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6일. [제1주간 금요일]
이사야 29,17-24
마태오 9,27-31
<하느님의 자비를 믿으면 꿈이 먼저 생긴다>
찰스 두히그의 책 ‘습관의 힘’은 리자 앨런이라는 여성의 사례로부터 시작합니다.
그녀는 16세부터 술과 담배를 시작했고 항상 비만에 시달렸습니다.
어떤 직장에서도 1년 이상 버틴 적이 없고 항상 빚에 쪼들려야 했습니다.
수치와 무기력감에 걸핏하면 심하게 화를 냈고 침대에 누워 눈물만 흘렸습니다.
급기야 남편도 더 이상 그녀와 살 수 없다며 이혼하자고 하여 절망에 빠졌습니다.
그런데 34세가 된 리자 앨런은 여러 의사들에게 인터뷰를 받고 있습니다.
그 지긋지긋한 술과 담배를 끊은 상태이며 빚도 청산했고 집도 장만했으며 건강한 몸매로 마라톤까지 하고 있었습니다.
어떤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요?
남편의 이혼통보를 받고 리자는 마지막 통장 잔고를 털어 이집트 카이로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피라미드를 직접 보고 죽는 게 소원이었기 때문입니다.
아침에 호텔에서 술이 덜 깬 상태로 담배를 집어 들어 불을 붙였는데 이상하게 고무 타는 냄새가 났습니다.
보니 볼펜에 불을 붙여 빨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이 미쳐간다는 생각에 침대에서 벌떡 일어날 때 물병이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주체할 수 없는 짜증이 밀려와 울음이 터졌습니다.
샤워를 하고 호텔을 나온 리자는 택시를 타고 피라미드와 스핑크스로 이어지는 비포장도로를 달렸습니다.
그리고 끝없이 펼쳐진 광활한 사막을 바라보았습니다.
광활한 사막을 보며 묘한 욕망이 솟구쳤습니다.
사막이라도 한 번 횡단해보고 싶은 마음이 생긴 것입니다.
그녀는 1년 뒤 사막을 걸어서 횡단할 결심을 합니다.
물론 은행에는 한 푼의 잔고도 없는 상태인데다 뚱뚱한 몸으로 사막을 횡단하는 것은
불가능해보였습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정신을 집중할 삶의 목표가 필요했습니다.
그 후 6개월 동안 리자는 담배를 끊고 조깅에 매달렸습니다.
그 덕분에 식습관이 바뀌었고 일을 대하는 자세와 수면을 취하는 방법도 달라졌습니다.
덩달아 통장에는 돈이 쌓여갔습니다.
일과도 달라졌고 미래 계획도 바뀌었습니다.
다시 학교에 돌아가 공부를 시작했고 집을 마련했으며 다른 남자를 만나 약혼까지 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뇌를 연구하는 과학자들의 연구 대상으로 선발되게 된 것입니다.
리자 앨런이 걸어서 사막을 횡단하였을까요?
아닙니다. 횡단하기는 하였습니다.
그때는 몰랐지만 사막을 횡단하는 상품이 있었던 것입니다.
11개월 후 다시 돌아온 리자는 6명의 여행객과 함께 에어컨은 물론이고 마실 것과 먹을 것을 잔뜩 싣고, 천막과 지도, GPS와 송수신 겸용 무전기까지 설치된 대형 자동차로 즐거운 마음으로 사막을 횡단하였습니다.
리자 엘런을 통해 우리는 삶의 목표가 오늘 하루를 살아가는 자세를 결정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어떤 사람은 삶의 목표가 있고
어떤 사람은 그저 하루하루를 견디듯 살아가는 것일까요?
사막에 떨어져있는 스마트폰이 사람이라고 생각해보겠습니다.
두 스마트폰이 있는데 하나는 그냥 생겨났다고 믿고 하나는 누군가에 의해 창조되었다고 믿습니다.
그냥 생겨났다고 믿는 스마트폰은 목표를 가질 수 없습니다.
‘그냥’ 생겨났으니 생겨난 이유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창조되었다고 믿으면 그 창조자가 목적을 가지고 만들었음을 믿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어떤 목적으로 창조했는지를 끊임없이 찾습니다.
부모가 자녀를 낳을 때 대충 살다 죽으라는 마음으로 낳을까요?
잘 살고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낳습니다.
무언가를 창조할 때는 그 창조된 것이 가치 있어지기를 바랍니다.
화가가 ‘세계에서 가장 가치 없는 그림을 그려야겠다.’라는 마음으로 그림을 그리지는 않습니다.
모든 창조자는 자신이 창조하는 것이 더 가치 있게 쓰이기를 원하며 피땀을 쏟습니다.
하느님도 인간을 만드실 때 같은 마음이셨을 것입니다.
창조하는 것 자체가 자신의 땀과 피를 쏟는 사랑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것은 이런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에덴동산의 모든 동물들에게 이름을 지어주라는 귀한 소명을 저버리고 열매나 따먹는데 시간을 허비했습니다.
오늘 하루의 시간을 허비하는 사람은 그래서 하느님의 자비를 믿지 않는 사람인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믿으면 하느님께서 나에 대한 계획을 찾고 그 목적대로 오늘 하루를 충실히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사랑으로 나를 창조하셨다는 것을 믿으면 반드시 그 믿음에 걸맞은 소망이나 도달하고 싶은 꿈을 갖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두 소경은 예수님을 따라오며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외칩니다.
하느님을 자비로우신 분으로 여기니 원하는 것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눈을 뜨는 소망이 생겼습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고 말씀하시며 그들의 눈을 치유해주십니다.
모든 삶의 기적은 나를 창조하신 분이 자비로운 분이셔서 나는 반드시 좋은 이유가 있어서 창조된 것이라는 믿음에서 시작됩니다.
그래서 꿈이 없는 사람은 믿음도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밀이 곡해되어 당신이 병을 치유해주는 것에 이용당할까봐
“아무도 이 일을 알지 못하게 조심하여라.”고 당부하십니다.
실제로 유다인들은 예수님께서 자신들에게 도움이 되어주지 않자 그분이 마귀를 쫓아낼 때 사탄의 힘으로 그러는 것이라고 몰아붙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청을 들어주시지 않더라도 그것은 하느님의 자비하신 뜻이기에 그분을 찬미합니다.
핵심은 하느님의 자비를 믿느냐, 믿지 않느냐에 있습니다.
세상에 좋은 영향을 미치는 인물들은 모두 각자가 믿는 하느님께서 자비하신 분임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2월6일 [대림 제1주간 금요일]
이사야 29,17-24
마태오 9,27-31
<믿음은 죽음을 넘어서는 희망의 행위입니다!>
순간적인 선택의 실수 뒤에 오랜 세월 동안 그 혹독한 댓가를 치르시는 분들이 한탄조로 내뱉는 한 마디 말이 있습니다.
“그 때 내가 잠시 눈이 멀었었지!”
“그때 살짝 내 눈에 콩깍지가 끼었었지!”
살아가다보면 잠시 우리 눈이 멀때가 있습니다.
눈은 버젓이 뜨고 있지만 눈이 머는 순간 말입니다.
어떤 특정한 대상에 마음이 온전히 빼앗길 때 그렇습니다.
잠시 후의 결과가 불을 보듯이 뻔하기에, 옆에서 아무리 말려도 소용이 없습니다.
불나방이 죽음인지도 모르고 불로 뛰어드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필요한 노력이 한 가지 있습니다.
육체적 눈은 떠있다할지라도 마음의 눈, 영혼의 눈, 상식의 눈이 감겨져 있지는 않은지, 늘 성찰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요즘 비정상이 정상화되는 과정에서 별의 별 웃기는 사람들이 자주 매스컴에 등장합니다.
그들의 생각이며 말, 행동이나 모습은 분명 정상이 아닌 듯합니다.
어찌 보면 그들 역시 눈이 먼 사람들입니다.
그릇된 이념이나 자기 논리에 함몰되어 앞이 보이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들은 국민들의 정신적·육체적 건강을 크게 해치는 암적 존재입니다.
그들이 입을 열때 마다 국민들은 속이 터지고 스트레스가 하늘을 찌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본인들은 전혀 모른다는 것입니다.
자기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상처입고 괴로워하고 있는지를 말입니다.
존재 자체로 괴로움의 근원이신 그분들이 그 어떤 처벌이나 제재도 받지 않고 계속 목소리를 높이고 계시니, 참으로 좋은 시절이 오긴 왔습니다.
십년 전, 이십년 전에 그랬더라면 어떠했을까요?
이런 면에서 오늘 예수님을 만난 눈먼 사람들이 영적이나 정신적으로 우리보다 훨씬 나은 것 같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처한 가련한 처지, 눈먼 상태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많은 경우 우리는 자신의 눈이 멀었다는 것 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우리가 자리나 명예를 지나치게 탐한다면 그것 역시 눈이 먼 것입니다.
재물이나 어떤 대상을 하느님 위에 올려놓는다면, 그것 역시 눈이 먼 것입니다.
어떤 이념이나 사상에 너무 깊이 함몰되고, 나와 다른 이들을 무시하고 미워한다면, 그것 역시 눈이 먼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 눈먼 사람들의 삶은 참으로 비참했습니다.
앞이 안보이니 늘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했습니다.
번듯한 직장이나 정상적인 가정생활을 꿈도 꿀 수 없었습니다.
보통 사람들의 대화에 끼지도 못했습니다.
삶 자체가 눈물이요 십자가였습니다.
그들을 대하는 사회적 통념 역시 가혹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눈먼 사람을 나병환자와 동급으로 두었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심판받고 버림받은 사람으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들은 성전에 제물을 바칠 수도 없었습니다.
동료 인간들로부터 언제나 배척당하고 소외받던 두 눈먼 사람이었기에, 인간에 대한 기대나 희망은 더 이상 지닐 수 없었습니다.
대신 그들의 희망은 오로지 주님께만 두었습니다.
주님만이 자신들의 마지막 보루요 의지처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온 몸과 마음을 다 바쳐 간절히 부르짖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마태오 복음 9장 27절)
예수님께서는 두 눈먼 사람의 신앙을 확인해보기 위해 한 가지 질문을 던지십니다.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너희는 믿느냐?”(마태오 복음 9장 28절)
신앙이 치유와 구원의 필수조건임을 강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신앙이란 예수님으로부터 유출되는 치유와 구원의 힘을 신뢰하는 행위이기 때무입니다.
예수님을 향한 두 눈먼 사람의 강렬한 믿음이 크게 돋보이고 있습니다.
믿음은 죽음을 넘어서는 희망의 행위입니다.
살아있었지만 죽은 목숨이나 다를 바 없었던 두 눈먼 사람은 예수님을 향해 자신들의 굳은 믿음을 드러내보였기에, 죽음을 넘어섰습니다.
새 삶이 주어졌습니다.
두 눈먼 사람의 치유를 통해 예수님으로 인해 시작된 주님 나라의 위력, 즉 하느님의 힘이 펼쳐지기 시작합니다.
우리 매일의 삶 속에서도 지속적인 주님의 치유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매일 복음을 굳게 믿고 따를 때 주님께서 우리의 영적인 눈을 뜨게 해주실 것ㅎ입니다.
우리가 매일 주님의 전지전능하심과 우리를 향한 큰 사랑을 굳게 믿고 그 사랑을 이웃들에게 실천할 때, 눈먼 사람들에게 이루어졌던 치유활동이 계속될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2월6일 [대림 제1주간 금요일]
복음: 마태 9,27-31: 두 소경의 눈을 보게 하시다
오늘 복음에서 소경 두 사람이 예수님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하고 청하였다. 예수께서는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너희는 믿느냐?” 하셨을 때, 그들은 “예, 주님!”하고 그들이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그들의 눈을 만지시며 치유해 주셨다(27-30절). 이 소경들의 치유의 기적은 하나의 “표징”으로서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 앞에 “빛”을 필요로 함을 가르쳐주고 있다.
두 눈먼 사람들은 믿음이 없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믿음이 없기 때문에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아직 참된 빛, 곧 율법과 예언서가 예고한 하느님의 외아들을 볼 수 없었다. 이 두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자마자 시력을 되찾았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오심을 믿으면 오류라는 눈멀음이 사라지고 곧 참된 빛에 관한 지식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눈먼 이들이 외치는데 예수님께서는 얼른 청을 들어주시지 않고 물음을 던지신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데리고 가까운 집으로 가신다. 그리고 본이가 아무도 없는 곳에서 고쳐주시며 아무에게도 일 일을 이야기하지 말라고 하신다. 군중들에게서 창송을 받는 것을 경계하시고 우리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하신다. 두 사람은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듣기만 하고도 믿음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자신들의 눈으로 이 기적을 확인할 수 있었다.
눈멀었던 사람들은 예수님의 지시를 따르지 않았다. 그들은 곧바로 복음을 선포하는 사람들이 되었다. 그들은 그 때 일어난 일을 알리지 말라는 지시를 들었지만 그 일을 알렸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곳에서 어떤 사람에게 “집으로 돌아가, 하느님께서 너에게 해 주신 일을 다 이야기해 주어라.”(루카 8,39)고 하셨다. 그것은 우리 자신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 자랑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느님께만 영광을 바쳐야 한다는 것이다.
즉 소경들의 되찾은 시력은 우리가 항상 청해야할 신앙의 빛을 의미한다. 우리 자신을 보면 그것을 만들어내지도 못하면서 너무나 쉽게 그 빛을 잃어버리고 잃어버린 줄도 모르는 경우가 많다. 이 빛은 우리가 청하고 받아들일 자세만 되어있다면 하늘로부터 끊임없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놀라운 선물이다.
우리는 지금 예수님의 우리 인간의 역사 내에 오심의 신비를 거행하고 있다. 예수님의 이 ‘오심’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빛이 필요한 것이며, 이 신비를 이해할 수 있는 내적인 “빛=밝음”은 신앙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이 소경들의 치유사화는 상징적으로 말해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시고 우리 가운데 임하시는 그 신비를 이해하고 또한 우리의 삶 속에 그것을 체험할 수 있기 위해서는 이 소경들이 예수님께 가지고 있었던 큰 믿음의 “빛”이 필요한 것이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