.
"공이 근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왕이 꿈을 점쳤던 사실을 자세히 얘기하니 아찬은 일어나 절을 하며 말했다.
"그것은 좋은 꿈입니다. 공이 만약 왕위에 올라서도 나를 버리지 않으신다면 공을 위해 꿈을 풀어보겠습니다."
王乃辟禁左右, 而請解之. 曰 “脫幞頭者, 人無居上也, 著素笠者, 冕旒之兆也, 把十二絃琴者, 十二孫傳世之兆也, 入天宮井, 入宮禁之瑞也.” 王曰 “上有周元, 何居上位?” 阿湌曰 “請密祀北川神可矣.” 從之. 未幾, 宣德王崩, 國人欲奉周元爲王. 將迎入宮, 家在川北, 忽川漲不得渡. 王先入宮卽位, 上宰之徒衆, 皆來附之, 拜賀新登之*<王,主>. 是爲元聖大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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周元退居溟州, 王旣登極, 時餘山已卒矣, 召其子孫賜爵.
<三國遺事 元聖大王條>
이에 왕이 좌우를 물리치고 아찬에게 해몽하기를 청하자 아찬은 말했다.
"복두를 벗은 것은 위에 있는 이가 없다는 뜻이요, 흰 갓을 쓴 것은 면류관을 쓸 징조이며, 12현금을 든 것은 12대손의 왕위를 이어 받을 조짐이며, 천관사 우물로 들어간 것은 궁궐로 들어갈 상서로운 조짐입니다."
"위에 주원이 있는데 어찌 상위에 있을 수 있겠소?"
왕이 말하자 아찬이 말했다.
"비밀히 북천 신에게 제사지내면 좋을 것입니다."
왕은 이에 따랐다. 그 얼마 후 선덕왕이 세상을 떠나매 나라 사람들은 김주원을 왕으로 받들어 장차 궁중으로 맞아들이려 했다. 그의 집은 북천 북쪽에 있었는데 냇물이 갑자기 불어나 건널 수가 없었다. 이에 왕이 먼저 궁궐로 들어가 왕위에 오르니 모든 대신들이 따랐으며, 새 임금께 축하를 드리니 이가 원성대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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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원은 명주에 물러가 살았다. 그는 왕위에 올랐으나, 이때 여산은 이미 죽었으므로 그의 자손들을 불러 벼슬을 주었다.
《삼국사기》 본기에는 김경신의 즉위와 김주원이 알천을 건너지 못한 정변 과정만 기록되어 있다. 선덕왕이 죽자 군신들이 김주원을 세우려 했으나 비로 인해 오지 못하자, 김경신(원성왕)이 먼저 궁에 들어가 왕위에 올랐다는 사실로 끝난다.
《삼국유사》 역시 알천의 물이 불어 김경신이 먼저 궁에 들어간 서사를 다루고 있으나, 여기에도 "명주로 피하여 살았다(避居溟州)"거나 "명주를 식읍으로 주었다"는 명문은 나오지 않는다.
'명주군왕 봉작·식읍 하사' 등의 세부 전승은 고려~조선 시대를 거치며 강릉 김씨 문중 및 지방 지리지(《신증동국여지승람》 등)와 족보(《강릉김씨세보》)에 정리되어 정착한 서사이다.
後二年 封周元爲溟州郡王 割溟州翼領三陟 斤乙於 蔚珍等官爲食邑 子孫因以府爲鄕
(원성왕 즉위) 2년 후에 주원(周元)을 명주군왕(溟州郡王)으로 봉하고, 명주의 날개처럼 딸려 있던 속현인 삼척(三陟)·근을어(斤乙於: 평해)·울진(蔚珍) 등의 고을을 떼어 식읍(食邑)으로 삼아주었다. 자손들이 이로 인하여 강릉부(溟州)를 본관(鄕)으로 삼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44 강원도 강릉대도호부 조
선덕왕 사후 정변이 일어난 785년에서 2년이 지난 787년(원성왕 3년) 즈음에 원성왕이 김주원에게 명주군왕 작위와 식읍을 하사하여 무마 및 회유 조치를 취했다는 문맥으로 해석된다.
당시 명주(강릉) 본지역뿐만 아니라 영동 남부의 주요 요충지였던 삼척·근을어(지금의 경북 울진군 평해읍)·울진 지역까지 잘라내어 김주원 가문의 독자적인 식읍 겸 영지 기반으로 인정해 주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시대 당대의 사서(삼국사기·삼국유사)에는 명주군왕 작위나 식읍 지역 이름이 나오지 않지만, 고려조선 초기 동해안 강릉 지역 민간 전승과 문중 고문서로 이어져 오다가 15~16세기 조선 국가 지리지(《동국여지승람》 및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관찬 문헌의 형태로 정리·기록되었다.
新羅侍中 周元 避亂退居溟州 元聖王 封爲溟州郡王 賜溟州 翼領三陟 斤乙於 蔚珍等官 爲食邑
신라 시중 주원(周元)이 난(왕위 승계 관련 정변)을 피하여 명주로 물러가 살자, 원성왕이 명주군왕(溟州郡王)으로 봉하고 명주 및 그 날개처럼 딸린 고을인 삼척(三陟)·근을어(斤乙於)·울진(蔚珍) 등의 관아 지역을 내주어 식읍(食邑)으로 삼게 하였다.
《강릉김씨세보》 서문 및 행록 기사
《강릉김씨세보》의 이 기사는 앞서 성종·중종 대에 수찬된 국가 지리지인 《동국여지승람》 및 《신증동국여지승람》의 내용과 문맥 및 대상 지역(삼척·근을어·울진)이 동일하게 일치한다.
후손 김첨경(金添慶)이 강릉부사로 부임하여 실전(失傳)되었던 시조 김주원의 묘소를 재확인하고 수축(修築)한 과정에 관한 기록이 전해진다.
이 기록은 《강릉김씨세보(江陵金氏世譜)》의 서문과 제문(祭文), 그리고 강릉 지역 유교 사적 기록 및 묘갈명 등에 상세히 수록되어 있다.
신라 말~고려 시대를 거치며 오랜 세월이 흘러 시조 명주군왕 김주원의 묘소 위치를 정확히 알 수 없게 되었다.
조선 명종 대(16세기 중반) 김주원의 후손인 김첨경이 강릉부사(江陵府使)로 부임하면서 실전(失傳)된 시조의 묘소를 찾기 시작했다.
문헌 및 가문 전승 기록에 따르면, 김첨경의 꿈에 시조가 나타났다는 현몽 전설과 함께 강릉 성산면 보광리 일대의 오래된 대형 묘소에 대한 지역 주민들의 구전 전승을 조사하였다.
성산면 보광리 현장에서 옛 능원 형태의 봉분과 주위 정황을 확인한 후, 이를 시조 김주원의 묘소로 확정하였다. 이어 묘역을 정비하고 묘비(묘표)와 봉분을 수축하였다.
이 성과를 바탕으로 1565년(명종 20년) 김첨경 등 문중 후손들이 《강릉김씨세보》(을축보)를 최초로 간행하면서 시조의 묘소 위치와 재확인 경위를 공식 기록으로 남겼다.
현재 '강릉 명주군왕릉'은 바로 이때 조선 중기에 재확인되어 보수·유지되어 온 묘역이다.
명주군왕릉에 상하(앞뒤)로 배치되어 있는 2기의 봉분 중, 위쪽(뒤쪽)에 위치한 봉분은 김주원의 부인인 '명주군왕비(溟州郡王妃)' 강릉 박씨(江陵 朴氏)의 무덤이고, 앞쪽(아래) 봉분이 명주군왕 김주원의 묘이다.
묘역 석비 등에 '왕비묘재후(王妃墓在後: 왕비의 묘는 뒤에 있다)'라는 명문이 기록되어 있어 이를 명확히 밝히고 있다.
조선 시대 사대부 및 왕실 묘제에서 산세의 혈맥을 따라 부부를 상하(전후)로 안장하는 형태를 취한 연유로, 아래쪽 묘에만 상석·문인석·망주석 등의 석물이 전면배치되어 있다.
1565년(명종 20년) 부임한 후손 김첨경이 묘역을 정비할 당시는 조선 후기의 이념적 예법(좌우쌍분 또는 자좌오향 우상/좌상 관념)이 교조적으로 고착되기 전으로, 풍수적 영맥(嶺脈)과 도장 풍습이 두루 반영되던 시기였다.
그러나 명주군왕릉의 상하 2기 배치는 김주원 부부의 실제 사망 순서나 도장 원칙보다는 16세기 묘역 재정비 과정의 공간적 특성에 따른 결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김주원과 왕비 강릉 박씨는 8세기 후반9세기 초(신라 하대) 사람이다.
당시 신라 사회에서는 부부 봉분을 상하로 쌓아 돌호석(둘레돌)을 두르는 형태의 전후 상하분(前後 上下墳) 형태가 드물었으며, 실전(失傳)되었다가 약 700~800년이 지난 16세기 중반에 봉분이 수축되었기 때문에 부인 박씨가 실제로 나중에 죽어 도장을 했는지는 명확한 기록이 없다.
1565년 김첨경이 현장에서 실전된 묘역을 수소문하여 확정할 당시, 해당 입지에는 산기슭 경사를 따라 내려오는 계단식 봉분 구조가 이미 존재했거나 조성되어 있었다.
당시 풍수 관념상 용맥(龍脈)이 내려오는 위쪽 봉분을 혈(穴)의 중심이자 산기운을 먼저 받는 상석(上席)으로 보아 주체(왕비)를 모시고, 아래쪽 봉분을 남편(김주원)으로 모시거나, 반대로 지형적 주석물 배치를 위해 상하로 나눈 형태로 정비되었다.
조선 중기 강릉 김씨 문중에서 묘역을 봉축하면서 위쪽(뒤쪽) 봉분을 부인 박씨의 묘, 아래쪽(앞쪽) 봉분을 김주원의 묘로 공식 지정하고 석물을 아래쪽에 배치하였다.
조선 명종 대(16세기 중반) 강릉부사로 부임한 김주원의 15세손 김첨경(金添慶)이 시조의 실전(失傳)된 묘소를 다시 찾아내게 된 현몽(現夢) 전설과 탐문 과정은 강릉 김씨 문중 전승 및 지역 야사·지리지 등에 매우 구체적이고 드라마틱하게 전해진다.
김첨경이 강릉부사로 부임하여 시조의 행적을 추모하고 묘소를 찾고자 염원하던 어느 날 밤,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났다.
머리에 금관을 쓰고 위엄 있는 왕의 복장을 한 거룩한 노인(김주원)이 나타났다.
노인은 김첨경에게 "내가 바로 너희들의 시조인 명주군왕이다. 오랜 세월 동안 산천이 변하여 내 묘소를 찾는 이가 없고, 풀만 무성하게 잡목 속에 묻혀 있구나"라며 탄식하였다.
노인은 특정 지형을 가리키며 "강릉 서쪽 산자락(보광리) 골짜기, 능선이 마치 비룡(飛龍)이 내리달리는 듯한 혈맥(穴脈) 아래에 내 안식처가 있다. 가서 찾아보아라"는 말을 남기고 안개처럼 사라졌다.
꿈에서 깬 김첨경은 이를 범상치 않게 여겨, 이튿날 즉시 관아의 아전들과 지역 사정에 밝은 노인들을 소환하였다.
김첨경은 부 관내 여러 골짜기의 오래된 무덤과 지명 전승을 조사했다.
탐문 결과, 성산면 보광리 일대의 주민들 사이에서 예로부터 "저 골짜기는 왕이 묻힌 곳이라 하여 '왕능골'이라 부른다", "조상 대대로 저 산자락의 대형 봉분에는 신령한 기운이 있어 함부로 나무를 베거나 훼손하지 않았다"는 구전이 내려오고 있음을 확인했다.
김첨경은 관원 및 문중 친족들과 함께 보광리 왕능골로 직접 향했다.
현장에 도착해 보니 꿈속에서 노인이 일러준 대로 산세의 용맥이 힘있게 내려오는 기슭이었으며, 거대한 상하 2기의 봉분이 덩굴과 잡목에 가려진 채 오랜 세월 방치되어 있었다.
주변 지형과 지방 전승, 묘역의 규모, 그리고 신라 시대 왕족·귀족 분묘의 형태를 종합적으로 검증한 김첨경은 이 무덤이 시조 김주원과 왕비 강릉 박씨의 묘소임을 확신하였다.
김첨경은 즉시 사재와 관의 지원을 모아 잡목을 제거하고 묘역을 넓게 봉축(封築)하였으며, 봉분과 묘표석을 다시 세웠다.
이어 1565년(명종 20년), 김첨경은 이 탐문 과정과 현몽의 전말, 그리고 재확인된 시조의 혈통을 정리하여 강릉 김씨 최초의 족보인 《강릉김씨세보(을축보)》를 간행하고 서문에 이 기록을 남겼다. 이로써 실전되었던 신라 하대의 명주군왕 묘소는 조선 중기 이후 오늘날의 '강릉 명주군왕릉'으로 공식적으로 재정립되어 전해 내려오게 되었다.
신라 시대 8~9세기
당시 무덤 형태는 흙을 높이 쌓은 봉분이나 돌을 쌓은 자연스러운 신라식 고분이었으며, 시간이 흐르고 고려 시대를 거치며 오랫동안 방치되어 외형이 크게 훼손되었다.
조선시대 중기 (16세기, 1565년)에
김첨경이 묘역을 정비할 당시에는 잡목을 제거하고 흙을 다시 돋우어 조선시대 사대부 묘제 양식의 봉분과 비석, 상석, 문인석, 망주석 등을 갖추었다. 이때는 다듬은 화강암 병풍석(호석)을 화려하게 두르는 양식이 아니었다.
현대 (1980년대 이후~현재)에 와서
강원도 기념물(1971년 지정) 지정 이후 문중(강릉김씨 대종회)과 지자체에서 능역을 정비하는 과정에서, 봉분의 토사 유실을 막고 무덤의 위용을 높이기 위해 현대식 기계 가공 화강암으로 12지신상이나 문양이 새겨진 둘레돌(병풍석/호석)을 둘러쌓고 상석과 바닥 석재를 깨끗하게 교체하였다.
둘레돌(호석)과 제향 공간의 매끈한 화강암 석물들은 최근 몇 십 년 사이에 현대적 공법으로 조성된 신식 석물이다.
실제 지정 문화재로서의 가치는 이 현대식 석조물 자체에 있다기보다, 8~9세기 신라 하대 고분으로서의 매장 입지 및 역사성, 그리고 16세기 이후 이어져 온 조선 시대 묘역의 전통적 배치 구조에 있다.
만약 내부 매장 시설이 보존되어 있다면, 신라 하대(8~9세기) 명주(강릉) 지역을 지배했던 최고위 진골 귀족의 무덤이라는 역사적 위상에 비추어 '굴식 돌방무덤(횡혈식 석실묘)' 구조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
8세기 후반 신라의 고위 귀족 및 지방 호족 묘제는 경주뿐만 아니라 지방에서도 널리 굴식 돌방무덤 양식을 채택했다.
그런데 현장의 지형을 고려하면 경주나 여타 지역에서 흔히 보는 거대한 돌방(석실)을 갖춘 굴식돌방무덤은 구조상 들어갈 수 없다.
명주군왕릉이 위치한 묘역은 평지나 완만한 구릉이 아니라, 산자락의 경사각이 매우 가파른 능선(맥선) 상에 위치해 있다.
사람이 걸어서 들어갈 수 있는 거대한 돌방(석실)과 길고 깊은 출입구(연도)를 수평으로 만드려면 뒤편의 산을 깊게 파내어 대규모 평지를 확보해야 하는데, 명주군왕릉 묘역의 지형은 그러한 대형 석실을 매장할 깊이나 평지 공간 자체가 전혀 형성되어 있지 않다.
1565년 조선 시대에 후손 김첨경이 묘를 재정비할 당시, 이미 경사면에 존재하는 작은 무덤 자리(또는 얕은 석곽/돌덧널) 위에 조선 시대 사대부 묘제 양식으로 흙을 단처럼 쌓아 올려(계단식 축대) 현재의 상하 방형 봉분을 만들어 넣었다.
즉, 거대한 지하 석실을 만든 것이 아니라, 가파른 비탈면 위에 축대를 쌓고 봉분을 돋우었기 때문에 지형적으로 굴식돌방무덤의 크기가 나올 수 없는 구조이다.
만약 이 묘소 지하에 실제로 신라시대 유구가 남아있다면, 웅장한 굴식돌방무덤(석실묘)이 아니라 지형적 한계에 맞춰 신체 하나만 겨우 들어갈 정도로 작게 파서 돌을 내장한 '돌덧널무덤(횡구식 또는 수혈식 석곽묘)'이나 소형 무덤 구조일 가능성이 훨씬 높다.
돌덧널무덤(석곽묘)은 신라 삼국통일 이전인 5~6세기경 전형적으로 유행했던 무덤 양식으로, 김주원이 활동했던 8세기 후반~9세기 초 신라 하대(통일신라 후기)의 주류 묘제 양식이 결코 아니다.
신라 하대의 왕공귀족 묘제는 굴식 돌방무덤(횡혈식 석실묘)이나 화장묘(뼈단지)가 주를 이루며, 양식사적으로 돌덧널무덤이 들어설 수 있는 시기가 아니다.
학계 및 향토사학계 일부에서도 강릉김씨 문중의 시조 묘역 창출(창작) 가능성을 충분히 개진하고 있으며, 수원 백씨 시조 백우경(白宇經) 묘 전설과의 구조적 유사성은 매우 핵심적인 비판 포인트이다.
백우경 묘 사건과 비교하여 명주군왕릉이 16세기 문중 차원의 '조작 및 문중 역사 재창조' 결과물일 가능성을 개진하고 있다.
조선 성종~선조 대, 특히 16세기는 성리학적 종법 질서가 정착하면서 각 문중이 족보 편찬(세보 간행), 시조 묘소 수색, 사당 건립에 혈안이 되던 시기였다.
백우경 묘(수원 백씨)도 조선 후기 문중에서 정맥을 입증하기 위해 신라 시대 인물인 백우경의 묘를 전설과 현몽에 의지해 임의로 지정·정비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명주군왕릉(강릉 김씨) 역시 1565년(명종 20년) 강릉부사 김첨경이 700~800년 동안 실전(失傳)되었던 묘소를 '꿈속 현몽(現夢)'과 '마을 노인들의 구전'만으로 찾아내어 성역화했다. 실증적 문헌이나 고고학적 지표 없이 꿈과 민간 전승에만 의존하여 시조 묘로 확정지었다는 점은 백우경 묘 등의 위작/조작 사례와 정확히 동일한 구조이다.
1565년 묘소를 확정하고 족보(을축보)를 펴낸 김첨경은 단순한 후손이 아니라 당시 '강릉부사(江陵府使)'라는 해당 지역 최고 행정관/지방관이었다.
관의 권력과 행정력을 동원하여 특정 산자락(보광리)의 고분을 시조 묘로 성역화하고, 관찬 지리지나 문중 기록에 이를 공식화하는 과정이 수월했을 것이다.
당시 지방관으로 부임한 후손이 가문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지역 내 임의의 방치된 옛 고분(또는 신라/고려시대 무덤)을 시조 묘로 '지정'했을 개연성이 높다.
앞서 다룬 강릉 김씨의 명주군왕릉(김주원 묘), 수원 백씨의 백우경 묘, 그리고 경주/순창 설씨의 설총 묘에 이르기까지 공통된 역사적 정체 형성 패턴을 공유한다.
실전(失傳): 고려~조선시대를 거치며 시조/선조의 무덤 위치가 유실됨.
현몽(現夢): 문중 후손의 꿈에 선조가 나타나 위치를 암시함.
지정 및 정비: 주변의 주인 없는 신라/고려시대 고분을 시조 묘로 확정하고 석물을 단장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