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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분명히 보았으므로
창 26:26-35
26 아비멜렉이 그 친구 아훗삿과 군대 장관 비골과 더불어 그랄에서부터 이삭에게로 온지라
27 이삭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를 미워하여 나에게 너희를 떠나게 하였거늘 어찌하여 내게 왔느냐
28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으므로 우리의 사이 곧 우리와 너 사이에 맹세하여 너와 계약을 맺으리라 말하였노라
29 너는 우리를 해하지 말라 이는 우리가 너를 범하지 아니하고 선한 일만 네게 행하여 네가 평안히 가게 하였음이니라 이제 너는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니라
30 이삭이 그들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매 그들이 먹고 마시고
31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서로 맹세한 후에 이삭이 그들을 보내매 그들이 평안히 갔더라
32 그 날에 이삭의 종들이 자기들이 판 우물에 대하여 이삭에게 와서 알리어 이르되 우리가 물을 얻었나이다 하매
33 그가 그 이름을 세바라 한지라 그러므로 그 성읍 이름이 오늘까지 브엘세바더라
34 에서가 사십 세에 헷 족속 브에리의 딸 유딧과 헷 족속 엘론의 딸 바스맛을 아내로 맞이하였더니
35 그들이 이삭과 리브가의 마음에 근심이 되었더라
창 26:26-35 / [이삭과 아비멜렉이 계약을 맺다] 어느 날 아비멜렉이 그의 고문관 아훗삿과 군대사령관 비골과 함께 그랄에서 이삭을 찾아왔다. 27) 그러자 이삭은 `그대가 나를 보기 싫어하여 나를 떠나 보내고서는 또 무슨 볼일이 있어서 나를 찾아왔소?' 하고 퉁명스럽게 물었다. 28) 그러자 그들이 대답하였다. `여호와께서 그대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우리가 분명히 알게 되었소. 그러니 우리를 너무 나무라지 마시고 또 우리를 서운하게 생각지 마시오. 그대와 내가 서로 이러이러한 일을 하지 않고 또 어떤 경우에는 이러이러하게 하겠다고 맹세를 하고 조약을 맺읍시다. 29) 우리가 그대를 해치지 않았으니 그대도 우리를 해치지 않겠다고 분명히 약속하시오. 우리가 그대에게 그래도 잘해 주지 않았소? 그대를 보낼 때 그대에게 뭐 잘못한 일도 없지 않았소? 여호와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려 주신 것이 분명하다는 것을 난 잘 알고 있소' 30) 그래서 이삭은 잔칫상을 차려 놓고 그들과 함께 먹고 마셨다. 31) 다음날 아침 그들은 일찍 일어나 어제 이야기하였던 내용대로 서로 신의를 지키기로 맹세하고 조약문에 함께 도장을 찍었다. 그리고 이삭이 그들을 보내자 그들은 평안히 그곳을 떠나갔다. 32) 그날 이삭의 종들이 와서 자신들이 우물 하나를 팠다고 이삭에게 알렸다. 33) 그래서 이삭은 그 우물을 `맹세'라는 뜻으로 세바라 지어 불렀고 그 우물이 있는 성읍은 오늘날까지도 브엘세바라고 불린다. 34) [에서의 아내들] 에서의 나이 40세가 되었을 때 헷 사람 브에리의 딸 유딧과 헷 사람 엘론의 딸 바스맛을 아내로 맞아들였다. 35) 이삭과 리브가는 이러한 에서 때문에 걱정을 하였다.
본문은 아비멜렉이 군대를 이끌고 크게 강성해진 이삭을 찾아와 평화의 조약을 맺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의 종들이 또 다시 우물을 파서 물을 얻는 복을 받습니다.
평화 조약을 요청한 아비멜렉(26-29) 아비멜렉이 군사들과 함께 찾아와 이삭에게 서로 맹세하고 계약을 맺자고 요청합니다. 이전에 이삭을 떠나라고 명령했던 아비멜렉이 지금은 간절히 계약을 맺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아비멜렉이 평화조약 맺기를 요청하며 이삭에게 말하기를 “너는 우리를 해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아비멜렉이 이삭을 통해 하나님을 분명히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삭이 여호와께 복을 받는 자임을 보았고 그것을 인정하였습니다(28). 이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이삭이 그들에게 두려운 존재가 된 것입니다.
잔치를 베푼 이삭(30-33) 아비멜렉 일행에 대한 이삭의 행동은 세상을 살아가는 성도의 삶의 표본이 됩니다. 이삭이 그들을 위해 잔치를 베푼 것은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말씀을 실천하는 삶을 보여 줍니다. 이삭은 진정 평화의 사람이며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지금까지 평화의 사람 이삭의 삶은 순탄치만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삭이 늘 보여 준 모습은 하나님의 말씀을 충성스럽게 따르고 사람들을 평화적으로 대하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삭이 아비멜렉과 언약을 맺은 날에 이삭의 종들이 우물을 판 소식을 전합니다. 이삭은 그곳을 아비멜렉과 맹세의 계약을 맺은 증거로 삼기 위해 맹세란 의미의 세바라 불렀고, 그 성읍의 이름은 브엘세바로 불리게 됩니다.
이방여인을 아내로 맞이하는 에서(34-35) 에서는 아버지인 이삭처럼 40세에 아내를 맞이했습니다(25:20). 그러나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의 간절한 소망을 따라 가나안 여인이 아닌 고향의 친족 중에서 아내를 찾은 반면(24:3-4), 에서는 자기가 보기에 좋은 대로 헷 족속의 딸을 아내로 맞이했습니다. 이것이 이삭과 리브가의 마음에 근심이 되었습니다(35). 에서가 장자권을 가볍게 여겨 야곱에게 넘긴 것과 같이 에서의 결혼은 부모의 가르침이나 신앙의 본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에서는 그의 부모 이삭과 리브라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어서 아브라함의 신앙의 유산을 이어받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선택과 행동은 하나님을 떠나 사는 불신앙의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자녀의 신앙을 잘 지도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큰 교훈을 줍니다.
적용: 이삭은 흉년을 만났고 아비멜렉의 견제와 토착민들로부터 자신의 것을 빼앗기는 일들로 인해 마음에 근심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의 아들인 에서의 결혼이 이삭에게 근심이 되었습니다. 요즘 어떤 근심거리들을 가지고 있으며, 어떤 방법으로 해결하고 있습니까?
베들레헴에 가면 그곳에 예수께서 나신 곳을 기념해서 주후 4세기에 큰 예배당을 지은 것이 지금까지 있습니다. 돌로 튼튼히 잘 지었고 그 안에 들어가 보면 화려하고 아름다운 모자이크로 성화를 그렸고 강단 밑에는 바로 예수님께서 나신 곳이라고 대리석에 별표를 만들어 놓은 것을 볼 수 있다합니다. 그러나 예배당의 특성은 들어가는 문이 하나밖에 없고 그것도 매우 낮으며 작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내자에게 그 이유를 물으니 “이 예배당에 들어오는 사람은 겸손해야 하는 까닭으로 이렇게 만들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아닌게 아니라 낮고 작은 문으로 들어가려면 머리를 숙이고 허리를 굽혀야 들어 갈 수 있습니다. 겸손해야 들어 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겸손한 자를 찾으십니다.
< 설 교 >
성도가 세상에 보여줄 것
십여년 전, 동남아시아의 어떤 나라 도시 식당에서 저녁을 먹으려는데 갑자기 전기가 나갔습니다. 그러자 즉시 부르릉하고 자가발전기가 가동되어 불이 다시 들어오는 것이었습니다. 며칠 뒤에 보니까 또 그랬습니다. 그래서 물었더니, 전기공사의 사장이 발전기 공장도 갖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아프리카의 어느 나라에서는 경찰이 차들을 세워서는 타이어를 검사하고 웬만한 타이어는 교체하라고 명령하는 것이었습니다. 왜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그 나라의 대통령이 타이어공장을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지금은 아마도 다 좋아졌을 것입니다.
오늘의 대한민국은 어떻습니까? 취객이 파출소에 와서 행패부리고 방화하는 나라, 정당에 정치자금을 주지 않으면 당선되고 나서 보복으로 회사 망하게 하는 나라, 주민들이 경찰관 보는 앞에서 군수를 폭행하고, 경찰차에 불을 지르는 나라입니다. 이 나라가 정상입니까? 공무원들이 뇌물에 길들여지고, 회사는 제품치나 기술로 성공하려고 하지 않고 비자금을 준비해서 정권에 줄을 대기에나 바쁜 나라, 일은 안하고 파업이나 주도하는 노조의 임원을 회사가 월급주는 나라, 어찌하여 우리 나라가 이 모양이 되었습니까? 도대체 어떻게 해야 바로잡힐 수 있을까요? 누가 이 나라를 바르게 할 수 있을까요?
옛날에, 김신조등 북한이 밀파한 무장공비 34명이 청와대를 폭파하기 위해 침투했을 때 한국은 위기를 맞이했었습니다. 백 명도 못되는 공비였지만 대한민국에게는 큰 위기였습니다. 그래서 그 뒤로 우리는 많은 대비를 하게 되었습니다. 만일 지금 1천명의 무장공비가 땅굴을 통해 서울에 침투했다면 어떻게 될까요? 아마 큰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런데 1천명이라는 숫자는 그렇게 많은 숫자는 아닙니다. 서울시민의 0.1%도 못되는 작은 숫자입니다. 그런데도 무장공비 천명은 서울 시내가 아니라 대한민국을 발칵 뒤집을 만한 숫자가 될 것입니다. 그들은 소수로도 엄청난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인구의 25%가 기독교인입니다. 1천 만 명이라는 엄청난 숫자가 예수를 믿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천만 명이 이 땅에서 밤낮으로 활동하건만 우리 사회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고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있는지 없는지 도대체 표가 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우리 기독교인들은 세상에 보여준 것은, 숫자만 많지 별것도 아닌 사람들이라는 인상만 심어 주었을 뿐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살아야 합니까?
이삭은 흉년을 만나 불레셋 땅 그랄로 내려갔었습니다. 거기서 그는 흉년을 피할 뿐만 아니라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부자가 되자 불레셋 왕과 백성들이 그를 드러내놓고 괴롭히기 시작했습니다. 이삭은 오랜세월 괴로움을 당하면서도 한번도 싸우지 않고 꾹 참고 하나님의 해결만을 기다렸습니다. 얼마나 힘든 세월을 보내었는지 모릅니다. 그렇게 얼마를 지내고 나니까, 불레셋 왕인 아비멜렉이 군대장관인 비골을 대동하고 와서 이삭에게 너와 나와 이제는 싸우지 말자고 화친을 맺자고 제의하는 것이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삭이 뭔가를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본문을 통해서 성도들이 세상에 무엇을 보여주면서 살아야 하는지를 배우고자 합니다.
이삭이 부자가 되자 그동안 그를 보호해주던 불레셋 왕 아비멜렉의 태도가 돌변했습니다. 그가 신하들을 시켜 이삭을 괴롭게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삭이 사용하는 우물을 흙으로 메워버리고는 이 동네에서 나가라고 몰아내었습니다. 이삭은 거기서 쫓겨나서 다른 동네로 가서 우물을 팠더니 물이 나왔습니다. 그러자 아비멜렉의 종들은 거기까지 찾아와서 다시 우물을 빼앗으면서 이것은 우리 것이니 떠나라고 또 쫓아냈습니다. 그렇게 여러번 하다가, 이삭이 르호봇이라는 곳에 가서 우물을 파자, 그들은 더 이상은 쫓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거기서 거주하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이삭이 거기서 가만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가 흉년에 물질을 얻으려고 이방 땅 그랄로 내려갔었는데, 그곳에서는 물질은 얻었지만 많은 시련과 고통도 함께 얻었습니다. 그는 거기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물질은 축복이긴 하지만 고난도 겸하는 축복이라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세상에서 물질이 많으면 도적과 강도가 주변에 끓게 되고, 명예를 얻으면 시기하는 사람이 생기게 되고, 권력을 얻으면 죽이려는 정적이 생기게 됩니다. 세상의 축복은 완전한 것은 없다는 것을 거기서 배웠습니다. 물질을 위해 세상길로 가면 물질은 얻을 수 있지만 신앙적으로는 손해를 본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것을 깨달은 이삭은 거기서 브엘세바로 올라갈 결심을 했습니다.
브엘세바는 맹세의 우물 이라는 뜻을 가진 동네로, 불레셋 국경을 넘어서 가나안땅에 속한 곳이었습니다. 브엘세바에서는 일찍이 아브라함의 첩 하갈이 사라에게서 쫓겨나 아들 이스마엘을 업고 여기에 와서 방황하다가 목이 말라 죽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를 위로해주시고 샘물을 발견하게 해주셔서 그들을 살려주신 곳이었으며(21:14-19), 얼마 전에는 아브라함이 불레셋 사람들의 괴롭힘을 당하고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함께하심을 보여주셔서 아비멜렉이 찾아와서 서로 해치지 말자고 불가침조약을 맺은 곳이기도 했습니다(21:31-). 이삭은 신앙인답게 살기 위해서, 르호봇을 떠나 브엘세바로 올라갔습니다.
그가 브엘세바에 도착하던 날 밤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 밤에" 란, 그가 돌아오던 밤에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신앙을 버리고 물질을 따라 갔다가 돌아온 사람을 오랫동안 모른 체 하지 아니하시고 그가 돌아온 그 밤에, 즉시로 맞아주시는 광경입니다. 얼마나 감사한지 알 수 없습니다. 탕자가 아버지의 재산을 다 탕진하고 돌아왔지만 아버지는 날마다 동네 밖까지 나가서 기다리고 있다가 달려가서 맞아주었습니다.
우리가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의지하기만 하면 하나님은 즉시 붙들어주시고 이끌어주시는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품에서 사는 사람은 세상에 뭔가를 보여주며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그 밤에 나타나신 하나님은 이삭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너희아비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니 두려워 말라. 내 종 아브라함을 위하여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복을 주어 번성케 하리라." 이삭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물질이 아니라 위로였을 것이고 불레셋 사람들에게 쫓기는 자기와 함께해 줄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그 둘을 다 주셨습니다. 위로를 주셨을 뿐 아니라, 동행의 약속을 해주셨습니다. 주님은 돌아오는 자에게 이 둘이 되어 주십니다.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동행의 하나님이십니다.
이삭은 그 고마우신 하나님께 제단을 쌓아 응답했습니다.
1) 그는 그곳에 제단을 쌓았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표현이 감사의 제단이었습니다.
그는 과거에 아버지가 하나님께 예배하는 제단에 참여하기는 하였지만 자기 스스로 하나님께 제단 쌓으면서 예배한 것은 처음인 것 같습니다. 그의 신앙이 성숙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우리가 기도하고 찬미할 때, 감사할 때, 우리가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과 도우심을 경험하게 되며, 그때에는 나도 모르게 "주여, 주여" 하게 됩니다.
이것이 은혜생활입니다. 이삭은 하나님을 만나고 나서 감사와 감격에 겨워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은혜가 충만하였다는 말입니다.
3) 그리고 거기에 장막을 쳤습니다. 종들은 거기서 오래 거주하려고 우물을 팠고, 장막을 쳤습니다. 그가 브엘세바에 장막을 친 것은, “이제는 주님 곁에서 살겠습니다. 이방 땅인 그랄에 내려갔다가 혼이 났습니다. 이제는 주님 곁에서만 살겠습니다. 주님만 의지하렵니다. 물질보다는 하나님 중심의 생활을 하겠습니다.” 라는 의지의 표현이었습니다. 이것이 참 신자의 모습입니다.
이렇게 신앙이 새로워지고, 마음이 안정되었을 때, 또 하나의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불레셋왕 아비멜렉과 그 군대장관 비골이 이삭을 찾아온 것입니다. 그가 왜 또 왔을까요?
이삭이 그들에게 퉁명스럽게 물었습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찾아왔느냐? 언제는 나를 미워하여 떠나게 하더니, 이제는 왜 나를 찾아왔느냐?”
그러자, 이삭을 찾아온 그들이 예상치 못한 대답을 했습니다.
"우리는 너희를 해치려고 온 것이 아니라. 사과하고 도움을 얻으려고 왔다. 우리는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하시는 것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으므로 우리가 너와 언약을 맺으러 왔다" 고 하였습니다. 이 어떻게 된 일입니까? 그동안 그렇게 이삭을 못살게 굴던 그들이, 여러 번 이삭이 판 우물을 빼앗고 말도 안 되게 핍박하던 그들이 어떻게 이렇게 변할 수가 있습니까?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변하게 만들었습니까? 무엇이 이삭의 지위를 이렇게 달라지게 만들었습니까? 이삭이 그들에게 무언가를 보여주었다는 말입니다. 이삭에게서 그들이 무엇인가를 보았다는 말입니다.
아비멜렉이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으므로 우리의 사이, 곧 너희와 우리사이에 맹세를 세워 너와 계약을 맺으리라 말하였노라."
무엇을 보았다고요? 하나님께서 이삭과 함께 하시는 모습을 그들의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태도가 그렇게 변했던 것입니다. 어떻게 보여주었습니까?
이삭이 그들에게 하나님을 보여주려고 의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살았을 뿐입니다.
이삭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은 무엇일까요?
이삭은 물질을 위해서 비리를 저지르며 비굴하게 살지 않고 성실하고 당당하게 살았습니다.
- 오늘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 중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물질 때문에 죄를 짓고 있습니다.
이삭은 불신자와 물질로 경쟁하지 않았습니다. 성도는 물질이 전부라고 생각하고 살지 않는 사람입니다. 물질은 이 세상에서 편리를 보장해주긴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물질이 풍성하고도 불행한 사람이 얼마든지 있고, 물질이 부족하여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이삭의 생각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물질 때문에 세상 사람과 맞서 싸우지 않고 양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힘이 약해서가 아니라, 내가 싸우지 않아도 하나님이 이기게 하신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삭의 경우 여러 번 우물을 빼앗겼지만 한번도 맞서 싸우지 않고 그냥 양보만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가 다른 곳에 가서 우물을 파는 족족 물이 나오게 하심으로서, 그에게서 우물을 빼앗은 사람들이 도리어 깜짝 놀라고 두려워하게 만드셨습니다. “야, 저 배후에는 누가 있구나.” 하고 겁을 먹고 제 발로 찾아왔던 것입니다.
이삭이 그동안 보여준 것은 맞서 싸울 줄도 모르는 유약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하나님이 저 사람과 함께 하시는구나 하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이삭은 피했고 양보했지만 그가 양보하고 물러가서 새 샘을 팔 때마다 물이 솟는 그것이,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임을 보여주었습니다.
샘을 빼앗기고도 낙심하지 않고 말없이 물러나서 다시 샘을 파는 그 모습이, 하나님께서 다시 샘을 주실 것이니 너희들과는 싸울 필요조차 없다는 자신감으로 보였다는 말입니다.
누가 싸움을 걸어와도 싸우지 않고 양보하고 빼앗기면서도 당당하게 자기 길을 가는 모습, 너희가 내 우물을 빼앗았지만, 나에게는 또다시 주실 분이 있다고 믿는 자신만만한 모습,
그리고 부자가 되고서도 물질에 집착하지 않고 하나님 곁에서 살려고 하는 그 모습에서, 보통사람과 다른 모습을 보았고 자기들이 힘으로 경쟁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괴롭히던 사람들이 180도 완전히 바뀌어져서 이제는 친하게 지내자고 화친을 청하러 온 것입니다. 아비멜렉의 태도가 변한 것은, 하나님의 손길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삭이 힘들고 어려울 때 강한 사람을 찾아가서 빌고 사정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께로 갔기 때문입니다. 주님께 다가가면,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고 맞아 주시고 강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십니다. 세상이 우리를 건드릴 수 없게 해 주십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하나님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약4:7-8)
우리가 주님께로 가까이 가면 주님은 분명히 우리와 함께 해주시며, 우리를 보호해 주십니다. 그러면 남들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을 보게 되어있고 우리는 강한 자가 됩니다. 우리를 해치려는 원수가 있다 할지라도 그가 우리를 당할 수가 없음을 알고 친구하겠다고 찾아오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말 도움이 필요하거든 강하게 보이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찾아야 됩니다. 정말 힘이 들거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사람들도, 물질도 나를 찾아옵니다. 그러나 내가 사람들을 찾아가면 사람들도 물질도 나를 피합니다. 이것이 원리입니다.
성도가 이 세상에 살면서 가져야 할 태도는 성실하고 진실하게 사는 모습입니다. 당당하게 자기의 길을 가는 모습입니다. 겸손하게 하나님만 의지하고 말씀에 순종하는 모습입니다. 그렇게만 살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높여주셔서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게 해주십니다.
다시 한번 확인해 봅시다. 이삭이 그랄에서 곤경에 빠졌을 때 아비멜렉을 찾아가 사정했더라면, 그의 허약함이 노출되어 더욱 자신 있게 짓밟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만 의지하고 사람에게 양보했더니 하나님은 파는 곳마다 물을 주셨습니다. 그 모습을 그를 해치던 아비멜렉도 보게 해 주셨습니다. 결국 이삭을 해치려던 아비멜렉이 제발로 찾아와서 친절하게 지내자며 화친을 청했고, 이삭이 도리어 강자가 되었습니다.
29절하에 보면, 아비멜렉의 입으로 "이제 너는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니라.” 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만 인정받으면, 온 세상이 그를 높이게 되어있는 것이 성경의 원리입니다.
이제 우리 믿는 성도들이 이 세상 사람들 앞에서 무엇을 보여주어야 할까요?
엘리야는 갈멜산 꼭대기에서 바알선지자들과 대결하여 단을 쌓은 뒤에 기도하면서 이렇게 요청하였습니다. “하나님만 참 신이신 것과, 내가 하나님의 종 된 것과, 내가 하나님의 명령대로 이일을 하는 것을 불로 응답하심으로서 보여주옵소서.”
우리도 세상에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보여줘야 합니다.
물질을 위해서 양심을 버리고 비굴하게 살며 거짓을 일삼는 사람이 아니라, 정도를 걷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순종하는 모습과, 어려운 문제를 만날 때마다 하나님 앞에 맡기고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줍시다. 그리하면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하시는 것을 이웃들이 보게 해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파는 우물도 어디서나 샘이 솟게 해 주실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에워싸고 괴롭게 하던 사람들이 두 손을 들고 하는 말이 "당신은 하나님께 복을 받은 사람이요! 우리가 그것을 똑똑히 보았으니 당신과 대결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소. 이제 나를 좀 도와주시오" 라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나와 홍해를 건너 40년 광야생활을 하면서 훈련받은 것이 있습니다. 앞으로 너희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 살게 될 텐데, 거기서 너희는 이렇게 살아야 한다. 엿새만 일하고 제 칠일은 철저하게 안식해서 너희가 하나님의 백성인 것을 주변의 사람들에게 보여주어야 하며, 너희가 거기서 얻은 물질은 십분의 일을 정확히 드려서 모든 물질의 주인이 하나님이신 것을 이방인들에게 보여주어야 하며, 너희는 거기에 있는 우상들을 철폐하고 오직 하나님만 섬겨서 세상에 섬기고 순종할 이가 천지의 주관자 하나님이심을 너희 주변의 백성들에게 보여주어야 한다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표식이었고, 그들이 그렇게 살 때, 이방인들은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심을 분명히 보고 그들 앞에서 감히 대항조차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을 떠나 우상숭배하며 구별된 모습을 보이지 못하면 즉시 이방인들에게 짓밟히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웃들에게 하나님의 사람이란 사실을 보여주며 사십니까?
우리가 진실하고 성실하게 살아서 복을 받으면, 이웃들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과 속이고 비리를 저지르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보게 될 것이고,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죄를 버리고 경건하게 사는 데 성공하면, 세상 사람들도 죄를 두려워하며 자세를 바로하지 않겠습니까? 전도자가 말로만 전도하지 않고 하나님의 손길,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외모와 재산과 지위가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사람인 것을 직접 보여주면서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진실하고 성실한 삶이요, 사람들과 경쟁하지 않고 양보할 수 있는 자신감이요, 어떤 어려운 일을 당할지라도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두려워하거나 절망하지 않는 담대한 모습입니다.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히 11:38)
진실하고 성실하고 담대한 삶으로 세상에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을 보여주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도전과 방해를 극복하고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