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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당, 조선후기 민중 성장의 상징
글쓴이 박찬승 / 등록일 2024-11-15
조선후기 사회의 변화에서 ‘민중의 성장’과 관련하여 주목할 것은 ‘서당의 증가’ 현상이다. 서당은 조선초기부터 있었지만, 본격적으로 서당이 세워진 것은 임진왜란 이후이다.
17세기에 들어서면서 전국 각지에 동족마을이 들어서고 이를 기반으로 한 재지사족들은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해 자기 마을에 서당을 세우기 시작했다. 이러한 양반 마을의 서당은 18세기 들어 동족마을이 늘어가면서 크게 늘어났다. 그런 가운데 18세기 후반 이후에는 평민층의 동족마을도 등장하기 시작했고, 이들 마을에도 서당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서당의 증가, 섬지방에도 노비층을 위해서도
일본의 경우, 에도막부 시기에 조선의 서당과 비슷한 데라코야(寺子屋)가 세워져 서민층의 자제들을 가르쳤다. 특히 19세기에 크게 늘어나 막부말기에는 전국적으로 16,650개의 테라코야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이로 인해 인쇄산업이 크게 발전했다는 연구도 있다.
조선의 경우에는 그러한 통계가 없어 서당이 얼마나 세워졌는지 알 수 없다. 다만 다산 정약용이 『목민심서』 「예전(禮典)」에서 “군현(郡縣)에서는 보통 1향(鄕)이 수십 개의 촌락(村落)을 거느리고 있는데, 대략 4~5개의 촌락마다 반드시 하나의 서재(書齋)가 있다”고 한 것을 보면, 19세기 초에는 4~5개 마을에 하나 정도의 서당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순우 교수의 저서 『서당의 사회사』를 보면, 조선후기~한말 서당의 모습이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이에 의하면, 1899년 전남 구례군 토지면에는 32개의 자연촌이 있었고, 호수는 687호였는데, 서당이 있는 마을은 6개 마을이었다고 한다. 5개 마을에 하나의 서당이 있었던 셈이다.
또 『추안급국안』을 보면, 18세기 중반에 유랑지식인 박천우라는 이가 전라도 위도라는 섬에 들어가 서당 훈장을 하다가, 도초도로 옮겼는데 그곳에도 서당이 여럿 있었다고 한다. 오횡묵이 쓴 『지도군총쇄록』를 보면, 1895년 지도군(지금의 신안군)의 군수가 된 오횡묵이 순시 차 여러 섬을 방문했을 때, 방문한 거의 모든 섬에서 서당 훈장을 만났고, 학동이 많게는 수십 명에 달하는 것을 목격했다고 한다. 섬지방에도 서당이 적지 않았던 것이다.
서당은 농촌이나 어촌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한양과 같은 도회지에도 양반층을 위한 서당, 상인층을 위한 서당, 심지어 노비층을 위한 서당까지 있었다. 한양의 서당에는 학동이 많아서 50명이 넘기도 했고, 그래서 2부제 수업을 하는 곳도 있었다.
서당 교육, 사람답게 살기 위해
서당에서는 『천자문』, 『동몽선습』, 『사략』, 『통감절요』, 『사서』의 순으로 학도들을 가르쳤다. 글자를 익히는 『천자문』, 『동몽선습』 단계의 아동들을 위해서는 이들 책 외에도 『유합(類合)』, 『훈몽자회(訓蒙字會)』 등 유사한 교재가 많았고, 다음 단계로는 『격몽요결』, 『명심보감』 등 한문 초심자를 위한 교재들이 많았다. 서당의 수가 늘어가면서, 조선의 인쇄산업에도 상당한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 서당 교육은 꼭 과거 응시만을 목표로 하는 것은 아니었다. 양반층이나 평민층이나 모두 삼강오륜을 뼈대로 하는 유학(儒學)을 가르침으로써, 학동들이 최소한의 인륜을 깨쳐 짐승이 아닌 사람다운 사람으로 살아가기를 바랐다고 할 수 있다.
서당의 운영은 양반층의 경우에는 대개 ‘학전(學田)’이라 부르는 논밭을 마련하여 이를 운영의 재원으로 삼았다. 하지만 평민층의 경우 ‘학전’까지는 마련하기 어려워 ‘학계(學契)’를 만들어 재원을 조달한 경우가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서당이 있었던 마을의 고문서 더미에서는 학계 계책이 발견되는 경우가 많다.
서당에서 공부한 이들 가운데 우수한 이들은 사마시에 응시하여 합격해서 생원, 진사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대부분은 사마시에 낙방을 하거나, 아예 응시할 엄두도 내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런 경우 이들은 고향에서 서당 훈장이 되거나, 유랑지식인이 되어 전국 각지를 떠돌면서 서당 훈장으로 생업을 유지하기도 하였다. 그것도 어렵다면 결국 농사일을 할 수밖에는 없었을 것이다.
서당 출신, 민란을 주도하기도
그런데 전세, 대동세의 수취와 관련하여 총액제가 실시되는 경우가 많았고, 이와 관련하여 각 동·리(洞里)의 두민(頭民), 면의 집강(執綱)의 역할이 중시되면서 서당에서 글을 배운 이들이 결국 이런 일들을 맡게 되었다. 그리하여 리회(里會), 면회(面會) 같은 것이 열리면 이를 주도하게 되었고, 그것이 민란으로 비화되는 때에는 이를 주도하는 인물이 되기도 했다.
서당의 수는 일제 강점기인 1910년대 이후 더 늘어났다. 신식교육을 담당할 학교는 아직 들어서지 못한 상황에서 교육열이 크게 높아지자 신학문을 가르치는 ‘개량서당’들이 우후죽순처럼 등장한 것이다. 서당이 가장 많았던 해는 1916년으로 전국에 25,486개의 서당이 있었으며, 서당에서 공부하는 학생은 259,531명에 달했다. 서당이 가장 많았던 곳은 황해도로 3,274개의 서당이 있었다. 다음이 경기도로 2,444개의 서당이 있었다.
1930년 전라남도에는 모두 1,412개의 서당이 있었고, 인구비례로 보면 1,402명당 1개의 서당이 있었다. 무안군의 경우, 21개 면에 서당이 126개가 있었으며, 서당에서 공부하는 아동은 남자 1,918명, 여자 5명이었다. 1개 면에 평균 6개 정도의 서당이 있었던 셈이다. 1개 면에 대개 10개 안팎의 리가 있었기 때문에, 2개 리 정도에 하나의 서당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조선후기부터 일제강점기에 이르기까지 서당은 꾸준히 늘어왔고, 숫자상으로 양반층보다 평민층의 교육을 담당하는 서당이 더 많았다. 이는 평민층도 서당을 운영할 만한 경제적 능력이 있었다는 것, 평민층 가운데 글을 하는 이들의 비중이 크게 늘어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볼 때, 이 시기 서당 수의 증가는 민중의 성장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하겠다.
■ 글쓴이 : 박 찬 승 (한양대 사학과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