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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소조불상(塑造佛像)이 봉안된 완주 종남산(終南山 )송광사(松廣寺)
2013. 7, 6 ‘송광사(松廣寺)’ 하면 누구나 얼른 전남(全南) 순천(順天)에 있는 조계산 송광사를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오늘 찾아간 곳은 전북(全北) 완주군(完州郡) 소양읍(所陽邑) 대흥리에 위치한 종남산(終南山) 송광사(松廣寺)이다. 물론 이 두 절은 한글은 물론 한자로도 ‘松廣寺’ 라고 표기하고 있지만 전혀 별개의 사찰이다. 그래서 순천송광사, 완주송광사라고 지명을 앞에 붙여 구분하여 부르고 있다.
옛날 조계산 송광사를 창건한 보조국사가 이곳 종남산을 지나다가 한 신령스러운 샘물을 마시고는 기이하게 여기어 장차 절을 경영하고자 했다고 한다. 결국 보조스님과 인연이 닿은 응호, 승명, 운정, 덕림, 득순, 흥신 스님 등이 힘을 모아 종남산 송광사를 창건불사(創建佛寺)를 하게 되었다고 한다.
송광사안내 및 당우 배치도
순천 송광사가 승보종찰로 우리나라 불교의 삼보사찰(三寶寺刹)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면 완주 송광사는 나라의 어려운 시기에 의승군(義僧軍)들이 머물렀던 호국사찰(護國寺刹)이라고 할 수 있다. 완주송광사는 조선시대 청나라 볼모로 잡혀간 소현세자(昭顯世子)와 봉림대군(鳳林大君)이 무사히 본국으로 돌아올 것을 기원하고 국난으로 돌아가신 모든 영가들이 왕생극락(往生極樂)을 발원했던 곳이기도 하며, 병자호란(丙子胡亂) 때에 전주사고(全州史庫)를 지키기 위하여 승군(僧軍) 700명이 머무르는 등 민족의 호국도량이기도 하였다.
종남산 송광사 중심전각 대웅전
완주 송광사는 종남산 아래 널찍하게 펼쳐진 수 만평 대지 위에 터를 잡고 있다. 흔히 말하는 평지사찰(平地寺刹)이다. 이 절은 평지사찰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는데,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일주문(一柱門) 앞에 서기만 해도 금강문, 천왕문, 대웅전의 중심축이 일직선상에 있어 이들 각건물의 문들이 틀을 만들며 점차 작아지다가 열어놓은 대웅전(大雄殿)의 어간문 안의 어둠속으로 수렴된다. 이 곳 사찰은 엄정성을 읽을 수 있는 정연한 구조이다. 산지사찰(山地寺刹)과는 판이하게 다른 진입방식이며, 가람배치이다. 당연히 평지라는 지형적 특성이 십분 고려된 것이겠지만, 옛 백제 지역 사찰들이 보여주는 평지성의 면면한 전통을 여기서도 새삼 확인할 수 있다.
종남산(終南山 ) 송광사(松廣寺) 일주문(一柱門)
절로 들어서면 제일먼저 만나는 건물은 일주문이다. 이 일주문은 다포계 맞배지붕양식이다. 조선시대 다포계 건물의 경우 대체로 시대가 내려올수록 공포의 생김새가 나약해지는 경향이 있는데, 이곳 일주문은 지나치게 섬약(纖弱)한 인상을 주고 있다.
금강문(金剛門)
금강문(金剛門)을 지나 천왕문(天王門) 안으로 들어서면 여느 사찰처럼 사천왕이 지키고 있다. 여기에 있는 사천왕은 흙으로 빚어 만든 소조(塑造)이다. 흙을 이겨서 4m가 넘는 신상(神像)을 조성되면서 주목되는 이유는 제작연대가 분명하다는 점 때문이다. 오른손으로 당(幢)을 잡고 왼손 위에는 보탑(寶塔)을 올려놓은 서방 광목천왕(廣目天王)이 쓰고 있는 보관(寶冠)의 뒷면 끝자락에 ‘順治己丑六年七月日畢’이라는 먹글씨가 남아 있어 1649년에 이들 사천왕상이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로써 조선시대 소조 사천왕상의 기준작을 얻게 된 셈이고, 이점이 송광사 사천왕상이 갖는 의의라 하겠다. 1997년 보물 제1255호로 지정되었다.
금강문(金剛門)
천왕문(天王門)
사천왕상(四天王像) 1
사천왕상(四天王像) 2
천왕문을 넘어서면 중정(中庭)이고 그 너머 정면으로 대웅전(大雄殿)이 우람하게 나타난다. 대웅전은 송광사의 주불전(主佛殿)으로 정면 5칸 측면 3칸의 겹처마 팔작지붕 다포계 건물이다. 법당의 주인공은 아무래도 불상이 되겠다. 중앙에 석가(釋迦), 동쪽에 약사(藥師), 서쪽에 아미타여래(阿彌陀如來)가 삼존불(三尊佛)로 모셔져 있는데, 소조(塑造)로 제작된 이 불상들은 각각의 높이가. 5.5, 5.2, 5,2m나 되는 거대한 크기를 자랑한다. 소조상(塑造像)으로는 국내에서 가장 큰 것으로 알려진 이 불상들은 그 크기가 어찌나 대단한지 법당(法堂) 안이 그들먹하다. 때문에 불상과 천장 사이의 공간은 여유롭지 못하고, 수미단(須彌壇:절의 佛殿 안에 부처님을 모셔 두는 壇)과 앞면 기둥열의 간격이 좁아 예배 공간이 옹색하며, 수미단조차 3단이 아닌 2단으로 낮추어 만드는 편법을 구사하고 있다. 공간 활용이 이렇게 비합리적임을 무릅써가며 부조화의 불상을 크게 만들어야 하는 이유가 있는지 의심스럽다.
전패(殿牌)가 모셔진 대웅전
근년 도난사건이 빌미가 되어 삼존불의 복장유물(腹藏遺物)이 수습(收拾)되었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세 불상에 똑같은 내용으로 납입된 [불상조성기(佛像造成記)]이다. 그 가운데 “이 불상을 만드는 공덕으로 주상전하는 목숨이 만세토록 이어지고 왕비전하도 목숨을 그와 같이 누리시며, 세자저하의 목숨은 천년토록 다함없고 속히 본국으로 돌아오시며, 봉림대군께서는 복과 수명이 늘어나고 환국하시기를······원하옵니다.[以 此造像功德奉爲主上殿下壽萬世 王妃殿下壽齊年 世子邸下壽千秋 速還本國 鳳林大君 增福壽 亦爲還國 ······之願]”하는 내용이 담겨있다. 이로써 우리는 임금과 왕비의 만수무강을 빌고 병자호란으로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간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의 조속한 환국을 기원함도 이들 불상 재작의 배경의 하나였음을 알 수 있다. 우리 역사의 서글픈 장면 하나가 일견 세상과 무관한 듯한 불상에 조차 화인(火印)처럼 남은 것이다. 또 조성기 첫 머리에 불상을 만든 때를 밝히면서 ‘崇禎十四年’과 ‘崇德六年‘(1641)이라고 명(明)과 청(淸)의 연호를 나란히 기록하고 있음도 눈에 띈다. 이 사실을 통해 우리는 동아시아 질서가 재편되는 혼란기에 명, 청 양국의 눈치를 살펴야 했던 약소국 조선의 딱한 처지도 손금 보듯 읽어낼 수 있다. 대웅전 삼존불은 우리 역사의 한 페이지를 가감 없이 고스란히 간직한 불상이라 하겠다.
대웅전의 삼존불(三尊佛): 중앙에 석가(釋迦), 동쪽에 약사(藥師), 서쪽에 아미타여래(阿彌陀如來)
중앙에 있는 석가불(釋迦佛)
중앙에 있는 석가불(釋迦佛)과 동쪽에 있는 약사불(藥師佛)
서쪽에 있는 아미타여래불(阿彌陀如來佛)
대웅전 수미단 위에는 전패(殿牌) 또는 원패(願牌)라고 불리는 조각이 아름다운 목패(木牌) 세 개가 서있다. 왕, 왕비, 왕세자의 만수무강을 비는 축원패(祝願牌)이다. 셋 모두 크기가 2m가 넘어 전패치고는 가장 큰 편에 속한다. 화염을 날리며 구름 속에서 꿈틀대는 용무늬가 복잡하게 전체를 뒤덮고 있는 양면은 뛰어난 조각 솜씨를 보인다. 뒷면에는 인조 때 만들었다는 것과 정조 때인 1792년 수리하였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먹글씨가 남아있다고 한다. 크기로나 새긴 솜씨로나 또 만들어진 연대가 드러난 점으로나 눈여겨봄직한 유물이다. 그동안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70호로 지정되어 있던 대웅전은 1996년 보물 제1243호로 등급이 승격되었고 삼존불상과 그 복장유물은 1997년 보물 제1274호로 새롭게 지정되었다.
주상전하수만세(主上殿下壽萬世) 전패(殿牌)
왕비전하수제년(王妃殿下壽齊年) 전패(殿牌)
세자저하수천추(世子邸下壽千秋) 전패(殿牌)
절 건물 가운데 범종(梵鐘), 목어(木魚), 운판(雲版), 법고(法鼓)의 네 가지 법구(法具), 사물(四物)이 비치된 완주 송광사 범종루(梵鐘樓)가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다. 대웅전의 남서쪽, 현재 요사채로 쓰이는 관음전의 비스듬한 앞쪽에 위치한 법종루는 우리 전통 건축사에서는 아주 드문 십자형(十) 평면을 채택하여, 누마루를 경계로 아래위 동일선상에 12개씩의 누하주(樓下柱)와 누상주(樓上柱)를 세우고 그 위에 다포계 팔작지붕을 교차시켜 짜 올린 대단히 독특한 외관을 뽐내는 건물이다. 사물이 걸려있는 누각은 면마다 돌아가며 간결한 계자난간(鷄子欄干)을 돌렸다. 누마루의 중심을 이루는 4개의 기둥에는 기둥을 휘감고 솟아오르는 용을 그려 넣어 돋보이게 장식을 하였다. 기둥사이의 간격이 2.5m, 따라서 한 면의 길이가 7.5m에 지나지 않는 작은 규모의 집에 귀공포가 여덟 군데나 놓이고 기둥사이마다 주간포(柱間包)를 짜 올렸으니 처마 밑은 공포(栱包)로 빼곡하여 섬세(纖細)하고 현란(絢爛)하며 화사(華奢)하다. 종전에는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3호로 지정되어 있었으나, 1996년 ‘완주 송광사 종루’라는 이름으로 보물 제1244호로 승격되었다고 한다. 십자형 평면으로 말미암아 십자각(十字閣)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고 있다.
완주 송광사 범종루(梵鐘樓)
송광사는 이미 대웅전 삼존불 조성 경위에서 왕실과 어떤 관련이 있음을 짐작케 한다. 나라의 어려운 시기에 의승군(義僧軍)들이 머물렀던 호국사찰(護國寺刹)역할을 하였고, 조선시대 청나라 볼모로 잡혀간 소현세자(昭顯世子)와 봉림대군(鳳林大君)이 무사히 본국으로 돌아올 것을 기원하는 사찰이었고, 병자호란(丙子胡亂) 때에 전주사고(全州史庫)를 지키기 위하여 승군(僧軍) 700명이 머무르는 등 민족의 호국도량이었다.
관음전(觀音殿)
지장전(地藏殿)
대웅전의 삼존 소조불상은 우리나라에 있는 소조불상 중 제일 규모가 큰 것으로 알려져 있고, 완주 송광사 종루는 우리나라에서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외관(外觀)은 자랑하고 있다. 완주 송광사는 우리나라에서 흔치 않는 평지형 가람배치로서 일주문에서 금강문, 천왕문, 대웅전의 중심축이 일직선상에 있어 엄정성과 질서정연한 구조를 보이나 대웅전 앞뒤로 흩어져있는 지장전, 관음전, 첨성각, 오백나한전, 약사전, 삼성각 등은 너른 대지위에 띄엄띄엄 흩어져 있는 분산 고립성으로 평지형 가람의 특성을 살리지 못한 점이 아쉬움으로 남는 사찰이다.
사찰 서편에 있는 연밭 1
사찰 서편에 있는 연밭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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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뒤 늦게 답사기를 읽어보니 새롭게 그때 일들이 생각 나네요...우리 답사때 주로 고택을 중심으로 하고 사찰은 첨이라 조금은 신선한 면도 없지 않다.
윤중선생 덕택에 송광사 답사기 잘 읽어봤네...지리적으로 찾아 가보기 힘든 사찰인데....더더구나 그 유명한 호국 사찰을....
1. 불보 사찰(佛寶寺刹) 부처님의 진신(眞身) 사리와 가사를 봉안하였다 하여 통도사를 말한다.
2. 법보 사찰(法寶寺刹) 부처님의 법(가르침)인 팔만대장경을 봉안한 곳이 해인사라 하여 법보 사찰이라고 한다.
3. 승보 사찰(僧寶寺刹) 우리 나라 절 가운데 훌륭한 스님을 가장 많이 배출한 곳이 송광사라 하여 일컫는 말이다. 송광사에서는 보조국사 이래 16국사가 배출 되었다.
잘 보았습니다. 유교 문화가 아닌 불교문화재에 대해서도 깊이있게 연구하셨네 상세한 설명과 함께 잘 보았습니다.
좋은 자료 잘 정리하여 소개 해 주어 고맙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