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들을 위한 복음
2티모 4,10-17; 루카 10,1-9 / 성 루카 복음사가 축일 / 2024.10.18.
오늘은 성 루카 복음사가 축일입니다. 그는 이미 마르코 복음서와 마태오 복음서가 나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독자적인 관점으로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적을 기록한 복음서를 펴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보통 신자들은 복음서가 네 권이나 나와 있는 이유를 모릅니다. 모두 다 예수님에 관한 기록이고 또 줄거리까지 비슷한데 굳이 복음서가 네 권씩 필요한지 생각해 보지 않습니다. 하지만 초대교회와 고대교회 시절에는 아직 교리서가 없었기 때문에 이 네 복음서가 각각의 용도에 따라서 절실하게 쓰였습니다. 아직 예수님을 모르는 그러나 알기 원하는 예비 신자들을 위해서는 마르코 복음서를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이제 막 세례를 받고 교회에 들어온 초보 신자들을 위해서는 마태오 복음서를 신앙 교육용으로 사용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왠만큼 신앙이 성숙하여 다른 이들에게 신앙을 전하고자 나서는 이들에게는 루카 복음서를 권했습니다. 그러니까 루카 복음서는 선교사들을 위해 쓰여진 책입니다. 그래서 이 책에는 ‘복음화’라는 주제가 선명하게 깔려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요한 복음서는 이 세 단계, 즉 마르코-마태오-루카의 단계를 다 거치고 원숙한 신앙의 경지에 다다른 신자들을 위해서 영성을 심화시키기 위한 교재로 활용했습니다. 이러한 역사를 현대 가톨릭교회에 알린 인물은 교황청의 영성 지도신부로 봉사했던 예수회 소속 마르티니 추기경입니다.
마르코는 십자가에 달리시기까지 당신 목숨을 바쳐 하느님의 사랑을 증거하신 예수님을 알아야 비로소 그분을 온전히 믿을 수 있다는 깨달음으로 복음서를 썼습니다. 마태오는 십자가의 신비에 대한 마르코의 깨달음 위에서, 믿는 이들이 모인 교회 안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도록 그분의 가르침을 집대성하여 상세히 전해 주었습니다. 이렇듯 마르코가 쓴 복음서와 마태오가 쓴 복음서는 상호 보완적입니다. 그런데 오늘 교회가 기념하는 루카는 좀 더 시야를 넓혀서 교회 안에서만 아니라 세상 전체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하기 위한 선교적 안목에서 마르코와 마태오가 미처 전하지 못한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을 전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루카는 이 세상에 출생하시는 첫 순간부터,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위해 세상에 오신 하느님의 아드님이시고,(루카 1,35) 구원자이시며 또한 주님이심(루카 2,11)을 강조하였고, 성모 마리아께서만 아시는 출생의 신비 즉 성령으로 인한 잉태와 역시 성령의 개입으로 탄생한 세례자 요한과의 기묘한 만남을 알려주었습니다. 이는 선교란 하느님께서 인간 역사에 개입하시는 손길을 받아들이는 일이라는 뜻이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2천 년 전이라는 특정한 시간, 팔레스티나라는 특정한 공간에만 개입하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나 개입하시는 하느님의 손길을 수동적으로 그러나 적극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이 손길을 세상 사람들에게 능동적으로 그리고 보편적으로 드러내는 일이 선교입니다.
또한 마르코나 마태오가 하느님 나라 또는 하늘 나라로 소개하는 예수님의 메시지를 모든 민족 가운데에서 가난한 이들이 들어야 할 복음으로 소개하였습니다(루카 4,18-19). 루카의 선교관이 여기서 드러납니다. 하느님 나라가 이 세상에서 드러나게 되는 현실적 계기는 바로 삶의 벼랑에 내몰려 희망을 잃어버린 가난한 이들이 다시 살아갈 힘과 희망을 되찾는 복음을 듣게 하는 데 있다는 메시지입니다. 비단 종교적인 차원에서 교리를 가르치거나 입교하도록 권유하는 일을 넘어서서 전인적으로 기쁨을 주는 일이 선교라는 뜻입니다. 그 결과로 그 가난한 이들이 하느님을 알고 교회에 속하게 되면 더 없이 기쁜 일이지요.
루카는 같은 이유에서 예수님께서 사도로 양성하시고자 부르신 열두 제자를 종종 ‘사도’라고 앞당겨 부릅니다. 이미 사도들이 활약하는 교회 시대까지 염두에 두고 그들의 사도직이 예수님의 신성을 드러내고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함으로써 하느님 나라를 이 세상에 드러내는 역할이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선교적 관점에서 루카가 기록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서가 보여주는 세 가지 특징, 즉 예수님의 신성을 드러내고,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함으로써 하느님 나라를 세상에 드러내며, 사도직 활동으로써 예수님의 신성과 하느님 나라를 지속적으로 드러내는 일은 신성을 가리고 하느님 나라를 가로막는 악과 마귀들의 활약을 꿰뚫어보고 이에 대적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창조 이래로 악과 마귀는 거짓으로 진실을 가리려고 하는 프레임 전환 계략으로 선과 하느님을 방해해 왔기 때문입니다.
루카는 안티오키아 공동체에서 의사로 일하다가 바오로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바오로가 어떠한 처지에서 사도요 선교사로 나서게 되었는지를 똑똑히 보게 된 후에, 동료요 제자로 따라 나섰습니다. 데마스가 떠나고, 크레스켄스와 티토 그리고 티모테오와 티키코스 등 다른 제자들이 사도 바오로가 개척해 놓은 여러 공동체들로 파견되었어도, 루카만은 사도 바오로를 묵묵히 수행했습니다.(2티모 4,11) 1차 선교여행에서 선교 대열에서 이탈했던 마르코도 바오로가 불렀습니다.(2티모 4,11) 사도 바오로가 티모테오에게 지시하는 편지 속에 나타난 상황은 그가 얼마나 악의 세력이 괴롭히는 가운데에서도 주님께 굳굳하게 의지하며 복음 선포의 의지를 다지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선교는 선과 악의 대결 상황 속에서 하느님께서 주시는 성령의 기운을 받아 선을 지키는 파수 역할입니다.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은 악의에서라기보다는 몰라서 선교사를 거들어주지도 않고 무관심 속에 저버리기 일쑤이기 때문에 오직 하느님만을 의지하고 하느님만으로 만족하려는 태도가 선교사의 생명입니다.
그래서 루카는 복음서를 저술한 데 이어서 사도들이 복음을 선포하는 역사적 기록까지도 펴냈습니다. 그 책이 사도행전입니다. 다만 그는 열두 사도들의 선교 행적을 베드로와 바오로, 이 두 사도의 행적으로 대표적으로 서술했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은 서두에는 초대교회의 전반적인 모습을 서술하고, 전반부에는 베드로 사도의 선교 행적으로 그리고 후반부에는 바오로 사도의 선교 행적을 보도하고 있습니다. 놀라운 것은 이 두 사도의 선교 행적에는 예수님께서 공생활 동안 일으키신 기적들이 고스란히 일어났다는 사실입니다. 병자를 낫게 하고 죽은 이를 다시 살리는가 하면, 박해자들에 맞서 용감하게 신앙을 증언하는 정황이 보도되고 있습니다. 모든 시대의 교회를 향하여 기준이 되고 모범이 되는 교회상이 사도행전에 쓰여져 있습니다. 특히 돋보이는 기록은 초대교회 신자들의 공동 생활이지요. 이 땅의 신앙 선조들도 혹독한 박해를 겪으면서도 초대교회 시절의 공동 생활을 전국에 흩어진 백여 군데의 교우촌에서 실행해 보였습니다.
선과 악이 대결하는 상황에서도 용감하게 선을 증거하는 일은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도 치열하게 그리고 교묘하게 현재 진행 중입니다. 선교의 사명을 부여받고, 사도직을 수행하는 이들이 늘 깨어 있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제도적인 보장을 받고 있어서 비교적 평화스러워보이는 본당 사도직이나 사회복지 사도직이나 병원 사도직 등도 그 안을 들여다보면 선과 악의 긴장이 반드시 내재되어 있습니다. 제도권이 아닌 현장에서 사회정의를 위해 헌신하거나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회적 약자를 위해 고군분투하는 정의평화 사도직에서는 두 말 할 것도 없으리만큼 치열한 선악 대결 상황이 매일같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사도로서의 자의식을 지니고 복음서를 기록한 루카가 고유하게 자신의 복음서 마지막 장에서 보도하고 있는 엠마오 기사가 이 상황에 대한 결론 역할을 합니다. 우리가 복음을 선포하는 선교의 길에서 반드시 명심해야 할 일은, 나그네처럼 나타나신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걷고 계신다는 발현 의식입니다.(루카 24,13-35)
교우 여러분!
삶의 현장에서 우리는 선교사라는 의식을 지니고 살아가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보고 하느님을 믿을지 믿지 않을지를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을 보여주는 성사이시고,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을 현존케 하는 성사이듯이, 모든 신자들은 교회를 드러내는 성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