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방법으로 기독교를 이해해 보자.
맹인이 낭떠러지에서 떨어졌는데 다행히 나무에 걸려 매달려 있었다. 지나가던 사람이 손을 놓으면 바로 살 수 있다고 했으나 믿지 못하고 매달려 있었는데 힘이 빠지자 어쩔 수 없이 손을 놓았다. 결과는 엉덩방아를 찍는 것이었다. 불교에서 쓰이는 '방하착(放下着)'이라는 말이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취미활동에 ‘절대적으로 옳다’는 신념까지 붙으면 신앙이 된다. 바꾸어 말하면 신앙도 취미생활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취미생활과 다른 점은 남에게까지 강권하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관심이 없는 분야에 대해서는 소홀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자신과 조금만 달라도 간격을 느끼는 예민한 분야가 신앙이다.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자신과 신앙이 다른 것을 견디지 못하는 성향이 있다.
그런데 다양성과 다원성은 다르다. 그런데도 차원이 다른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다양성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자기가 이해하지 못하면 종교다원주의라고 딱지를 붙인다.
종교다원주의라는 말은 얼핏 들으면 “산으로 올라가는 길은 어느 길로 가나 모두 정상으로 이르게 되어있다”는 뜻같이 들린다. 그러나 이 말은 "산을 올라가 보고 하는 이야기인지” 아니면 “산을 올라가 보지 않고 먼 데서 산을 바라보기만 하고 하는 것인지”에 따라서 다르다. 산을 올라가다 보면 잘못 든 길도 있고, 가다가 끊어진 길도 있고 심지어는 골짜기로 도로 내려오는 길도 있다. 정상에 올라가 보고서 비로소 “모든 길은 하나로 통한다.”라고 할 때는 다원이 아니라 일원인 것이다. 그러므로 차원이 다름을 이해를 못하는 이들은 '종교다원주의'라고 딱지를 붙이지만 실상은 '종교일원주의'인 것이다.
어떤 분야이든지 경험은 소중한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경험을 절대화할 때는 독단에 빠지기 쉽다. 이런 현상이 가장 널리 유통되는 곳이 신앙이다. 주관적 경험을 마치 진리처럼 절대적으로 신봉하는 증세는 백신도 치료제도 없다. 왜냐하면 독단을 지나 독선이라는 암에 걸렸기 때문이다. 신앙은 무리한 확신을 갖는데 크게 도움이 된다. 잘못 아는 것도 정당화 시킬 수 있고 아는 것이 적어도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처럼 확신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오로지 성경 구절에 매어 달리는 사람들을 보면 방하착 생각이 난다. 차원이 다른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다르다고 생각하고 배척할 때 방하착이 필요한 것이다.
나는 방하착의 뜻을 ‘성경을 내려놓아야 한다.’ 로 적용하고 싶다. 기독교인이 성경을 내려 놓다니? 말이 안되는 이야기인 것 같다. 그러나 한 번 잘 생각해보자.
불교에서 통용되는 불립문자(不立文字)라는 말이 있다. 문자로써 세우지 않는다는 뜻으로, 깨달음은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지는 것이지 문자나 말로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역시 불교에서 통용되는 진여(眞如, tathata)라는 말이 있다. 산스크리트어로 '꼭 그러한 것', ' 있는 그대로의 것' 등을 의미한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진실하게 본다는 뜻이다. '타타타'는 1991년 가수 김국환이 발표해서 널리 노래 제목으로 널리 알려진 곡이다. 작사가 양인자가 인도 여행을 하다가 가사를 썼다고 한다.
예수도 교리에 의해서 조립된 모습이 아니라 2,000년 전 살았던 모습 그대로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성경의 권위 보다는 예수의 삶과 정신을 따르는 것에 비중을 두어야 하지 않을까? 문화와 역사의 상황에 따라 성경을 조금 다르게 해석한 것이 무엇이 대수랴?
방하착의 댓구로 쓰이는 말이 착득거(着得去)이다. ‘가지고 가라’의 의미이다.
그러므로 나는 착득거(着得去)를 ‘십자가는 지고 가라’의 뜻으로 풀이하고 싶다. 예수가 율법을 내려 놓고 십자가를 지고 갔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