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주 격려해 주는 사람 오네시보로
디모데후서 1 : 15 – 18
사람들은 도움을 받아야 할 만큼 갑자기 어려움을 당할 때도 있고, 가깝게 지내는 사람에게 도움을 주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상부상조하는 인간관계와 함께 세상을 삽니다. 병들거나 실패했을 때 자주 찾아와서 격려해 주면 큰 위로가 됩니다. 그러나 외면하는 친구가 있다면 서운하게 여겨집니다.
사도 바울이 네로 황제의 박해로 로마 옥에 갇혔습니다.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4:6)라고 말한 것을 보면 자신이 순교의 제물이 될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유언과 같은 편지를 쓴 것이 디모데후서입니다.
바울은 유서와 같은 중요한 말씀을 하면서 제일 먼저 자신을 버린 사람들과 자신을 격려해 준 사람에 대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를 버렸다’(15)고 말한 것은 ‘아시에게 있는 모든 사람’이 떠난 것이 아니라, 바울의 복음을 듣고 따르던 사람들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났다는 것을 알고 너무나 크게 실망하여 ‘모든 사람이 나를 버렸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들이 바울을 버렸다’는 말은 구속사적으로 그들이 바울을 버린 것이 아니라 그들이 바울이 세운 교회를 버리고 떠났기 때문에 그들이 교회로부터 버려진 것입니다. 교회를 버리고 떠난 것은 그들이 교회로부터 버려진 것입니다.
‘잃은 것’과 ‘버린 것’은 다릅니다. ‘잃은 것’은 찾아 구원하지만, ‘버린 것’은 찾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여리고의 세리장 삭개오의 집에 유하시는 것을 보고 유대인들이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 갔다고 하며 비난했을 때 그들을 향하여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19:10)
바울을 버린자들 중에는 부겔로와 허모게네가 있었습니다. 그 두 사람을 특별히 언급한 것은 바울을 잘 따르고 섬겼던 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바울이 잡혀 옥에 갇힌 것을 보고 부끄럽게 여기고 바울을 버리고 떠났습니다.
예수님께서 병든 자를 고치고 주린 자들을 배부르게 먹여 주었을 때 따르던 무리가 예수님께서 잡혀 끌려가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는 것을 보고 그들은 흩어지고 떠났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버렸지만 실상은 그들은 버려진 자들입니다.
오늘의 교회 안에도 부겔로와 허모게네와 같은 사람이 없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교회가 싫어서 떠나는 것은 그들이 교회를 버린 것이 아니라 그들이 교회로부터 버려진 자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오네시보로가 옥에 갇힌 바울을 찾아와서 격려했습니다. 바울은 오네시보로가 자주 찾아와서 격려해 준 것을 편지를 써서 디모데에게 알린 것은 디모데 뿐 아니라 오늘에 이르기까지 교회에 매우 중요한 교훈임을 가르쳐 줍니다.
‘격려’(유쾌케;개역)란 어려운 사람에게 용기나 의욕을 북돋아 주어 마음을 즐겁게 해 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울의 옥중 생활은 인간적으로 가장 고통스럽고 힘들었던 때었습니다. 그때 오네시보로의 격려가 바울에게는 마음의 위로와 기쁨이 되었습니다.
오네시보로는 에베소에 살면서 많이 봉사한 것을 디모데도 잘 아는 사람입니다.(18) 어쩌면 부겔로와 허모게네와 함께 바울을 잘 따랐던 에베소 교회의 일꾼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부겔로와 허모게네는 바울이 옥에 갇힌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바울을 버렸지만, 오네시보로는 복음 전하다 옥에 갇힌 바울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오히려 자주 찾아와서 격려해 주었습니다.
바울이 갇힌 로마 감옥은 햇볕도 들지 않는 어두컴컴한 지하 독방입니다. 인간적으로 최악의 고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외로움과 불안과 공포로 인한 그의 고통을 우리는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오네시보로가 자주 찾아와서 격려해 준 것은 마치 오랜 가뭄으로 시들어 죽어가는 식물에게 단비처럼 바울에게 큰 기쁨이 되었습니다.
오네시보로는 처음이나 나중이나 변함이 없는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좋을 때 잘 지내다가 어려울 때 외면하면 친구라고 할 수 없습니다. 좋을 때도 잘 지내야 하지만 병들거나, 실패로 어려움을 당했을 때 찾아와서 격려하는 사람이 친구입니다.
오네시보로의 집은 에베소에 있습니다. 에베소에서 로마(약2,900km)까지는 지중해를 가로질러서 얼마나 먼 곳인가를 이해를 돕기 위해서 부산에서 베트남(약3,100km)까지 배를 타고 가야 하는 먼 곳입니다. 당시 배를 타고 풍랑과 싸우며 여러 날 또는 여러 달을 가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오네시보로가 ‘나를 부지런히 찾아와 만났다’(17)라고 말했습니다. 오네시보로의 방문과 격려는 옥에 갇힌 바울의 마음을 유쾌하게 해 주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오네시보로의 이러한 교제와 형제애를 나눌 수 있었던 것을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베푸신 위로와 축복으로 여기며 하나님께 감사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오네시보로의 집을 축복했습니다. “원하건대 주께서 오네시보로 집에 긍휼을 베푸시옵소서”(16) 라는 축복은 우리에게 상당한 교훈을 줍니다.
‘오네시보로’ 개인을 말하지 않고 ‘오네시보로의 집’을 축복한 것은 쉽게 넘어가도 되는 말씀이 아닙니다. 바울이 ‘오네시보로의 집’을 축복한 것은 그의 집에 숨겨진 봉사가 있었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바울을 자주 찾아가서 격려할 수 있었던 것은 오네시보가 개인적으로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에베소에서 로마까지 먼 거리를 배를 타고 자주 오가며 바울을 격려하는 것은, 여러 사람의 도움이 있어서 할 수 있는 어렵고 힘든 일입니다.
바울이 ‘오네시보로의 집’을 축복한 것은 에베소 교회의 도움을 받고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네시보로 집’의 온 가족이 함께 소문도 없이 즐겁게 협력했기 때문에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네시보로의 집의 온 가족이 함께 협력하여 로마까지 멀다고 생각하지 않고 자주 찾아와서 격려하도록 협조하는 것을 바울은 알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네시보로의 집’을 축복한 것입니다.
우리가 선교사를 돕고 섬기는 것도 가난하면 하고 싶어도 하기 어렵습니다. 선교사들을 후원하고 돕는 것도 재물이 많다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가족이나 협력하는 자들이 함께 해야 고난 당하는 자를 자주 찾아가서 격려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제자들의 격려를 원하셨습니다. 성만찬을 마치고 제자들과 함께 기도하시기 위해 겟세마네 동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다른 제자들에게는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고 하시고, 가장 신뢰하는 베드로 야고보 요한에게 고민하고 슬퍼하시며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에게 ‘너희는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신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것이 얼마나 힘든 고난이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함께하는 격려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조금 나아가 얼굴을 땅에 대시고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같이 되며(눅22:44)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과 함께하지 않고 자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고 있는 제자들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고 말씀하시며 서운하게 여기셨습니다.
우리도 어려운 일로 힘들 때 격려 해 줄 만한 사람으로부터 격려가 없으면 실망하고 배신감을 느끼며 서운하게 여기게 됩니다. 그러나 그들이 와서 격려해 줄 때 즐거운 마음으로 힘을 얻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라’라고 오히려 제자들의 약함을 격려하셨습니다.(마26:36-43)
그런데 바울은 다시 “원하건대 주께서 그로 하여금 그날에 주의 긍휼을 입게 하여 주옵소서”(18)라고 축복했습니다. 앞서 축복할 때 말하지 않은 ‘그날에’란 말을 했습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그날’은 세상 종말을 의미합니다. 그날은 예수님 재림의 날이며 ‘인자가 오시는 날’이며 죽은 자가 살아나는 부활의 날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부활한 모든 사람을 모으고 심판하시는 최후의 심판의 날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옥에 갇혔을 때 자주 찾아와서 격려해 준 ‘오네시보로의 집’을 예수님 재림하시는 그날에 대심판주가 되셔서 모든 인류를 심판하실 때 긍휼을 입게 해 줄 것을 축복한 것입니다.
그날에 심판주로서 예수님께 의인들에게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26:36) 그때 의인과 악인과의 심판 규정은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내게 한 것이라’(마26:45)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오네시보로가 옥에 갇힌 바울을 격려한 것을 예수님께 내게 한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고난 중에 있는 성도를 찾아가서 격려하는 것은 곧 우리가 예수님께 한 것이 됩니다.
우리가 주린 사람을 먹이고 목마른 사람에게 마시게 하고 나그네를 영접하고 헐벗은 사람에게 옷을 입히고 병든 사람을 돌보며 갇힌 사람에게 찾아가서 격려하는 것은 예수님께 한 것입니다.
바울이 축복한 대로 ‘그날’에 ‘오네시보로의 집’은 심판주가 되신 주님으로부터 긍휼하심을 입게 하실 것입니다.
‘내가 옥에 갇혔을 때에 너희가 와서 보았느니라’고 하시며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 된 나라를 상속받으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마25:34-36)
그러면 오네시보로의 집은 천사들의 영접을 받고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무한한 영광입니다.
그러나 부겔로와 허모게네는 옥에 갇힌 바울을 버렸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도 그들에게 ‘너희는 나를 버렸다’고 하시며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마26:41)고 하실 것입니다. 그러면 사단의 사자들은 그들을 지옥불 속으로 던질 것입니다.
바울이 오네시보로의 집에 ‘그날에 주의 긍휼을 입게 해 달라’는 축복은 복 중에 최고의 복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히 사는 영생의 복입니다. 이보다 더 큰 축복은 없습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들은 기독교의 축복 관을 오해하고 있습니다. 특히 우상을 섬기고 신들에게 복을 비는 사람들은 건강과 많은 물질을 빌고 받기를 원하는 것은 유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고난당하는 사람에게 자주 찾아가서 그들을 격려하십시오. 그래서 주님 오시는 그날, 여러분이 격려해 준 그들과 함께 주의 긍휼함을 입고 주님으로부터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는 말씀을 듣고 기뻐 뛰며 천사들의 영접을 받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서 영생합시다.
첫댓글 설교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설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가난한 자는 그의 형제들에게도 미움을 받거든 하물며 친구야 그를 멀리 하지 아니하겠느냐 따라가며 말하려 할지라도 그들이 없어졌으리라(잠 19:7).
감사합니다
💖삶에도 여백의 공간이 있어야 아름답습니다.
내 삶에 여백이 클수록 사랑과 행복을
넉넉히 채울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과 건강과 행복이 늘 함께 하시길 소원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