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6년 손기정, 남승룡이 베를린 올림픽에 우승한후
오오 조선의 남아여
이역의 하늘 아래서 그대들의 심장 속에 용솟음치던 피가
2천3백만의 한 사람인 내 혈관 속을 달리기 때문이다.
‘이겼다’는 소리를 들어보지 못한 우리의 고막은
깊은 밤 전승의 방울 소리에 터질 듯 찢어질 듯 침울한 어둠 속에 짓눌렸던
고토의 하늘도 올림픽 거화를 켜든 것처럼 화다닥 밝으려 하는구나!
오늘밤 그대들은 꿈속에서 조국의 전승을 전하고자
마라톤 험한 길을 달리다가 절명한 아테네의 병사를 만나 보리라.
그보다도 더 용감하였던 선조들의 정령이 가호하였음에 두 용사 껴안고 느껴 울었으리라.
오오, 나는 외치고 싶다! 마이크를 쥐고 전 세계의 인류를 향해서 외치고 싶다!
“인제도 인제도 너희들은 우리를 약한 족속이라고 부를 터이냐!”
심훈은 이 시를 지은 후 일본 경찰에 끌려가 심한 고초를 겪었다.
유해붕과 이길용의 일장기 말소
조선중앙일보의 유해붕기자는
손기정 우승 3일후인 8월13일 시상대에 선 손기정의 사진을 입수했다.
유해붕은 그날 신문에 사진을 내면서 손기정 가슴팍에 붙은 일장기를 지워버렸다.
손기정이 조선 사람임을 강조하고 조선 사람의 우수성을 모든 국민에게 알리기 위해서였다.
조선중앙일보는 민족지도자였던 여운형이 출옥 후 사장을 맡고 있던 신문이었다.
그리고 8월25일, 보다 선명한 사진을 구한 동아일보도
손기정의 가슴에서 일장기를 지운 사진을 신문에 실었다.
신문을 본 조선 총독 미나미는 격노했고
일본 순사들이 동아일보에 들이닥쳐 기자들을 떼로 연행했다.
체육 주임기자 이길용, 사회부장 현진건, 잡지부장 최승만, 사진과장 신낙균,
사진 제판 담당 서영호 등 5명이 일장기 말소의 주요 용의자로 꼽혔다.
다른 사람들은 오래지 않아 석방됐지만
이들 다섯 명은 40일 동안 풀리지 않은 채 고문에 시달렸다.
고문의 주된 목적은 일장기 말소가 동아일보 창설자
김성수(조선체육회 창립 발기인, 이사를 지냄)와
사장 송진우(조선체육회 이사를 지냄) 의 직접 지시에 의해 이뤄진 것이라는 걸
자백받기 위한 것이었다.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리고 조선중앙일보와 동아일보는 8월 29일자로 무기한 간행 정지 처분을 받았다.
이길용 등 다섯 명은 언론계 영구 추방의 조건으로 풀려났다.
동아일보는 다시 발행되었으나 조선중앙일보는 영영 발행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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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이자 작가인 심훈 선생, 시 영화 기사로 일제에 저항
▲ ①심훈의 사진. ②본지 1962년 7월 25일 자에 실린 충남 당진 부곡리의 ‘상록학원’ 창설 모습.
심훈의 소설 ‘상록수’가 나온 지 30여 년 만에 작품의 배경이었던 당진에서
‘상록학원’이란 이름의 야학당이 만들어졌다.
③본지 1929년 6월 13일 자에 당시 본지 기자였던 심훈이 게재한 자작시(自作詩) ‘야구’.
조선총독부의 검열 때문에 두 군데에 X자 표시가 돼 있다.
④소설 ‘상록수’의 표지.
⑤‘상록수’ 여주인공 채영신의 실제 모델이었던 최용신.
⑥최용신이 경기 수원군 반월면 샘골에 만들었던 ‘샘골 강습소’의 낙성식(落成式·건축물의 완공을 축하하는 의식) 장면. /조선일보DB
경기 안산시는 1930년대 농촌계몽운동의 선구자이자 여성 독립운동가인 최용신(1909~1935) 선생과 관련한
근현대 역사유물 자료를 공개 구매한다고 밝혔다.
최용신은 심훈(1901~1936) 소설 '상록수'의 여주인공 '채영신'의 실제 모델로 알려져 있다.
안산시에 있는 행정구역인 '상록구'의 지명은 바로 심훈의 '상록수'에서 딴 것이다.
심훈은 어떤 인물이었을까요?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며는/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날이/ 이 목숨이 끊기기 전에 와주기만 하량이면,/ 나는 밤하늘에 날으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의 인경(통행금지를 알리거나 해제하기 위해 치던 종)을 머리로 드리받아 울리오리다.' 심훈이 1930년에 써서 1932년 문예지 '신생'에 발표한 시 '그날이 오면'의 일부다.
시 어디에도 화자가 기다리는 날인 '그날'이 어떤 날인지 직접 밝히지는 않았지만 그걸 알아차리지 못할 독자는 없었습니다. 그것은 일제 치하 수많은 조선 사람이 그리던 조국 광복의 날이었어요. 당시 갓 서른을 넘은 청년이 이런 시를 발표했다는 것은 대단히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었습니다. 심훈은 이 시를 포함해 100여 편의 시를 모아 출판하려 했으나 일제의 검열로 막혔고, 그가 죽고 광복이 된 뒤인 1949년 '그날이 오면'이란 제목의 시집이 출간됐습니다.
불과 35년의 짧은 생애 동안 심훈의 활약은 다방면에 걸쳐 있었습니다. 그는 시인이자 소설가였고, 신문기자였으며, 영화감독이자 배우이자 각본가였으며 영화평론가였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독립운동가였습니다. 어쩌면 일제 치하 지식인으로서 해볼 수 있는 거의 모든 직업을 거쳤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경기도 과천군 하북면 흑석리(현 서울 동작구 흑석동)에서 태어난 심훈의 본명은 심대섭이었어요. 경성고등보통학교(현 경기고) 3학년이었던 1919년 3·1운동에 참여한 뒤 검거돼 8개월 동안 수감 생활을 했습니다. 이때 어린 심훈은 "콩밥을 먹는다고 끼니 때마다 눈물겨워하지 마십시오"라며 오히려 모친을 위로하는 당찬 모습을 보였다고 합니다. 출옥한 뒤 중국 유학을 떠났다가 1923년 귀국해 연극·영화계에서 활발히 활동했습니다. 신극 연구 단체인 극문회를 만들었고 영화 '장한몽'에 배우로 출연했습니다. 영화 '먼동이 틀 때'의 각본을 쓰고 감독을 맡기도 했죠.
그것은 결코 목적 없는 활동이 아니었습니다. 심훈은 1927년 조선일보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이 땅에서 나고 또 살아온 고로 우리 조선의 현실을 조금이라도 나타내어야 할 사명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식민지 예술인으로서의 사명을 뚜렷이 자각한 데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영화 '먼동이 틀 때'의 원래 제목은 '어둠에서 어둠으로'였지만, 총독부가 검열하며 시비를 걸었다고 합니다. "어둠이 뭐 어째? 이거 식민지 조선의 처지를 빗댄 거 아니냐!" 그래서 제목이 바뀌었다는 거예요.
동아일보 기자로도 일했던 심훈은 1928년부터 1931년까지 조선일보 기자로 활동하며 기사와 작품을 통해 '조선의 현실을 나타내야 한다'는 다짐을 실천했습니다. 해방과 독립의 염원을 절절하게 표현한 시 '그날이 오면'을 쓴 1930년은 바로 심훈이 조선일보 기자로 일하던 시기였습니다. 그는 소설도 썼습니다. 조선일보에 1931년 연재한 '동방의 애인'과 1932년 연재한 '불사조'였죠. 그러나 두 작품 모두 일제의 탄압으로 중단되는 일을 겪었습니다.
심훈의 작품들은 매우 강한 항일 의지를 담고 있었습니다. 1927년의 시 '박군의 얼굴'은 감옥에서 병을 얻은 뒤 풀려난 친구의 초췌한 몰골을 보고 충격을 받아 쓴 것인데, 시의 마지막은 "눈은 눈을 빼어서 (갚고)/ 이는 이를 뽑아서 (갚아)주마!/ 너와 같이 모든 (한)을 잊을 때까지―/ 우리들의 심장의 (고동)이 (끊칠 때)까지"였습니다. 그러나 발표될 당시 일제의 검열로 인해 괄호 안의 말들은 '×'로 가려져 지면에 나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심훈이 작품을 통해 항일 정신만을 표출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소파 방정환의 어린이 운동에 동참하는가 하면, 조선 청년들이 조선의 현실에 눈을 떠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1930년 1월에 쓴 칼럼 '새해의 선언'에선 "동무여! 진흙구렁에 틀어박힌 머리를 쳐들고 우리의 현실을 응시하자" "이 땅의 흙냄새를 맡고 자란 젊은이는 조선 사람이 마땅히 걸어야 할 그 길을 줄기차게 걸어만 가면 그만이다"고 주장했습니다.
신문사를 그만두고 충남 당진으로 내려가 집필한 심훈의 대표작이 장편소설 '상록수'입니다. 농촌계몽운동을 소재로 한 이 소설은 그가 조선일보 재직 시절 신문사 주도로 전국적으로 펼쳐졌던 문자보급운동의 경험이 깊이 들어 있습니다. 이 작품에서 그는 조선이 문맹과 가난에서 벗어나 자립해야 한다는 것을 역설했습니다.
그는 '상록수'를 영화로 만들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고, 1936년 갑작스러운 장티푸스로 요절(젊은 나이에 죽음)하고 말았습니다. 그의 장례식에서 낭송된 시는 얼마 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1위와 3위를 한 손기정·남승룡 선수를 위해 쓴 '오오, 조선의 남아여!'였습니다. 그 마지막 구절은 이것이었습니다. "인제도 인제도 너희들은 우리를/ 약한 족속이라고 부를 터이냐!"
심훈의 소설 '상록수'의 여자 주인공 채영신의 실제 모델인 최용신은 함경남도 덕원 출신 농촌운동가였습니다. 협성여자신학교(현 감리교신학대) 재학 중 농촌계몽운동에 투신해 경기도 수원군 반월면 샘골(현 안산시 상록구 본오동)에서 농촌교육을 시작했죠. 문맹 퇴치를 위한 한글 강습뿐 아니라 산술·보건, 기술, 애국심을 가르치는 계몽 운동을 적극적으로 벌였습니다.
1928년 4월 1일 조선일보에 기고한 글 '교문에서 농촌에'에서 최용신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중등교육을 받은 우리가 화려한 도시 생활만 동경하고 안일의 생활만 꿈꾸어야 옳을 것인가? 농촌으로 돌아가 문맹 퇴치에 노력해야 옳을 것인가? 거듭 말하나니 우리는 손을 서로 잡고 농촌으로 달려가자." 최용신은 안타깝게도 병을 얻어 2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1964년 한국여성단체협의회는 그를 기념하는 '용신봉사상'을 제정해 해마다 시상식을 열고 있습니다.
<참고문헌>
1. 유석재/안영, "詩로, 영화로, 기사로… 일제에 저항했어요", 조선일보, 2023.2.23일자. A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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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그 날이 오며는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 칠 그 날이
이 목숨이 끊기기 전에 와주기만 할 양이면
나는 밤하늘에 나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의 인경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다.
두개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
그날이 와서 오 오 그 날이 와서
육조 앞 넓은 길을 울며 뛰며 뒹굴어도
그래도 넘치는 기쁨에 가슴이 이어질듯 하거든
드는 칼로 이 몸의 가죽이라도 벗겨서
커다란 북을 만들어 들쳐 메고는
여러분의 행렬에 앞장을 서오리다.
우렁찬 그 소리를 한번이라도 듣기만 하면
그 자리에 거꾸러져도 눈을 감겠소이다.
이 시를 쓴 시인 심훈은 상록수라는 소설로도 잘 알려진 분이다.
그러나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하고 1936년 35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해방의 기쁨을 누릴 수 있다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있다는 이 시어 속에는
어두운 식민지를 살아가는 아픔이 얼마나 큰 것이었을까 짐작하게 합니다.
옥스퍼드 대학교수 바우라는 ‘시와 정치’라는 책에서
이 시를 세계적인 저항시의 예로 들면서 일제의 어떤 압제도 한국 시인들을 죽일 수 없었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나라의 반만년 역사 가운데 자유와 주권을 빼앗겼던 일제 36년은 가장 불행한 시기입니다.
우리는 말을 빼앗기고, 자기의 이름도 잃어버렸습니다.
일본은 국모인 명성황후를 죽이고, 왕을 폐위시킨 후 일본 천황에게 충성을 맹세케 했습니다.
젊은 남자는 징용으로 전쟁터에 끌려가고, 여자들은 종군 위안부로 잡혀갔다. 모든 곡물은 전쟁용 군수물자로 공출해갔다.
당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모릅니다.
예배를 드리기 전에 천황을 향해 절을 강요했고, 모세오경과 요한 계시록은 읽지 못하도록 했다.
어기는 자들은 모조리 잡아 가두고, 죽였습니다. 우리는 철저하게 36년 동안 일본에 의해 자유와 주권을 유린당했다.
- 이 땅에 자유를 위해 한 생을 바쳤던 숱한 사람들이 어느 순간에 뜻을 꺾고 절개를 버리고 일본에 굴복했던 것은
이 민족이 다시는 해방을 보지 못할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이 땅에 해방이 온다는 것은 비관적이었습니다. 그만큼 절망의 삶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해방이 온 것입니다.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은 기분에 빠진 것입니다.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뜻으로 본 한국역사’라는 책에 함석현 선생은 우리나라 해방에 대해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우리나라 해방은 도둑 같은 해방이었다, 예기치 않았다. 갑자기 우리에게 주어진 해방이었다.
그리고 이 해방은 하늘에서 온 것이었다.
어느 누가 노력해서 얻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는 가만히 있는데 해방을 스스로 할 능력이 없는데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었다」고 그는 평하고 있습니다.
우리 역시 일제의 핍박 속에 36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을 보내면서 모든 것을 다 빼앗겼습니다.
도저히 일어난 것같지 않은 이 민족이 해방을 맞은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설명을 할 길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