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서갱유(焚書坑儒)
제감도설에 실린 분서갱유 상상도
焚:불사를 분
書:글 서
坑:구덩이 갱
儒.:선비 유
분서갱유는진시황이 사상통제의 일환으로
농서를 제외한 서적들을 모두 불태우고(焚書)
수백명의 유생을 생매장한(坑儒) 사건을 가리킨다.
이때 불태운 서적들은 현대와 다르게
대부분 대나무로 만들었으며 그 시기에
기록 수단이었던 죽간이었다.
이는 언론이나 문화에 대한 탄압을 상징하는 사건이다.
중국을 통일하고 8년이 지난 BC 213년
진시황은 학자 70명을 초대해
수도 함양에서 연회를 열었다.
참가자 중 한 명인 주청신이
진시황의 공덕을 찬양하자,
제나라 유학자 순우월이 옛것을
버리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반박했다.
이에 승상 이사가 진시황에게 간한다.
"여러 유생이 지금을 본받지 않고
옛날을 학습하며 당세를 비판하고
백성들을 미혹하고 있습니다.
지금 황제께서 천하를 통일하고 흑백을 가려
독존이 누구인지 결정하셨습니다.
제자백가의 책은 모두 태우시고
옛것을 들어 새것을 비방하는 자들은
일족을 멸하십시오.
그러자 진시황이 이사를 편들며 말했다.
"좋다. 시행하라."
이리하여 중국을 통일한 진나라는 공자, 맹자 등
춘추전국시대 유명한 사상가들의 논설이
기재되어 있던 많은 책을 거두어 불태워 버렸고,
의서와 농서 같은 실용서적만 남겼다.
그 유명한 분서(焚書) 사건이다.
진시황은 책을 태워버리는 것에만 그치지 않고
다음 해인 BC 212년에는 불로초를 탐색하다
실패하게 된 본인의 과오를 엉뚱하게도
유학자들에게 뒤집어씌워 460명을
잡아 들여 산 채로 묻어버렸다.
이를 갱유(坑儒)라 한다.
이른바 분서갱유라 불리는 사상 및 언로에 대한
탄압사건은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이 통일
이후의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고 폭정으로 치닫는
대표적인 일화로 자주 소개된다.
실제로 진나라는 진시황 사후 4년 만에 멸망하고 만다.
500년간 이어온 춘추전국이라는 분열의 시대를
종식시킨 지 불과 15년도 되지 않아
통일 진나라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 것이다.
진시황은 수백 년간 분열된 대륙을 최초로
통일한 인물로 그의 정복 전쟁이 아니었다면
중국은 하나의 나라, 하나의 문화,
하나의 시장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 철권통치자나 독재자들이
그러하듯 초기의 진취성과 인내심은
통일 이후 자만심으로 변질되고
아첨하는 이들에 의해 교만해져 갔다.
그런데 진시황과 비슷한 시기 인도 대륙을 통일했던
마우리아 왕조의 아소카 대왕의 비문에는
전혀 다른 글이 적혀 있다.
"왕은 모든 종교 교단들이 영토 어디에서나
자유롭게 살기를 원한다.
왕은 모든 교단의 사람들이 다른 교단의
훌륭한 교리에 관해 잘 알게 되기를 바란다."
같은 시절, 같은 정복 군주였으면서도
왜 전혀 다른 통치 철학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아소카 대왕은 자신이 벌인 정복 전쟁에서
희생된 자들에 대한 참회와 반성을
많이 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진시황의 비문에서는
어떠한 반성이나 최소한의 유감의
표시도 찾아볼 수가 없다.
오로지 황제의 공과 은택만 있을 뿐.
반성하지 않는 지도자는 결국 백성도,
나라도 상하게 만든다.
역사는 많은 것을 이야기해주고 있다.
-옮긴 글-
출처: 바람에 띄운 그리움 원문보기 글쓴이: 학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