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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祭祀)란 무엇인가?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요 6:53-58)
기독교인은 제사를 지내는 것이 옳은 것인가 옳지 않은 것인가. 이 같은 질문은 과연 타당한가. 열성적인 기독교인은 이런 종류의 물음조차 불경하게 여긴다. 기독교는 오직 하나님만을 섬겨야 하고 그 외의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은 우상숭배라고 단정하기 때문에 여타의 물음은 이미 가치가 없다고 여기는 폭력적인 기독교인들도 다수다.
기독교의 이러한 주장의 근거는 성경과 전통적인 기독교 문화에 바탕을 둔 것이다. 따라서 다분히 타종교에 대해서는 일방적이고 공격적이며 배타적이다. 그것은 물론 기독교만의 특징은 아니다. 대개 종교의 특성이 객관적인 것이기보다는 가치 중심적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나타나는 양상이기도 하다.
그로 말미암아 전통을 중시하고 조상 숭배의 문화가 뿌리 깊이 배어 있는 곳에서는 큰 상처와 갈등이 치유되지 않고 반복된다. 한 가족 안에 서로 다른 종교와 서로 다른 제례 의식을 치러야 하는 곳에서는 말할 것도 없다.
기독교가 이렇게 된 데에는 물론 기독교의 자기 정체성이 잘못 확립된 데 있다. 나는 이런 질문에 앞서서 과연 제사란 무엇인가부터 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제사를 지내는 것이 옳은가 그른가의 문제는 문제의 핵심을 비켜가는 질문이기 때문이다. 하여 그 같은 질문에 일방적으로 옳다든지 그르다든지 하는 답변은 정답이 아니다.
나는 여기서 단순히 기독교와 한국의 전통적인 조상 제례에 대한 갈등을 서로 다른 이질적인 문화의 충돌로만 보고 싶지 않다. 그 같은 요소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 같은 갈등에 대한 다양한 해석과 토론이 기독교 안팎에서 있어 왔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나타난 현상만을 보는 것이다.
기독교는 어찌 되었든 성경을 바탕으로 성립된 종교다. 성경에서 말하는 제사의 의미는 사라진 체 단순히 우상 숭배만의 논리만을, 그것도 우상 숭배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결여한 채, 자신의 신만을 섬기는 것은 유일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고, 조상에게 제사하는 것은 우상을 숭배하는 것이라는 매우 단순 논리로 제사의 문제를 규정하려 한다.
이것은 자신의 토대인 성경에 대해서 스스로 무지하고 경박하기 이를 데 없는 한심한 논리요, 스스로가 우상 숭배에 빠져 있음을 자가하지 못하는 천박한 기독교의 전형을 보여 주는 것에 다름 아니다.
물론 한국 기독교의 초기 미신 타파와 유일신 하나님만을 섬겨야 한다는 기치 아래 기독교는 이 땅에 보무도 당당히 상륙하여 사회에 기여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유교 문화에 찌들대로 찌들어 삼베옷을 입고 초하루와 삭망을 거르지 않으며 젯밥을 차려 놓고 곡을 하며 삼년상을 치르는 것만이 어버이를 섬기는 것이며 사람의 도리인 양 가르쳤던 잘못된 문화와 전통에 채찍을 가한 것은 통쾌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오도된 민초들에게 허례와 허식을 벗겨버린 것 등은 기독교의 큰 공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는 과연 미신을 온전히 타파하였는가.
불행이도 오늘의 기독교는 오히려 미신 타파는커녕 자신들의 종교가 미신화 되고 있다는 비판으로부터 조금도 자유롭지 못하다. 어쩌면 유일신 하나님을 섬긴다는 미명 아래 조상 숭배를 금기시키는 기독교가 하나님을 숭배하듯 숭배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렇데 보면 이 땅의 제사에 관한 문제는 서양의 옷으로 갈아입고, 그 이름만을 ‘하나님’으로 개명했을 따름이지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는지 모른다. 삼베옷을 입고 삼년을 곡하던 폐해 이상으로 오늘의 기독교 역시 그 폐해가 한두 가지가 아니라는 말이다.
인간을 잘못된 종교 의식의 노예로 굴종시키고 옥죄는 것은 당시의 유교 문화의 폐해를 훨씬 능가하는 것은 아닌가? 참으로 그 종류도 다양하다. 동네마다 컴컴함 무슨 기도원 형태로 무속적인 기독교도 만연하고 있고 물량주의와 결탁한 대형화된 기독교는 인간을 자본과 물질의 예속물로 전락시키고 있으며 그 의식을 종교가 앞서서 타락시키고 있다. 이 모든 문제들 역시 제사의 의미를 오해한 데서 비롯된 것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사람이 사는 곳에는 어떤 형태이든 ‘제사’라는 것이 있다. 종교는 이 같은 사람들의 바람과 열망을 집약하여 제사를 다룬다. 성경 또한 예외가 아니어서 어쩌면 처음부터 끝까지 제사를 다루고 있는 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성경의 독자들이 익히 아는 대로 가인과 아벨의 제사가 표면적으로 등장하는 성경에서의 첫 제사 이야기이다.
무론 창세기 1장부터 의미론적으로 제사가 다루어지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구체적인 표현을 띠고 제사에 대해 언급하는 처음 사건이 가인과 아벨의 제사이다. 결국 가인은 최초의 살인자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게 된다. 성경은 제사의 문제를 매우 엄격하고도 심도 있게 다루고 있다. 레위기와 같은 온통 제사에 관한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도대체 ‘제사’란 무엇인가? 단순히 조상 숭배뿐만 아니라 인간이 사는 곳에는 예외 없이 그 이름만 조금씩 다리 할 뿐 수많은 제사의 형태들이 있다. 우리 주변만 해도 천신제, 산신제, 지신제, 풍어제, 대동제 등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제사의 종류도 많다.
물론 성경에도 제사의 종류가 여럿 등장한다. 대표적으로 속죄제, 번제, 화목제가 있으나 그 밖의 다양한 형태도 등장한다. 물론 여러 종류의 제사가 언급되고 있으나 세 가지의 제사 형태도 모두 집약된다.
우리의 전통에서 보면 조상 숭배의 문제가 허례의식과 사회적인 폐해로 기승을 부리던 조선 말기에 이르면서 기독교가 이 땅에 발을 들여 놓고 변화와 개혁을 어느 정도 주도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미 이 땅에서 자생적인 개혁과 변화의 조짐은 있어 왔다. 오히려 기독교가 미처 알아채지 못하고 있는 것까지도 그 싹을 틔우고 있었다는 것에 새삼 놀란다.
‘제사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던져 놓고 그 해답의 단초를 우리는 우리의 자생적인 위대한 정통, 미완의 혁명으로 끝난 동학에서 엿볼 수 있다는 것은 새삼 경이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동학의 2대 교주 해월 최시형은 갑오 동학농민 혁명이 실패한 몇 년 뒤인 1897년 4월 5일 이천군 앵산동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밤에 호롱불 밑에 모여 앉은 몇 안 되는 농민들에게 제사에 대한 위대한 말씀을 설하였다. 그 때 그 유명한 「향아설위(向我設位)」에 대한 제사의 본래 의미가 밝혀진다.
제사의 코페르니쿠스적 진화가 이루어진다. 이것은 경천동지하는 말씀이요, 제사에 대한 혁명적인 사건이다. 우상을 내동댕이치고 과연 제사가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알려 주는 계시적 사건이다.
인간은 「향아설위(向我設位)」의 제사를 지내지 못한다. 「향벽설위(向壁設位)」가 그리스도인이냐 아니냐를 막론하고 이루어지는 제사 양식이다. 즉 위패 혹은 지방을 벽에 붙여 놓고 그 앞에 제상을 차려 놓고 상주가 제사를 지내는 양식을 「향벽설위(向壁設位)」라고 한다.
그것은 제사를 지내는 자인 상제가 ‘여기’ 있고 제사를 받는 대상은 ‘저기’ 벽을 타고 지방 혹은 위패가 모셔 있는 ‘거기’에 있는 것이다. 그 사이에는 제물이 없다. 이 제물은 제주인 상제가 노동을 통해서 얻은 생산물이다. 여기 주체가 있고, 저기에 대상이 있는 것, 그리고 그 대상은 주체의 땀을 착취하고 가로채버리는 것이 제사의 일방적인 형태인 것이다.
물론, 거기에는 제사를 지내는 사람과 제사를 받아먹는 귀신 사이의 철저한 거래가 이루어진다. 이 거래라는 것은 제사를 지내는 사람의 계산속에 있는 것이다. 복덕을 비는 마음과 조상을 숭배하는 갸륵한 심리적 만족만이 있을 것이다.
여기 이 같은 제사의 구조 속에서는 ‘내’가 여기 있고 ‘너’는 거기에 있다. 즉 제사를 받아먹는 대상이 조상신이 되었든, 혹은 유일신이라는 이름을 지녔든 상관없이 그러한 제사의 구조 속에서는 ‘나와 너’가 분리되어 있고 나는 나대로, 너는 너대로 각자의 계산이 담겨진 채 제사 행위가 진행된다는 말이다.
거기서 신은 나의 제물을 받아먹는 만큼 내게 복을 주어야 한다. 물론 그것은 일방적인 나의 주관이 신의 성격을 규정하고 조각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것이 우상 숭배이다.
기독교가 아무리 자신들은 유일신을 섬기고 조상을 섬기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상 숭배가 아니라고 주장한다하더라도 그러한 구조 속에 있는 유일신은 철저한 섬김의 대상으로 있는 우상일 따름이다. 이것이 거짓 신이다. 이것은 사기 치는 것 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위대한 기독교가 철저히 귀신을 섬기고 있는 종교로 전락하고 있는 것이다.
이 점에서 기독교는 미신을 타파하기는커녕 철저히 인생들을 울려먹고 있고 인간을 부속시키고 있다. 헌금이 그러하고 십일조가 그러하고 예배가 그러하고 기도가 그러하다. 도무지 향설위의 형태에서 벗어난 제례의식을 찾아 볼 수가 없다.
그러면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우상 숭배의 의식의 틀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생들이 성경을 그렇게 해석하고 이해하고 있을 따름이다.
「향아설위(向我設位)」란 무엇인가?
「향아설위(向我設位)」란 위패를, 지방을 벽에다 써놓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거기 그렇게 있는 위패는 걷어치운다. 그 위패가 모셔져 있는 곳은 저 벽을 타고 오는 허깨비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모셔져 있다. 따라서 그 제물을 취하고 먹는 존재는 저 벽속의 허깨비가 아니다. 바로 나 자신이다.
예물과 헌물을 누구에게 드린다는 말인가? 바로 나 자신에게 드린다. ‘향아설위’란 나의 섬김을 받을 대상이 거기 그렇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여기 이렇게 내 안에 빛나는 정신으로 모셔져 있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진정한 화해이다. 비록 그 존재가 하나님이 되었든, 나를 낳아주신 육신의 부모가 되었든, 나와 관계하는 내 주변 사람이 되었든, 거기 그렇게 존재하고 있는 한 나와 어쩔 수 없는 틈새 관계로 존재한다. 비록 살을 맞대고 하나로 만나고 있다고 입으로 주장한다 한들 어찌 그것이 만남일까? 그것은 영원한 이별의 상태를 여전히 확인하는 몸부림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향아설위(向我設位)」가 되려면 내가 개방되어야 한다. 거기 그렇데 대상으로만 있어서 위패가 벽속에 걸려 있는 동안 위패를 내 안으로 모셔올 수가 없다. 인간과 신이, 인간과 인간이, 인간과 자연이 화해가 가능하려면 우리가 모두 ‘너와 나’로 구분 짓고 주체와 대상으로 틈새지울 수밖에 없는 이원론적 구조가 개혁되어야 한다. 그 전에는 불가능하다. 우상숭배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우상 숭배는 거기 대상을 설정해 놓고 결국 자신의 유익을 도모하고자 하는 모든 어둠의 음모이다. 그것은 인류 역사가 지속되는 한 계속될 것이며 우리가 육신에 속해 있는 한 멈추지 않고 활동한다. 그 음모는 다른 존재가 아니다. 그 음모의 주체는 바로 자기 자신이다. 자신이 어둠의 세력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향아설위가 안 된다.
「향아설위」가 나능하려면 「항벽설위」의 속성을 지닌 자아가 자리를 물러서야 가능하다. 여기 「향아설위」에서 ‘아(我)’를 오해하면 안 된다. 비록 해월 최시형이 그 상세한 설명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또 하나의 에고를 형성하기 위한 이익의 재료로 ‘我’를 해석해서는 안 된다.
여기 ‘我’는 이기적인 ‘에고’를 일컫는 말이 아니다. 에고를 넘어선 자리, 거기 그렇게 있던 하나님이 여기 이렇게 존재하는 그 자리를 일컫는 ‘我’이다. 모든 존재의 껍데기 너머에 숨 쉬고 있는 영성의 자리이다. 성경으로 말하자면 하나님이 그렇게 청정하게 자리하고 계신 서방의 성도, 곧 ‘지성소’인 셈이다.
민간에는 아직도 낮도깨비 같은 귀신놀음이 끝없이 횡행하고 있다. 공영방송도 오락과 호기심과 상업성을 동시에 충족하면서 낮도깨비와 같은 여러 귀신이야기들을 너무 쉽게 방영한다. 얼마 전 어떤 이로부터 내가 들은 이야기가 있다. 그는 독특한 영안이 열려 있어서 신세와 지세와 영들의 기운을 볼 수 있다는 거였다.
그의 이야기는 연약한 사람들의 마음을 휘젓기에 충분했다. 이야기인즉 우리들의 모임을 갖고 있는 곳을 지창하면서 이곳은 육이오 때 많은 젊은 병사들이 전투로 말미암아 죽어서 원혼이 떠도는 죽음의 그림자가 머문다는 것이었다. 그 원한 맺힌 혼들이 떠돌아서 음산한 기운이 돌고 자칫 그곳의 주춧돌 공사를 잘못하면 사람이 죽어나갈 수도 있다는 거였다.
이것은 내가 두 해 전의 어떤 목사라는 분으로부터 직접 들은 이야기다. 이런 식의 말에 사람들은 곧잘 동요한다. 그는 따라서 그 원혼들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기도원처럼 영성이 강한 사람들이 통성기도를 하는 장소로 그곳을 활용해야 이겨낼 수 있다던가, 아니면 차라리 이사를 가는 것이 좋다는 말도 하였다. 이것은 사술(邪術)일 따름이다.
내가 무어라 답변했겠는가.
“목사님! 설사 그렇다고 하십시다. 여기 젊은이들의 피맺힌 원혼이 떠돈다고 하십시다. 그렇다면 그 원한이 어찌 그 젊은이들만의 것이겠습니까? 그 같은 원한은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의 원한이 아닐까요? 민족이 두 동강이가 나고 그로 말미암아 서로 반목과 다툼의 시절이 반세기가 넘었고 그 이전의 일제 식민 치하에 찌들어 있는 민족적 원한, 동서의 갈등과 다툼, 이 모든 것들의 산물이 지금도 온 산하와 산천, 사람들의 가슴 속에 여전히 떠돌며 지울 수 없는 민족적 상처로 새겨져 있습니다.
육이오 때의 젊은 원한 맺힌 원혼들의 한을 풀어주려면, 전쟁에서 희생될 수밖에 없었던 그 원인을 제거하기 전에는 결코 풀리지 않을 테지요. 푸닥거리한다거나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통성 기도해야 이긴다고요? 아니라, 내 안에 있습니다. 나의 이중적 갈등구조가 해소되기 전에는 원혼의 아픔을 달래줄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내 안에서 풀어내야 할 나의 문제입니다. 젊은 원혼들이 보이신다고요? 그렇다면 당연히 그들이 가슴에 맺힌 한을 내 안에서 풀어내야 하지 않을까요? 끝내 원혼들이 눈감지 못하는 것은 미움과 다툼, 복마전이 내 안에 있기에, 원혼들도 여전히 떠도는 것입니다.
화해는 내 안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 떠도는 귀신을 두려워하고 벌벌 떨고 있는 동안 귀신은 나와 화해하지 못합니다. 내 안에 그들을 품고 그들의 원한을 풀어낼 수 있는 화해의 싹이 움틀 때, 그 귀신을 끌어안을 수 있을 때, 귀신은 비로소 떠나가고(안식하고, 원한은 풀리고) 그 안에 그 젊은이들의 숭고한 희생의 꽃이 비로소 살아난다는 사실을 왜 모르십니까? 그것이 남북의 화해, 동서의 화해의 기초가 되는 것일 테지요. 이 땅의 젊은 원혼들의 응어리가 풀리게 하는 화해의 신호탄이 될 것입니다.”
라고 대답했던 기억이 난다.
예수가 귀신을 꾸짖고 쫓아냈던 것은 그 같은 잘못된 의식의 허구, 허상, 허깨비의 영을 쫓아낸다는 말이다. ‘군대귀신’이란 집단 무의식의 족쇄에 사로잡혀 있는 인생을 일컫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가 귀신을 쫓아내고 꾸짖어야 한다.
그렇다. 향아설위의 원리는 단순한 제사의 원리만이 아니다. 귀신을 구원(?)하는 원리이다. 나의 조상들이 내가 차려주는 제사상이나 받아먹다가 더 이상 제사장을 착취하지 않고 내 안에 새롭게 정신으로 부활하는 계기가 이루어진다. 그 동안 육체를 떠나 원혼으로 떠돌던 부모를 비로소 내 마음의 좌소(座所)에 모셔서 화해와 새로운 전신으로 승화되어 부활체로 나타나는 원리가 「향아설위」이다.
하나님이 계신 마음의 좌소는 마치 바다와 같다. 그 공의와 공평이 충만한 바다와 같아 어떠한 귀신이나 오물도 정화시킬 수 있는 화해의 충일(充溢)이 거기 그렇게 있다. 공의와 공평이란 단순히 저희끼리 정해 놓은 규범에 따른 것이 아니다. 신의 공의는 인간이 측량할 수 없다. 우리의 공의로는 결코 용납할 수 없는 것이 신들의 세계에서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여기 이러한 영성의 세계로 우리는 초대받았다.
성경은 바로 그와 같은 「향아설위」의 제사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그 미분적 표현이 탁월하다. 가인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지만 「향벽설위」의 방식이었다. 이에 비하면 아벨이 드린 제사는 「향아설위」였다.
하나님은 성전 안에 계시다. 아벨의 제사를 흠향하셨다. 예수는 「향아설위」의 제사를 알려 준다. 그는 스스로를 ‘살아 있는 떡’이라고 하신다. 살과 피를 먹이고 제공하고 계신다. 인생들이 아무리 먹어도 배부르지 않고 마시고 또 마셔도 갈증이 계속되는 것은 「향벽설위」의 제사 음식을 차려 먹기 때문이다. 귀신이 처먹은 음식을 나누기 때문에 배부름도 없고 다함도 없다.
「향아설위」의 제상을 차리기 위해 먼저 제물로 올려야 할 것은 ‘자기 자신’이다. 구약 성경에 속죄제라는 것은 짐승을 잡아드리는 제사이다. 짐승의 영원한 속성을 예수가 한 몸에 담아 제물로 드렸다.
그래서 속죄제는 희생제사이다. 그 희생은 자기 자신의 동물적 속성을 처단하면서 시작되는 것이다. 속죄제는 따라서 우리의 뿌리 깊은 선악의 죄의식으로부터, 즉 체면과 자신의 옳고 그름의 노예로 살 수밖에 없는 허깨비의 자신으로부터 놓여나는 첫 걸음이다.
아벨은 희생 제사를 드렸다. 하나님은 희생 제사를 흠향하신다. 그것은 자신의 어둠을 처단하는 희생제물이다. 그 속성이 남아서 관성처럼 자신과 타인을 괴롭히는 것을 처단하는 제사가 번제랄 수 있다. 비로소 신과의 완전한 화해가 이루어지고 위패를 「향아설위」로 옮겨 놓을 때 거기서 화목제는 가능하다.
여기서 화목제의 1차적인 관계를 설명해본다면 신과의 화목이랄 수 있겠으나, 이는 달리 말하면 자신 근본 안에 있는 영성과의 합일을 의미한다. 화목제는 자신의 내면에 있는 신성과 접점을 이루어 나가고 그 사람과의 관계에서 화목이 이루어지고 사물과의 관계에서도 그 영역은 넓어져간다. 인간은 결코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전에는 화목제를 드릴 수가 없다.
화목제란 산상수훈의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다’는 말씀처럼 자신의 문제가 해결된 사람만이 드릴 수 있는 살아 있는 제사이다. 우리가 어떻게 십일조를 드릴 수 있는가? 십일조가 바로 돈이 아니고 우리 자신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것(곧 영성과 지성소의 본래 자리를 회복하는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라고 한다더라도 그것을 어떻게 드릴 수 있다는 말인가.
그것은 곧 화목제를 통해서 가능하다. 내 안의 신과의 화목은 소극적 의미의 화목이다. 적극적 의미에서 그것은 너와 나의 화목을 일컫는다. 네 안의 하나님을 부활시켜 나의 밥으로 삼는 것이 화목이다. 나의 밥으로 삼는다 함은 나의 양식으로 삼는다는 말이다. 그것은 곧 그의 안에 있는 영성을 일으켜 내 안에 영접하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곧 너의 지독스런 노예근성을 처단하고 네 안에 있는 진정한 너를 내 안에 영접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세사장의 역할이다. 그것은 ‘너’를 나의 밥으로 삼는 것일 뿐만 아니라 ‘내’가 너의 밥이 되는 원리이다. 이것이 대동제이다.
서로가 밥이 되어 주는 원리를 통해서 진정한 대동이 이루어진다. 이것이 ‘지극히 작은 자’를 영접하는 것이요, 십일조를 받는 것이며 또한 바치는 것이다. 그것이 동시에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다. 지극히 작은 자가 곧 하나님, 인내천 사상은 여기 성경에도 동일하게 담겨 있다.
어찌 지극히 작은 자를 영접하는 것이 나를 영접한 것이며 나를 영접하는 것이 하나님을 영접한 것일 수 있는가? 그것은 거기 그 안에 좌정하고 계신 하나님의 실체를 말하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일 수 있다는 것은 거기서 성립된다. 그러나 사람이 하나님이 되려면 먼저 사람이 사탄인 존재를 희생의 제물로 진 밖에 내가 버리고 태워버려야 한다.
여기 진정한 「향아설위」의 제사법이 성경에 그려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 전에는 결코 사람이 하나님일 수 없다. 이기적인 자아, 짐승이요, 사탄일 따름이지 어찌 그러한 존재가 하나님일까?
사탄은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한다. 십일조를 어떻게 바칠 것이며 우리가 십일조를 어떻게 받을 것인가의 그 깊은 영성의 의미는 다른 기회에 심도 있게 살피게 될 것이다.
그렇다. 예수는 우리를 영접하고 자신이 거할 처소를 마련하기 위해 그 자신을 우리의 야식으로 주셨다. 그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그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하신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은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 35)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요 6:54-58)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그리고 조상들의 전통에서 일부 엿볼 수 있는 위대한 제사의 원리이다. 이것의 토론이 단지 제사를 지내는 것이 옳은가 혹은 제사를 지내지 않는 것이 옳은가 하는 방향으로 흐르는 것은 그 주제가 잘못 돼도 한참 잘못된 것이다. 한국의 기독교는 그 토론의 언저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비록 조상들의 제사도 ‘향벽설위’의 제사라면 그것은 조상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그 깊은 심리를 들여다보면 자신의 배를 위한 동기가 거기 깃들어 있고, 추도식의 형태를 띠며 하나님을 찬송한다하더라도 그 하나님이 「향아설위」의 하나님을 말한다면 여전히 고상한 우상만을 섬기는 것이니 무엇이 나르다는 말인가?
이런 점에서 한국의 기독교는 제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엿보이지 않는다. 방편과 수단은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 비록 그 방편이 서로 이질적인 문화형태를 띤다하더라도 그것을 토론이나 시빗거리로 삼는 것은 성숙한 태도가 아니다. 거기에는 상호 존중과 이해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
문화는 계속 발전하기도 하며, 방편은 새로워질 수도 있고 전통의 형태를 계속 지닐 수도 있다. 나의 방편만이 진리라고 하는 것은 난센스이다. 토론의 주제를 그곳으로 한정하는 것은 핵심을 놓치고 껍데기만을 갖고 논쟁하는 소모적인 것일 뿐이다.
제사는 단순히 조상의 문제와 관련된 것이 아니다. 삶 전체의 존재 양식을 규정하는 개념이다. 그대, 오늘은 무슨 제사를 지내고 계시는가.
이 땅 위에 우상이 사라지고 진정한 화해가 이루어지는 것, 그것이 ‘생명의 노래’가 지향하는 작은 바람이며 글쓰기이다.
우리가..죽기전에...잠깐은... 한번쯤...생각해보고...가자 ! 2000년이 넘고넘어....그리도...기다리는 사랑이...있는지를....! 창조주앞에...까불지말라 ! 너희가...영원히...죽을까하노라 ! 너희가...별을...따랴 ! 너희가...달을...만들것이냐 ! 어린아이처럼...계속..말장난하며...까불지말라 ! 개나 소,돼지에게 성경책을 주면 무엇인지 모른다 그러나 그짐승들에게 먹을것을 주면 짐승들은 주인을 좋아라한다 ! 너희가....짐승이냐 ? 이제...너희와 약속된...용서의... 기다림의 시간이 다가왔음이라 !
창조주앞에.... 바짝...업드려... 두려움을...생각하고...참회하라 ! 그리고..지금도 기다리시는... 주님꼐...돌아오라 !
어찌하여 말벌의 침과 전갈의 독침은 두려워하면서 너의 영혼을 잡아 먹는 사탄은 두려워하지 않느냐 ! 너의 눈은 멀었으며 너의 귀는 어두워졌으며 너의 마음의 빛은 꺼져 사탄의 어둠에 갖혀있음이라 ! 인간의 썪어질...육체는... 인간의 삶의 ...목표도...목적도...전부...아니다 인간이 어찌하여... 개나...돼지나...닭이나..소처럼.... 저차원의 동물로 남아...사단과 악마의 자식으로..살려하는가! 숨어 살아있는....영원한...다음세상이 있음을... 잠들어 있는....너의 영을...깨워서...깨달으라....! 죽기전에...어서...깨달아...구원의 길로 가라 ! 영원한 생명의 길로 가라 ! 죽은후에는...하나님의 영원한 심판뿐이다 ! 사후에는 잠든 너의 영을 깨울수도 없으며 너의 영은 거듭날수도 없다 ! 잠들어 있는....너의 영을...깨워서...깨달으라....! 죽기전에...어서...깨달아...구원의 길로 가라 ! 영원한 생명의 길로 가라 ! 그길로 가는 법은...오직한길... 하나님이...예수님을 통하여 우리게 주신... 생명의 성경 말씀...뿐이라 ! 숨쉬는...우상(사탄)을 섬기지말라 !
창조주... 하나님은 반드시 계신다 ! 어리석은 자들아.... 밤하늘의 수많은 별들을 혜어보라 ! 그...끝도없이...많은 별들을... 만드신이는 석가도...마호메트도...교황도...목사도...신부도 성황당 고목나무도...돌부처도...돌아가신...내부모도... 하느님도..하늘님도 아니며...하날님도 아니라 ! 모두 ..아니다 ! 어린아이처럼...계속..말장난하며...까불지말라 ! 창조주는..오직...한분! 하나님 이라 !
숨쉬는...우상(사탄)을 섬기지말라 ! 그들도...모두..우리와 같은 피조물이며, 죄인이다 ! 못 알아 듣는자는....짐승이다 ! 숨쉬는...우상(사탄)을 섬기지말라 ! 신은
오직 한분...창조주...하나님이시다 !
하나님의 무한하신 참사랑으로 돌아오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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