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북동 간송 박물관
5월과 10월 성북동에는 나의 '은밀한 즐거움'이 있다. 해마다 간송미술관(02-762-0442)의 춘추 정기전이 있기 때문이다. 전시회는 1971년 10월 '겸재 정선 회화 특별전'과 함께 연구 논문집『간송문화』창간호를 내면서 시작돼 매년 두 차례씩 32년을 계속해 왔다. 65회를 맞는 올 가을 전시는 '조선 중기 회화 특별展'으로 12일부터 26일까지 2주일간 열리고 있다. 이번 전시회에는 한 시대를 마감하고 새 시대(진경시대;1675~1800년)를 여는 2백여년에 걸친 과도기 민족문화의 고민과 진통을 응축하고 있는 조선 중기 우리 그림 1백20여 점이 나온다. 사임당 신씨(1504~1551)부터 공재 윤두서(恭齋 尹斗緖 1668~1715)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당대를 대표하는 화가 50여명의 작품이다.
간송미술관 나들이의 즐거움은 무엇보다 전시회에서 훌륭한 작품을 만나는 것이다. 1만 수천 점에 이르는 간송 컬렉션은 양과 질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전시회마다 '민족문화의 금싸라기'들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오니 관람객으로서는 그야말로 횡재 중의 횡재다. 게다가 무료 전시임에랴. 또 하나의 즐거움은 대한민국 최고의 부자동네라고 알려진 서울 성북동 금싸라기 땅에서 만나는 토종 정원이다. 참나무, 뾰주리 감나무가 어우러져 간송의 흉상 위에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 중앙 동산 숲은 내게는 자못 그윽한 향수를 자극하는 풍경이다. 대문간 담 밑에 익어가고 있는 키 작은 수수와 차조, 거기 어울려 피어 있는 참취의 하얀 꽃들도 그렇다. 또 미술관으로 가는 길 양쪽에는 요즘의 우리 정원에서는 잊혀져 가는 토종 풀과 꽃들이 가득하다. 다래와 으름 덩굴까지 나무를 감고 오르며 자라고 있다. 10월 4일 현장에 방문했을 때는 으름 한 송이가 잘 익어 탐스럽게 벌어져 있었다. 미술관 앞의 작은 밭에 자라고 있는 가을 무와 배추, 그 이랑 사이에 재래종 감나무에서 떨어진 홍시, 밭 한쪽 구석에 아직도 남아 있는(사용하지는 않지만) 재래식 화장실…. 이처럼 외부인의 출입이 허용된 지역만 보더라도 작지 않은 동산에 펼쳐지는 숲과 구석구석 가꾼 꽃, 곡식, 야채 등은 여기가 21세기의 서울인가 싶게 전원의 모습이다. 10월 전시회가 열릴 무렵이면 미술관 아래 채마밭에는 홍시가 무시로 떨어진다. 재수 좋으면 한두 개 차지가 돌아올 수도 있다. 자연상태에서 익은 조그만 뾰주리 홍시, 그 기막힌 맛을 아는 사
간송미술관은 현재는 한국민족미술연구소(소장 전영우, 연구실장 최완수) 부설 미술관이지만 그 출발은 우리나라 최초의 사설 박물관이었다. 설립자는 간송 전형필(澗松 全鎣弼 1906∼1962)선생이다. 이곳에는 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 실린 <훈민정음(국보 제70호)>의 원본을 비롯한 고서 1만여 점과 서화, 석조물, 자기 등 골동품 3천여 점이 소장돼 있다. 그 대부분을 간송의 손으로 사 모았다. 그는 증조부 때부터 배우개(梨峴=지금의 종로4가) 중심의 종로 일대 상권을 장악한 10만석 부호가의 재산을 물려받았다. 양부와 생부의 가산을 간송이 모두 상속한 것이다. 어마어마한 규모였다. 간송은 그 많은 재산을 탕진했다고 손가락질 당할 만큼 심혈을 다해 문화재를 사 모았다. 특히 일본 사람이 탐내는 물건은 놓치지 않았다. 민족 문화재가 적들의 수중으로 넘어가는 것을 그냥 둘 수 없었던 것이다. 일제치하에서 그것은 일종의 저항이요 투쟁이었다.
 ▲아름드리 참나무와 뾰주리 감나무가 어우러진 간송미술관 중앙 정원.
일본 와세다대학 법과를 졸업한 그는 대학 졸업 직후인 25세 때(1930년)부터 문화재 수집을 시작했다. 그 배경에 두 스승이 있다. 휘문학교의 은사 춘곡 고희동(春谷 高羲東 1886~1965)과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분인 위창 오세창(葦滄 吳世昌 1864~1953)이다. 고희동은 한국인 최초의 서양화가로 민족문화의 소중함을 휘문학교 학생이던 간송에게 일깨워줬다. 구한말 역관으로 개화사상가였던 역매 오경석(亦梅 吳慶錫 1831~1879)의 아들인 오세창은 언론인이자 스스로 전서와 예서에 뛰어난 서예가였으며 서화(書畵)감식에는 당대 1인자였다. 그가 편찬한 한국 역대 서화가 사전인『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은 지금도 이 분야를 연구하는 데 가장 권위 있는 문헌으로 평가되고 있다. 오세창은 간송에게 문화재를 보는 안목을 열어줬으며 간송이 수집한 문화재를 일일이 감식하고 품평하며 작업을 지도하고 거들었다. 지금도 전시회에 나오는 간송미술관 소장 미술품의 보관함에는 위창이 친필로 쓴 제발(題跋)과 낙관이 선명하다.
▶간송 전형필 선생의 흉상. 간송은 1934년 지금의 성북동에 1만여 평의 땅을 사들여 북단장(北壇莊)을 개설했다. 그 안에 1938년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박물관인 보화각( 華閣)을 세우고 방대한 수집 문화재를 수장했다. 오늘날의 간송미술관이다. 1962년 간송이 타계한 뒤 후손·후학들은 1966년 북단장에 한국민족미술연구소를 설립하고 보화각을 부속 간송미술관으로 바꿔 축적된 자료들을 체계적으로 분류-정리하는 한편 연구를 계속해 전시회 때마다 화집 겸 연구논문집『澗松文華』를 펴내고 있다.
여러 자료들에서 추려 모아 본 간송 컬렉션에 얽힌 일화 네 토막.
기와집 일곱 채 값에 백자 하나를 사다 1936년 11월 22일, 지금의 퇴계로 경성미술구락부에서 골동품 경매가 있었다. 백자 명품들이 쏟아져 나왔다. 가장 관심을 끈 것은 청화백자양각진사철채난국초충문병(靑華白磁陽刻辰砂鐵彩蘭菊草蟲文甁, 보물 제241호)이었다. 아름다운 곡선의 몸매, 희고 보드라운 살결에는 들국화 몇 가지와 푸른 풀잎이 어울려 수를 놓았다. 그 위로 나비들이 꽃으로 날아들고…. 풀잎은 청화, 들국화는 진사와 철채로 그린 보기 드문 명품 중의 명품이었다. 백자의 최고가가 2천원을 넘지 않던 시절이었다. 사람들의 경악 속에 호가가 이어졌다. 간송의 대리인으로 일본인 골동상인 溫古堂 주인 심보(新保喜三)가 외쳤다. "1만원." 일본인 야마나카(山中)가 다시 불렀다. "1만 5백원." 5백원 단위로 몇 차례 공방이 오갔다. 그리고 심보가 소리쳤다. "1만4천5백원." 따라 부르던 야마나카의 응수가 길어졌다. "1만4천5백10원." 목소리는 힘이 없었다. 심보가 마지막 일격을 가했다. "1만4천5백80원." 경락봉이 '탕'하고 책상을 울렸다. 이어 박수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당시 군수 월급이 70원, 백자 값은 비싸야 2천원, 20칸 기와집 한 채가 2천원일 때였다.
#일본인 거상(巨商) 울린 상감청자 고려청자의 대표작이자 세계적 명작으로 꼽히는 청자상감운학문매병(국보 제68호)은 개성 근처에서 도굴된 이후 일본인 손에 넘어갔다가 대구의 신창재라는 사람이 사들였다. 이때 값이 4000원. 그 후 다시 일본인 골동상 마에다가 갖게 됐다. 이 소식을 들은 간송은 마에다의 요구에 두말 않고 2만원이라는 거금을 주고 사들인다. 일본인 수집가들은 놀라기도 했지만 자존심이 상했다. 조선총독부 박물관도 접촉했으나 엄청난 값 때문에 욕심을 접을 수밖에 없었던 물건이었다. 이를 안 일본 굴지의 수집가 무라카미가 간송을 찾아와 4만원을 불렀다. 간송의 대꾸가 속이 시원하다. "이 청자보다 더 좋은 물건을 나에게 가져오면 이 매병을 원금에 드리지요." 무라카미는 더 이상 말을 붙일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해외유출 위기를 넘긴 청자상감운학문매병은 1962년 12월 국보로 지정되고 현재 간송미술관에 소장돼 있다. 간송은 귀중한 문화재에 값을 매길 수 없다 하여 사들이면서 단 한번 흥정한 적이 없다고 한다. 그런 간송을 이야기하면서 값을 따지기는 송구스런 일이지만(어느 신문 기사에 따르면) 이 매병의 값은 2백50억원쯤이라고 한다. 일본으로 유출된 것을 간송이 되찾아 온 도자기 명품은 이밖에도 청자상감연지원앙문정병(국보 제66호), 청자기린형향로(국보 제65호), 청자오리형연적(국보 제74호), 청자상감포도동자문매병(보물 제286호), 청자상감국목단당초문모자합(보물 제349호), 백자박산향로(보물 제238호) 등 국보와 보물이 숱하다.
#5천석지기 전답과 바꾼 '빅딜' 고려청자의 최고 컬렉션으로 이름 높던 영국출신 변호사 존 개스비(John Gadsby)의 수장품을 일괄 인수할 때는 5천석지기 전답 판 돈을 몽땅 쏟아 부었다. 개스비는 영국 귀족으로 도쿄에 와서 국제변호사로 활약하던 중 고려청자에 흠뻑 빠져 수집광이된 사람이다. 그에게 고려청자 명품이 많다는 정보를 갖고 있던 간송은 1937년 2월 일본으로 갔다. 국제정세에 불안을 느낀 개스비가 수장품을 일괄 처분하고 귀국하려 한다는 전갈이 있었기 때문이다. 간송은 급히 공주에 있던 땅을 팔아 자금을 마련했다. 개스비 컬렉션은 양과 질 모두 대단했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국보와 보물이 된 것만도 여러 점일 정도다. 청자기린형향로(국보 제65호), 청자압형연적(국보 제74호), 청자상감포도동자문매병(보물 제286호), 청자상감국목단당초문모자합(보물 제349호) 등이 그것이다. 간송은 청자 10여 점 값으로 10만원을 지불했다. 기와집 50채 값이었다. 서울로 돌아온 간송은 소장품들을 전시하고 보관하기 위해서 다음해 성북동에다 보화각( 華閣, 지금의 간송미술관)을 새로 지었다.
#6.25때의 위기일발 "6·25 땐 북단장 아래 전효준씨가 사시던 데로 옮겼죠. 북쪽에서 온 당원으로 '기'란 사람과 서예가 '일관'이란 사람이 와서 간송 소장품을 안전한 데로 옮긴다는 것이죠. 그래 손재형씨와 제가 지연작전을 세웠습니다. 우선 선별 기준에서 좋은 것은 나쁘다, 나쁜 것은 좋다고 하고 물건을 하나 가져다가 풀었다간 아니라고 다시 싸고, 또 목록이 잘못 되었다고 다시 하였지요. 포장이 진행되면서 상자를 사오라고 하는 둥 목수가 없다는 둥 지연하고…9·28 때까지 완전히 포장되어서 상자에 싸여진 것은 하나도 없었죠. 그때 보화각 지하실에 '화이트 호스' 위스키가 궤짝으로 있었는데 그것을 '기'한테 날마다 자꾸 권했죠. 술이 취하면 우리가 사보타지하기 쉬웠죠. 그리고 그 속에 일본 판화로 된 좋은 춘화가 있었는데 그는 그것을 보고 좋다고 흥얼대면서 우리가 눈속이는 걸 모르고 매일같이 곯아 떨어졌습니다. 소전(=손재형) 선생과 나는 참 위기일발로 살아 남았어요. 북쪽 책임자인 일관이란 사람이 9·28이 다가오자 우리 두 사람에게 책임을 묻겠다고 할 때는 참 아찔했습니다. 그 날 그들이 모두 서울에서 사라져 버렸습니다." (최순우 전 국립박물관장이 1973년 11월 간송 11주기 좌담회에서 한 말) "(1.4후퇴 때 간송은 손재형과 최순우가 포장한 대로)그때 짠 상자로 부산 피난을 했습니다. 피난을 울산 옆 병영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물건은 김승현 박사가 쓰던 영주동 별장에 보관을 했죠. 그리고 1953년 겨울(10월)에 물건이 서울에 왔는데 물건이 오자 10일 뒤엔가 그 별장에 큰불이 나서 전소했습니다. 그래서 하늘이 도왔다고 했습니다." (간송의 장남 전성우씨가 같은 좌담회에서 한 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