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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19. 묵상글 ( 사순 제 4주일. - 한때 어둠.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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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19. 사순 제 4주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한때 어둠
오늘 에페소서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한때 어둠이었지만
지금은 주님 안에 있는 빛입니다.
빛의 자녀답게 살아가십시오.”
그리고 복음에는 한때 어둠이었지만,
이제 지금은 빛의 자녀가 된 사람 태생 소경의 얘기가 나옵니다.
그래서 오늘 사순 제4주일에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이렇게 질문을 던집니다.
나는 한때 어둠이었는가?
한때 어둠이었다면 그것은 지금은 어둠이 아니라는 얘기이니
다시 그러면 나는 지금 어둠이 없는가? 빛인가?
또는 이렇게 자문할 수 있습니다.
나는 어둠을 통과한 빛인가?
복음을 보면 두 부류가 있습니다.
어둠을 통과한 태생 소경과 바리사이를 비롯해 아직 어둠 가운데 있는 사람들.
태생 소경은 자기 뜻이 아니지만, 어둠의 자식으로 태어났고,
뜻밖에도 어둠을 벗어날 수 있었고, 빛의 자녀로 태어났습니다.
뜻밖이란 자기 뜻이 아니란 말입니다.
소경이 된 것도, 자기 뜻이 아니고, 보게 된 것도, 자기 뜻이 아닌 은총입니다.
어둠도 누구의 죄나 탓이 아닌 은총이고,
다시 보게 된 것도 누구의 공로가 아닌 은총이라는 말입니다.
바리사이는 태생 소경이 죄인이기에 그리된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당신은 완전히 죄 중에 태어났으면서”라고 모진 말을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하느님의 일이 저 사람에게서 드러나려고
그리된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빛이신 하느님께는 어둠 또한 어둡지 않습니다.
그래서 시편 138편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어두움 그것마저 당신께는 어둡지 않아
밤 또한 낮과 같이 환히 밝으며 캄캄함도 당신께는 빛과 같으오리다.”
소경은 한때 어둠이었지만, 주님과 만나며 빛 가운데 있게 되었고,
자신만 볼 수 있게 된 것이 아니라 이제 하느님의 빛이 되었습니다.
이 상태를 에페소서의 바오로는 “주님 안에 있는 빛”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은총으로 어둠을 통과해 볼 수 있게 되고,
더 나아가 세상을 비추는 주님 안의 빛이 되었지만
그 은총을 차버리고 곧 주님 밖으로 나가면 이내 어둠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사순 제4주일에 이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나는 한때 어둠이었다.
나는 주님 안에서만 빛이다.
나는 바리사이들처럼 볼 수 있으니 소경이 아닌 것이 아니라
한때 어둠이었고 주님 안에 있지 않으면 언제고 다시 어둠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사실도 알아야 합니다.
이제는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한다.
내가 어두워 세상도 어둡게 하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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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19. 사순 제 4주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은 사순 제4주일입니다. 오늘 우리가 듣는 요한 복음에서는 주님께서 태어나면서부터 눈 먼 사람을 고쳐 주십니다. 공관복음이 수많은 기적 이야기를 전해 주는 데 비히여,요한복음은 일곱 가지 표징만을 언급합니다.
물을 술로 변화시키심(2,1-11),고관의 아들을 고쳐주심(4,46-54),베짜타 못가의 병자를 낫게 하심((5,1-9),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심(6,1-13),물위를 걸으심(6,16-21),오늘 우리가 듣는 태생 소경의 눈을 열어주심(9장),
라자로를 부활시키심(11,1-44),일곱입니다.
잘 알다시피 일곱 이라는 숫자는 완전을 뜻하는 상징 수입니다. 요한복음의 저자는 예수께서 행하신 수많은 기적 가운데 의도적으로 이 일곱 가지 표징만을 골라 소개하였습니다. 숫자는 비록 일곱에 그치지만 실체를 가리키는 데 부족함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의 표징이 무슨 실체를 설명하기 위하여 동원된 것인지 알려면,이 표징들의 내용을 면밀히 살펴보면 될 것입니다. 이 일곱 가지 표징은 가나의 표징과 물 위를 걸으신 표정을 제외하고 모두 병의 치유,굶주림의 모면, 죽음에서의 부활처럼 생명과 연관 됩니다. 이상 일곱 가지 표징은 모두 생명과 연관되면서 최종적으로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가리킵니다.
오늘 요한 복음9장에서 소개하는 태생 소경을 치유하신 여섯째 표징은 초막절의 의미를 되새기게 합니다. 평생 빛을 본 적이 없는 이 사람은 실로암 연못에 가서 씻으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실천 하여 다시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물과 빛의 주제,말씀에 대한 무조건적인 복종,예수님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공경이 이 표징 이야기에 다 들어 있습니다.
태생 소경의 눈을 열어주어 생명을 살리려는 예수님의 일에 바리사이파는 안식일이라는 잘못된 인식을 가지고 그 행위를 가로 막습니다. 유다인들은 안식일의 근본 뜻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안식일은 생명을 창조하고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주권을 공적으로 경축하는 축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안식일에도 멈출 수 없는 두 가지 일이 있습니다. 생명을 주거나 살리는 일과, 정의로 세상을 다스리는 일입니다. 이 두 가지 일을 멈추시면 세상은 죽음과 불의가 판을 치는 혼돈이 될 것입니다. 이 일을 하는 것은 하느님의 특권이며 아무도 그것을 방해할 수 없습니다. 아버지께로부터 파견 받은 아들도 아버지가 하시는 일을 해야 합니다.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이루고 그분의 일을 완성하는 것"(요한 4,34)을 예수님은 양식으로 삼으셨습니다. 아버지 하느님께서 생명을 살리는 일을 멈추지 않으시니 아들 예수님도 안식일이라고 해서 그 일을 멈출 수 없는 것입니다(5,17). 무릇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는 이는 누구나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명을 살리는 일과 정의로운 일을 하는 것은 다른 어떤 것보다 첫 자리에 두어야 하며 그 어떤 규정도 하느님께서 주신 고귀한 소명을 막아서는 안될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영적인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기 위해서는 자신 먼저 영적인 소경에서 눈을 떠야 합니다. 영적인 눈을 뜬다는 것은 눈과 입과 귀 등 모든 육신의 오관이 하느님을 향해 열려 그분의 참된 사랑을 깨닫고 그분의 뜻을 실행하는 것입니다.
성 보나벤뚜라의 다음의 말을 묵상하며 영적인 눈을 뜰 수 있도록 은총을 청하도록 합시다..
“창조된 사물들이 그러한 광휘를 보고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누구나 장님임에 틀림없습니다. 사물들의 힘찬 목소리를 듣고도 깨어나지 못하는 사람은 누구나 귀머거리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분의 모든 작품을 찬미하지 않는 이는 누구나 벙어리임에 틀림없습니다. 이 모든 표지를 보고도 제일원리를 발견하지 못하는 이는 누구나 바보임에 틀림없습니다.”
✝️ 일요일 성체의 날✝️
<세계 도처에 일어난 성체의 기적(마리아 헤젤러)>
프랑스 작가 샤또브리앙의 첫영성체
어린이들이여! 여러분들은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가 어떤 것인지 아는가요? 공상으로 가득찬 동화나 만용을 부리는 인도 탐험의 이야기가 절대 아닙니다. 아니 그 보다는 착한 인간의 진실한 체험이 훨씬 더 아름답지요. 여러분들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여러분 자신이 어렸을 때부터 매우 많은 일을 보셨고 또 경험하셨습니다. 부모님들에게 그 일들에 관해 얘기해 달라고 하세요. 그 모든 일들은 진실하며 실제로 체험했던 일입니다. 더우기 많은 사람들은 우리가 그들의 경험으로부터 배울 수 있도록 하려고 그들의 삶에 대한 기억을 글로 기록했읍니다. 그래서 유명한 프랑스의 작가 르네 샤또브리앙은 아주 정직하고 겸손한 자세로 그가 자신의 첫영성체를 어떻게 맞이했는가를 기록해 놓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그 당시 유감스럽게도 열 넷인가 열 다섯 살이 되었을 때야 비로소 첫영성체를 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어요.
“제가 첫영성체를 하는 날이 점점 다가 왔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저의 열심함과 경건함이 참된 것이라고 생각했지요. 저의 모든 모범적인 행실은 신학교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감동시켰습니다.
정말로 저의 수많은 헌신적 행동과 고행은 저의 선생님들을 거의 불안하게 만들 정도였으니까요.
저의 고해신부님은 신학교의 교장선생님이셨습니다. 그분은 대략 50세쯤 되셨는데 엄격하고 근엄한 풍모를 갖추신 분이셨어요.
제가 고해를 하러 갈 때면 그분은 언제나 많은 질문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것에 대해 감사를 드려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전혀 저의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신부님으로서 그분의 여러가지 사랑의 말씀들이 아마도 제가 고해했던 작은 잘못들에 대한 저의 커다란 당혹감을 풀어 주지는 못했던가 봐요. 그런데 그러한 저의 당혹감은, 더우기 제가 감추려고 했지만 역시 저의 행동에서 알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첫영성체를 하는 날이 가까와질수록 저는 그분의 성화에 화가 났습니다.(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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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페소 평화 관상 기도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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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19. 사순 제 4주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너는 이미 그를 보았다. 너와 말하는 사람이 바로 그다.”(요한 9,37)
오늘은 사순 4 주일이며, 기쁨주일 입니다. 오늘 <말씀전례>는 참된 기쁨이 어디로부터 오는 지를 밝혀줍니다. 곧 참된 기쁨은 ‘빛을 보는 데서 온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런데 여기서, ‘본다.’는 것은 ‘안다’는 것을 말해주기에, 기쁨은 ‘빛이신 주님을 아는 데서 온다.’는 것을 밝혀줍니다.
우리는 모두 눈을 지니고 있고, 눈으로 타인과 세상을 바라봅니다. 그러나 바라본다고 해서 모두 제대로 보는 것은 아닙니다. 눈을 뜨고도 보지 못하는 당달봉사가 있는가 하면, 눈을 감고도 볼 수 있는 심미안이 있고, 보아도 보여 지는 대로 보지 못하고 자신이 보는 대로만 고집하는 편견이 있습니다.
<제1독서>는 눈이 빛나는 다윗이 선별되는 이야기입니다. 사무엘은 말합니다.
“사람들은 눈에 들어오는 대로 보지만, 주님은 마음을 본다.”(1사무 16,7)
<제2독서>는 빛의 자녀로 사는 그리스도인의 이야기입니다. 바오로는 에페소인들에게 말합니다.
“빛의 자녀답게 살아가십시오. ~그리스도께서 너를 비추리라.”(에페 5,8-14)
그리고 <복음>은 태생소경이 눈을 뜨고 빛을 보는 이야기 입니다. 제자들은 태생소경이 보지 못하는 것이 자신의 죄든, 부모의 죄든, 죄 탓인지를 묻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일이 그에게서 드러나게 하기 위해서이다.”(요한 9,3)
그렇습니다. 그에게서 하느님의 일이 드러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사실, 소경인 그는 어둠 속에 갇혀 있는 인류를 대변하고 있습니다. 곧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우리 자신을 대변해 줍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그가 눈을 뜨게 되는가? 그에게 빛이 생기게 되는가?
그는 예수님께서 땅에 침을 묻혀 진흙에 개어서 자신의 눈에 바르며, “실로암 못에 가서 씻어라.”(요한 9,7)하신 말씀대로 했습니다. 그는 앞을 보지도 못했지만, 말씀에 순명하여 실로암 못으로 가서 씻었던 것입니다. 사실, 그보다 앞서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당신의 침을 묻힌 진흙을 눈에 발라 주었습니다. 진흙으로 빚어진 그의 살이 예수님의 신성과 결합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으로 도유된 것입니다. 이토록, 예수님께서는 친히 소경의 눈을 만지시고, 그의 가슴 속에 당신의 빛을 부어주시어 그가 볼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그는 남들처럼 볼 수 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까지도 보게 되었습니다. 소경은 예수님을 알아보게 된 것입니다.
혹 우리는 예수님을 보고도 아직 눈 먼 존재로 살고 있지는 않는지요? 만약 우리가 예수님을 본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과 우리 가정, 우리 공동체를 주님을 계시하는 장소로 알아 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현실을 떠난 저 높은 곳에 계시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심을 알아차릴 것입니다. 그래서 삼위일체의 신학자라 불리는 보나벤뚜라는 인간에게는 3중의 눈이 있음을 이렇게 말합니다.
“육신의 눈과 지성의 눈과 관조의 눈이 그것이다. 인간은 육신의 눈으로써 세계와 그 안에 있는 것을 보고, 정신의 눈으로써 영혼과 그 안에 있는 것을 보며, 관조의 눈으로써 하느님과 하느님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본다. 그리하여 인간은 육신의 눈으로써 인간 밖에 있는 것을 인식해야 하고, 지성의 눈으로써 인간 안에 있는 것을 인식해야 하며, 관조의 눈으로써 인간 위의 것을 인식해야 한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소경이었다가 ‘눈을 뜬 이’에게 말합니다.
“너는 이미 그를 보았다. 너와 말하는 사람이 바로 그다.”(요한 9,37)
분명, 우리는 이미 그분을 보았습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아직 보지 못하고 있다면, 곧 보고도 알아보지 못하고 있다면, 완고하여 보고도 인정하지 않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분은 분명, 여전히 보여주고 계십니다.
그런데, 혹 나는 지금 빛이 아니라 어둠을 보고 있지는 않는지요?
혹 자신에게서나 타인에게서 어둠이 보인다면, 얼른 그 어둠을 비추고 있는 빛을 보아야 할 일입니다. 우리 안에는 이미 빛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빛을 보아야 할 일입니다. 빛을 향하여 있어야 할 일입니다. 세상과 모든 이 안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리스도를 알아보는 일, 바로 이것이 “기쁨주일”인 오늘 우리가 누리는 참된 기쁨일 것입니다. 빛이 어둠을 몰아낼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마지막 장면에서, 바리사이들이 “우리도 눈먼 자라는 말은 아니겠지요?” 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눈먼 사람이었으면 오히려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너희가 ‘우리는 잘 본다.’ 하고 있으니,
너희 죄는 그대로 남아 있다.”(요한 9,41).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너는 이미 그를 보았다.”(요한 9,37)
주님!
분명, 이미 당신을 보았습니다.
보고도 아직 보지 못함은 완고하여 인정하지 않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당신은 여전히 보여주고 계십니다. 항상 저를 향하여 계신 사랑입니다.
하오니, 빛을 보게 하소서. 당신 사랑을 보게 하소서. 당신을 보게 하소서. 나의 주님!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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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19. 사순 제 4주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맑은 영혼의 눈을 지니길 희망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1요한 4,7-8). 서로 사랑하는 가운데 주님의 사랑에 눈뜨기를 기도합니다.
파스칼은 ‘팡세’에서 “이 세상은 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빛이 충분하지만, 보지 않으려는 사람들에게는 핑계 대기에 충분할 만큼 어둡다”.고 말합니다. 이는 ‘자신이 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이들은 보게 되고, 본다고 스스로 자부하는 사람은 못 보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스스로 본다고 자부하면서 예수님을 거부하는 이들은 결국 육신의 눈은 멀쩡히 뜨고 있지만 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야말로 눈뜬장님입니다. 왜냐하면, 볼 것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바리사이들은 빛이신 예수님을 고집 센 태도로 거부하고 죄의 어둠 속에서 헤맸습니다. 그들에게는 아는 게 병이었습니다.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세 가지 고통의 인생을 산 미국의 헬렌 켈러(1880- 88세의 일기로 세상을 마감. 태어난 지 19개월 만에 고열로 눈, 귀, 말을 잃었지만 ‘설리번’이라는 가정교사를 만나 장애를 극복하고 인권운동과 노동운동, 장애인 복지사업 등에 많은 영향을 미침)는 ‘세상에서 가장 큰 비극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라는 질문에 “나는 처음에 눈이 멀어, 보지 못하는 것이 가장 큰 비극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조금 더 성장하여 깨달은 것은 눈을 가지고도 보지 못하는 사람이 너무나 많다는 것이었습니다. 눈을 가지고도 하느님을 보지 못하고 자신의 참모습과 미래도 보지 못하는 인생, 성경은 이런 사람을 영적인 소경이라고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비극은 하느님을 모르는 것입니다.” “나는 눈과 귀와 혀를 빼앗겼지만 내 영혼을 잃지 않았기에 그 모든 것을 가진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나의 역경에 대해서 하느님께 감사합니다. 왜냐하면 역경 때문에 나 자신, 나의 일, 그리고 나의 하느님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우리도 인생 여정에서 시련과 역경, 예기치 않은 많은 일들에 직면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때야말로 하느님을 알게 되고 만나는 기회입니다. 시련 중에 함께, 동행하시면서 마음의 문을 열어주시는 예수님을 알아뵙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길에서 만난 눈먼 사람에게 땅에 침을 뱉고 그것으로 진흙을 개어 눈에 바르시고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고 명하시어 눈을 뜨게 하셨습니다. 한 말씀으로 눈을 뜨게 할 수 있지만 진흙을 발라주는 구체적 행동을 통해 사랑의 표현을 드러내셨습니다. 질병은 곧 죄의 결과라는 사회적 격리는 물론 육체적으로 뿐만 아니라 외로움과 소외감으로 오는 고통까지도 치유해 주셨습니다. 문제가 있는 곳에서 주님의 능력이 드러났고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우리의 시련과 역경의 상황도 바로 이런 자리가 될 수 있음을 잊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눈먼 사람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실로암에 가서 씻었듯이 믿음에 따르는 응답은 우리의 몫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믿고 고해성사를 통해 영혼의 때를 씻음으로써 자비의 주님, 용서하시는 사랑의 하느님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흔히 눈을 3가지로 구별하기도 합니다. 내가 나를 바라보는 눈, 남이 나를 바라보는 눈, 하느님께서 바라보는 눈입니다. 우리는 어느 눈을 의식해야 합니까? 하느님의 눈을 의식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눈은 어디에나 계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는 “주님의 눈은 어디에나 계시어 악인도 선인도 살피신다”(잠언15,3). 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은 하느님의 눈에 들기보다는 사람의 눈에 들기에 힘을 쏟고 있습니다. 그래서 진리를 외면하고 세상 것에 줄을 섭니다. 그렇지만 믿는 이들은 크신 사랑으로, 자비 가득한 눈길로 나를 바라보시는 주님을 바라봐야 하고 마침내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세상의 헛된 암흑을 멀리하고 깨끗한 눈으로 하느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누려야 합니다.
성 아우구스띠노는 호소합니다. “형제들이여, 세상을 두고 기뻐하지 말고 주님 안에서 기뻐하십시오. 죄 안에서 기뻐하지 말고 진리 안에서 기뻐하십시오. 허영의 꽃을 두고 기뻐하지 말고 영원의 희망 안에서 기뻐하십시오. 기뻐하십시오. 여러분이 어디에 있든 얼마나 오래 살든 간에 주님께서 가까이 계시니 아무 걱정도 하지마십시오.”
오늘 1독서를 보면, 주 하느님께서는 사무엘에게 이사이의 아들 가운데 하나에게 기름을 부으라고 명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원하신 사람은 다윗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무엘은 처음에는 엘리압을 보고 임금이 될 사람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겉모습이나 키 큰 것만 보아서는 안 된다. 나는 이미 그를 배척하였다. 나는 사람들처럼 보지 않는다. 사람들은 눈에 들어오는 대로 보지만 주님은 마음을 본다”(사무엘 상 16,6-9). 그리하여 사무엘은 주님의 가르침을 받아 다윗에게 기름을 부었고, 영이 그에게 줄곧 머물렀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잠시 눈을 감고 “무엇이 주님 마음에 드는 것인지 가려내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바오로 사도의 말씀대로 “선과 의로움과 진실”의 열매를 맺었으면 좋겠습니다. 선은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인간의 양심을 지키는 것입니다. 모든 일에 있어 선하신 하느님을 차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하느님 한 분 외에는 아무도 선하지 않다”(마르10,18). 의로움은 내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과 용서로 인간을 구원하시는 의로우시고 올곧으신 분이십니다”(신명32,4). 진실은 자신에게 솔직한 것입니다. 자신을 속이지 않는 것입니다. 잘못, 허물을 인정하고 용서를 청하는 것입니다. 탈출기에는 “주님은 자비하고 너그러우신 하느님이다. 분노에 더디고 자애와 진실이 충만하며 천대에 이르기까지 자애를 베풀고 죄악과 악행과 잘못을 용서한다”(탈출34,6-7). 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용서하시는 주 하느님 앞에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해야 하겠습니다.
내 것으로 가득 차 있는 그릇에는 아무것도 담지 못하는 법입니다. 선입견이 있으면 다른 사람이나 사물을 제대로 볼 수 없습니다. 자기가 최고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장점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바리사이들이나 율법학자들은 자기가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만을 확신하고 고집함으로써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눈은 있어도 동자가 없는 사람” 다시 말하면, 눈은 있으나 ‘정확한 안목과 식견으로 분별’해내지 못하였습니다. 눈 뜬 소경이었습니다. 우리도 같은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자기 안에 갇혀 있는 고정관념이나 선입견의 틀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미 세례성사를 통하여 주님께서 영의 눈을 뜨게 해 주셨음에도 세상 것의 욕심으로 영의 눈을 자꾸 가리는 것은, 아닌지 살펴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 눈먼 사람의 눈을 뜨게 해 주신 것처럼, 오늘 우리의 눈도 어루만져 주시어 날마다 맑은 영혼의 눈을 가지고 살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무엇이 주님의 마음에 드는 것인지 가려내는 지혜를 청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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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19. 사순 제 4주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고인이 되신 어머니는 생전에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가끔 하였습니다. 시대를 잘못 만난 어머니는 배움이 적었습니다. 어머니는 배우자를 만날 때 딱 한 가지 기준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것은 배우자의 능력, 재력, 외모가 아니었습니다. 어머니는 배우자의 ‘학력’을 보았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당시 사범학교를 다녔기에 어머니의 기준에 적합했습니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결혼해서 57년을 함께 살았습니다. 아버지가 돈을 많이 벌지 못해도 탓하지 않았습니다. 재력을 보고 결혼 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이사를 다 마치면 집으로 오셨습니다. 이사를 하는 것도 모두 어머니의 몫이었습니다. 집안일을 잘 못해도 탓하지 않았습니다. 능력을 보고 결혼 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는 책을 가까이 하고, 서예를 하는 아버지를 존경하였습니다. 자식들에게도 늘 ‘아버지의 자리’를 함부로 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신앙을 받아들였습니다. 신앙과 배움은 어머니 삶의 두 날개였습니다. 어머니는 야학으로 한글을 배웠고, 검정고시도 보았습니다. 어머니는 돌아가실 때까지 레지오 단원으로 지냈습니다. 어머니의 안목으로 동생은 수도자가 되었고, 저는 성직자가 되었습니다.
‘인사(人事)는 만사(萬事)’라는 말이 있습니다. 잘 들어온 며느리는 어려운 집안을 일으켜 세운다고 합니다. 잘 못 들어온 며느리는 집안에 분란을 일으킨다고 합니다. 정부는 인사를 할 때마다 ‘홍역’을 치르곤 합니다. 후보자의 능력과 자질을 평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후보자의 인격과 품성을 평가하는 것도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능력과 업적은 쉽게 볼 수 있지만 인격과 품성은 잘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국가 수사본부장이 임명된 지 하루 만에 자진 사퇴하였습니다. 정부는 임명을 철회하였습니다. 본인도 사퇴의사를 밝혔고, 정부도 임명을 철회하였기에 사퇴의 이유를 거론할 필요는 없지만, 인사를 할 때는 좀 더 명확한 검증이 필요하다는 평가가 있었습니다. 인사이동 때가 되면 주교님들의 고민도 깊어 질 것 같습니다. 꼭 보내고 싶은 사제는 겸손하게 사양을 하는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보내고 싶지 않은 사제는 굳이 찾아와서 보내달라고 하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인사이동이 별 무리 없이 이루어지면 그제야 마음이 편해질 것 같습니다.
눈이 있지만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은 겉모습만 보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삐뚤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눈앞에서 벌어지는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자신들의 잣대로 보려하기 때문에 현실을 왜곡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날 때부터 소경인 사람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사람이 소경이 된 것은 조상의 탓도 아니고, 본인의 탓도 아닙니다.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기 위한 것이다.” 바리사이들은 사람이 아픈 것도, 장애인이 되는 것도 모두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기 위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같은 사물을 보면서도 전혀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입니다. 오랜 동안 앞을 보지 못한 소경이 눈을 뜬 것은 축하할 일입니다. 가족들에게도 기쁜 소식입니다. 그런데 바리사이파 인들은 소경이 눈을 뜬 것이 신학적으로 합당한 것인가를 먼저 생각하고 있습니다.
오늘 성서 말씀을 묵상해봅니다. “너희는 사람들의 외모와 능력, 사람들의 겉모습만 보지만, 야훼께서는 사람들의 속마음을 보신다.” 오늘 하느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참으로 볼 수 있는 “心眼”을 요구하십니다. 참으로 들을 수 있는 “智慧”를 요구하십니다. 눈을 들어 세상을 봅니다. 참으로 보지 못하고, 참으로 듣지 못해서 눈과 귀가 있으면서도 그릇된 곳으로 가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겉만 보고 사람을 판단하여, 욕하고, 비난하고, 침을 뱉으며, 인격을 무시합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나는 보는 사람은 보지 못하게 하고, 보지 못하는 사람은 보게 하려고 왔다.” 진실을 애써 외면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런 사람들에게 거짓과 가식과 허영에서 벗어나 참된 진리를 보도록 요청하십니다. 그리고 이제 참된 세상을 보도록 인도하십니다. 누구나 함께 할 수 있는 세상을 보도록 인도하십니다. 희망과 평화, 진실과 사랑이 한데 어울려, 참된 빛을 볼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십니다. 아름다운 꽃을 보기 전에, 저 땅 속에서 쉼 없이 양분과 물을 찾고 있는 뿌리를 볼 수 있다면, 깨끗한 거리를 보기 전에, 새벽부터 일어나 청소하는 환경미화원을 볼 수 있다면, 일등에게 찬사와 축하를 보내기 전에, 꼴등에게 위로와 격려를 먼저 할 수 있다면, 용서받기를 원하기 전에, 먼저 용서를 할 수 있다면 우리는 어둠에서 벗어나 이미 빛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참회와 절제, 자선의 사순시기도 벌써 반이 훌쩍 지나버렸습니다. 난 과연 무엇을 보고 있는지, 난 과연 무엇을 보기 싫어하는지 곰곰이 생각하면서 한 주간을 지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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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19. 사순 제 4주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참가자에게 모두 똑같은 방식으로 조리한 소고기 패티를 제공했습니다. 단지 겉에 적혀 있는 라벨링 문구에 차이가 있을 뿐이었습니다. 참가자 절반이 받은 소고기 패티에는 ‘살코기 함량 75%’라고 적혀 있었고, 나머지 참가자가 받은 소고기 패티에는 ‘지방 함량 25%’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즉, 라벨링 문구만 다를 뿐 똑같은 소고기 패티였습니다. 그리고 이 라벨링 문구도 같이 보면 차이가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살코기 함량 75%라는 것은 곧 지방 함량 25%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소고기 패티를 시식한 사람이 맛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했을까요?
‘살코기 함량 75%’라고 적힌 요리를 맛본 사람이 ‘지방 함량 25%’라고 적힌 요리를 먹은 사람보다 고기 패티가 덜 기름지고 더 담백해서 맛과 품질 모두 좋다고 평가했습니다. 똑같은 소고기 패티인데도 말입니다.
부정적 성향을 받아들이면 이렇게 올바른 판단을 하기 힘듭니다. 종종 물건을 사기 위해 인터넷 게시판에 적힌 상품평을 보곤 하는데, 부정적인 상품평을 보게 되면 이 물건을 사는데 망설이게 됩니다. 부정적 성향을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함께하는 삶에서 부정적 성향은 주님으로부터 더 멀어지게 만듭니다. 분명히 신앙생활을 통해 많은 힘을 얻는데도, 남이 하는 부정적 말에 자신의 신앙을 내려놓기도 합니다. 이런 말을 듣고서 자신은 신앙생활을 하지 않겠다고 하시는 분도 있지요.
‘종교에 빠지면 가족을 돌보지 않는다, 종교에 빠지면 이상한 행동을 한다. 종교는 아편이다.’
긍정적 성향을 보여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 안에서 더 힘차게 기쁨의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행복이 멀리에 있지 않음을 깨닫습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을 보시고는 땅에 침을 뱉고 그것으로 진흙을 개어 그 사람의 눈에 바르신 다음 “실로암 못으로 가서 씻어라.”라고 이르십니다. 예수님 말씀을 따른 이 사람은 이제 앞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냥 실로암 못으로 가서 씻게 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아니 그냥 그 자리에서 말씀만으로 앞을 볼 수 있도록 하실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왜 땅에 침을 뱉고 그것으로 진흙을 개어 그 사람 눈에 바르셨을까요? 침은 은총을 나타냅니다. 즉, 주님의 은총으로 치유되었음을 깨닫게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주님의 전지전능하신 힘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를 보지 못하는 유다인들입니다. 태생 소경이 앞을 보게 되었음에도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에게서 온 사람이 아니라면서 하느님의 은총을 거부합니다. 그 부정적인 생각이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주님의 사랑이라는 긍정적인 방향으로 향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을 증언하는 태생 소경처럼 우리도 세상에 용기 있게 주님을 증언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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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자신이 되라! 다른 사람은 이미 있으니까(오스카 와일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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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19. 사순 제 4주일. 키엣 대주교님.
믿음의 어둠에서 벗어나십시오
세상을 볼 수 있는 것은 빛과 그 빛을 받아들이는 눈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눈먼 이에게는 빛이 있어도 세상은 오직 어둠일 뿐입니다.
어리석음의 어둠 :
시력을 잃어 어둠 속에 살고 있는 사람도 있지만, 어리석음의 어둠 속에 갇혀있는 사람도 많습니다. 지혜를 주는 책을 읽으면서도 이해하지 못하고 실천하지 않기에 어리석음의 어둠 속에 갇혀있습니다. 지혜의 눈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름다운 석양과 밤하늘, 새벽의 여명은 화가들에게 영감을 주지만 우리에게는 매일 보는 석양이고 밤하늘일 뿐 그 이상의 창조로 이어지지는 않습니다. 아름다움을 보는 눈이 없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숲 속 나무 꼭대기에서 지저귀는 작은 새의 소리에도 영감을 얻어 시를 씁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숲과 나무를 보면서도 새도 소리도 보고 듣지 못합니다. 섬세한 눈과 귀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어둠 :
어둠 속 깊은 곳에는 믿음이 있고 영적인 삶이 있습니다. 믿음이 있어야 주님을 볼 수 있는 영적인 눈을 뜰 수 있고 신성한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세상에 눈이 멀었다면 빛이신 주님께서 계신다해도 그 빛을 볼 수 없습니다. 영적인 눈이 열려야 주님의 빛을 볼 수 있습니다.
믿음은 보고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보고 믿을 수 있도록 어둠을 밝혀주는 빛입니다. 믿음은 어리석은 사람들을 영원한 생명의 길로 인도하는 불빛이지만 항상 누구에게나 환하게 비춰주지는 않습니다. 단지 조심스럽게 한 걸음, 한 걸음씩 옮길만큼만 밝혀줍니다. 그러므로 어둡고 넓은 하늘에서 그 빛을 찾으려면 주님에 대한 깊은 믿음과 진정한 사랑이 있어야만 볼 수 있습니다.
믿음은 자신을 맡기는 것입니다.
복음의 눈 먼사람은 눈을 씻으면 정말 볼 수 있을 지 알 수 없었지만 지체하지 않고 예수님의 말씀을 즉시 실천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올바른 믿음의 자세입니다. 사실 믿음의 길은 쉽지 않습니다. 그 믿음이 어떤 미래를 만들어줄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확고한 믿음을 갖기 위해, 눈 먼 청년의 믿음의 길을 되새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주저하지 않고 예수님의 말씀을 따랐으나 여러 어려움을 맞게 됩니다. 사실을 믿고 싶어하지 않는 군중들과 눈 먼 아들이 눈을 뜨고 믿음도 갖게 되었는데 외면하는 부모들, 회당으로부터 쫓겨나 종교적인 터전을 잃은 그는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가장 고통스러운 그 순간, 마치 그의 확고한 믿음을 지지하듯이 주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은 구세주이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드러내어 보여 주시자 그는 즉시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 경배를 드렸습니다.
이처럼 믿음은 고난과 함께 오는 은총입니다.
고난을 통해 믿음도 깊어졌습니다. 처음에 그는 예수님을 많은 사람들 중 한분이라고만 생각했기에 “예수라고 하는 분이 제 눈에 진흙을 붙여 주셨습니다.” 라고 했지만, 바리사이가 “당신은 그를 어떻게 생각하오?” 라는 질문에 “그분은 예언자이십니다.”라고 하였으며, 체포당하는 고난을 통해 “그 분은 하느님으로부터 오신 분”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고,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믿음은 이처럼 먼지와 흙 속에 묻혀 있는 진주처럼 긁히고 깍아내는 시련을 겪어내야만 합니다. 많이 깍이면 깍일수록 진주는 더욱 더 빛을 발합니다.
믿음은 등잔불과도 같습니다. 뜨겁게 달아오르는 고통을 참으면 참을수록 빛은 더욱 밝게 더 멀리 비춥니다.
믿음을 가로막는 어두움을 극복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면 세상을 보는 눈과 영적인 눈을 갖게 될 것입니다. 영적인 눈은 주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확고한 믿음을 통해 주님을 만난다면 주님께서는 충만한 삶으로 인도하여 주실것입니다.
사순절은 믿음의 램프가 영원히 빛날 수 있도록 기름을 붓는 기회입니다. 기름은 금식과 참회를 하며 서로 화해하고 가난한 이웃과의 나눔이 많을수록 많아집니다. 나의 꺼지지 않는 믿음의 램프를 통해 주님께서는 우리가 어둠을 벗어나 영원한 빛이신 하느님께 다가갈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실 것입니다.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눈 먼 청년은 고난을 벗어날 수 있는 믿음의 불씨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불씨에 기름을 붓자 불꽃이 타올라 주님께 가는 길을 환히 비출 수 있었습니다. 나에게는 믿음의 불씨가 남아있습니까?
2. 세례를 받은 후 나의 믿음은 어떠한지 생각해보십시오.
3. 고난 중에 주님께서는 어떤 모습으로 당신을 드러내셨습니까?
말씀의 나눔
1. 세례를 통해 주님께서는 믿음의 램프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수 많은 유혹과 시련들이 램프를 끄려고 위협하고 있습니다. 사순절은 믿음의 램프가 다시 빛날 수 있도록 기름을 붓는 좋은 기회입니다. 꺼져가는 램프가 다시 반짝일수 있도록 금식과 참회를 하며 서로 화해하고 가난한 이웃과 나눔을 실천해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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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19. 사순 제 4주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개안開眼의 여정
-빛의 자녀답게 삽시다-
사순시기 주일전례가 은혜롭습니다. 우리 삶의 여정을 상징하는 듯 합니다. 사순 제1주일에 우리는 주님과 함께 광야에서의 악마의 유혹을 통과했고, 사순 제2주일에는 주님의 최측근 애제자들인 베드로, 야고보, 요한과 함께 주님의 영광스러운 변모를 체험했고, 사순 제3주일에는 사마리아 여인과 함께 야곱의 우물가에서 생명의 주님을 만나 영적 목마름을 완전 해갈했습니다. 그러나 깊이 알고보면 파견된 분, 예수님이 진짜 실로암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사순 제4주일 래타레 주일, 기뻐하라 장미주일에는 실로암 못가에서 태생 소경과 함께 주님을 만나 눈이 열립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잔치가 열리는 성전이 상징하는바 주님을 만나 개안하는 눈이 열리는 실로암 못가입니다. 여러분은 모두 무지의 눈이 활짝 열리기를 갈망하면서 오늘 사순 제4주일 장미주일 미사에 참석하고 있습니다.
어제 성가연습을 하면서 새삼스레 잔잔한 기쁨을 느꼈습니다. 기뻐하라 장미주일에 이어, 사순 제4주간 월요일은 우리 요셉수도원의 주보성인인 “성 요셉 대축일”이요, 화요일은 우리의 “사부 성 베네딕도 별세 축일”이고, 토요일은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입니다. 주님은 사순 제4주간, 아름다운 축제의 기쁨의 빛으로 우리 마음을 환히 밝혀주십니다.
사순 제4주일 “기뻐하여라” 주일 제의 색깔도 기쁨을 상징하는 장미색 분홍 제의입니다. 입당송 이사야서 말씀(66,10-11)도 오늘 기뻐하라 래타레 주일에 잘 어울립니다.
“즐거워하여라, 예루살렘아.
그를 사랑하는 이들아, 모두 모여라.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위로의 젖을 먹고 기뻐 뛰리라.”
즐거워하여라, 라틴어로 하며 ‘래타레(Laetare)’이며 그래서 래타레 주일입니다. 제2독서 바오로 사도 권고 말씀 역시 고무적이요 우리의 기쁨을 배가 하며 마음을 환히 밝힙니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한때 어둠이었지만 지금은 주님 안에 있는 빛입니다. 빛의 자녀답게 살아가십시오. 빛의 열매는 모든 선과 의로움과 진실입니다. 무엇이 주님 마음에 드는 것인지 가려 내십시오.”
“빛의 자녀답게 살아가십시오” 얼마나 힘이 납니까! 제가 늘 강조하다시피 삶은 선택이요 훈련이요 습관입니다. 빛이자 생명이신 주님을 선택하여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훈련과 더불어 습관화될 때 비로소 빛의 자녀답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어지는 제2독서 말씀도 은혜롭습니다. 우리 모두 잠에서 깨어나 주님의 빛으로 세상의 빛으로 살 것을 촉구합니다. 영적 잠에서 깨어나 깨어 살아갈 때 깨끗한 마음에 무수히 쏟아지는 깨달음의 선물들이요 비로소 빛의 자녀로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사순시기, 아주 적절한 충고 말씀입니다.
“잠자는 사람아, 깨어나라.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를 비추어 주시리라.”
늘 우리를 비추는 그리스도의 빛입니다. 그래서 오늘 강론 제목은 지체없이 “개안의 여정-빛의 자녀답게 삽시다”로 정했습니다. 강론 제목을 오늘 하루는 물론 평생 화두로 명심하고 살아도 좋을 것입니다. 사순 제4주일 서울주보 1면 오늘 강론 주제도 인상적입니다.
“완고함 3종 세트”란 제목하에 결론은 다음과 같이 맺고 있었습니다. “교형자매 여러분! 우리의 믿음 중에 ‘미움으로 가득한 분노’, ‘내 이성의 합리성을 충족하려는 오만함’, ‘이웃에 대한 편견’, 이러한 일상의 ‘완고함 3종 세트’가 ‘하느님을 보지 못하는 사람’으로 만듭니다.”
이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무지의 죄라 할 수 있습니다. 무지에 눈멀 때 분노, 교만, 편견, 탐욕, 질투등 줄줄이 이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지에 대한 답은 인류의 빛이자 세상의 빛이신 그리스도 예수님뿐입니다. 주님의 빛이 무지의 어둠을 몰아내어 우리 모두 주님의 빛 안에서 빛의 자녀로 살게 됩니다. ‘밖으로 드러나는 것은 모두 빛으로 밝혀지기 마련이요, 밝혀진 것은 모두 빛입니다(에페5,13).
그러니 오늘 화답송 후렴이 참 적절합니다. 빛의 자녀답게 사는데 결정적 도움이 되는 고백입니다. 방금 성가 연습시 흥겹게 불렀다시피 가사도 곡도 흥겹습니다. 평생 좌우명이나 묘비명으로 삼아도 좋겠습니다. 오늘 하루 자주 노래 기도로 바치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불러도 감미롭고 전혀 싫증을 못 느낄 것입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노라.”
얼마전 어느 자매님으로부터 좋은 조언을 받았습니다. 정형외과 의사로부터 받은 충고랍니다. 가슴과 허리를 펴고 몸의 체형을 바로 잡는데 양손을 번쩍 올리는 ‘만세’가 그렇게 좋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자주 해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만세 삼창을 자주 하며 몸의 균형을 바로 잡습니다.
“하느님 만세!”
“예수님 만세!”
“수도원 만세!”
가슴을 활짝 펴고 하늘을 바라보며 마음을 활짝 열고 만세부르기 수행에 충실할 때 저절로 주님의 자녀답게, 빛의 자녀답게 살려는 의욕도 샘솟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이 참 깁니다.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인 태생 소경을 고쳐 주시는 빛이자 생명이신 우리 예수님이십니다. 태생 소경이 상징하는바 무지에 눈먼 사람들입니다.
무지의 악, 무지의 죄, 무지의 병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아마 원죄의 결과가 무지일 것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무지에 눈먼 우리를 눈뜨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은 인류의 빛이신, 세상의 빛이신 주님뿐입니다. 평생을 살아도 무지에 눈먼, 눈뜬 소경들은 얼마나 많겠는지요.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함은 무지에 눈멀고 무지에 귀먹었기 때문입니다.
삶은 선택이요 훈련이요 습관이라 했습니다. 또 삶은 은총의 선물이자 평생과제입니다. 단번에 눈뜨는 개안은 없습니다. 개안의 여정입니다. 죽을 때까지, 살아있는 그날까지 하루하루 날마다 늘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영원한 도반이신 주님을 만나 주님과의 우정을 날로 깊이하면서 눈도 밝아지고 시야도 날로 깊어지고 넓어집니다. 이래야 비로소 빛의 자녀답게. 주님의 자녀답게 살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십시오. 실로암 못가에서 주님을 만나 눈이 열린 태생 소경과 진짜 영적으로 눈먼 바리사이들과의 관계가 참 불편합니다. 전혀 소통의 대화가 되지 않으니 바리사이들이 무지에 눈이 멀고, 무지에 귀가 먹었기 때문입니다. 태생 소경의 눈이 열려가는 개안의 여정도 인상적입니다. ‘예수님’이라는 분에서 ‘예언자’로, ‘선생님’으로, 그리고 마침내 믿음의 눈이, 영안이 활짝 열려 ‘주님’이라 고백합니다.
“주님 저는 믿습니다.”
참으로 눈이 열릴 때 우리의 눈은 주님의 눈으로 변모될 것입니다. 자비롭고 지혜로운 눈, 깊고 널리 통찰하는 눈이 될 것입니다. 제1독서에서 사무엘이 주님의 명령에 따라 다윗을 선택할 때처럼 우리도 주님의 안목을 지니게 될 것입니다.
사무엘이 엘리압의 외모를 보고 뽑으려 했을 때 주님은 즉시 차단하고 나섭니다.
“겉모습이나 키 큰 것만 보아서는 안된다. 사람들은 눈에 들어오는 대로 보지만 주님은 마음을 본다.”
반면 막내인 다윗이 도착했을 때 주님은 즉시 사무엘에게 알립니다.
“바로 이 아이다. 일어나 이 아이에게 기름을 부어라.”
주님과 늘 함께 함으로 주님의 안목을 배운 사무엘이 우리에게는 롤모델이 됩니다. 평생 개안의 여정중인 우리들입니다. 날로 빛이자 생명이신 주님과의 신뢰와 사랑이 깊어갈 때 우리는 비로소 주님의 빛안에서 빛의 자녀답게,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 수 있습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이렇게 살아가는데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끝으로 예수님 닮기의 “예닮기도”를, “행복기도”를 다시 나눔으로 강론을 마치겠습니다.
“주님,
참회합니다
믿습니다
사랑합니다
찬미합니다
감사합니다
기뻐합니다
차고 넘치는 행복이옵니다
이 행복으로 살아갑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늘나라 천국이옵니다.
곳곳에서 발견하는
기쁨, 평화, 감사, 행복이옵니다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임을 깨닫나이다
끊임없는 찬미와 감사의 삶과 기도중에
당신을 만나니
당신은 우리를 위로하시고 치유하시며
기쁨과 평화, 희망과 자유를 선사하시나이다
주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당신과 함께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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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19. 사순 제 4주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 복음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우리에게 빛으로 오신 주님을 묵상합니다. 특히 오늘 주님께서는 ‘나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자신을 우리에게 알려주었습니다. 이제 부활을 향해 걷고 있는 우리의 발걸음은 거의 끝나갑니다. 부활의 가까웠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부활성야 미사를 안에서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리스도 우리의 빛, 하느님 감사합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응답인가요. 이 얼마나 간결하면서도 강한 신앙의 확신인가요.
우리는 사실 오늘도 빛이신 주님을 따라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순간순간 우리 영혼의 눈이 가려지고 어두워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서 잘못하고 죄를 저지릅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 주님은 다시금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어떻게 초대하시냐고요?
오늘 복음에 나와 있습니다. “실로암 못으로 가 씻어라.”라고 초대하십니다. 실로암의 뜻은 ‘파견된 이’라고 합니다. 즉 다시 말하면 ‘파견된 이에게 가서 씻어라.’라는 말이 됩니다.
여기서 ‘파견된 이’는 누구를 말할까요? 우리에게 ‘파견된 이’는 어떤 분이십니다.
맞습니다. 바로 우리의 빛이신 주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우리가 어둠 속에 머무르게 되거나 죄의 빠져있을 때 파견된 이에게 나아가 씻어야 합니다.
지금이 그때입니다. 파견된 이에게 나아가 씻어야 하는 때입니다. 그리고 빛이신 분을 다시금 바라보고 그분을 우리의 빛이라 말하며 환호할 그 날을 기다려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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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먹을까?
뭘 먹을까? 뭘 입을까? 걱정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는데 저는 늘 뭘 먹을지 걱정합니다.
묵상 글을 쓰다가 문득 수제비가 먹고 싶어졌습니다. 그래서 우당탕탕 투박한 묵상을 글로 적은 후 주방으로 달려왔습니다.
왜냐하면, 저녁 식사 시간이기도 하고 배가 매우 고팠거든요.
우선 적당량의 밀가루로 반죽해서 냉장고에 넣어놓고, 수제비의 걸맞은 육수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있는 채소 중에 성한 것들을 골라 잘 씻어서 삶기 시작했습니다.
얼마나 우러났을까요. 어느 정도 육수가 ‘나 육수 같지?’라고 말할 때 반죽 덩이를 꺼냈습니다. 그리고는 ‘툭’, ‘찍’ 신공으로 한 손에는 반죽 덩이를 들고 한 손으로는 그 덩이에서 반죽을 떼어냈습니다. 그 후 간을 하고서 파도 좀 넣고.
다 됐습니다. 제가 준비한 저를 위해 ‘위대한 수제비’가 완성됐습니다.
뭘 먹을까? 그냥 그대가 그대를 위해 준비한 ‘위대한 땡땡땡’를 드셔보세요. 그것이 어떤 것이든 만족감과 즐거움과 행복을 선물해 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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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19. 사순 제 4주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빛에게 어둠에게>
빛이여
그대에게
빛을 주신
빛에게 감사하십시오
어둠이여
그대에게
빛을 주시도록
빛에게 간구하십시오
빛이 된 어둠이여
빛을 모르는 어둠에게
그대 받은 빛을
아낌없이 나누십시오
빛을 모르는 어둠이여
빛이 된 어둠을 보거든
어둠에게 빛을 주신
빛을 찬양하십시오
빛을 모르는 어둠이여
빛이 되어 기뻐하는
어둠과 함께 기뻐하며
빛으로 나아가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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