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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7월 24일 화요일 [(녹) 연중 제16주간 화요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녹] 연중 제16주간 화요일 또는 [백] 성 사르벨리오 마클루프 사제 미카 예언자는 주님께, 당신 소유의 양 떼를 당신의 지팡이로 보살펴 주시기를 청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하늘에 계신 당신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당신의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라고 하신다(복음). <저희의 모든 죄악을 바다 깊은 곳으로 던져 주십시오.> ▥ 미카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7,14-15.18-20 주님, 14 과수원 한가운데 숲속에 홀로 살아가는 당신 백성을, 당신 소유의 양 떼를 당신의 지팡이로 보살펴 주십시오. 옛날처럼 바산과 길앗에서 그들을 보살펴 주십시오. 15 당신께서 이집트 땅에서 나오실 때처럼 저희에게 놀라운 일들을 보여 주십시오. 18 당신의 소유인 남은 자들, 그들의 허물을 용서해 주시고 죄를 못 본 체해 주시는 당신 같으신 하느님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분은 분노를 영원히 품지 않으시고 오히려 기꺼이 자애를 베푸시는 분이시다. 19 그분께서는 다시 우리를 가엾이 여기시고 우리의 허물들을 모르는 체해 주시리라. 당신께서 저희의 모든 죄악을 바다 깊은 곳으로 던져 주십시오. 20 먼 옛날 당신께서 저희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대로 야곱을 성실히 대하시고 아브라함에게 자애를 베풀어 주십시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46-50 그때에 46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고 계시는데, 그분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그분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있었다. 47 그래서 어떤 이가 예수님께,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48 그러자 예수님께서 당신께 말한 사람에게,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하고 반문하셨다. 49 그리고 당신의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50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수님께서 군중을 가르치실 때 그분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찾아옵니다. 아마 사람들은 예수님께서도 혈연관계를 중시하시어 그들을 배려하실 것이라 기대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새 공동체는 혈연관계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으로 구성된 새 가족 공동체였습니다. 우리는 관계 속에서 태어나 관계 속에서 성장하며 결국 관계 속에서 나의 흔적과 기억을 남기고 떠납니다. 그러기에 가장 가까운 인간관계를 맺고 사는 가족과 혈연이 관계 맺기의 가장 중요한 기준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혈연보다 더 중요한 인간관계가 생겨나고 있습니다. 그것은 신념과 가치를 공유하고, 신의와 공정을 기초로 삼아 살아가는 공동체입니다. 그것이 때로는 국가라는 이념으로 왜곡되고, 특정한 이익 집단으로 폄하되기도 하며, 친구라는 미명으로 상처를 주고받기도 하지만, 결국 인간이 살고 죽는 가장 중요한 원리는 ‘함께’ 살아가는 비결입니다. 예수님의 어머니와 친척들이 혈연관계 때문에 예수님의 제자 공동체의 특권을 입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새 가족, 새로운 인류 공동체는 하느님의 뜻을 깨닫고 실천하는 이들로 묶인 친교의 공동체였습니다. 성모님께서는 누구보다 하느님의 말씀을 잘 듣고 실천하신 분이셨기에 예수님과 깊이 결합되신 분이셨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성찬례를 통하여 같은 식탁에서 빵을 나누고, 함께 하느님 말씀을 들으며, 이웃 사랑을 실천하여 교회라는 가족 공동체를 이룹니다. 신앙은 결코 교회 없이 성장할 수 없습니다. 혹시 내가 교회 안에서 성직자, 수도자, 신자들에게 받은 상처 때문에 교회 없는 나 홀로 신앙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면 좋겠습니다.(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
나는 슬퍼하고 울부짖으며 맨발에 알몸으로 걸어다니고 미카는 예언자로서 살아간다는 것이 때로 얼마나 혹독한 것인지를 생생하게 소개합니다. “나는 슬퍼하고 울부짖으며 맨발에 알몸으로 걸어다니고 승냥이처럼 슬피 울며 타조처럼 애처롭게 울리라.”(미카서 1장 8절)
그도 그럴 것이 주님께서 미카 예언자에게 부여한 사명은 바로 타락한 예루살렘의 심판과 멸망을 선포하는 것이었습니다. 거짓 예언자들의 위선을 고발하는 것이었습니다. 탐욕스런 부자들의 횡포를 단죄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네 인간 역사는 대체로 반복에 반복을 거듭하는 것 같습니다. 미카 예언자의 고발 내용은 어찌 그리도 오늘 우리의 현실과 정확히 일치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주님은 언제나 충실하시지만 인간은 언제나 불충실합니다. 미카 예언자 시대 당시 경신례는 호화롭게 거행되었지만, 진정한 마음의 회개는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거짓 예언자들과 목자들은 착한 목자와는 거리가 점점 멀어져 갔고, 자기 호주머니만 생각하는 삯꾼으로 전락해 있었습니다. 사회 지도층 인사들과 부자들은 주님 두려운 줄 모르고 가난한 백성들을 벼랑끝까지 몰고 갔습니다.
미카 예언자는 이런 당시의 사회적 배경을 안고 자신의 예언직을 수행하기 시작합니다. 주님께 신뢰하기보다 자신의 재물이나 권력에 더 방점을 찍는 그릇된 안전 의식, 가식과 허위로 가득한 전례, 그분께는 눈엣가시 같은 우상숭배 행위는 주님 주도 아래 모조리 폐기될 것임을 선포했습니다. 죄와 반역과 불충실의 대명사요 화신인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은 철저하게도 파괴될 것임을 외쳤습니다.
틈만 나면 멸망을 선포하고, 숨겨둔 죄를 고발하는 미카 예언자를 향한 기득권 세력의 눈초리는 날카로울 수 밖에 없었습니다. 거대한 집단적 악과 맞서 혈혈단신 투쟁하는 미카 예언자의 모습이 참으로 외로워 보입니다. 그는 가난하고 고통받는 백성들 쪽에 섰지만, 그들 앞에서도 철저하게 혼자였습니다. 사제들과 판관들, 권력자들로부터 당한 무시와 냉대는 하늘을 찔렀습니다. 당시 함께 활동하는 다른 예언자들 사이에서도 철저하게 왕따였습니다.
그 끔찍하고 고통스런 현실에도 불구하고 미카 예언자는 최종적으로 희망을 노래하기 시작합니다. 주님께서는 에프라타의 보잘 것 없는 부족으로부터 시작될 새로운 부흥이 준비되고 있음을 선포합니다.
“그러나 너 에프라타의 베들레헴아 너는 유다 부족들 가운데에서 가장 보잘 것없지만 나를 위하여 이스라엘을 다스릴 이가 너에게서 나오리라.”(미카서 5장 1절)
다윗의 후손, 메시아 임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곳에서 탄생하실 것이며, 철저하게 파괴될 예루살렘은 다시 한번 당당히 재건되어 온 세상의 중심지가 될 것을 예언합니다. 세상 모든 민족들은 그분의 말씀을 들으려고 예루살렘으로 달려와 그분을 뵙게 될 것이며, 끝까지 주님께 충실했던 소수의 남은 자들은 주님으로부터 큰 축복을 받게 될 것임을 선포합니다.
미카 예언자는 예루살렘으로부터 남서쪽 40킬로 지점에 위치한 작은 시골 마을 모레셋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시골 출신 농부로 살다가 예언자로 불림을 받았습니다. 당연히 당시 농부들이 겪고 있던 고초를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런 연유로 그는 농부와 목축업자들의 입장을 대변하면서, 부패하고 타락한 지주들과 귀족층을 신랄하게 고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평신도 희년을 맞아 세상 안에 몸담고 계시는 평신도들에게 부여된 사제직, 예언직, 왕직에 대해서 자주 생각합니다. 사제직, 예언직, 왕직 하니, 평신도들에게 너무 거리감있어 보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너무 거창하거나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으셔도 좋을 듯 합니다.
미사드리는 마음으로 각자에게 맡겨진 일상의 일들을 정성껏 수행해나가는 것이 평신도들이 사제직을 수행하시는 것입니다. 각자 몸담고 살아가는 가정과 직장, 공동체를 ‘작은 교회’로 여긴다면 사제직을 잘 이해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성찬례 중에 밀떡이 주님의 몸으로 변화되듯이, 각자가 행하는 매일의 업무를 거룩하게 수행함을 통해 주님의 일로 변화시키는 것이 곧 사제직을 수행하시는 것입니다. 접시를 닦을 때 마치 미사 중 사제가 성작을 닦듯이, 정성껏 기도하는 마음으로 닦으면, 사제직을 잘 수행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비록 보잘 것 없는 존재들이지만, 우리 안에 주님께서 분명히 현존하고 계심을 굳게 믿는다면, 그래서 우리 자신을 또 다른 메시아이요 왕이신 그리스도, 다시 말해서 제2의 그리스도로 여긴다면 왕직을 잘 이해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주님의 모상임을 잊지 않는다면, 우리 안에 주님께서 심어놓으신 고귀한 품위에 걸맞게 살아간다면, 왕직을 잘 수행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 그 누구도 지도자들, 그리고 이웃들, 나 자신이 지니고 있는 불의와 거짓을 고발하는데 있어 편안하고 자유로울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공동선을 위해, 이웃의 선익과 구원을 위해 용기를 낸다면, 그래서 그들을 회개와 새 삶으로 인도하고자 노력한다면, 충분히 예언직을 잘 수행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한국관구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가족의 의미>
한 중학교에서 도덕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부모님을 30일 동안 칭찬하고 일기를 써 오라고 숙제를 냈습니다. 아이들의 언성이 높아졌습니다. 칭찬은 부모님이 자신들에게 하는 것으로만 알았습니다. 부모님 볼 시간도 별로 없고, 가장 큰 문제는 아무리 뜯어봐도 부모님에게 좋은 점이 보이지 않습니다.
아이는 쑥스럽게 아버지에게 다가가 “아버지 존재 자체가 저에겐 행복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아버지는 대답하십니다.
“미친놈!”
칭찬하고 욕먹었습니다.
학원에 데려다주는 어머니에게 “엄마가 학원 보내주셔서 공부 잘 하게 됐어요. 고마워요.”라고 말합니다.
돌아오는 어머니의 대답은, “반에서 00등 하는 게 공부 잘 하는 거니?”
학원 도착할 때까지 잔소리를 들었습니다.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몰려왔지만 그래도 숙제이니 끝까지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관찰하고 또 관찰했습니다. 관찰했더니 관심이 됐습니다.
“엄마, 오늘 예뻐 보여요!”
“정말이니?”라며 엄마는 처음 얼굴을 보는 듯 한참동안 거울을 봅니다.
“아빠 배가 넉넉하시네요.”
“허허, 배가 만물의 근원이지.”
아버지에게 이런 유머감각이 있는 줄 몰랐습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오랜 시간 함께 살지 못했던 어머니가 돌아왔습니다. 아이가 식사 준비를 하는 어머니에게 말합니다.
“엄마가 만든 음식 매일 먹으니까 좋아요.”
엄마가 웁니다.
“엄마, 왜 울어요?”
“어, 양파 때문 ... ”
나도 양파 때문에 눈물이 났습니다.
30번의 칭찬이 끝나고 아이들이 말합니다.
“그냥 밥만 먹고 잠만 자는 곳인 줄 알았는데, 요즘 집이 좋아요.”
“부모님을 칭찬하면서 나도 조금씩 변하게 됐어요.”
“두려워하지 않고, 겁내지 않고, 칭찬한 나에게 ... ‘나도 참 괜찮은 사람 같다.’ 라는 마음이 생겨요.”
[출처: ‘엄마가 울었다’, 지식채널 e]
가족이란? 이 질문에 이 실험만큼 좋은 사례를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진정한 가족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바로 세상에서 떨어진 나의 자존감을 회복시켜 줄 수 있는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이 가족일 것입니다. 자존감은 타인이 나에게 사랑으로 측정해 주는 가치입니다. 그러니 가족은 사랑이 흐르는 곳입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은 하느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중요한 뜻입니다.
사랑이 없는 가족은 가족이 아니라 집단이나, 무리, 혹은 떼거리라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는 모기떼를 모기 가족으로 보지는 않습니다. 아무리 뭉쳐 다녀도 그 구성원들이 타인에게 자신의 피를 내어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내어주는 만큼 상대의 존엄성이 높아집니다. 원숭이‘무리’라도 되려면 적어도 자녀를 키워내고 자신의 바나나를 나누어주며 다른 구성원의 털도 골라줄 줄 알아야합니다. 그러나 이 무리의 목적은 모기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생존’에 있지 ‘사랑’에 있지는 않습니다. 사랑만이 목적인 공동체가 가족입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가족을 이용한다면 동물 무리만도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여기저기에서 박해를 받으시자 예수님의 가족들은 자신들이 입을 손해를 걱정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미쳤다고 여기고 잡으러 옵니다. 불쌍한 성모님까지 끌고 온 것입니다. 예수님은 설교를 하시다말고 당신 가족들이 왔다는 말에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한 가족은 한 아버지가 있고 한 아버지의 뜻이 있습니다. 한 아버지의 뜻은 한 가족이 서로 사랑하여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 아버지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 아버지도 사랑으로 당신 한 가족을 만드시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니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이들은 모두 그분의 자녀들이 됩니다.
이제 가족은 핏줄보다 사랑의 능력으로 단결됩니다. 예수님도 핏줄보다 하느님 아버지 안에서의 한 가족을 꿈꾸십니다. 그래서 그 사랑이 아니면 같은 핏줄이라도 한 가족으로 인정하지 않으십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위 아이들이 한 것처럼 하려고 노력한다면 그 사람은 세상 모든 이들을 가족처럼 여기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가족은 두려워 할 대상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이 두려운 이유는 내가 그들에게 가족처럼 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가족은 핏줄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내가 사랑하면 아주 많은 이들과 가족의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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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성인
성 사르벨리오 마클루푸(Charbel Makhlouf)
축일 : 7월 24일
성인구분 : 성인
신분 : 신부, 은수자
활동지역 : 레바논(Lebanon)
활동연도 : 1828-1898년
같은이름 : 마클루프, 사르벨리우스
성 사르벨리우스 마클루푸(Sarbellius Makhlouf, 또는 사르벨리오 마클루푸)는 1828년 5월 8일 레바논의 베카아 카프라(Bekaa-Kafra)에서 노새를 끄는 아버지의 아들로 태어나 요셉 자룬 마클루푸(Josephus Zaroun Makhlouf)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는 3살 때 아버지를 잃고 삼촌에 의해 양육되었다. 어려서부터 신심이 깊었던 요셉에 비해 그의 삼촌은 그렇지 못했다. 소년 시절 그가 가장 좋아한 책은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a Kempis)의 “준주성범”이었다.
23살이 되었을 때 요셉은 집을 빠져나와 비블로스(Byblos) 북쪽에 있는 동정 성모 마리아 수도원에 입회하였다. 1853년, 2년간의 수련을 마친 그는 안나야(Annaya)에 있는 성 마로 수도원으로 보내졌다. 그곳에서 그는 첫 서원을 하며 2세기의 순교자 성 사르벨리우스의 이름을 자신의 수도명으로 선택했다. 그는 1853년 장엄 서원을 하고 1859년에 사제품을 받았다.
그는 모범적인 수도승으로 살았지만 그가 꿈꾼 것은 고대 사막의 교부들과 같은 삶이었다. 그래서 1875년부터 죽을 때까지 23년 동안 5세기의 수도원장 성 마로(Maron, 2월 14일)의 모범을 따라 은수자로서 매우 엄격한 삶을 살았다. 그의 성덕에 대한 명성이 커지자 점점 많은 사람들이 상담이나 축복을 청하기 위해 모여들었다. 그는 또한 성체성사에 대한 위대한 신심을 갖고 있었다. 가끔 수도원장이 인근 마을에 가서 성체성사를 집전하도록 했을 때 그는 매우 기쁘게 이를 받아들였다. 그는 기도 중에 몸이 공중에 뜨는 은총도 받았다.
성 사르벨리우스 마클루푸는 1898년 12월 24일, 예수 성탄 대축일 전날 늦은 오후에 안나야에서 선종하였다. 그의 사후 몇 차례의 치유 기적이 일어나면서 그의 무덤은 레바논 사람이건 아니건, 그리스도인이건 아니건 수많은 사람들의 순례하는 장소가 되었다. 그는 1965년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77년 10월 9일 같은 교황으로부터 성인품에 올랐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는 종종 교회는 두 개의 허파(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를 갖고 있는데, 우리는 그 둘로부터 호흡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말했다. 성 사르벨리우스 마클루푸 같은 성인이야말로 가톨릭 교회의 다양성과 일치의 참된 가치를 깨닫게 해주는 좋은 예이다. 사르벨 마클루푸(Charbel Makhlouf)로도 불리는 그의 축일은 12월 24일에 기념하기도 한다.
성녀 쿠네군다(Cunegundes)
신분 : 수녀, 왕비
활동지역 : 폴란드(Poland)
활동연도 : 1234-1292년
같은이름 : 구네군다, 구네군데스, 구네군디스, 쿠네군데스, 쿠네군디스, 킨가, 킹가
마걀 이름으로 킹가(Kinga)로 불리던 성녀 쿠네군다(Cunegundis, 또는 구네군다)는 헝가리의 국왕 벨라 4세의 딸이자 성녀 엘리사벳(Elisabeth, 11월 17일)의 조카딸이었다.
쿠네군다는 궁중에서 ‘라틴어와 하느님 두려워하는 법을 배우면서’ 자랐고 16세 때 폴란드 국왕 볼레슬라우스(Boleslaus)와 결혼하였다.
그녀는 비록 결혼에는 동의하였으나 결혼한 밤에 왕에게 정절을 지키겠다고 말하였다.
이에 대하여 왕은 1년 동안만 지키자고 동의하였다.
그러나 이 기간이 다 끝나기 전에 왕과 왕비는 크라쿠프(Krakow)의 주교 앞에서 평생 동정을 서약하였다.
쿠네군다 왕비는 궁중의상 아래에 허름한 옷을 입고 엄격한 생활을 하였고, 수시로 병자와 가난한 이에게 음식을 날라다 주었다.
1279년에 남편이 서거하자 그녀는 나라를 다스리라는 귀족들의 청을 물리치고, 자신이 스타리 사치(Stary Sacz)에 세운 클라라 봉쇄 수녀원에 들어가서 여생을 지내다가 1292년 7월 24일 선종하였다.
그녀는 수많은 성당과 병원을 지었으며, 작은 형제회를 위해 많은 경비를 지출했다고 한다.
만년에는 그녀 주위에 수많은 기적과 초자연적인 현상이 일어나서
그녀의 출중한 덕행이 더욱 빛났다고 한다.
성녀 쿠네군다에 대한 공경은 이미 1690년 교황 알렉산데르 8세(Alexander VIII)에 의해 허락되었고, 1715년 교황 클레멘스 11세(Clemens XI)는 그녀를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의 수호자로 선포하였다.
1998년 7월 3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는 그녀를 복자품에 올렸고, 이듬해인 1999년 6월 16일 폴란드를 방문하여 스타리 사치에서 그녀에 대한 시성식을 집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