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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피낭 6 - 성문 카스티예문으로 들어가서 구시가지 대성당을 구경하다!
2026년 5월 14일 프랑스 페르피낭의 우르반 호텔에서 체크아웃을 하고 배낭을 맡기고
나오는데..... 오늘은 페르피낭 시내를 구경한후 다시 기차를 타고 스페인의
지로나로 갈 생각이니 죄네할 드롤르가 Avenue Du General de Gaulle 를 걷습니다.
그러고는 운하에 도착해 강변을 걸어서 성문인 카스티예문 Le Castillet 에 도착하니
여긴 11시(6월 부터는 10시 반)에 문을 여는지라 성문을 통과해
구시가지 Vieille Ville 로 들어가서 골목길을 걸어서 페르피낭 대성당을 찾아갑니다.
페르피낭 생장 대성당에 들어가니 안내하는 처녀가 종이를 건네 주는데 찬송가
악보로.... 그러고 보니 50명 가량 사람들이 앉아있는데 대부분은 나이든
사람들이고 아이들도 보이는데 모두 잘 차려 입었으며 20분 후에 미사가 시작됩니다.
여기 페르피낭 대성당 (Basilique -Cathédrale de Saint-Jean-Baptiste) 은 1324년에
건축 공사가 시작되어 185년이나 지난 1509년에 완공된 카탈루냐 고딕 양식의 성당
으로 분홍색 벽돌로 된 아치현 장식은 웅장하니 남프랑스의 고딕양식을 대표한다고 합니다.
대성당의 완공에 200년 가까이 걸린 이유가 있으니..... 987년에 성립된 카페 왕조에서 1285년에 즉위해
1314년까지 통치한 필리프 4세는 아비뇽 유수와 성전 기사단을 탄압한 장본인으로, 아들 루이
10세, 필리프 5세, 샤를 4세에 딸은 에드워드 2세와 혼인해 잉글랜드의 왕비가 된 이자벨이 있었습니다.
1314년에 장남 루이의 아내 마르그리트와 삼남 샤를의 아내 블랑슈가 필리프 및 고티에 형제와
나란히 외도를 저지르다가 들통나니 넬탑 사건으로..... 1313년 이자벨이 친정인
프랑스를 방문해 오빠들에게 비단 주머니를 선물했고 그들이 아내에게 선물하면서 밝혀집니다.
차남 필리프 5세의 아내 부르고뉴 여백작 잔은 주머니를 고이 간직했지만 루이 10세의 아내 마르그리트
왕세자비와 샤를 4세의 아내 블랑슈는 내연남인 필리프 오네이와 고티에게 선물했고......
형제는 저 비단 주머니를 허리에 찬채 공주 이자벨이 있는 연회에 참석해 과시하는 미친 짓을 선보입니다?
매우 놀란 이자벨은 아버지 필리프 4세에게 오빠들의 아내가 부륜을 저지르고 있다고 말했고, 필리프
4세 왕은 오네이 형제를 체포한뒤 심문결과 며느리들의 불륜을 밝혀냈으니..... 감통을 저지른
마르그리트와 블랑슈의 눈앞에서 내연남들을 끔찍하게 죽이고는 삭발시킨뒤 가이야르성에 감금합니다.
마르그리트는 남편 루이 10세가 프랑스왕으로 즉위한 뒤에도 감옥에 있다가 옥사했고 블랑슈 역시
샤를과 혼인이 무효화된뒤 수도원에서 생을 마감했으며, 루이 10세 국왕은 헝가리의 클레망스와
재혼을 했지만 불과 2년 만에 20대 나이로 의문의 죽음을 당했고, 유복자 장 1세도 5일 만에 죽습니다.
조카 장 1세를 이어 왕위에 오른 차남 필리프 5세 역시 후계자 없이 6년 만에 20대 나이로 죽고
3남 샤를 4세는 여동생인 프랑스의 이자벨을 이용해 잉글랜드 왕위 계승에도
관여했으나, 상속자 없이 즉위 6년만에 30대 초반의 나이로 죽으면서 카페 왕조 직계는 끊깁니다.
그러니까 3남 샤를 4세가 왕위에 오른지 2년후인 1322년에 페르피낭 대성당이 착공된 것인데.... 국왕이
1328년에 후사없이 죽으니 혼란스러운지라 공사가 순조로울수가 없었고, 프랑스의 왕위는 필리프
4세의 동생이었던 샤를 드 발루아의 아들 필리프 드 발루아가 '필리프 6세' 로 즉위하니 발루아 왕조입니다.
대성당 공사는 발루아 왕조에서 이어지지만 곧 백년전쟁이 벌어지니 중단되어버리는데... 필리프 4세
의 딸 프랑스의 이자벨이 영국 플랜태저넷 왕가로 시집갔으니 여기서 태어난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는 필리프 4세의 외손자인지라 어머니 이자벨을 내세워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주장합니다.
프랑스 왕위는 필리프 4세의 외손자인 영국왕 에드워드 3세가 정통성이 있느냐, 아니면 필리프 4세의 조카
필리프 6세가 되는게 맞느냐는 싸움인데, 영국 왕실인 플랜태지네트 왕조도 그 조상은 프랑스
사람으로 앙주 백작이었으니.... 영국왕과 영국 귀족들은 영어를 할줄 모르고 모두 프랑스어를 사용했습니다.
프랑스의 앙주 백작인 헨리 2세는 프링스의 왕비였던 엘레노어와 결혼해 보르도가 속한 아키텐과 끼엔느
지방을 얻어 부유하게 되니, 군대를 길러 1154년 영국을 침략하여 전쟁에서 승리해 영국왕이
된지라.... 영국왕과 귀족들은 당연히 영어를 몰랐고, 앙주와 아키텐을 소유하니 프랑스왕의 신하입니다?
필리프 6세는 발루아 왕가를 열고 프랑스 왕이 되었지만.....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는
영국왕 에드워드 3세가 침략하는 바람에 벌어진 100년 전쟁에서 초반에 연전
연패하는 바람에 나라가 대 혼란에 휩싸였고 때문에 대성당 공사도 중지될수 밖에 없었습니다.
필리프 6세의 아버지 샤를 왕자는 발루아, 앙주 등을 영지로 보유하면서 형 필리프 4세를
보좌했고, 아라곤 왕국과 라틴 제국의 명목상 왕이었으며, 어머니 마르게리타는
앙주 백작이자 나폴리 국왕인 카를로 2세의 딸로..... 외가 또한 카페 왕조의 방계 입니다.
1328년 2월 필리프의 사촌인 프랑스왕 샤를 4세가 아들 없이 사망했는데, 두 딸 잔과 마리가 있었지만
게르만 프랑크족 살리카법의 원칙에 따라 여자는 왕위를 물려받을수 없었고, 다만 에브뢰의
잔이 임신 중이었기 때문에 그녀가 아들을 낳을 경우 갓난아기가 프랑스의 국왕이 될수는 있었습니다.
1328년 4월 1일 에브뢰의 잔은 딸 블랑슈를 낳았으니.... 이리하여 위그 카페 이래 340여년간
프랑스 왕위를 이어가던 카페 직계가 단절되었으니 필리프는 프랑스 국왕
필리프 6세로 선포되었고, 그해 5월 29일 랭스 대성당에서 도유식과 대관식을 거행했습니다.
샹파뉴 백국 상속권자이자 전 국왕 루이 10세의 외동딸 잔은 남편이자 에브뢰 백작 필리프의 지원을
받으며 프랑스 여왕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다가 살리카법이 적용되지 않는 나바라 국왕이
되었지만, 필리프 6세는 나바라 왕국과 샹파뉴 백국 및 에브뢰 백국이 통합되는걸 우려해 거부합니다.
한편, 필리프 4세의 딸이자 잉글랜드왕 에드워드 2세의 왕비이며 에드워드 3세의 어머니로, 애인
로저 모티머와 함께 어린 에드워드 3세의 섭정으로 권세를 누리던 프랑스의 이자벨은
아들 에드워드 3세가 프랑스 왕위에 올라야 하는데 필리프 6세가 부당하게 가로챘다고 여겼습니다.
프랑스왕 필리프 6세가 처음 맞닥뜨린 문제는 플란데런 백국에서 발발한 반 프랑스 봉기였으니,
1322년 플란데런 (벨기에의 브뤼헤) 백작으로 즉위한 루이 1세 드 플란데런은
사치에 몰두하면서 유흥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직물 상인과 농민들을 가혹하게 수탈했습니다.
결국 플란데런의 브뤼헤 시민들이 1323년에 반란을 일으켰고 5년간 인근 지역을 공격해 약탈과
파괴를 자행하자..... 세금 징수원과 플란데런 백작의 측근들은 살해되거나
도망쳤으며 귀족들의 집은 파괴되니 루이 1세는 1328년 새 국왕 필리프 6세에게 도움을 청합니다.
필리프 6세는 곤경에 처한 봉신을 돕는다면 국왕의 정당성을 강화할수 있다고 보고, 대관식에 참석하기 위해
랭스에 모인 귀족들에게 플란데런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와달라고 요청해 동의를 얻어냅니다.
아라스에서 병력을 집결한 필리프 6세 왕은 1328년 7월 플란데런으로 출진했는데 때마침 브뤼헤의 라이벌
도시인 겐트가 브뤼헤를 공격하면서 반란군은 이를 막느라 프랑스군의 공세에 제때 대응할수 없었고,
프랑스는 분견대로 플란데런 서부를 휩쓸고 브뤼헤성을 압박한뒤, 자신은 본군을 이끌고 카셀로 진군합니다.
그러자 반란군인 플란데런 장창병은 산 아래로 은밀히 이동한뒤 낮잠을 자고있던 프랑스군을 기습 공격하자,
기겁을 한 병사들은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졌으며..... 필리프 6세와 기사들은 급히 말에 올라탔습니다.
필리프 6세는 금색 백합으로 수놓은 푸른 옷에 모자를 쓴채 기사들을 재편성한후,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따르라!" 라고 외치며 선두에서 반란군을 향해 돌격하자 반란군은 어깨를 맞대고 원형 진형을 결성했습니다.
하지만 필리프 6세의 반격이 무척 빨랐기 때문에 너무 짧은 시간에 진형을 펼치느라 비어있는 공간이
많았으니 프랑스 기사들이 침투해 반란군을 학살한후 카셀시를 공략해 불태우고는 브뤼헤
시의 항복을 받으니..... 왕은 적진으로 돌격한 용감한 군주로 프랑스 왕좌에 대한 권위를 확립했습니다.
필리프 6세는 영국왕 에드워드 3세에게 프랑스 왕국에 속한 영지의 영주로서 자신에게
경의를 표하라고 요구하니, 잉글랜드 왕실은 국왕의 위신을 손상시킬 일을 미루려고
했지만...... 카셀 전투후 위세가 드높아진 필리프 6세가 영지를 몰수하겠다고 위협합니다.
피할수 없는지라 1329년 영국왕 에드워드 3세는 도버에서 출발해 6월 6일 아미앵 대성당
에서 필리프 6세에게 아키텐과 퐁티외의 제후로서 선서를 했는데..... 그러나 의식
도중에 손을 맞잡는 것을 거부함으로써 공작령에 대해 필리프가 가진 주권을 부정합니다.
필리프 6세는 이렇게 어물쩡하게 끝낼 생각은 추호도 없었으니 1330년 7월까지 완전한 선서를
다시 하지 않으면 프랑스내에 있는 영국왕의 영지를 몰수하겠다고 경고했으며,
기한이 지나자.... 프랑스왕은 군대를 소집해 가스코뉴를 향한 공세를 개시해 영지를 탈취합니다.
에드워드 3세 영국왕은 1330년 10월 정변을 일으켜 어머니의 애인 로저 모티머를 살해하고 모후인
이자벨 대비를 유폐하는데, 이자벨은 올케들이 부륜을 저질렀다고 고변하더니 자신은
더했다는? 그후 프랑스 국왕에게 그의 뜻대로 할테니 침공을 멈춰달라고 요청해 승인을 얻어냅니다.
1331년 4월 에드워드 3세 영국왕은 상인으로 위장해 프랑스로 비밀 여행을 떠났고 필리프
6세와 파리에서 접견한뒤 선서를 다시 했으니..... 필리프 6세는 에드워드 3세가
가진 영지를 비롯 프랑스 모든 영토에 대해 주권을 가진 명실상부한 프랑스 국왕이 됩니다.
프랑스의 귀족인 아르투아 백국은 1302년부터 계승 분쟁에 시달리고 있었으니, 아르투아 백작
로베르 2세가 1302년 쿠르트레 전투에서 플란데런 반란군에게 전사했을때,
외아들 필리프 다르투아는 4년전인 1298년에 사망했고 손자 로베르 다르투아가 살아 있었습니다.
본래라면 그가 로베르 3세로서 아르투아 백작위를 계승해야 했지만... 로베르 2세의 딸이자 필리프의 누이
이며, 고모인 마호트 다르투아가 아르투아 백국의 계승에 관한 관습법을 제시하며 이를 막았습니다.
아르투아 백국의 귀족들은 15살 소년 보다는 강력한 권세를 누리던 부르고뉴 공작
오톤 4세의 부인인 마호트 쪽을 선호했으니..... 결국 고모 마호트가 아르투아
여백작이 되었고 로베르는 보몽 르 로제 라는 작은 영지가 보상으로 주어졌습니다.
어린 로베르는 격분했으니...... 고모를 축출하고 자신이 아르투아 백작이 되기 위해 투쟁
했지만 법정에서 패하자 샤를 드 발루아의 딸이며 필리프 6세의 누이 잔 드 발루아
와 결혼해 입지를 강화하고는, 필리프 6세가 왕위에 등극할때 적극적으로 도왔습니다.
필리프 6세는 그의 헌신에 고마움을 느껴 연금을 제공했고 친구이자 조언자로 삼았는데, 1년후 1329년
고모 마호트가 사망하고 장녀 잔이 아르투아 여백작이 되었지만 중병에 걸린지라 로베르는
지금이야말로 아르투아 백작위를 확보할 절호의 기회라고 파리 법원에 계승 문제를 3번째로 제기합니다.
하지만 로베르는 상황이 불확실하다고 여겼으니... 아르투아 여백작인 잔은 부르고뉴 여백작
이기도 했고, 프랑스 국왕 필리프 5세의 미망인이기도 했으며, 또한 잔이 사망한후
아르투아 여백작이 될 것으로 예정된 장녀 잔은 부르고뉴 공작 외드 4세의 부인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재판에서 이기기 위해 문서를 비밀리에 위조했으니..... 재판에 참석한 필리프 6세는
그를 소중한 동료로 여겼지만, 부르고뉴 공작과 척지기도 싫었기 때문에
그에게 아르투아 백국을 분할하는게 어떠냐고 제안했지만 로베르는 전체를 원했습니다.
법률가들이 면밀히 조사한 끝에 로베르가 제시한 문서가 위조된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으니, 위조한 이는
베쑨성의 영주 하벳의 딸 잔 드 디비옹으로, 부친이 아르투아 여백작 마호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
켰다가 패배후 재산을 상실한뒤 로베르 3세가 아르투아 백작이 되면 재산을 돌려받고자 위조한 것입니다.
잔 드 디비옹은 화형에 처해졌고, 로베르는 유죄 판결을 받고 소유물을 박탈당한 뒤에 프랑스에서
추방되자.... 플란데런으로 망명했다가 아비뇽을 거쳐 1334년 잉글랜드로 피신해 22살
잉글랜드왕 에드워드 3세를 꼬드겨 전쟁을 일으키려 했다고 합니다? 로베르 때문에 100년 전쟁이?
백년전쟁은 1337년 부터 1453년 까지 116년이라는 기간 잉글랜드 왕국의 플랜태저넷
왕가와 프랑스 왕국의 발루아 왕가 사이에 프랑스 왕위 계승문제를 놓고
일어난 일련의 분쟁들을 말하니........ 양측 모두 여러 동맹자들을 전쟁에 끌어들입니다.
백년전쟁은 중세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전쟁으로, 프랑스 왕위를 두고 두 왕조가 5대 117년에
걸쳐 싸운 긴 전쟁으로..... 기사의 최고 전성기이자 동시에 기사 계급의
쇠퇴가 시작된 시기이며 잉글랜드와 프랑스 모두 전쟁으로 인해 "국민 정체성" 이 싹트게 됩니다.
1338년 5월 필리프 6세 프랑스왕은 제노바와 카스티야에서 고용한 갤리선 80척이 칼레에 이르자
바후셰 제독은 영국 해협을 들락거리면서 잉글랜드 상선들을 탈취했으며,
로베르가 이끄는 프랑스- 제노바 연합 함대는 채널 제도를 공격해 사크섬과 건지섬을 함락합니다.
1338년 9월 니콜라 바후셰와 키에레 제독이 전함 48척을 이끌고 양모를 팔기위해 플란데런의 아르네뮤이덴
항구에 접근하던 잉글랜드 상선 5척을 습격하자, 잉글랜드인들이 대포를 처음 해전에서 사용하는등
결사적으로 항전했지만 끝내 항복하니, 잉글랜드 선원 전원을 몰살하고 상선 5척과 대포 및 화물을 포획합니다.
1338년 10월, 프랑스 함대는 수천명의 프랑스, 노르만, 제노바, 카스티야 수병들을 영국에
상륙시킨뒤 육지와 해상에서 사우샘프턴을 공격하니..... 마을 민병대와
시민들은 공포에 질려 시골로 도망쳤고, 일부 수비대는 끝까지 싸우다가 모두 전사했습니다.
1339년 여름 몰리남작 로버트가 이끄는 잉글랜드와 플란데런 함대가 반격에 나서니 프랑스 해안에 상륙
한뒤 올트와 르 트레포르 마을을 파괴하고, 볼로뉴 항구의 프랑스 함대를 기습해 파괴했으며,
필리프 6세에게 반기를 든 플란데런 함대도 독자적으로 움직였으니 9월 디에프시를 파괴하고 약탈합니다.
본격적인 백년 전쟁은 1340년 6월 잉글랜드 - 플랑드르 연합함대가 라인강의 하구에 있는
브뤼주 (브뤼허) 슬뢰이스항에 대한 프랑스 함대의 봉쇄를 저지하기 위해 공격
하면서 시작되었으니 잉글랜드군이 승리하였고 도버해협의 제해권은 잉글랜드가 차지합니다.
1345년 에드워드 3세는 맏아들 흑태자 에드워드와 함께 노르망디에 상륙하였고 이듬해 1346년
그 유명한 크레시 전투가 있었는데..... 이 전투에서 잉글랜드군은 농민과
사냥꾼들로 구성된 보병 장궁대를 내세워 전력이 훨씬 우세한 프랑스 기사군을 격파했습니다.
보병 장궁대의 기사군 격퇴는 화약 무기의 등장 이전에 중장기병의 몰락을 예고한 것으로 평가
되는데, 이 전투에서 프랑스 기사군은 일제히 돌격을 시도하였으나 비가 온 탓에
진흙탕을 거치면서 기병 특유의 충격력을 상실한 상태에서 장궁대의 공격을 받은 것입니다.
잉글랜드군의 장궁은 석궁에 비해 사거리 및 위력이 뛰어났고 연사력이 더 좋았으니.....
본래 웨일스의 사냥꾼들이 사용하던 것이었으나 영국 왕실은 위력을 알아보고
전쟁에 동원한 것이며 반면 프랑스는 석궁병들을 배치했으나 영국 장궁병에게 패배합니다.
잉글랜드군은 크레시 전투에 승리한 여세를 몰아 칼레 시(市) 로 진격하여 성을 완전히 포위하자
칼레 시민들은 완강하게 저항하였으나..... 1347년 마침내 항복하니 칼레는 잉글랜드령
으로 확정되면서, 에드워드는 앙주- 플랜태저넷 왕가의 옛 대륙 영토 전 지역의 회복을 노립니다.
그후 잉글랜드는 1428년 오를레앙을 포위하자 샤를 7세 프랑스 왕세자는 랭스 대성당에서
대관식을 거쳐야 했으나 잉글랜드군 때문에 그러지 못했으니..... 정식 국왕이 아닌지라
궁지에 몰렸고 용병도 모이지 않는지라 오를레앙을 구원할 힘이 없으니 암울한 처지였습니다.
불리한 전황이 승전으로 전환된건 처녀 잔 다르크의 출현이었으니 그녀는 소수의 프랑스 병사로 오를레앙
의 잉글랜드군을 격파하였으며, 그후에도 늘 선두에 서서 잉글랜드군을 격파했지만.... 1430년에
부르고뉴파에 체포돼 잉글랜드에 인도되고 1431년 루앙 재판에서 마녀인게 들통나서 화형에 처해집니다.
중세에 스페인과 프랑스에 영국과 독일등 유럽에서 교회가 주관하는 종교재판에서는 수많은 여자
들이 교회의 잔혹한 고문에 못이겨 결국 마녀임을 실토하고 화형에 처해졌는데, 토사구팽이라?
프랑스 왕실과 프랑스 교회들도 잔다르크가 마녀라는데 동의했던 것이니 후안무치한 자들 입니다?
1429년에 샤를 7세는 정식으로 대관식을 거행하고 적법한 프랑스 국왕이 되었으며 이 무렵
전황은 프랑스 쪽으로 기울어졌으니.... 수십년간 항쟁을 계속한 부르고뉴파와
아르마냐크파도 아라스에서 프랑스와 화의를 맺음으로써 프랑스의 내란은 끝을 맺게 됩니다.
영국과는 1444년 투르에서 휴전이 성립되었지만 잉글랜드는 프랑스 내에 멘, 보르도, 칼레,
노르망디 등의 영토를 계속 보유하고 있었는데..... 그러나 영국에서는 1455년부터 왕위
쟁탈전인 장미 전쟁이 시작되어 1485년까지 혈투를 벌이는지라 100년 전쟁은 끝난 것입니다.
전쟁에서 승리한 프랑스는 봉건 영주제가 몰락하고 중앙집권 왕국으로 이어지면서, "프랑스인" 정체성
이 강화되는데..... 페르피낭 대성당도 공사를 재개해서 마침내 185년만인 1509년에 완공되니
발루아- 오를레앙 왕조의 루이 12세 시대로 7명의 왕을 거쳤습니다. 나의홈 : cafe.daum.net/baik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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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네 믿음은 네 생각이 된다 .
네 생각은 네 말이 된다.
네말은 네 행동이 된다
네행동은 네 습관이된다 .
네 습관은 네 가치가 된다 .
네 가치는 네 운명이 된다
오늘 하루를 만끽하며 살아야 한다.
건강과 행운이 있는 행복한 시간 되세요.
🌝🌝🌝🌝🌝
작은 도시이지만 성당은 참 화려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