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흔적 갈6:11~18절 2020.11.1 주일오전예배
* 스티그마타
오늘은 갈라디아 마지막 시간입니다. 17절에“이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라고 합니다.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이란 원어로 스티그마타입니다. 스티그마타의 배경을 보면 옛날 노예의 시대에 그 노예의 주인은 자신의 인이 새겨진 인두로 불에 달구어 그 노예의 몸에 주인의 표시를 하는데 이것이 스티그마타입니다. 이때부터 그 노예는 주인의 것, 주인의 소유물이 됩니다. 사도 바울은 엡1:13절에 이러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라고 합니다. 이 인치심이 14절에서 “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합니다. 성령의 인침이란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합니다.
요3:32~33절에 “그가 친히 보고 들은 것을 증언하되 그 증언을 받는 자가 없도다 그의 증언을 받는 자는 하나님이 참되시다는 것을 인쳤느니라”고 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서 그가 친히 보고 들은 것을 증언하시되 그 증언을 믿고 받아드리는 자들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중에도 그의 증언을 받고 믿는 자가 있다면 하나님께서 참되시다는 인을 치신다는 것입니다. 참되시다 즉 나의 백성이란 인을 치신다는 것입니다. 이 내용의 말씀을 바울은 성령의 인침이라고 하십니다. 성령의 인침이란 영적 할례 곧 성령의 통치입니다. 롬2:29절을 보면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할례를 받으라고 하시면서 창17:10~11절에 이 할레는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하시고 11절에서는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고 하십니다.
즉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증표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몸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할례는 조상으로부터 흘러오는 죄로 오염된 혈통은 단절하여 끊어버리고 죄로써 오염된 피가 아니라 거룩한 피 죄와는 상관없는 의로운 피에 의해서 다시 태어난 거룩한 백성이라는 표가 할례가 의미한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를 깨닫고 약속된 메시야 그리스도를 믿고 기다리라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이고 그 약속의 증표가 할례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유대인들은 할례 받은 육신의 흔적을 가지고 교만하고 자랑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마음에 할례를 받으라고 하시며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않다고 합니다. 바울이 말하는 예수의 흔적은 자신의 옛 사람은 죽고 예수의 피로 다시 태어나 예수의 것으로 사는 인생이란 것입니다.
죄악으로 구성되어 오직 자신의 욕망에 의해서 살던 죄의 사람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아 죽고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칭함 받는 예수의 것,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살아감을 말합니다. 사람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만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자기는 버리는 피의 정신과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스티그마타라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것,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소유라는 것입니다. 지금 바울은 자신을 가리켜 나는 나의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분의 종으로서 자신의 생명도 돌아보지 않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한 사명자로서 사는 것이 예수의 흔적입니다.
* 성령으로 새로 지으심을 받은 것
갈라디아에 들어온 거짓 선지자들은 율법의 제도나 할례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백성의 표라고 증언하고 자랑하지만 바울은 15절에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신을 받은 것만이 중요하니라”고 합니다. 옛 조상 아담의 피에 의해서 태어난 죄의 사람은 죽고 그리스도의 피에 의해서 성령으로 새롭게 지음을 받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거룩한 피에 의해서 새롭게 태어나는 일입니다. 죄악으로 태어나 죄악으로 만신창이가 된 인간 죄악으로 그 속에 생명력인 영혼이 죽어 시체가 된 인간으로서는 그 어떤 착한 행위나 노력으로는 죄에서 벗어 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 종교적인 행위를 한다고 해도 죄를 용서를 받고 죄에서 벗어 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죄 중에 태어난 죄인에게 유일한 한 가지 희망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행위 즉 자기를 버리신 고난입니다.
죄인이 사는 유일한 길은 전적인 하나님의 긍휼이요 하나님의 행위입니다. 죄인 된 우리가 노력하고 행하는 그 어떤 행위에 의해서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깨달아 그분을 나의 주로 나의 생명으로 믿고 따르는 것뿐입니다. 새로 지음을 받았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그 속에 흐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는 예수의 영이신 성령이 그 속에 역사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령의 지배와 통치를 받아 사는 것이 예수의 흔적입니다. 성령은 곧 말씀의 영이시기 때문에 성령이 그 속에 역사하는 성도는 말씀을 통해서 십자가의 비밀을 깨닫고 십자가의 길을 가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의 통치를 받는 성령의 사람으로서 새로운 피조물이요 예수의 흔적을 가진 자입니다.
* 십자가만을 자랑하는 자
사람들은 나름대로의 자랑거리가 많습니다. 사람이 산다는 것은 어찌 보면 자기를 자랑하기 위해서 산다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옛날 가난한 시절에는 집에 자전거만 있어도 자랑거리었습니다. 그런데 오토바이가 나오면서 자전거 자랑은 사라지게 됩니다. 이렇게 인간적인 자랑이란 시간이 가고 세월이 감에 따라 그 자랑거리도 사라지게 됩니다. 사도 바울도 한때는 이러한 자랑거리에 도치되어 빌3:4~6절을 보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자랑을 하였지만 8절에서는 예수님을 만난 후에는 배설물로 여기고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자랑되게 사는 것입니다.
이제 그가 자랑하는 것은 팔일 만에 할례 받음도 아니요 이스라엘 족속이 된 것도 아니요 베냐민의 지파에서 태어난 것도 율법적인 바리새인이 된 것도 더욱 아니며 누구보다 뛰어난 열심도 열정도 아니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다고 말하는 그런 자랑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제 그의 자랑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그의 자랑거리라는 것입니다. 14절에서 그는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나니”라고 합니다. 왜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자랑거리라고 할까요? 십자가는 유대인들에게는 저주의 상징이요 예수 그리스도가 비참하게 못 박혀 죽으신 수치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바울은 십자가만을 자랑 한다는 걸까요?
십자가는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케 하신 영광의 표상입니다. 인간의 눈으로 볼 때는 저주받아 죽은 저주의 자리 패배의 자리인 것 같으나 이 십자가는 하나님이 의도하신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어 하나님이 누구신지 하나님이 완벽하게 계시됨으로 하나님이 만족하시고 기뻐하신 영광의 자리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발견하고 깨달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고 영광 받으시는 것은 그 어떤 인간의 업적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의 영광의 상징인 십자가만을 자랑하겠다는 것은 이 세상의 인간 그 누구도 아니고 오직 하나님만을 기쁘시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자신의 몸에 가진 예수의 흔적입니다. 바울은 십자가에서 자신의 육의 사람 옛 사람은 죽고 그리스도의 피로 다시 태어나 십자가에만 의미와 가치를 부여해서 십자가만 자랑되게 사는 것은 전적인 성령의 역사요 고난이란 십자가의 흔적을 가진 자입니다. 그리스도의 피 또 십자가는 우리들에게는 생명으로 다가오지만 그리스도에게는 고난의 그 자체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복음을 깨달은 바울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예수의 것으로 살고, 성령의 통치를 받아,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자랑되게 사는 것이 예수의 흔적인 것입니다. 이렇게 살기 위해서는 고난이 그의 삶과 온 몸에 예수의 흔적으로 남을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