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린 듯 끌린 듯이 따라갔네 그녀의 희고 아름다운 다리를 나 대낮에 꿈길인 듯 따라갔네 또박거리는 하이힐은 베짜는 소린 듯 아늑하고 천천히 좌우로 움직이는 엉덩이는 항구에 멈추어 선 두 개의 뱃고물이 물결을 안고 넘실대듯 부드럽게 흔들렸네 나 대낮에 꿈길인 듯 따라갔네 그녀의 다리에는 피곤함이나 짜증 전혀 없고 마냥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나 대낮에 꿈길인 듯 따라갔네 점심시간이 벌써 끝난 것도 사무실로 돌아갈 일도 모두 잊은 채 희고 아름다운 그녀 다리만 쫓아갔네 도시의 생지옥 같은 번화가를 헤치고 붉고 푸른 불이 날름거리는 횡단보도와 하늘로 오를 듯한 육교를 건너 나 대낮에 여우에 홀린 듯이 따라갔네 공동묘지 같은 변두리 아파트 단지로 들어섰네 나 대낮에 꼬리 감춘 여우가 사는 듯한 그녀의 어둑한 아파트 구멍으로 따라들어갔네 그 동네는 바로 내가 사는 동네 바로 내가 사는 아파트! 그녀는 나의 호실 맞은편에 살고 있었고 문을 열고 들어서며 경계하듯 나를 쳐다봤다 나 대낮에 꿈길 인듯 따라갔네 낯선 그녀의 희고 아름다운 다리를
「지하인간」 (미래사, 1991)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서 직장에 나간다. 원시인이 사냥 나가 듯 매일 출근하고 일을 한다. 그나마 점심시간엔 잠시 족쇄가 풀린다. 이성적인 사람이라 하더라도 본능과 감성을 외면할 순 없다. 죽도록 일 하기 싫을 때가 가끔 있다. 가슴이 답답하고 숨이 막힌다. 관능적인 여성이 허벅지를 드러내고 가고 있다. 뒷일은 제쳐두고 따라 붙인다. 어떻게 하자는 구체적 계획은 없다. 볼륨 좋은 허벅지에 끌리고 탱글탱글한 엉덩이에 홀려서 무작정 따라 갈 뿐이다. 세상만사 다 잊고 오직 본능에 충실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