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컴퓨터를 이용하여 PC방에서 게임을 하지만 과거엔 오락기계가 있는 오락실이나 문구점에 설치된 곳에서 동전을 넣어 했었다.
이 오락기계도 도농간의 격차가 커서 살아온 곳에 따라 느낌이 다르다.
나는 초등학교 때 극장((재재개봉관:재개봉관 보다 필름상태가 안 좋았지만 이라 여러 편 볼 수 있었고 가격이 상대적으로 저렴하고 유사한 명칭의 영화가 상영되었지만 대형스크린)이 있는 곳에 살았는데 오락실도 있었고,체육사, 경양식집 제과점 그리고 화교가 하는 중국집이 있었고 시장도 규모가 제법 컸다.
지금은 광주시가 된 광주면: 면이지만 군청소재지가 되다 보니 일반적인 면과 다른 환경이 조성되었고 서울로 들고 나는 이들이 많았다. 용인도 그렇지만 79년을 기준으로 군청이 있는 곳은 읍이 되고 시가 되는데 걸리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더 웃긴 건 초등학교를 졸업하기전 많은 학생들이 서울이나 성남, 수원으로 혼자 또는 형제 자매가 전학을 갔는데 형편이 좋은 집들이나 친인척이 있는 집들의 경우 크게 장사를 하는 경우 이곳에서 초등학교는 입학만 하고 졸업은 도시에서 하는 경우가 많았고 지금 동문회도 순수한 졸업생도 오지만 중간에 전학간 친구들이 부담없이 방문을 한다.
서울에 가지 않아도 왠만한 건 다 해결되지만 교육과 학교문제 같은 건 그렇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당시에도 더 다양한 것을 얻고 싶으면 바로 앞 버스터미널에서 완행(노란 바탕에 빨간색 청색 줄)이나 직행(여린 청색과 진한 청색)을 타고 동네 형들과 서울의 마장동이나 당시 막 커진 성남으로 마실을 갔었다.
그러나 갑자기 시골로 갑자기 내려오게 되자 극장은 읍내로 버스를 타고 가야했고 철지난 교과서나 헌책은 더 멀어진 서울로 일을 보러가는 어른들께 부탁을 했었다.
특히 문구점은 아쉬운 것이 많아 인근 읍내로 20여리 걸어서 방문을 하거나 자전거를 타고 가기도 했는데 중간에 동네의 선배들에게 걸려 혼나거나 곤혹을 치루는 경우도 있어 개울을 통해 가거나 먼길을 우회하기도 했고 어른들이 장에 갈 때 따라가서 큰 문구점을 들렸었다.(시골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분들은 이런 경험이 있는 경우가 있었을 것. 물론 나이가 들고 서로 알아가면서 친해질 수 있지만 당시엔 옆동네나 모르는 동네에 갈 땐 조심해야 했다.)
그러던 어느날인가 동네에서 큰 잡화점을 하던 분이 읍내의 문구점을 능가하는 다양한 물건들을 갖춰놓고 장사를 했다.
오락기계 부터 , 다양한 모형킷트,만화책, 저가의 동화책, 우표첩, 초중학교 참고서 부터 운동기구까지 읍내에 가지 않아도 되고 가는 길에 선배들에게 혼나거나 모르는 또래에게 돈을 빼앗기는 경우도 없었다.
가게가 크다 보니 팀스피리트 훈련을 받던 미군병력들이 소문을 듣고 찾아와 쇼핑을 하고 가게 아저씨는 짧은 영어와 손짓으로 소통을 했고 다양한 것들을 팔았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하면 최소한의 수요가 있다면 과감하게 물건을 공급하고 부탁하면 어떻게 해서든 구해서 공급하던 분이라 지역에는 단골이 많았고 물건의 양도 양이지만 다양한 품목들이 있어 멀리가지 않아도 좋았고 자주 찾아가 진열된 것을 구경하는 것도 좋았다.
도시나 읍내엔 수북히 쌓여 쉽게 구할 수 있던 것들이 작은 면 소재지엔 없었고 있더라도 팔리지 않으니 주인입장에서는 공급할 수 없었을 것이다.
지금은 사람도 없고 특히 어린 학생들이 줄다보니 가져다 팔 이유도 없으며 인터넷의 발달로 인해 도시인들도 택배로 주문을 하는 세상이 되었다.
당시 남아있던 것들을 보려면 인사동이나 헤이리 같은 공간을 찾아야 하고 지금은 크게 필요하지 않은 것들이 되었다고 본다.
어른들이나 나이 먹은 학생들이 보면 별로 보잘 것 없던 것을 사러 먼거리 읍내로 향하던 길을 혼자 가던 길이 생각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