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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경환의 명시감상 제1권에서
색깔은 말이다
반경환
색깔 만드는 게 직업인 나는
먹고 사는 일도 색깔에 기댑니다
나는 색깔 만들고
색깔은 내가 사는 길 내어줍니다
만들 때마다 제 마음 들려줍니다
검정색 만들 때는
모든 파장 받아들이는 大德
어머니 마음 들려주고
흰색은 모든 파장 반사하는
어린 아이 눈동자 같은 마음 들려주고
파랑은 꿈속 이야기
노랑은 나만의 행복한 마음
보라색은 고통을 견디는 방법 들려줍니다
색깔 만들 때마다
옛날부터 내려오는 전언을 듣습니다
내가 듣는 자연의 말입니다
색깔 속에는 내 생이 들어 있어
사람보다 사람같이 말하는
색깔들의 말을 듣습니다
----박종국, 「색깔은 말이다」 ({하염없이 붉은 말})전문
나는 철학예술가로서 나의 근본 문제를 ‘인간의 행복은 무엇인가’로 삼은바가 있었고, 나의 낙천주의 사상은 그 ‘행복론’의 결정체라고 할 수가 있다. 나는 대한민국 최초로, 아니, 인류의 역사상 최초로 ‘철학예술가’가 되고자 했던 것이며, 나의 낙천주의 사상의 방법적인 화두는 ‘지혜’와 ‘용기’와 ‘성실’이라고 할 수가 있다. 지혜는 이 세상의 근본 이치를 꿰뚫어 보는 힘이고, ‘용기’는 그 지혜를 실천할 수 있는 힘이며, 그리고 마지막으로 ‘성실’은 그 지혜(앎)와 용기(행동)를 일치시키기 위해서는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한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성실하게 실천할 수 있는 힘을 말한다. 지혜는 삶의 목표를 가져다가 주고, 용기는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 힘을, 그리고 마지막으로 성실은 그 어느 누구보다도 뜨거운 열정으로 자기 자신의 삶을 살아가게 해준다. 지혜가 없는 자는 이 세상에서 삶의 목표가 없는 자이며, 그는 절대로 행복할 수가 없는 자이다. 용기가 없는 자는 그 지혜 앞에서 우유부단한 자이고, 성실하지 못한 자는 어떠한 지혜와 용기마저도 그 ‘불성실함’의 용광로 속에서 다 소진시켜 버리고 마는 자에 지나지 않는다. 용기가 없는 자도 행복할 수가 없고, 성실하지 않은 자도 행복할 수가 없다.
자기 자신의 지혜의 한 움큼은 타인들의 지혜의 만萬 움큼보다도 더 가치가 있고, 자기 자신의 용기의 한 움큼은 타인들의 용기의 만 움큼보다도 더 가치가 있다. 요컨대, 자기 자신의 성실함 역시도 마찬가지이다. 지혜로운 사람의 가장 큰 적은 지혜롭지 않은 사람이며, 용기 있는 사람의 가장 큰 적은 용기가 없는 사람이고, 그리고 성실한 사람의 가장 큰 적은 성실하지 않은 사람이다. 이 세상에서 지혜롭지 않은 자와 용기가 없는 자, 그리고 성실하지 않은 사람들의 해악에 비하면, 외부의 적이나 나이가 많은 노약자와 병약자들의 해악은 차라리 새 발의 피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도저히 자기 자신의 실력으로는 정정당당하게 살아갈 수가 없는 자들이며, 따라서, 그 생존경쟁에서 살아 남기 위해서는 만악의 근원인 온갖 권모술수를 다 창출해내게 된다. 우리 학자들의 끊임없는 표절과 우리 정치인들의 사색당쟁이 바로 그 대표적인 예들에 해당된다. 우리 한국인들은 자기 자신의 행복론을 소유하지 못한 어중이 떠중이들에 불과하며, 자기 자신들의 존재론적 기반이 저마다의 눈앞의 사소한 이익 때문에 다 무너져가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 이 세상의 어중이 떠중이들, 즉, 영원한 철부지 어린 아이들에 지나지 않는다.
시를 쓰는 마음에는 사악한 생각이 하나도 없다고 했던가? 시인은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반성하고 성찰하는 사람이지, 눈앞의 사소한 이익을 위하여 전체의 이익을 훼손시키는 사람이 아니다. 또한 시인은 끊임없이 새로운 지혜를 창출하고 그 지혜를 통하여 우리 인간들을 인도해나가는 사람이지, 온갖 권모술수로 사색당쟁을 일삼는 사람이 아니다. 박종국 시인의 [색깔은 말이다]라는 시는 그의 지혜와 용기와 성실함의 소산이며, 시인으로서의 장인 정신이 어떠한 것인가를 가장 웅변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쇼펜하우어는 일찍이 “전문가인 그들의 기쁨은 학문과 예술에서 버는 금전 뿐이다. 이런 멸시는 빈곤, 굶주림 이외는 다른 욕망의 자극 없이는 어떤 일에도 본심으로 착수할 수 없다는 천한 신념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 (......) 그러나 사실은 어떤 일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비전문가이고, 그것을 한낱 수단으로 여기는 것이 전문가다. 또 어떤 일을 본격적으로 행하는 것은 직접 그것에 몸을 바치고 좋아서 행하는 사람 뿐인 것이다. 가장 위대한 일을 시작하는 것은 언제나 이와 같은 사람들이지, 결코 돈을 위해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다”({슬기로운 삶을 위하여}, 을지출판사, 1984년)라고, 그 장인 정신을 역설한 바가 있다.
하지만 쇼펜하우어의 ‘비전문가’와 ‘전문가’의 그릇된 대립 개념은 수정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전문가는 일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 사람이지, 돈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전문가가 그 직업에 충실하게 되면 마르크스와 쇼펜하우어, 또는 반고호와 보들레르처럼 자기 자신의 유일한 생명까지도 바치게 되지만, 이 세상의 어중이 떠중이들, 즉, 비전문가가 전문가의 행세를 하게 되면,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게 되고, 대중성과 상업성이 판을 치게 된다. 진리를 탐구하는 학문과 예술마저도 이 세상의 어중이 떠중이들의 기호에만 맞추어야 하고, 그리고 그 상업성이 담보되지 않으면 어떠한 진리도 비진리에게 그 자리를 내어 주지 않으면 안 된다. 하지만, 그러나, 자기 자신의 직업에 성실하게 임하고, 돈 자체보다도 일 자체를 목적으로 삼게 되면, 이 세상의 근본적인 법칙과 질서가 바로 잡히게 되고, 양화가 악화를 구축하게 된다. 전문가는 일 자체를 사랑하는 사람이고, 비전문가는 돈 자체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박종국 시인은 충북 괴산 출생이며, 1997년에 {현대시학}으로 등단한 ‘늦깎기“ 시인이다. 그의 시집으로는 {집으로 가는 길}과 {하염없이 붉은 말} 뿐이지만, 그러나 그의 장인 정신은 ’색채제조업자‘로서나, 또는 ’시인‘으로서나 제일급의 경지에 올라섰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색깔 만드는 게 직업인 나는/ 먹고 사는 일도 색깔에 기댑니다/ 나는 색깔 만들고/ 색깔은 내가 사는 길 내어줍니다/ 만들 때마다 제 마음 들려줍니다“라는 첫 시구는, 색채제조업자로서도 그의 내공의 깊이가 배어 있고, 다른 한편, 시인으로서도 그의 내공의 깊이가 배어 있다. 따지고 보면 ”색깔 만드는 게 직업인 나는/ 먹고 사는 일도 색깔에 기댑니다“라는 시구도 대수로울 것이 없고,”나는 색깔 만들고/ 색깔은 내가 사는 길 내어줍니다“라는 시구도 대수로울 것이 없다. 이 시구들은 너무나도 당연하고 평범한 시구들에 지나지 않지만, 그러나 색깔을 ”만들 때마다 제 마음 들려줍니다“라는 시구는 그 평범한 시구들을 살아 움직이게 하면서, [색깔은 말이다]라는 시를 제일급의 시로 이끌어 올려준다. 이제 ’색깔‘은 단순한 ’색깔‘이 아니라, 색채제조업자의 오랜 친구가 되고, 또, 그리고 자기 자신의 마음을 사심없이 들려주는 그의 스승이 된다. 이처럼 ’색깔‘은 단순한 ’색깔‘이 아니라 시인의 오랜 친구이며 스승이기도 한 것이다. 따지고 보면 무기체인 색깔이 그의 친구와 스승이 될 리가 없지만, 그러나 시인은 그 색깔에 자기 자신의 영혼을 불어 넣으며, 그 색깔을 오랜 친구처럼, 또는 위대한 스승처럼, 이처럼, 잘 대접하며 받들어 모시고 있는 것이다. 아무튼 내가 색깔을 만들면 색깔은 내가 먹고 사는 길을 내어 준다. 이 자연스러운 인과응보의 법칙이, 그러나 내가 색깔을 만들 때마다 ”제 마음을“ 들려주는 색깔이 있기 때문에, 그 현실성(인과응보의 법칙)의 벽을 뚫고 예술의 차원으로 그 비상의 나래를 펼쳐 나가게 된다. 시인은 일 자체를 사랑하는 사람이지, 돈 자체를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다. 시인은 자기 자신의 작품마다 그의 영혼을 불어 넣어주는 전문가이지, 온갖 겉만 번지르한 눈속임의 대가(비전문가)가 아니다.
날이면 날마다 색깔을 만들 때마다 그의 영혼을 불어 넣어주는 박종국 시인, 그 색깔을 단순한 색깔이 아니라 오랜 친구이며, 훌륭한 스승으로서 섬기며 그 색깔들의 말을 받아 적고 있는 박종국 시인----. 박종국 시인이 단순한 색채제조업자로서 머무르지 않고 ‘늦깎기’ 시인이 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며, 이 [색깔은 말이다]라는 시는 그의 삶의 철학이 진하게 배어 있는 작품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일찍이 보들레르는 “이 세상 일체는 상형문자이고, 시인은 다름 아닌 번역자이며 암호해독자”라고 역설한 바가 있다. 상형문자는 물체의 형상을 본 떠서 만든 글자이며, 바로 그 문자 속에는 우리 인간들의 의식이 각인되어 있는 것이다. 시인이 다름 아닌 번역자이며 암호해독자라고 할 때, 바로 그때에는 현실에 충실하면 이 세상의 모든 이치(상형문자)는 저절로 풀리게 되어 있는 것이다. 철학은 지혜를 탐구하는 학문이며, 그 지혜를 통하여 영원불멸의 사상의 신전을 짓는 것을 그 궁극적인 목표로 삼고 있는 학문이다. 사상이란 그것이 공산주의이든, 자본주의이든, 낙천주의이든지 간에, 하나의 기적을 불러 일으킬 수 있는 구원론으로 되어 있으며, 그리고 그 사상의 신전은 이 세상의 모든 인간들이 살아갈 수 있는 지상낙원이라고 할 수가 있다. 사상은 모든 학자와 예술가들의 최종적인 목표이며, 그 모든 것이다. 박종국 시인이 날이면 날마다 그 색깔들을 받들어 모시며, 그 색깔들의 말을 받아 적는다는 것은 이미, 그가, 색채제조업자로서, 또는 시인으로서 대사상가의 길에 올라섰다는 것을 뜻한다. 박종국 시인은 그가 그 색깔들에게 영혼을 불어 넣어주고 있다는 점에서는 상징주의자이고, 다른 한편, 그 색깔들의 말을 받아 적는다는 점에서는 현실주의자이며, 그리고 “옛부터 내려오는 전언”, 즉, 전통과 관습을 존중하고, “자연의 말”에 귀 기울이며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점에서는 낙천주의자이다.
박종국 시인은 색깔의 말을 받아 적는 번역자(통역자)이며, 암호해독자이다. 검정색은 그에게 “모든 파장 받아 들이는 大德/ 어머니 마음”을 들려주고, 흰색은 ”모든 파장 반사하는/ 어린 아이의 눈동자같은 마음“을 들려준다. 검정색은 매우 따뜻한 색이며, 그 검정색(검은 옷, 검정 외투)이 없다면 우리 인간들은 기나 긴 엄동설한을 그처럼 따뜻하게 지낼 수가 없을는지도 모른다. 따라서 검정색은 모든 파장을 다 받아들이는 大德이 되고, 그 ‘大德의 사상’은 어머니의 마음이 된다. 흰색은 이 세상에서 가장 맑고 깨끗한 색이며, 이 가장 맑고 깨끗한 색은 ’어린 아이의 눈동자”와도 같은 색이 된다. 어린 아이는 하나의 거울과도 같은 존재인데, 왜냐하면 그 어린 아이의 눈동자를 바라보게 되면, 더없이 더럽고 추한 우리 인간들의 마음이 사실 그대로 되비춰 지고 있기 때문이다. 흰색은 어린 아이의 눈동자와도 같은 마음이며, 모든 파장들(모든 사건들)을 모조리, 다, 되비춰 주게 된다. 파랑색은 박종국 시인에게 “꿈 속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노량색은 “나만의 행복한 마음‘을, 그리고 마지막으로 ’보라색‘은 ”고통을 견디는 방법“을 들려준다. 파랑색은 푸르고 푸른 하늘과 바다를 지시하고 있는 색이며, 그 파랑색은 ’하늘의 높이‘와 ’더 크고 더 넓게‘라는 뜻을 지니게 된다. 청운의 푸른 꿈은 사나이 대장부의 꿈이며, 우리 인간들을 이 ’고통의 바다‘로부터 구원할 수 있는 꿈이 된다. 노랑색은 밝고 따뜻한 색이며, 마치, 유치원의 어린 아이들처럼, ’나만의 행복한 세계‘로 잠입해 들어가게 해주는 색이다. 노랑색은 우리 인간들에게 동화적인 아름다움과 그 행복감을 가져다가 준다. 또, 그리고, 보라색은 남색과 자주색이 섞인 색이며, 우리 인간들의 마음에 더없는 안정감과 따뜻함을 가져다가 준다. 따라서 ’보랏빛 희망‘이라는 말이 있듯이, 보라색은 그에게 ’고통을 견디는 방법‘을 들려주게 된다. 청운의 푸른 꿈은 어떠한 고통도 즐겁고 기쁘게 생각하게 하고, 또한 청운의 푸른 꿈은 ’나만의 행복한 세계‘로 인도해준다. 만일, 행복이, 네 마음과 네 의지 속에 있는 것이라면, 청운의 푸른 꿈 속에는 모든 행복이 다 들어 있다는 것이 된다. 박종국 시인은 어머니와도 같은 大德의 마음과 어린 아이와도 같은 티없이 맑고 깨끗한 마음을 지녔고, 또한, 사나이 대장부로서의 장엄하고 웅대한 기상을 지녔다.
박종국 시인의 무지개는 오색이며, 그것은 검정색, 흰색, 파랑색, 노랑색, 보라색으로 나타난다. 그는 최초의 명명자이며, 그 언어의 사원의 창시자이다. 검정색, 흰색, 파랑색, 노랑색, 보라색 등에게, 그 색깔과 그 색깔에 걸맞는 의미를 부여해주고 있으면서도, 그는 또다시 이렇게 능청을 떨어댄다. 이때의 능청이란 겸손함이며, 이 겸손함이 그 능청마저도 자연스럽게 만들어준다. “색깔 만들 때마다/ 옛날부터 내려오는 전언을 듣습니다/ 내가 듣는 자연의 말입니다/ 색깔 속에는 내 생이 들어 있어// 사람보다 사람같이 말하는// 색깔들의 말을 듣습니다”라고----. 어느 덧 박종국 시인이 부여해준 색깔이 말이 되고, 그 색깔의 말은 만인들의 심금을 울릴 수 있는 ‘자연의 말’(또는 ‘시인의 말’)이 된다. ‘예술이 자연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이 예술을 모방한다’라는 말의 참된 이치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나의 말은 색깔의 말이며, 그 색깔의 말은 자연의 말이다. 그리고 그 자연의 말은 이 세상에서 최고의 예술가인 시인의 말이 된다.
그러나 이제는 철두철미한 장인 정신이 전문가의 정신에 함몰되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또한 밝혀두지 않으면 안 된다. 만일, 전문가가 그가 다루는 기계나 물리학, 또는 그가 연구하는 사회학이나 문학에 국한된 어떤 것이라면, 그는 전문가의 울타리에 갇혀 있는 인간이지, 진정한 전문가는 결코 될 수가 없는 것이다. 마르크스가 경제학자로 출발을 해서 세계적인 대사상가가 되고, 아인시인타인이 물리학자로 출발을 해서 세계적인 대사상가가 되었듯이, 세계적인 대사상가와 예술가들은 그 전문가의 울타리를 뛰쳐나와 인류 전체와 이 세계 전체를 구원해냈던 현자들이라고 할 수가 있다. 부의 공정한 분배와 만인평등의 문제는 시간과 공간의 문제가 아니며, 어느 특정국가와 인종의 문제도 아니다. 또한 상대성 이론 역시도 시간과 공간의 문제가 아니며, 어느 특정 국가와 인종의 문제도 아니다. 왜냐하면 그 진리들은 그만큼 보편적이고 객관적이기 때문이다. 전문가는 일 자체를 사랑하는 사람이고 비전문가는 돈 자체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러나, 그가 제 아무리 일 자체를 사랑하는 사람일지라도 그가 그 전문가의 함정에 빠져 있다면, 그는 비전문가가 되고, 우리 인간들의 전체의 이익은 그의 눈앞의 사소한 이익(전문가의 이익) 때문에 더없이 훼손을 당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그 전문가의 한계를 뚫고 더 큰 바다로 나온다면, 그의 진리는 인상파 화가들의 색채처럼, 또는 소크라테스의 진리처럼 그 빛을 더하게 될 것이다. 진정한 전문가치고 돈 자체를 사랑하는 사람은 없으며, 또한 진정한 전문가치고 그 전문가의 한계를 뚫고 나오지 않은 사람도 없다. 그 전문가는 고귀하고 위대한 인물이며, 이 세상과 우리 인간들을 구원하는 문화적 영웅들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색채제조업자로서 스스로 그 색깔들을 만들고, 그 색깔들 하나 하나마다 독자적인 이름과 그 의미를 부여할 줄 아는 인간, 또, 그리고, 그 색깔들과 날이면 날마다 대화를 나누며 그 색채제조업자로서의 한계를 뚫고 나와, 이처럼 아름답고 뛰어난 시를 쓴 시인이 바로 그런 사람들인 것이다. 그가 “사람보다 사람같이 말하는/ 색깔들의 말을 듣습니다”라고 노래할 때,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검은색, 흰색, 파랑색, 노랑색, 보라색”의 무지개 빛깔----박종국 시인만의 무지개 빛깔로----로 더욱 더 아름답게 되는 것이다.
시는 그의 색깔이고, 색깔은 그의 시이다. 그의 색채론은 그의 언어론이며, 그의 언어론은 그의 색채론이다. 나는 그가 더욱 더 ‘색채론의 대가’로서, 혹은 진정한 시인으로서, 그 위업을 쌓아나가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