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욥이 끝까지 시험받기를 원하노니 (욥기 34장 1절 – 37절) 34:1 엘리후가 말하여 이르되 2 지혜 있는 자들아 내 말을 들으며 지식 있는 자들아 내게 귀를 기울이라… 4 우리가 정의를 가려내고 무엇이 선한가 우리끼리 알아보자 5 욥이 말하기를 내가 의로우나 하나님이 내 의를 부인하셨고 6 내가 정당함에도 거짓말쟁이라 하였고 나는 허물이 없으나 화살로 상처를 입었노라 하니 7 어떤 사람이 욥과 같으랴 욥이 비방하기를 물마시듯 하며 8 악한 일을 하는 자들과 한패가 되어 악인과 함께 다니면서 9 이르기를 사람이 하나님을 기뻐하나 무익하다 하는구나 10 그러므로 너희 총명한 자들아 내 말을 들으라 하나님은 악을 행하지 아니하시며 전능자는 결코 불의를 행하지 아니하시고 11 사람의 행위를 따라 갚으사 각각 그의 행위대로 받게 하시나니 12 진실로 하나님은 악을 행하지 아니하시며 전능자는 공의를 굽히지 아니하시느니라… 23 하나님은 사람을 심판하시기에 오래 생각하실 것이 없으시니… 25 그는 그들의 행위를 아시고 그들을 밤사이에 뒤집어엎어 흩으시는도다… 29 주께서 침묵하신다고 누가 그를 정죄하며 그가 얼굴을 가리신다면 누가 그를 뵈올 수 있으랴… 31 그대가 하나님께 아뢰기를 내가 죄를 지었사오니 다시는 범죄하지 아니하겠나이다 32 내가 깨닫지 못하는 것을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악을 행하였으나 다시는 아니하겠나이다 하였는가 33 하나님께서 그대가 거절한다고 하여 그대의 뜻대로 속전을 치르시겠느냐… 34 슬기로운 자와 내 말을 듣는 지혜 있는 사람은 반드시 내게 말하기를 35 욥이 무식하게 말하니 그의 말이 지혜롭지 못하도다 하리라 36 나는 욥이 끝까지 시험 받기를 원하노니 이는 그 대답이 악인과 같음이라 37 그가 그의 죄에 반역을 더하며 우리와 어울려 손뼉을 치며 하나님을 거역하는 말을 많이 하는구나 (개역개정) 오늘의 성경 본문은, 욥이 당한 고난의 원인을 두고 친구들 간에 벌어진 3차례의 변론(4-31장)이 끝나면서, 그 자리에 참관하여 모든 내용을 듣고 있던 엘리후가 참여한 변론(32-37장)의 두 번째 내용입니다. 자신이 변론에 참여해야하는 당위성을 밝힌(32장) 엘리후는, 첫 번째 변론(33장)에서 어떤 자세로 자신이 변론에 임할 것인지와 욥이 받는 고난의 의미를 세 친구들과 달리 재해석합니다. 욥의 세 친구들은 욥의 고난을 그가 저지른 죄악으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해석하고 회개를 요청했다면, 엘리후는 욥으로 죄악을 저지르지 않도록 고난을 통해 무엇이 옳은지를 깨닫게 하여 하나님의 구원을 갈망하는 신앙적 연단을 위한 것으로 해석하며 회개를 요청합니다. 엘리후가 이러한 첫 변론을 마치면서 욥에게 “만일 할 말이 있거든 대답하라”(33:32)고 했지만 욥이 침묵하자, 엘리후는 이어서 오늘 본문의 두 번째 변론을 시작합니다. 그런데 엘리후는 지금까지의 분위기와 달리 갑자기 욥을 세 친구들 앞에 기소하면서, 하나님의 공의 변증을 통해 욥이 했던 말을 정죄하는 판결을 하며, “나는 욥이 끝까지 시험 받기를 원하노니, 이는 그 대답이 악인과 같음이라”(34:36)는 저주를 퍼붓습니다. 엘리후는 분명 “세 친구에게 화를 냄은, 그들이…욥을 정죄함이라”(32:3)며, 편협한 신앙 지식만을 반복하며 욥을 정죄하는 것에 분노했습니다. 더군다나 그는 “내 마음의 정직함이 곧 내 말이며, 내 입술이 아는 바가 진실을 말하느니라”(33:3)며, “정직”한 마음과 “진실”한 자세로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만 말하겠다고 했습니다. 엘리후도 변론에 끼어들어 얼마나 말을 하고 싶었는지, “내가 말을 하여야 시원할 것이라. 내 입을 열어 대답하리라…내가 입을 여니, 내 혀가 입에서 말하는구나”(32:20,33:2)라고 했는데, 막상 입을 열고 떠들다보니 그 역시 욥의 세 친구들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 1. 엘리후는 욥의 문제를 어떻게 기소합니까? “엘리후”의 일차 변론에 욥이 아무런 반박 없이 침묵하자, 그는 욥의 세 친구들과 지켜보고 있는 주변 사람들을 향하여 “지혜 있는 자들아 내 말을 들으며, 지식 있는 자들아 내게 귀를 기울이라!”(34:1)며, 주의를 환기하는 말로 이차 변론을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엘리후”는 자신의 변론에 모두가 참여해줄 것을, “입이 음식물의 맛을 분별함 같이 귀가 말을 분별하나니, 우리가 정의를 가려내고, 무엇이 선한가 우리끼리 알아보자!”(34:3-4) 곧 “무엇이 바른 판단인지 결판을 냅시다. 우리 함께 시비를 가려봅시다.”(공동번역)라고 제안합니다. “엘리후”는 갑자기 욥의 세 친구와 주변 사람들을 가리켜서 “지혜 있는 자들”과 “지식 있는 자들”로 추켜세우는 호칭을 쓰며, 욥을 재판하기 위해서 자신이 변론하는 말에 객관적인 정당성을 부여해줄 배심원이 되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욥을 공개 재판에 회부하는, 곧 욥의 문제를 사람들 앞에 기소하는 발언이었습니다. “엘리후”가 사람들 앞에 나서서 떠들다보니, 순간적으로 자기가 뭐나 된 줄 알고 자기만이 지혜와 공의에 기초해 있다는 오만한 생각에 사로잡힌 것 같습니다. 늘 앞에 선 사람들이 조심해야 할 자세가 무엇인가를 깨닫습니다. “엘리후”는 욥이 변론한 말들 중 일부만을 발췌해서 어떤 문제가 있는 사람으로 기소합니까? 첫째로는, “욥이 말하기를, ‘내가 의로우나 하나님이 내 의를 부인하셨고, 내가 정당함에도 거짓말쟁이라’ 하였고, ‘나는 허물이 없으나 화살로 상처를 입었노라’ 하니”(34:5-6) 곧 “욥이 하는 소리를 들으셨지요? ‘나는 옳게 살았는데 하느님께서 나에게 죄를 주신다. 나는 바로 살았는데 이 아픔이 웬일인가? 나 아무 죄도 없는데 죽을 병이 들다니.’”(공동번역)라고 했다며, “어떤 사람이 욥과 같으랴? 욥이 비방하기를 물마시듯 하며”(34:7)라고 그는 욥을 고소합니다. 욥이 당하는 고난의 원인을 찾기 위한 변론에 참여한 “엘리후”는, 갑자기 변론의 목적을 상실하고 욥에 대한 정죄로 일관합니다. 욥의 무죄 주장은 친구들의 정죄에 대한 항변이었고, 이로 인한 고통조차도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 섭리로 받아들인 욥의 하나님께 대한 호소가 “나의 정당함을 물리치신 하나님, 나의 영혼을 괴롭게 하신 전능자”(27:2)라는 고백이었는데, 이것을 왜곡시켰습니다. 현실을 살면서 생각지 않은 재난과 어려움에 처할 때가 누구에게나 있지만,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은 그 재난 자체가 아니지 않습니까? 사람들의 조롱과 조소의 손가락질과 뒷담화가 그 사람을 무너지게 하는 것을 이해한다면, 욥이 호소하는 고통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유도 알지 못하고 당하는 고통의 아픔을 “그가 폭풍으로 나를 치시고, 까닭 없이 내 상처를 깊게 하시며, 나를 숨 쉬지 못하게 하시며, 괴로움을 내게 채우시는구나”(9:17-18)라고 탄식한 것 역시도,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섭리를 믿는 믿음에서 고백하는 하소연이었습니다. 그런데 “엘리후”는 이러한 욥의 탄식을, 세 친구들처럼 하나님을 “비방”하고 대적하는 불신앙적인 모습으로 고소합니다. 고통을 호소하는 욥에 대한 사랑의 관심과 이해보다, 고난 중에도 신앙을 잃어버리지 않았던 욥이 마치 신앙을 저버린 것처럼, 욥이 한 말의 한 부분만을 부각시켜 왜곡하고 과장해서 문제로 제기했습니다. 둘째로는, “악한 일을 하는 자들과 한패가 되어 악인과 함께 다니면서 이르기를, ‘사람이 하나님을 기뻐하나 무익하다’ 하는구나”(34:8-9) 곧 “겨우 한다는 소리가 이렇습니다. ‘하느님과 잘 지내봐야 별 신통한 수가 없다.’”(공동번역)라고 했다고 욥을 고소합니다. 세상의 현실은 악한 자라고 징벌을 받는 것도 아니고 선한 자라고 재난을 안 겪는 것도 아니라는 점에서, “일이 다 같은 것이라. 그러므로 나는 말하기를. 하나님이 온전한 자나 악한 자나 멸망시키신다”(9:22)라는 반문을 제기했던 것을, 하나님을 믿어보았자 별 좋은 일도 없다고 말한 것처럼 모함했습니다. 욥은 결코 “악한 일을 하는 자들과 한패가 되어” 다닌 적이 없었지만, 욥의 친구들이 욥을 모함한 것처럼 “엘리후”는 자신이 보지도 않은 일들을 추측성 발언으로 정죄하여 고소했습니다. 2. 하나님의 공의로 욥을 어떻게 판결합니까? “엘리후”가 “내 귀가 당신의 말을 어찌 한마디인들 놓쳤겠소. 당신이 하는 말을 나는 다 들었소.”(33:8,공동번역)라며, 그렇기에 공정하게 변론하겠다던 “엘리후”는 어느 순간 객관성을 상실하고 오직 자기 아는 지식의 합리화와 주장에 몰두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왜 야고보 선생이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약1:19-20)고 했는지를 다시금 실감하게 됩니다. 우리가 남의 말을 듣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깨닫게 됩니다. 고통 받는 욥에게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통해 신앙의 연단을 하시는 것이기에 하나님을 찾는 회개하는 믿음으로 설 때에, 다시금 회복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얻으리라고 권고했던 “엘리후”가, 세 친구들이 주장했던 것처럼 갑자기 인과응보 논리로 욥을 정죄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엘리후”는 이것을 인과응보 논리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의 절대적인 공의에 따른 판결임을 “그러므로 너희 총명한 자들아, 내 말을 들으라. 하나님은 악을 행하지 아니하시며, 전능자는 결코 불의를 행하지 아니하시고, 사람의 행위를 따라 갚으사 각각 그의 행위대로 받게 하시나니, 진실로 하나님은 악을 행하지 아니하시며, 전능자는 공의를 굽히지 아니하시느니라”(34:10-12)는 대전제의 선언으로 욥에 대한 판결을 시작합니다. 우주와 역사를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공의에 대한 “엘리후”의 선언은, 구구절절이 틀린 말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옳은 말 맞습니다. 그는 이러한 하나님의 절대적 공의를, 욥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문제는, 욥이 한 말의 의미나 그가 처한 상황과는 다른 관점이라는 데에 있습니다. 욥은 자신을 무고하게 정죄하는 자들을 향한 자신의 의로움을 항변한 것이며,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의 상황에 처하게 하신 하나님의 의로우신 섭리를 다 알 수 없는 자신의 신앙적 한계와 무지를 탄식한 것이었지, 하나님의 공의를 부인한 적이 없었습니다. “엘리후”는 이러한 하나님의 절대적 공의에 근거하여 욥을 어떻게 판결합니까? 첫째로, “엘리후”는 하나님은 시간과 신분을 초월하여 자신의 절대 공의를 실행하시는 분이기에 어느 누구도 감히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를 거부하거나 항변할 수 없다는 것을, “누가 땅을 그에게 맡겼느냐? 누가 온 세상을 그에게 맡겼느냐? 그가 만일 뜻을 정하시고 그의 영과 목숨을 거두실진대, 모든 육체가 다 함께 죽으며 사람은 흙으로 돌아가리라”(34:13-15)고 선언합니다. 욥에게 고난을 주신 하나님의 섭리 역시도 어떤 이유였든 정당한 것이기에, 이에 항변하는 욥의 태도가 불의하다는 판결이었습니다. 결국 “엘리후” 역시도 세 친구들처럼 하나님이 교만하고 패역한 욥을 심판한 것이지, 이유 없이 주신 고난이 아니라는 의미였습니다. 용어만 하나님의 절대적 공의로 바뀌었지, 결론은 인과응보적인 심판의 논리였습니다. 둘째로, 공의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속성으로서 사람을 차별하지 않기에 이유 없는 고난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엘리후”는 “만일 네가 총명이 있거든, 이것을 들으며 내 말소리에 귀를 기울이라. 정의를 미워하시는 이시라면 어찌 그대를 다스리시겠느냐? 의롭고 전능하신 이를 그대가 정죄하겠느냐?”(34:16-17)라고 선언하며,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만한 죄악을 저지른 적이 없다고 하는 욥의 태도를 가리켜서 하나님에 대한 비난이자 거부라고 정죄했습니다. “엘리후”는 하나님의 절대적 공의를 강조하여, “그는 왕에게라도 무용지물이라 하시며, 지도자들에게라도 악하다 하시며, 고관을 외모로 대하지 아니하시며, 가난한 자들 앞에서 부자의 낯을 세워주지 아니하시나니, 이는 그들이 다 그의 손으로 지으신 바가 됨이라”(34:18-19)며,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차별 없는 절대적 공의로 심판하시는 분이라고 욥에게 선언합니다. 따라서 욥에게 닥친 재앙은 돌연히 임한 것도 아닌 절대적인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공정하신 공의의 심판의 결과임을, “그들은 한밤중에 순식간에 죽나니 백성은 떨며 사라지고, 세력 있는 자도 사람의 손을 빌리지 않고 제거함을 당하느니라”(34:20)며, 자기 죽을 때를 모르고 살아가는 모든 인간의 한계성 역시 자신에게 찾아온 죽음을 돌연한 사건으로 인식하지 않느냐고 했습니다. “엘리후”는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를 거부할 수 없으며, 주님이 정하신 섭리 속에서 그 사람이 행한 행위대로 보응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교리적인 선언에서 어떤 마음과 생각이 듭니까? 하나님의 공의만을 강조하면서 하나님을 절대적인 독재자로 강조하는 목사들의 특징이, 혼자 온갖 악한 짓은 다하는 인간일 때가 간혹 있습니다. 하나님의 속성을 고백할 때, 왜 ‘공의와 사랑’의 주님으로 고백하는 지를 우리는 다시금 생각해야합니다. “엘리후” 역시도 하나님의 절대적 공의만을 강조할 때, 하나님을 참으로 몰인정한 분으로 몰아가고 있었습니다. 어느 인간이 절대적으로 깨끗합니까? 이런 논리에 들어가면,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제대로 숨도 쉴 수 없는 비참한 존재로 전락해버리고 맙니다. 점점 극으로 치닫는 “엘리후”의 논리는, 셋째로 인간의 행위를 감찰하시는 하나님의 눈앞에서 아무 것도 감출 것도 피할 곳도 없음을, “그는 사람의 길을 주목하시며, 사람의 모든 걸음을 감찰하시나니, 행악자는 숨을 만한 흑암이나 사망의 그늘이 없느니라”(34:21-22)고 선언합니다. “그”는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욥이 갑작스런 재앙을 당한 것은 갑작스러운 사건이 아니라, 이미 모든 것을 밝히 아시는 주님께서 조사할 필요도 없이 하나님이 하고자하실 때에 심판하셨다는 것을, “하나님은 사람을 심판하시기에 오래 생각하실 것이 없으시니, 세력 있는 자를 조사할 것 없이 꺾으시고, 다른 사람을 세워 그를 대신하게 하시느니라. 그러므로 그는 그들의 행위를 아시고, 그들을 밤사이에 뒤집어엎어 흩으시는도다.”(34:23-25)라고 선언합니다. 하나님의 속성에 관한 것이 다 맞는 말이면서도, 자신들에게는 적용하지 않고 오직 욥을 향한 정죄의 수단으로만 삼았다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넷째로, 결국 “엘리후”는 세 친구들의 정죄(22:4-11)처럼 “그들을 악한 자로 여겨 사람의 눈앞에서 치심은, 그들이 그를 떠나고 그의 모든 길을 깨달아 알지 못함이라. 그들이 이와 같이 하여 가난한 자의 부르짖음이 그에게 상달하게 하며, 빈궁한 사람의 부르짖음이 그에게 들리게 하느니라”(34:26-28)며, 욥이 재앙을 당한 것은 그가 악인이었고 해서는 안 되는 온갖 악한 짓을 저질렀기 때문에 임한 하나님의 심판이었다고 단정하는 선언입니다. 3. 엘리후의 욥에 대한 정죄는 무엇입니까? “엘리후”는 하나님의 절대적 공의에 대한 자신의 신앙 지식을 자랑하려다가 보니, 욥이 특별한 죄나 이유 없이 고통을 당할 가능성을 유추하는데 실패했고, 오히려 욥의 세 친구들과 같은 편협한 신앙적 시각에서 욥을 정죄하기에 바쁜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의 공의를 심판적인 관점에서만 해석하지만,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사랑하신다는 속성이기도 합니다. “엘리후”는 욥에게 그가 받은 고난의 이유에 대해서 하나님이 말씀하지 않는다고 탄식한 호소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주께서 침묵하신다고 누가 그를 정죄하며, 그가 얼굴을 가리신다면 누가 그를 뵈올 수 있으랴?”(34:29) 곧 “하나님이 숨으신다고 하여, 누가 그분을 비판할 수 있겠습니까?”(새번역)라고 선언합니다. 절대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판단과 결정에 인간은 어떤 요구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논리적으로는 맞는 말이기는 하지만, 욥이 하나님께 요구했다기보다는 “백성들아, 시시로 그를 의지하고, 그의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시62:8)라는 말씀처럼, 자신의 고통스런 마음과 생각을 주님 앞에 털어놓는 것이 결코 하나님께 반항하는 죄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33:3)고 하셨지 않습니까? 그런데 “엘리후”가 덧붙인, “그는 민족에게나 인류에게나 동일하시니, 이는 경건하지 못한 자가 권세를 잡아 백성을 옭아매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34:29-30)고 한 말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새번역에서는 “경건하지 못한 사람을 왕으로 삼아서 고집 센 민족과 백성을 다스리게 하신들, 누가 하나님께 항의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했고, 공동번역에서는 “불경스런 자를 백성의 통치자로 세우셨다면 그것은 사람들의 마음이 비뚤어졌기 때문이 아니겠소?”라는 뜻으로,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의 뜻에 반하는 결정과 선택을 하셨다면 그것 역시 하나님의 절대 주권이며, 결론적으로는 우리 자신의 문제라고 선언합니다. 인과응보 논리만을 주장하는 것에 대해서, 절대 의롭고 선하신 하나님이 이 세계를 통치하시는데, 어떻게 현 세상에 악인이 득세하고 형통하며 의인이 고통을 받는 모순된 현실을 어떻게 볼 것이냐는 욥의 반문에 대한 “엘리후”의 변호이자, 이런 상황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전능하신 분이심을 변호하다보니 빚어진 결론이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공의를 강조하다보니, “엘리후”는 “그대가 하나님께 아뢰기를 내가 죄를 지었사오니, 다시는 범죄하지 아니하겠나이다. 내가 깨닫지 못하는 것을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악을 행하였으나 다시는 아니하겠나이다 하였는가?”(34:31-32)라며, 욥의 고난의 문제를 욥이 저지른 죄악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그의 회개를 요구합니다. 이 문제의 발단이, 하나님께서 사탄에게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1:8)고 하신 말씀에 대해서, 사탄이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1:9)라는 반문과 함께,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뼈와 살)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틀림없이 주를 향하여 욕하지 않겠나이까?”(1:11,2:5)라며, 하나님께 욥을 시험해볼 수 있도록 허락을 요청한 결과라는 것을, 세 친구나 “엘리후” 그리고 욥 자신도 몰랐습니다. 따라서 “엘리후”는 결국 “하나님께서 그대가 거절한다고 하여, 그대의 뜻대로 속전을 치르시겠느냐? 그러면 그대가 스스로 택할 것이요, 내가 할 것이 아니니, 그대는 아는 대로 말하라”(34:33) 곧 “하느님의 판결을 당신이 불복한다고 하여 그가 당신 생각을 따라 보응하실 줄 아시오? 이 일은 당신이 알아서 할 일, 내가 어찌 하겠소? 그러니 당신의 소견을 어디 말해 보시오.”(공동번역)라며, 욥이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는 것을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공의에 대한 반항으로 규정하면서, 자신의 판결에 욥이 어떻게 생각하는 지를 묻습니다. 욥이 침묵하자, “엘리후”는 의기양양해서 “슬기로운 자와 내 말을 듣는 지혜 있는 사람은 반드시 내게 말하기를, 욥이 무식하게 말하니 그의 말이 지혜롭지 못하도다 하리라”(34:34-35)며, 욥이 한 모든 변론이 무식해서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하기에 한 말들이라는 자신의 판결에 다른 사람들도 다 동의할 것이라고 단정해버립니다. 그러면서 “엘리후”는 놀랍게도 “나는 욥이 끝까지 시험 받기를 원하노니, 이는 그 대답이 악인과 같음이라”(34:36)며, 욥을 악한 자로 규정하면서 끝까지 고난 받기를 원한다고 정죄하며 저주했습니다. 이는 “그가 그의 죄에 반역을 더하며, 우리와 어울려 손뼉을 치며 하나님을 거역하는 말을 많이 하는구나”(34:37) 곧 “잘못을 저지르고도 거역하기까지 하며, 우리에게 주먹을 휘두르고 하느님께 마구 입을 놀리는 사람이다.”(공동번역)라며, 욥을 하나님 앞에서 극히 교만하고 패역한 자였다고 정죄합니다. “우리와 어울려 손뼉을 치며”는, 우리가 보는 앞에서 손뼉을 치며 하나님을 조롱하는 행동과 말을 일삼았다는 의미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재앙을 당해 고통스러워하는 욥의 고난의 문제를 변론하겠다고 나선 “엘리후”가, 갑작스럽게 “나는 욥이 끝까지 시험 받기를 원하노니, 이는 그 대답이 악인과 같음이라”(34:36)고 정죄하는 발언을 일삼은 것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우리가 말하는 것이 참으로 조심스러운 것은, 어느 순간에 본래의 의도와 목적을 잃어버리고 엉뚱한 말을 내뱉고 있는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을 발견할 때가 많지 않은가요? “엘리후”가 본래는 “정직”한 마음과 “진실”한 자세로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만 말하겠다(33:3-4)고 했지만, 욥이 당하는 고난에 대한 진실한 이해와 사랑보다 그 역시 자기중심적인 편견에 휩쓸려서 욥을 더 고통스럽게 정죄하고 저주하는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우리 인간은 어떤 상황이나 사람을 온전히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없고 오직 하나님만이 모든 것을 온전하게 판단하실 수 있기에, 사도 바울은 “내 사랑하는 자들아…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롬12:19)며,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롬12:17-18)고 당부했습니다. 야고보 선생이 “너는 누구이기에 이웃을 판단하느냐?”(약4:12)라고 경고한 것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교리적 지식이 중요하면서도, 교리만을 변증하다보면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망각해버리고 오직 사람들을 정죄하기에 바쁜 냉혈 인간으로 전락하는 또 다른 죄악을 저지르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왜 잠언서에 “말을 아끼는 자는 지식이 있고, 성품이 냉철한 자는 명철하니라. 미련한 자라도 잠잠하면 지혜로운 자로 여겨지고. 그의 입술을 닫으면 슬기로운 자로 여겨지느니라”(잠17:27-28)고 했고, 전도자도 “우매자의 입술들은 자기를 삼키나니, 그의 입의 말들의 시작은 우매요, 그의 입의 결말들은 심히 미친 것이니라. 우매한 자는 말을 많이 하거니와”(전10:12-14)라고 했는지를 깨닫고 분별하는 이들이 복됩니다. 자기 신앙 지식을 자랑하고 변증하기 위해서 고통 받는 사람들을 정죄하는 판단을 멈추고,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롬12:15-16)는 말씀 앞에 순종하는 겸손한 신앙의 사람들이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