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의 킬링필드 - 크메르 루즈는 누구인가?
1975년 4월, 검은색 제복을 입고 붉은색과 흰색의 체크무늬 스카프를 두르고 낡은 고무 타이어로 만든 호치민 샌들을 신고 열을 지어 프놈펜에 입성한 어린 군인들은 세계인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할 만큼 특이한 존재였다. 이들은 대부분 젊었다. 그중에는 어린이도 섞여 있었다. 조직의 명령에 따라 작은 권력을 휘두르며 수많은 민간인들의 목숨을 앗아간 이들은 누구였으며,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그런 엄청난 일을 저지르게 만들었을까?
폴 포트와 동료 지도자들은 혁명 반군을 충원할 때 교육받은 사람을 의식적으로 피하고,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빈민층 소년들을 선택했다. 그들은 어리기 때문에 지도자들이 제시하는 세계관에 쉽게 감동할 수 있었고, 그 가치관에 따라 필요하면 목숨도 쉽게 버릴 수 있었다. 또한 빈민층 출신인 까닭에 사회적 차별과 경제적 불평등에 대해서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그들은 쉽게 적대감으로 무장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심지어 이들은 때로는 자신의 친부모도 죽일 만큼 기존의 가치관에서 벗어나 있었다.
크메르
루즈 군인들
평범한 어린이와 청소년을 잔인하고 신념에 찬 크메르 루즈 전사로 만든 것은 전쟁이었다. 기나긴 내전과 국제전이 이들을 천진난만한 어린이와 청소년으로 남아 있게 할 버팀목인 가족을 붕괴시켜버렸기 때문이었다. 전쟁은 먼저 많은 아이들을 고아로 만들었다. 또한 부모가 있다 해도, 그들은 자기 자식을 부양하거나 전쟁의 위험으로부터 보호할 수 없는 무력한 존재에 불과했다. 그런 가정에서 아무런 소속감도 느끼지 못하는 청소년들에게 크메르 루즈는 모든 것을 제공해줄 수 있는 전능의 조직으로 비쳤다. 청소년들의 손에 쥐어진 총은 그들에게 권력의 맛까지 알게 해주었다. 오랜 내전 속에서 정부군과 전투를 치르는 가운데 누적되어온 학살 경험은 크메르 루즈 전사들의 정체성의 일부로 자리 잡아갔다. 부모 살해는 그들만의 집단 정체성을 확인하는 극단적 징표로 작용했다.
크메르 루즈가 하나의 강고한 집단으로 형성되는 데는 미국의 역할도 컸다. 크메르 루즈의 게릴라전은 1968년의 미국의 대규모 공습과 비슷한 때에 시작되었다. 캄보디아 지역에 숨어 잇는 북베트남군의 격퇴를 명분으로 시작된 미국의 공습이 국경 지대에서 내륙 쪽으로 확산되면서 미국에 대한 민심이 크게 악화되자, 이에 대한 반동으로 크메르 루즈는 인적, 물적 자원의 동원에 어려움을 겪지 않게 되었다. 이와 동시에 크메르 루즈는 자신들이 점령한 캄보디아 지역에서 한편으로는 보상을 통해, 다른 한편으로는 살육을 통해 지배력을 높여갔다. 전통적인 사회 조직이 해체되고 폭력과 아사의 위협이 상존하는 가운데, 농민들은 가치관의 혼란을 극복하고 목숨을 보전하는 방법을 크메르 루즈의 지배 속에서 찾았다. 크메르 루즈는 제방을 쌓고 농작물을 수확하고 집을 짓고 엄폐호를 파는 작업을 돕는 가운데 농민들의 지지를 확보해나갔다. 그러나 지배에 복종하지 않는 농민들에 대해서는 학살도 주저하지 않았다. 크메르 루즈 내부를 지배한 것은 엄격한 규율과 평등주의 원칙이었다.
프놈펜에
입성하는 크메르 루즈군
크메르 루즈의 활동이 정글 속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들이 프놈펜에 모습을 드러내기 전까지 그들에 대해 크게 상반된 평가가 공존하고 있었다. 그러나 두 가지 평가 모두 크메르 루즈의 본모습이었다. 피로 얼룩진 내전이 끝났을 때 캄보디아인은 크메르 루즈가 그들이 애초에 약속했던 것처럼 풍요와 안정, 질서와 평등을 가져다줄 것으로 기대했다. 내전 기간 동안에 나타났던 크메르 루즈의 잔혹성은 상황의 산물일 뿐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믿고 싶어 했다. 그러나 그 희망 섞인 예상은 빗나갔다. 내전이 일단락되었지만 완전히 종식되지는 않았고, 크메르 루즈 지도부가 오히려 또 다른 무모한 전쟁을 준비했기 때문이다.
크메르 루즈 이후의 캄보디아
1978년 캄보디아와 베트남사이의 국경분쟁의 갈등이 심해지고 결국 베트남에서는 12월 캄보디아를 공격했다. 12만 명의 베트남군은 남동쪽부터 시작하여 서쪽방향으로 계속 진군하였으며 17일 만에 수도 프놈펜을 점령하였다. 폴 폿의 크메르 루즈는 태국 국경지역으로 도주하였고 그곳을 위주로 게릴라전을 하였으나 이미 크메르 루즈는 상황을 역전시킬만한 힘이 없었다. 하지만 크메르 루즈가 아직 남아있는 한 캄보디아는 안정적이지 않았다. 태국의 국경과 가까운 지역의 사람들 중에는 그 때의 여파로 팔과 다리가 없는 사람들이 많다. 크메르 루즈가 방어를 위해 수많은 지뢰를 설치했기 때문이다. 지뢰가 광범위하게 설치되어있을 뿐만 아니라 그 수도 많고 경제적인 상황으로 인해 현재까지도 제거되지 않고 있다.
베트남은 캄보디아를 점령하고 캄푸치아 인민 공화국을 세웠으며 원래 크메르 루즈였다가 베트남으로 망명했던 훈센이 지도자가 되었다. 베트남은 캄보디아에 15만 명 정도의 베트남군을 배치하였으며 고문관을 파견하고 베트남인을 이주시키기도 하였다. 그러나 국제적인 제제로 인하여 군대를 철수시키고 결국 1991년 내전이 공식적으로 종결된 후 1993년 왕정이 복구된다. 1993년 첫 총선에서 푼신펙의 노르돔 라나리드와 CPP의 훈센이 공동총리가 되었다. 그러나 1994년에 쿠데타 시도가 일어나는 등 정국이 혼란했으며 양 측 사이에 충돌이 일어났다. 그리고 1997년 훈센과 라나리드 사이에 무력 충돌이 일어나 결국 라나리드는 축출되었다.
1998년 캄보디아의 서북부에서 폴 폿이 사망하고, 이어서 키우 삼판과 이엥 사리가 훈센에 항복하여서 타 목만이 크메르 루즈의 지도자로써 남아있었지만 1999년 항복하여 크메르 루즈는 완전히 해체되었고 내전은 공식적으로 종료되었다. 그리고 망명중이던 노르돔 시하눅을 다시 정식 국왕으로 받아들여 입헌군주제로 헌법을 개정했다. 1997년부터 크메르 루즈였다가 폴 폿에 반대하여 베트남 괴뢰정권의 지도자로 있던 훈센이 현재까지 집권하고 있으며 2012년 10월 15일 전국왕인 노르돔 시하눅이 사망하고 그의 아들인 노르돔 시하모니가 그의 뒤를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