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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dDOHXzGnO_M
https://youtu.be/b4YlENFzyUQ
관자 [貫子]
망건의 조임 당줄을 거는 작은 고리
망건에 달아 당줄을 거는 구실을 하는 작은 고리.
그 재료에 따라 금관자, 옥관자 등으로 불리며 신분에 따라 재질의 제한이 있어서 신분을 상징하는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머리 양 옆면에 눈과 귀 사이 부분을 관자놀이라고 하는게 바로 망건을 착용하면 관자가 놓이는 부분이라 관자놓이라고 하던게 발음이 변해 관자놀이가 되었다.
망건을 쓰면 관자(망건끈을 매는 동그란 장식)가 놓인 위치에서 맥박이 뛸 때 관자도 같이 움직이므로 그 부위를 관자놓이, 관자놀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 관자 [貫子]
조선 시대, 망건의 당줄에 꿰는 작은 고리
내용
관자貫子는 권자圈子, 환자環子, 총환總環이라고도 하며, 조선시대 기혼 남성의 망건에 다는 장식의 일종이다. 망건은 상투 튼 머리가 흐트러지지 않게 이마에서 뒤통수에 걸쳐 두르는 것이며, 상부를 졸라매는 ‘당’과 하부를 졸라매는 ‘편자[邊子]’로 이루어져 있다. 관자는 편자의 좌우 귀 부분에 달며, 당줄을 관자에 걸어 머리에 동여맨 후 상투에 잡아맨다. 관자는 귀와 눈 사이에 있는 태양혈太陽穴 자리에 위치하게 되는데, 그곳의 맥이 뛸 때 관자가 움직인다는 데에서 ‘관자놀이’라는 용어가 생겼다.
관자의 기본형은 원형이다. 천원지방天圓地方의 개념에 따라 남성을 양陽인 원으로 표현하였고, 다양한 무늬로 장식하였다. 사대부들은 사군자류를 즐겨 사용하였으며, 특히 댓잎 세 잎에서 딴 삼죽엽三竹葉무늬가 많이 보인다. 그 밖에 나팔꽃·오이꽃·수초 등을 사용하였으며, 동물무늬로는 학이나 박쥐, 용이 머리와 꼬리를 휘감은 무늬인 반리문蟠螭文이 있다. 칠성七星, 일월日月 등을 무늬로 쓴 경우도 있다. 관자는 계급에 따라 재료와 무늬를 달리하였으며, 백정 등 천민에게는 허용되지 않았다. 『경국대전經國大典』 의장조儀章條에 1~3품 당상관의 관자는 금과 옥으로 규정하였으며 상세한 내용은 명시하지 않았으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의 망건환제변증설網巾環制辨證設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1품은 만옥권漫玉圈, 속칭 옥환玉環을 하였다. 2품은 나팔꽃·매화·오이꽃 및 쌍반권雙蟠圈의 금관자, 3품은 여러 꽃 모양 및 수팔련환자鎪八蓮環子의 옥관자를 하였다. 당하堂下 3품 이하 사서士庶는 대모玳瑁· 양각羊角·소 발굽[牛蹄]으로 만든 소권小圈을 사용하였으며, 서인庶人 중 사치한 자는 호박琥珀이나 명박明珀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후대에 사용된 예를 보면, 1품은 무늬 없이 질이 좋고 작은 옥관자인 도리옥, 정2품은 무늬 없는 소형 금관자인 도리금, 정3품은 꽃·대나무·연꽃 모양 등을 조각한 대형 옥관자를 사용하였다. 당하 3품 이하 서인은 뼈나 뿔, 대모, 마노, 호박 등을 사용하였으며 상인喪人은 소 발굽을 사용하였다. 품계가 높을수록 금옥金玉의 크기가 작고 간소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교만하고 자만심 높은 풍습을 억제하려는 뜻을 나타낸 것이다.
금·옥관자는 매우 귀한 것으로 사치 금제의 대상이 되었으며, 옥관자는 왕의 특별 하사품으로 내려지기도 했다. 『가례도감의궤嘉禮都監儀軌』, 『상방정례尙方定例』를 보면, 왕이나 왕세자, 부마의 의복으로 옥이나 금관자가 사용된 것을 알 수 있으며, 1882년 순종 가례 관련 「궁중발기宮中發記, 宮中撥記」에는 산호·비취·순금·옥으로 만든 관자가 기록되어 있다. 국상國喪 때 종친 및 문무백관은 흰색 선을 두른 망건을 착용하였는데, 대상大喪(임금의 상사)에만 금·옥관자를 제거하고 자전상慈殿喪(임금의 어머니의 상사)에는 그대로 착용하였다. 연산군 대에는 왕과 내관이 진향進香 때 상아 관자를 착용한 기록이 있다.
특징 및 의의
관자는 기혼 남성의 상투를 정리하는 망건에 다는 장식이다. 망건의 당줄을 걸어 넘겨 고정하는 기능을 하는 한편, 그 재료와 무늬에 따라 직품職品을 구분하는 사회적 역할을 하였다. 금·옥관자를 가장 귀하게 여겼으며, 지위가 높을수록 무늬가 없이 간소하고 소박한 것을 착용하는 절제와 겸손의 미를 보여 주었다. 그 형태에 음양오행의 원리를 담고, 무늬를 통해 사대부의 덕과 농경사회의 백성을 풍요롭게 하는 뜻을 표현하는 등, 관자에는 조선시대 선비들의 마음이 깃들어 있다.
참고문헌
우리 옷과 장신구(이경자·장숙환·홍나영, 열화당, 2003), 장신구사(서지민, 시각, 1986), 조선시대 예복과 장신구(이화여자대학교 담인복식미술관, 2015), 한국복식사전(강순제 외, 민속원, 2015).
망건에 관한 속담>
*망건 쓰다 장파한다
망건을 이리저리 고쳐 쓰느라 꾸물대다가 장에 갔더니 이미 장이 다 끝났다는 뜻으로 사소한 일에 뜸을 들이다가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치는 것을 이르는 말
*망건 쓰고 귀 안 빼는 사람 있느냐
망건을 쓰면 누구나 조금이라도 편하게 귀를 내놓는다는 뜻으로, 돈 버는 일이나 먹는 일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망건 쓰고 세수한다
세수를 하고 머리를 빗고 그 다음에 망건을 쓰는 법인데 망건을 먼저 쓰고 세수를 한다는 뜻으로, 일의 순서를 바꾸어 함을 놀림조로 이르는 말.
무슨 망근 쓰고 왔노 / 외올 망근 쓰고 왔네
무슨 풍잠 달고 왔노 / 옥각 풍잠 달고 왔네
무슨 관자 달고 왔노 / 옥 관자를 달고 왔네
무슨 동곳 꽂고 왔노 / 산호 동곳 꽂고 왔네
무슨 갓끈 달고 왔노 / 구슬 갓끈 달고 왔네
- 놋다리 노래 중
주요작품
 방장걸이 유소, 발 망건, 이수여,
59X9cm망건(Manggeon-Headband)
이수여 선생의 망건 기능은 딸인 강전향 선생이 전수하기 전까지 거의 유일한 보유자였다. 당연히 비교 불가능한 절대적 지위를 가지고 있을뿐더러, 동시에 평생을 반복해 숙달한 기능의 완성도 또한 달리 비교대상이 없다. 그 동안 수없이 만들어 온 예민한 손끝 감각이 노련하게 잘 발휘되어 온 감동을 느낄 수 있다.
비단처럼 섬세하면서도 물들일 수 없는 엄격한 검은 빛
망건은 말총이나 인모(人毛)로 바닥을 짜서 만든 의관이다. 즉, 성인 남자들이 갓을 쓰기 위하여 앞머리를 가리고 망건을 쓰는데 그 위에다 갓을 쓰므로 망건은 갓에 속하는 부대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망건은 일종의 사치품으로 머리를 장식하는 의관인데 보통 편자 앞, 뒤로 구성되며 편자는 날줄과 씨줄을 늘어뜨려 베 짜듯이 바닥을 짜고 앞과 뒤는 올 하나 하나를 손으로 걸어나간다.
망건의 제작은 말총에 한하지 않는다. 총이 가는 것일수록 고운 제품이 되기 때문에 때로는 인모(사람의 머리카락)망건을 가장 섬세하고 정교한 것으로 귀히 여기기도 한다. 망건은 말총과 인모를 재료로 하는데 대부분은 말총을 많이 사용하며 헌 망건을 수리할 때는 인모를 사용한다. 망건은 발생 이후 조선시대 말엽까지 성인 남자들이 외출할 때 의관을 정장하는 것으로 필히 사용했기 때문에 일제 침략 이전까지는 대성업을 이루었다. 그때는 망건 만드는 일을 직업으로 삼는 사람도 많았고 국가기관에도 망건을 만드는 장인(匠人)들이 있었다. 또, 망건은 지방마다 특징이 있는데 통영 망건은 섬세하고 질이 좋았으며, 서울 망건은 편자가 좋고, 논산의 망건은 뒤가 제일이고, 황등의 망건은 앞이 제일이며, 또 김제의 망건은 당이 좋다고 하여 매우 우수한 제품들이었다고 전한다. 조선시대 말엽의 망건은 김제, 공주, 제주, 논산, 서울 등지에서 많이 만들었는데, 특히 공주감영(公主監營)에 사는 양화일, 양화백 형제가 고종 때에 망건을 잘 만들어 왕에게 바치니 왕이 칭찬하고 전국 망건제작의 특권을 얻었다는 말도 전해오고 있다.
망건은 중국에서 창안되어 조선초기에 전래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은 중국의 망건을 말총이란 재료로 바꾼다거나 형태도 간편하게 미적으로 개선하는 등 조선적인 미의식을 가미하였다. 결국 조선의 말총망건은 명나라의 망건양식을 전수한 것이지만 그것의 재료와 형태를 독창적으로 발전시킨 조선식의 특수한 수공예품으로 자리매김한 셈이었다. 조선 후기에 이르면, 망건의 착용이 유행하면서 신분에 따른 관자의 착용이 정착되자, 국가에서는 망건의 제작과 관자의 부착을 전담하는 수급체제로 전환하였다. 망건장의 역할은 말총으로 망건을 짜는 역할로 제한되고, 망건을 다듬고 비단천을 붙이고 관자를 다는 마무리작업은 관자장의 역할이 되었던 것이다. 조선 후기가 되면 망건은 말총이 많이 생산되는 지역에서 민간 수공품으로 대량으로 제작되어 왕실의 수요를 충당할 수 있었다. 그로 인해 정부에서 운영하는 상의원이나 임시로 설치하는 도감에서도 따로 망건장을 동원할 필요가 없었다. 조선후기까지 성행하던 망건제조업은 1895년 고종 32년에 단발령이 발표되면서부터 차츰 그 성업이 사라지기 시작하여 일제 침략 이후부터는 갑자기 삭발을 하게 되어 거의 사라지기 시작하였다. 더욱이 현대에 이르면서 상투가 없더라도 모양새를 위해 갓이나 탕건은 착용할지언정 망건은 그 착용례가 적어서 가장 이른 시기에 제작자가 거의 사라져 버렸다.
13세부터 망건을 만든 이수여 선생
제주도의 제주시 삼양동에 거주하고 있는 이수여 선생은 13세때부터 망건을 만들던 장인이다. 망건을 만드는 집안에서 태어나 자라면서 망건을 태생적으로 접했다. 모든 사람이 이 일을 하며 사는 거라고 여길 만큼 망건 일은 몸의 일부처럼 자연스런 것이었고, 사는 것 자체이기도 했다. 한눈 한 번 팔지 않고 그야말로 앞만 보고 외길을 내쳐 달려 온 인생이었다. 삶 전체가 망건이고 망건이 그의 인생이 되었다. 1985년에 임덕수 보유자가 사망하고 나서 무형문화재 지정을 위해 조사자가 제주를 방문했을 당시 망건을 제작할 수 있는 유일한 장인이 바로 이수여 선생이었다. 이수여 선생이 망건장의 보유자로 인정을 받게 된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유일한 기능보유자인 만큼 선생의 활동범위 또한 필요한 모든 곳에서 폭넓게 전개되었다. 4.3사건 후 이수여 선생의 남은 유일한 혈육은 무남독녀인 딸 강전향 선생뿐이었다. 강전향 선생은 어려서부터 어머니를 도우며 어깨 너머로 망건제작기술을 익히기 시작하여, 현재 보유자로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2001년에 무형문화재 기록영화를 찍으면서 편자짜기는 강전향 선생이 전 과정을 실연하였으며, 어머니의 뒤를 이어 제주 망건의 전통을 손색없이 전수하고 있다.
재료와 제작과정

망건은 말총과 바늘로 엮어 만든 머리를 간추리는 싸개의 일종이다. 망건의 재료는 본래 비단이었으나 조선시대 선조들은 값비싼 수입 비단을 대체하고자 국산이면서 질기고 광택이 아름다운 말총을 선택하게 되었다. 말총으로 망건을 만들기 위해 사용하는 도구는 총바늘을 비롯하여 일상 삶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자잘하고 소소한 소도구들을 적절하게 응용하고 활용하였다.
당골과 골걸이
말총: 본래 중국에서는 투명한 비단에 짙은 옻칠을 하여 만들었으나, 우리나라에서 비단은 수입품이기 때문에 값이 비싸서 사용하기 어려웠다. 이러한 재료를 대체할 재료로서 말총을 선택하게 되었는데 말총은 말목장만 있으면 어디서든지 쉽고 값싸게 구할 수 있는 국산재료였다. 재료적인 면에서 말총의 특성은 질기고 표면이 매끄러워 위생적이다. 아울러 말총은 광택이 있어서 시각적인 아름다움도 충족시키기 때문이다. 또한 그 성분이 사람의 머리카락에 흡사하고 검은 색상 또한 비슷하기 때문에 조선시대 선비를 비롯한 성인 남자들이 머리를 간추리는 용도의 망건으로는 최상의 재료였던 것이다.
당골: 망건 위쪽에 당을 걸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도구로 목재는 박달나무가 주로 사용되며, 물에 넣고 삶기 때문에 물기가 잘 먹지 않는 것이 좋다.
골걸이(쳇대기) : 망건을 짜기 위해 몸골이나 당골을 올려놓는 일종의 받침대
약력
1923년출생
1980년전승공예대전 장려상(탕건), 입선(망건)
1987년국가무형문화재 제66호 망건장 기능보유자 인정
1988년-1991년경복궁내 전통공예관 작품제작 시연
2005년-2006년‘경마축제’ 작품제작 시연(제주경마장)
2006년
제주컨벤션센터 ‘보유자 작품전’ 작품제작 시연
남북전통공예교류전 출품
2008년
국가무형문화재 제66호 망건장 공개행사 시연
부천세계무형문화유산엑스포 출품
2009년국가무형문화재 제66호 망건장 명예보유자 인정
과거 선비들의 머리띠...전통 의관의 한 요소
무형문화재 66호 망건장...말총으로 제작, 주요 생산지는 조천읍

망건은 갓을 쓰기 전에 머리카락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쓰던 일종의 머리띠다.
고려 말·조선 초부터 만들어진 망건은 한국 전통의관의 일부로써 성인 남자가 외출할 때 반드시 갓을 써야 했기 때문에 일상에서 필수품이었다. 또 조선시대 사대부는 관례(冠禮), 즉 성년의례와 함께 상투를 틀고 망건을 둘렀다. 곧 망건은 어른이 됐다는 상징 중 하나였다.
하지만 망건은 개화 후 1895년 단발령에 따라 사람들의 머리가 짧아지면서 점차 사라졌다.
망건은 중국 명나라 때 생겨 조선 초기에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한국인의 정서와 환경에 맞춰 토착화하는 과정을 거친 결과 망건 형태와 재료는 중국의 것과 달라졌다. 중국에선 망건 재료가 비단이었지만 한국에선 말의 꼬리털인 말총이었다. 말총 망건이라고 불린 이유다. 말총을 이용한 망건 제작기술은 거꾸로 중국에 ‘역수출’됐다고 전한다.
망건장(網巾匠)은 망건을 제작하는 기술이나 해당 기술을 가진 사람을 일컫는 용어로 중요 무형문화재 제66호로 지정·보호되고 있다. 기능보유자는 강전향씨(71·제주시 삼양동)다.
망건은 맨 아랫부분에 해당하는 편자(하대)와 중간부분인 바닥, 상단부인 당으로 구성된다.
관자貫子)와 풍잠(風簪)은 망건을 화려하게 꾸미는 장식품이다. 망건 끈을 잡아매는 고리인 관자의 재료는 신분에 따라 엄격히 제한됐다. 일품(一品)은 옥관자, 이품(二品)은 금관자, 당상관은 흰 옥관자를 착용했고 당하관 이하는 거북 등껍질이나 양의 뿔로 만든 관자를 썼다.
망건 제작은 편자를 머리 둘레 길이로 짜는 일에서 시작된다. 이때 날과 씨는 모두 말총으로 대는데 말총은 부러지지 않도록 물에 적셔 사용한다. 편자가 완성되면 망건골(망건 모양 틀)에 걸고 말총을 바늘에 꿰어 바닥을 짜는데 뒷바닥은 촘촘하고 이마에 닿는 앞가리는 성글게 뜬다.
여기에다 신축성을 확보하기 위해 당을 건 후 일정한 모양을 유지하도록 망건골에 씌운 채 그대로 삶아내면 짜고 겯는 작업은 마무리된다. 이어 당에 당줄을 걸어 매고 편자와 바닥에 명주싸개로 선을 둘러 견고함을 높인 뒤 관자를 붙이면 망건 제작이 완성된다.
편자를 짜고 당을 거는 과정까지 체의 틀을 3개 붙인 ‘체떼기’가 작업의 받침대로 사용된다.
한 향토사학자는 “망건 제작은 섬세한 공예작업인 만큼 얼마나 예쁘면서 견고하게 만드느냐에 따라 실력이 판가름 났다. 또 말총의 질도 제품 수준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였다”며 “망건은 전통 의관을 구성하는 요소로 제주에선 조천읍 일대가 주요 생산지였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