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시 준비로 문학을 접하기 힘든 학생들도 다 알 정도로 유명한 박완서 선생. <자전거 도둑><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같은 작품이 교과서에서 실려 어린 친구들에게도 친숙한 인물이다. 군복무 중인 조카가 중학생일 때 내가 쓴 동화책을 선물하자 “박완서 선생님 책이나 사인 받아 주지”라고 말해 새삼 그 유명세를 실감했다.
박완서 선생이 초등학생부터 할머니에 이르기까지, 전 국민에게 골고루 사랑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옆에서 일어나는 일처럼 실감나면서도 감동적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는 솜씨가 그 어느 작가보다 뛰어나기 때문이다. 격동의 한국사를 겪으며 시대의 아픔과 개인의 고통을 문학적으로 승화시킨 작품이 가슴을 절절하게 울린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는 수많은 작품을 발표하여 대한민국의 권위있는 상을 휩쓴 박완서 선생의 대표작이다. 작가의 여러 소설 속에 등장하는 다양한 인물을 한꺼번에 만나볼 수 있는 작품이라는 것도 기억할만하다. 작가가 출판사로부터 성장소설을 써달라는 요청을 받고 자신의 성장과정을 기억에 의지하여 쓴 ‘소설로 그린 자화상’이다.
박완서 선생의 작품이 문학적인 의미를 갖는 것은 고난의 시대를 온몸으로 체험한 순간순간을 세밀하게 묘사하여 큰 울림을 주기 때문이다. 역사책에서 중요한 사건의 연도를 외우는 것에 그치면 그 시대를 제대로 알 수 없다. <그 많던 싱아…>는 앞선 세대가 얼마나 큰 혼란과 아픔을 겪었는지 생생하게 담은 또다른 역사책이다.
일제 강점기인 1931년에 태어나 국민학교 때 일본어로 공부한 그녀는 숙명고녀에 진학했지만 전학을 갔다가 공부를 멀리하는 등 방황한다. 1941년부터 1945년까지 일본과 연합군 사이에 벌어진 태평양전쟁 때 생활은 점점 피폐해지고 작가의 오빠는 징용에 끌려갈 위기를 모면한다.
힘든 시절을 견뎌 광복을 맞았으나 나라는 더욱 혼란 속으로 빠져들고 작가는 서울대학교에 입학한다. 하지만 625 전쟁이 터지고 피난을 가지 못한 가족들은 엄청난 소용돌이에 휘말린다.
가족이야기를 담은 자화상
소설가는 체험이 곧 재산이다. 상상을 펼치되 현실이 바탕이 되어야 튼튼하기 때문이다. <그 많던 싱아…>는 박완서 작가의 삶을 기억에 의지해 그대로 담았을 뿐인데 그 어떤 소설보다 흥미롭고, 긴장되고, 아프고, 저릿하다. 세 살 때 세상을 떠난 아버지를 대신하는 할아버지와 두 분의 숙부, 두 자녀를 최고로 키우기 위해 갖은 고생을 하면서도 묘한 자존감으로 버티는 어머니, 자랑스러운 오빠의 알 수 없는 선택, 각각의 인물들이 힘든 세월 속에서 살아남으려는 몸부림이 처연하다.
일제 강점기에 면서기를 지낸 큰 숙부는 해방이후 친일파로 몰리고, 625 때 서울이 점령당하면서 인민군의 명령으로 식사를 마련해준 작은 숙부가 수복 후 처형당하는 일. 기준이 없고 선택이 자유롭지 못했던 혼란한 상황도 책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1930년대와 1940년대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도 이 소설은 가치가 있다. 여자는 학교에 잘 보내지 않던 시절에 작가의 어머니는 위장 전입을 시도하여 딸을 사대문안에 있는 학교에 입학시킨다. 현서동에 살면서 사직동에 있는 학교를 다니느라 고군분투하는 모습과 그 시절 아이들이 노는 풍경도 애틋하고 정겹다. 방학마다 찾는 고향 개풍의 풍경은 그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을 풍요롭게 만든다.
이야기를 재미있게 각색하는 어머니와 도서관에서 읽은 엄청난 양의 책 덕분에 작가는 소설가의 소양을 저절로 키운다. 점령군에 따라 갈팡질팡하는 세월을 작가는 어떻게 견뎠는지를 살피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할 독서 포인트이다. 70년 전 소녀는 힘든 상황을 어떻게 이겨냈고 어떤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봤는지, 지금의 나와 비교해보면 좋을 것이다.
힘든 시대가 준 선물같은 작품
“경제가 어렵다, 헬조선에서 흙수저는 살 수가 없다”는 푸념이 쏟아지지만 불과 몇 십 년 전 죽음의 관문을 뚫고 폐허 속에서 지금의 대한민국으로 우뚝 섰다는 걸 기억해야 한다. <그 많던 싱아…>를 꼼꼼히 읽으며 1930년대부터 20년간의 엄청난 소용돌이를 실감나게 접하면 삶이 한결 겸허해질 것이다.
2011년에 세상을 떠난 박완서 선생을 생전에 자주 뵈었다. 단아하고 고상하며 말수가 적은 선생이 심연에 고여 있던 엄청난 이야기로 주옥같은 작품을 쓴 건 시대가 준 선물이다. 한 인간에겐 너무나 큰 고통이었지만 소설가로서는 그 시대가 행운이었다고 말하면, 무지한 걸까? 작품을 위해 일부러 힘든 일을 겪은 건 아니지만, 피할 수 없었던 고통이 많은 사람을 성숙하게 만든 작품으로 재탄생 된 건 분명한 일이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와 후속편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는 200만 권 넘게 팔린 최고의 성장소설이다.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도 사람은 성장하고 소녀는 꿈을 꾼다. 나는 어떤 꿈을 가질 것인가, 내 인생을 어떻게 개척할 것인가, 더할 수 없을 만큼 어려운 시대를 보낸 작가를 탐험하며 나를 설계해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