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감래(1599~1644) 신찰일통 吴甘来 信札一通
출처:서령인사 소스:이페어케이
도록 번호: 966
평가 RMB: 80,000-120,000
호가 RMB: 184,000(수수료 포함)
966
오감래(1599~1644) 신찰일통
종이책 렌즈(편지 2쪽, 발 2쪽)
식문: 앞의 성의 중고(中苦)를 어찌 자세히 설명할 길이 없다.지금 도착하면 매번 서에 들어오고 나반은 시끄러워진다.실언은 더 미움을 산다.성에 가서 돌아가면 스승과 사당을 방문하려 한다.이 단어를 구비하여 크롬 일람을 하사한다.시험 삼아 이미 이 공적을 치하하였으나, 허부공이 경송하였다.아상, 말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비지비지. 이름은 정구이다.
인장:감래(주
제발: 오감래, 자와 수, 강서 신창 사람.숭정 원년 진사서사선발과에서 일을 중. 북서쪽 큰 가뭄에 조류를 풀어 진기하게 하소서.복극론 무신이 공을 들이밀고 발호막제하다.이우귀. 한 곡 복상하고 이과에 급제하다.진병과에서 일을 하는 중.해가 지나자 승진과가 모두 급제했다.형, 양수군은 도적이 도착하기 전에 제신들을 인솔하여 호령하여 갔다.감래상소(甘來上 建)는 천자중건친(天子衆建親)이라 하고, 병조제실( 屏 帝帝室)이라 하므로 종자유성(宗子 。城)이라 한다.봉화가 비로소 퍼져서, 일조에 가서 백성의 기대라고 여기지만, 신하들은 여전히 부화뇌동하여 위신을 지키며 실추된 죄를 덮어 주었다.유성은 갈 만한 사람을 두고, 이름은 모두 버릴 만한 땅을 지키며,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관직이라고 어루만졌다.공죄가 불명확하면 상벌이 처벌되지 않으니, 이렇게 할 수는 없다어찌하여. 깊이 들어가지 않고, 제대 가탄하느님.하루는 제갈호부 상서 예원루의 급료, 감래는 신하와 호조표리라고 하고, 급료는 국계에 따라 감응할 수 있다.신하가 걱정하는 자는 군대는 도둑이 도망한다는 소문을 듣고도 백성은 도둑을 보고 기뻐하나 무급지환은 아니나 백성에게는 아무런 걱정이 없다.급한 대로 세금을 경감하고 인심을 사야 한다.제함지. 호환을 누리게 되어 연거푸 아뢰옵소서.회제는 진명하에게 장호과를 지으라고 명했고, 감래는 기쁨으로 대신했다.며칠 안 되어 도둑이 도성에 박하다.시태래는 관리의 외랑으로, 감래는 형에게 돌아가 어머니에게 속하며, 스스로 죽음을 맹세하였다.내일 성이 함락되니, 남행의 말을 하는 자가 있으니, 감래는 주께서 명결하신다고 하는 것이 가벼워지지 아니하리라.내질하여 황성에 들어가서는 안 되고, 다시 몇 가지 소고를 검토하니, 도적이 종횡무진하며, 단지 의론만 할 뿐,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하였다.후세에 이름만 붙이지 말고 다 타버리고 말았다.복왕은 태상경을 선물하고, 시호는 충절이다.순치 9년, 유사급지(有司 给地)에 명하여 70묘의 건사(建社)에 제사를 지내고, 장개(莊介)를 하사하였다.갑신의 변명은, 수십 명의 간원이 도망치거나 욕되게 하거나, 선시사절을 명한 자로서, 오직 장개 한 사람만이 옳았다고 할 수 있다.인화고보강서. 도장을 찍다:보강(백)
감장인 : 옹천구물(주) 순방소장(백)
설명: 천일각의 후손인 범영기, 동규존구장.고보강제발.
WU GANLAI LETTER
Ink on paper , mounted ( two pages plus two pages of inscription )
Note : Inscribed by Gao Baokang.
Provenance : Previously collected by Fan Yongqi and Tong Kuizun .
화심: 26.5×9.5cm×2 발문:35×20.5cm×2
RMB : 80 , 000-120 , 000
저자소개: 오감래(1599~1644).바이트지, 호와 수, 별호위암, 지금의 풍담산 진인.숭정 원년(1628년)진선비는 서사 사람에게 상을 준다.5년 시험에서 형과로 임용되는 도중, 남으로 수임하다.경태상사 박사님. 일 년 안에 수십 번을 상서합니다. 나라에는 인재요, 민명입니다.등의 진술은 이미 나왔고, 이치에 따라 강력히 주장하여, 권세가를 피하지 않았다.백관의 칭송을 받다.숭정 13년(1640년)에 전시에 과로하여 지병이 도지고 상소하여 고향에 돌아가 휴양하였다.고향이 2년 농업에 연결되어 흉작이고 기근과 역병이 병행되다.선생은 죽을 던져 구제하자고 제안하여 많은 백성을 구제하였다.17년(1644년) 이자성이 경성을 함락하였다복왕증태상사(增太常寺) 정경은 '충절(忠節)'이라는 시호를 받아 제장(祭葬)을 지내고, 사당을 지어 숭사(崇祭)했다.청정은 '장개'라는 시호를 내려 70묘의 제전에 제사를 지내고, 또 칙명을 받아 충사를 창건하여 그를 기렸다.
소장자소개: 1.범영기(1727~17)95), 봉힐, 오자오구정, 재호 옹천거, 저장성 닝보족.천일각 후대. 건륭황제.오십일년에 거인하였다. 공서와 전각으로 소장한 서신이 매우 많다.충분히 고인이 된다. 《인현통지》에 따르면, 유·충신·문사 등에 이름을 붙인 자석이다.효자, 규각수원 및 세외승도, 무수록하지 않는다. 시대, 예관, 품행, 도의를 두루 살피고 차례를 지낸다.이 밖에도 전각에 정통하다.돌아가신 후, 장서와 서화나 서신이 서적 판매상의 손에 전해지다.
2. 동규존(1831~1908앞), 원명회자 순배선호소미인성초무교(지금의 닝보하이수구) 사람.동괴오자(童槐五子)를 위하여 광서원년(1875) 거인(擧人)하여 중헌대부(中憲大夫)에게 4품계집을 하사하였다.부복건성사주사.가부는수장하고서화골동품은정감별하였다.깨달음을 얻은 사람은 풍도생초서축이라, 오랜 시일을 모사하다가, 결국 초서에 일하게 되고, 또 다시 초서화하게 된다.선전, 해서. 광서 16년(1890)에 『鄮山書院碑記』를 쓴 책이다.
발자소개: 고보강[청], 공보.제생과 인화 후보 훈도.공전서.
吴甘来(1599~1644) 信札一通
图录号: 966
估价RMB: 80,000-120,000
成交价RMB: 184,000(含佣金)
966
吴甘来(1599~1644) 信札一通
纸本 镜片(信二页,跋二页)
识文:前省中劳顾,以冗不遑详。今到,每承入署,柰班行杂聒,致失延话,更得罪也。计到省归即欲谒老师祠。拟具一词,乞赐铬传一览。试事已致此公,而许府公更颂雅尚,不置口也。秘之秘之。名正具。
钤印:甘来(朱)
题跋:吴甘来,字和受,江西新昌人。崇祯元年进士,授中书舍人,擢刑科给事中。西北大旱,疏请发粟振饥。复极论武臣冒功、翫冦跋扈莫制状。以忧归。服阕,起吏科,进兵科右给事中。逾年,擢户科都给事中。荆、襄数郡,贼未至而抚道诸臣率称护籓以去。甘来上疏曰天子众建亲亲,将使屏籓帝室,故曰宗子维城。乃烽火才传,一朝委去以为民望,而诸臣犹哓哓以拥卫自功,掩其失坠之罪。是维城为可留可去之人,名都为可守可弃之土,抚道为可有可无之官。功罪不明,赏罚不着,莫此为甚。疏入,帝大嘉叹。一日,帝诘户部尚书倪元璐饷额,甘来曰臣科与户曹表里,饷可按籍稽。臣所虑者,兵闻贼而逃,民见贼而喜,非无饷之患,而无民之患。宜急轻赋税,收人心。帝颔之。甘来遘疾,连请告。会帝命陈名夏掌户科,甘来喜得代。不数日,贼薄都城。时泰来官员外郎,甘来属兄归事母,而自誓必死。明日,城陷,有言驾南幸者,甘来曰主上明决,必不轻出。乃疾走皇城,不得入,返检几上疏稿,曰当贼寇纵横,徒持议论,无益豪末。尽取焚之,毋钓后世名,遂投缳死。福王赠太常卿,谥忠节。顺治九年,命所在有司给地七十亩建祠致祭,赐谥庄介。甲申之变,谏垣数十人或窜、或辱、或污,伪命先时死节者,惟庄介一人可谓得其正矣。仁和高保康书。钤印:保康(白)
鉴藏印:瓮天旧物(朱) 莼舫收藏(白)
说明:天一阁后人范永祺、童揆尊旧藏。高保康题跋。
WU GANLAI LETTER
Ink on paper, mounted (two pages plus two pages of inscription)
Note: Inscribed by Gao Baokang.
Provenance: Previously collected by Fan Yongqi and Tong Kuizun.
画心:26.5×9.5cm×2 题跋:35×20.5cm×2
RMB: 80,000-120,000
作者简介:吴甘来(1599~1644),字节之,号和受,别号苇庵,今宜丰潭山镇人。崇祯元年(1628年)进士,授中书舍人。五年考选改任刑科给事中,授南京太常寺博士。一年之内,即上书数十次,对国是人才、民命等陈述已见,据理力争,不避权贵,为百官所称道。崇祯十三年(1640年),因典试过劳,旧病复发,上疏告假回乡休养。家乡连接两年农业歉收,饥荒瘟疫并行。先生倡议施粥以济,救活了不少百姓。十七年(1644年)李自成攻陷京城,战败后自经。福王赠太常寺正卿,谥“忠节”,予以祭葬,建祠崇祀。清廷赐谥“庄介”,给祭田70亩,又敕建旌忠祠来纪念他。
鉴藏者简介:1. 范永祺(1727~1795),字凤颉,别字莪亭,斋号瓮天居,浙江宁波人。天一阁后人。乾隆五十一年举人。工书、篆刻,所藏明清尺牍甚多,足资掌故。据《鄞县通志》记载: 自硕辅名儒、忠臣、文士、孝子、闺阁秀媛及世外僧道,无不收录。并考其时代、礼冠、品行、道义,一一作序。此外亦精于篆刻。去世后,藏书和书画尺牍流转于书贩之手。
2. 童揆尊(1831~1908前),原名会,字莼舫,号少眉。鄞城醋务桥(今宁波海曙区)人。为童槐五子。光绪元年(1875)举人,诰授中宪大夫四品衔户部福建司主事。家富收藏,精鉴别书画古玩。得明人丰道生草书轴,追摹日久,遂工于草书,又善篆、楷。光绪十六年(1890)曾书《鄮山书院碑记》。
跋者简介:高保康[清],字龚甫。仁和诸生,候选训导。工篆书。