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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주아의 은밀한 매력’을 보고 나서 소속 : 의예과 학번 : 4730202 이름 : 박진성 내가 이번에 본 ‘부르주아의 은밀한 매력’은 두 번째 영상 과제였다. 지난번 ‘중국식 룰렛’을 보러 갈 때는 다소 기대도 하고 약간의 흥미가 느껴졌었다. 일단 영화관이 우리가 보통 알고있는 만경관, 한일극장 등이 아닌 아트홀이란 점이었다. 한글 그대로 풀이하면 예술관, 이미 이름에서만 보아도 어디선가 강한 포스가 느껴졌었다. 하지만 내 수준이 예술을 즐기기엔 아직 못 미쳤는지 아님 영화가 지루했는지는 몰라도 지난번에 영화관람 후 약간은 실망을 한 터라 이번엔 그닥 기대가 된다거나 그러진 않았다. 이 영화는 저녁 식사를 위해 차를 타고 가는 손님들의 그럴듯한 행위와 인물 설정으로 시작된다. 방해받는 식사의 모티프로 설정된 행위는 지난번 ‘중국식 룰렛’보다 약간은 흥미롭기도 하고 웃기기도 했지만 점점 터무니없고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여섯 명의 부르주아지 미식가들은 계급의 전형적 생활양식인 파티를 열려고 하는데 약속이 어긋나거나 군인․경찰들이 갑자기 들이닥치는 바람에 번번이 실패한다. 레스토랑에서 하는 식사마저 지배인이 죽어 이루어지지 못한다. 또한 이들은 음식을 생존 수단으로 사용하기보다 부르주아지 의식의 하나인 파티를 위해 사용한다. 즉 먹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개인의 위치가 강조된다. 일종의 부르주아지의 자존심이랄까.. 이 영화를 보기 전에 대략적인 줄거리가 부르주아지의 허위를 풍자하는 영화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식사 때마다 벌어지는 혼란들이 부르주아지의 자존심이 무너지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가 있었다. 부르주아지는 목적을 잃어버린 것처럼 보인다. 다른 한편으로 비옥한 풍경에서 인위적이고 갑갑한 환경 밖으로 나가려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세 번에 걸쳐 삽입되는 시골길을 침묵하며 걷는 여섯 명의 행진은 점점 대열이 흐트러지고 결국 그 존재마저 사라지는 듯 보인다. 그들은 질서가 기초하고 있는 긴장과 공포, 가부장적 질서를 강조하는 현실을 환상으로 나타낸다. 중년의 가부장적 권위를 지닌 인물이 꾸는 네 개의 꿈들은 권위의 붕괴에 대한 불안으로 해석할 수 있겠다. 일단은 영화가 ‘부르주아지의 풍자’라는 하나의 주제로 압축할 수 있었기 때문에 지난번 영화보다는 약간 흥미로웠다. 평소에 약간은 부르주아라는 말에 대해서 거부감을 느끼던 터라 영화 중에 풍자되는 그들을 보았을 때 통쾌한 느낌마저 들었다. 그래서 영화를 보는 도중에 졸거나 딴 생각을 하는 등의 일은 없었다. 하지만 역시 이번 영화도 예술영화이니 만큼 약간은 멍한 느낌은 있었다. 어찌 보면 졸지 않고 영화를 끝까지 볼 수 있었던 게 지난번 영화 때 낭패를 본 터라 약간은 예습을 하고 온 덕분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앞으로 교양을 좀 더 쌓아서 예습이 없이 바로 이런 예술 영화들을 봤을 때 이해가 가능하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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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계동 올림픽과 무등산 타잔 박흥숙을 보고 소속 : 의예과 학번 : 4730202 이름 : 박진성 영상예술의 이해 수업시간에 '상계동 올림픽'을 보게 되었다. 이 작품은 상계동 지역의 재개발로 인해 보금자리를 잃게 된 상계동 주민들의 서울시를 상대로 한 투쟁에 관한 이야기다. 88올림픽이 개최될 당시 나는 3살의 어린 아이었고 그 시기의 상황이나 올림픽의 자세한 내막은 알지를 못했다. 하지만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성공적으로 개최했다는 서울 올림픽의 이면에 아픔이 녹아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서울시는 1988년 올림픽을 앞두고 가난한 서울의 모습을 보이면 안 된다며 빈민촌에 살고 있던 주민들을 강제 이주시키려 하고 이들은 살 곳을 뺏으려면 이주할 곳을 확실하게 보장하고 이주를 시켜야 할 것 아니냐면서 서울시에 대항해 싸운다.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나도 부당한 일이지만 이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본다면 가능할 법도 한 일이다. ꡐ상계동 올림픽ꡑ은 국제사회에 보여질 사회의 미관을 위해 공권력에 의해 짓밟힌 인간의 기본권리를 이야기한다. 올림픽이라는 행사가 성공적으로 개최되어서 국제적 위상이 올라간다면 결국 우리국민들의 위상이 올라가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성과가 국민들의 기본적인 생존권리를 침해해서 얻어진 것이라면 이것이 과연 의미가 있는 일인 것인가? 그 이후 며칠 전에 ‘무등산 타잔 박흥숙’을 보았다. 1977년 4월20일, 광주 무등산에서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진다. 자신의 무허가 집이 철거되고 불태워지는 것에 격분한 21살의 청년 박흥숙이 철거반원 4명을 살해한 사건이었다. 사건 후 그는 ꡒ무등산 타잔ꡓ이라 불리며 그를 살리려는 각계각층의 구명운동에도 불구하고 결국 사형된다. 내막을 모른 채 그냥 본다면 4명의 시민을 살해한 잔인한 살인마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 속에는 정의를 사랑하는 젊은 청년인 나에게 충분히 납득할 만한 사연이 있었다. 구청직원들이 강체철거의 일환으로 박흥숙 집에 불을 질러 어머니가 피땀 흘려 모아둔 돈 30만원이 타버리고, 그 과정에서 집으로 뛰어 들어가는 어머니를 구청직원들이 내동댕이쳐 어머니가 실신해버린다. 거기에 인근 빈민 폐병 환자들과 의지할 곳 없는 노인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있던 곳마저 불을 질러 더 이상 걷잡을 수 없는 위험천만한 상황이 벌어져 효자였던 박흥숙은 정당방위로 우발적인 사건을 벌이게 된 것이었다. 박흥숙, 내가 본 그는 충분히 훌륭한 인재임에도 불구하고 불우한 시대 환경의 그늘 속에 희생된 안타까운 사람이다. 살인이라는 중죄를 저지를 그를 살리려는 운동이 일어난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것일 수도 있는 듯 하다. 이 두 작품의 공통점은 철거민의 비애를 들 수 있다. 나는 초등학교를 3군데 다녔을 정도로 이사가 빈번했다. 이사를 한다는 것은 단순히 본다면 의식주중에 주의 변화로만 볼 수 있지만 당사자인 나에게는 적지 않은 고통이었다. 정든 친구들과 헤어져야하는 아픔, 이는 순수했던 시절의 초등학생인 나로서는 너무 아쉬운 일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아쉬움이 감히 위 두 작품의 당사자들의 고통에 비교할 바가 되겠는가? 그들은 당시 정부의 근시안적인 정책의 희생양이고 동시에 지금 이 시점에 반드시 보상 받아야할 사람들이다. 비단 이 예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사회적으로 조명이 되지는 않았지만 주위에서 가끔 이와 흡사한 예들을 접하게 된다. 과거를 돌이킬 수는 없다. 하지만 현재는 과거를 통해 재구성 되어야한다. 과거에 잘못된 점이 되풀이된다면 이는 잘못된 것이다. 우리는 위 두 작품의 교훈을 다시 한번 돌이켜 보고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각자가 노력해야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