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다고 하던 비는 오지 않고 하늘만 잔뜩 흐려있다. 혹시 몰라 우산 하나를 챙겨들고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오늘은 절친한 친구 C를 만나려 서울역으로 가는 길이다. 그와 나는 고등학교, 대학교를 함께 다녔고 집안으로 치면 내가 그의 조카뻘이다. 오늘의 만남은 그의 제안으로 이루어졌는데, 내 수필 당선작이 실린 문예지를 그에게 보내주자 그가 한 턱 내겠다고 즉석에서 약속을 한 것이다. 1년 전에 동화가 당선 되었을 때에도 그는 진심으로 기뻐하며 내게 식사대접을 한 적이 있다.
그와 처음으로 만난 때가 고교 1학년인 1971년이니 그 사이에 54년이라는 긴 세월이 흘렀다. 전북 이리 출신인 그는 고향에 어머니를 홀로 두고 서울에 유학을 와서 공부를 했는데 무척이나 고달픈 하숙생활을 하고 있었다. 하루는 점심시간에 그가 가방에서 도시락 통을 꺼내는데 김칫국물이 온통 새나와 가방까지 적셔있었다. 나는 우연히 그 광경을 지켜보았는데 보는 내 마음도 무척 좋지 않았다. 한참 나이에 도시락 반찬이 김치뿐이라니........
그때 나는, 비록 우리도 그리 넉넉하지 못하지만 그를 문화촌의 우리 집에서 받아주면 어떨까 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집에 돌아와 큰누나에게 사정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돌아온 답변은 곤란하다는 것이었다. 큰누나는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지만 표정이 상당히 굳어있었다. 하긴 우리 형제만 해도 다섯인데 거기에다 남의 식구까지 덤으로 데리고 있기가 심히 불편했을 것이다. 나는 그와 한 방에서 식사하고, 한 방에서 공부하는 광경을 상상했는데 결국은 모두 무산되고 말았다. 그리고 그에게 미안했다. 나중에 들어보니 그의 어머니도 안타까워 하셨다고 한다. 내가 그를 떠올리면 언제나 제일 먼저 떠오르는 생각, 그것은 바로 무산된 동거의 꿈, 바로 그것이다. 그 역시 서운했겠지만 어른스럽게 침묵으로 이겨내고 이루지 못할 꿈을 이내 깨끗이 지워버렸다.
1년 전에 만났을 때에도 나는 내가 먼저 그 이야기를 꺼냈다. 그 까닭은 그에 대한 미안함을 내가 아직 잊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내 말에 대해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영원히 잊고 싶은 추억의 한 토막인지도 모른다.
지혜로운 왕 솔로몬은 우정에 대해 이렇게 설파한 바 있다.
“궁핍과 곤란에 처한 때야말로
친구를 시험하기 가장 좋은 기회이다
어떠한 때에도 곁에 있어 주는 것이 참된 친구이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말했다.
“친구가 되려는 마음을 갖는 것은 간단하지만
우정을 이루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린다.“
고통을 함께하는 친구가 진정한 친구이며, 참된 우정을 이루는 데는 많은 시간이 소요 된다는 뜻이다. 그런데 나는 친구의 어려움을 목격하고도 단지 큰누나에게만 의사타진을 했을 뿐 최종 결정권이 있는 부모님의 의사는 물어볼 엄두도 내지 못한 우를 범했다. 만약 그때 내가 부모님의 승낙을 받아냈더라면 상황이 어떻게 변했을까. 아마도 그와 내가 함께 공부함으로써 얻는 시너지 효과가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에 대한 부식도 하숙집 보다는 훨씬 낫지 않았을까. 이제 와서 돌이켜 보니 아쉬움만 크게 남는다. 나는 그에게 이 이야기는 차마 하지 못했다. 이제 와서 생각한다고 달라질 것이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때의 지나간 이야기는 이제 그만 마치고 앞으로의 우정을 어떻게 이루느냐에 대해서만 생각하기로 했다.
그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열심히 노력하여 미국에 가서 학위를 땄고, 귀국해서는 모 국립대의 교수가 되었다. 그리고 그는 답습하기 보다는 새로운 실험을 통해 제자들을 우수하게 키워나갔다고 한다. 그는 말 보다는 실행을 통해 하나하나 업적을 쌓아간 것이다. 그는 자신의 교육방식에 대해 상당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고 학계에서도 인정을 받는 것 같았다.
나는 내 친구가 대단히 자랑스럽고 존경스럽기까지 하다. 그는 침묵 속에서 창조를 하였고, 겉으로 드러나는 생색내기는 아예 발도 붙이지 못하게 하였다.
나는 그를 만나면 그의 말을 듣기 보다는 내 말을 주로 한다. 마치 아저씨에게 조카가 미주알고주알 털어놓는 것 같이. 그러면 그는 미소 띤 얼굴로 내가 하는 말들을 하나하나 가슴에 담아두는 것 같다. 더욱 성숙해진 그와의 만남이 거듭해질수록 학창시절에는 느끼지 못했던 그의 원숙미를 많이 느끼고 있다.
우리가 언제까지나 서로 교류를 할 수 있을지는 아무도 알 수 없지만 가능하다면 우리의 명이 다할 때까지 오래 지속되기를 바란다. 그럼으로써 두 사람이 보다 발전적으로 성장하기를 기대해본다. (끝)
첫댓글 두분의 우정이 관포지교(管鮑之交)에 못지 않습니다. 시간이 다함까지 이어지시길 바랍니다. 행복한 저녁되십시오.👍
이 우정이 오래오래 계속되기를!
두 분의 우정이 오래 오래 지속되기를 바랍니다.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깊고 아름다운 우정에 박수를 보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