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철길을 달린 사연>이란 글을 이곳 수필수상방에 두 편으로 나누어 올린 적이 있습니다.
저희 가족과 관련된 일이라 저희 남매들이 함께하는 카톡방에 올려두었더니, 저보다 열네살이 더 많은 제 큰형이 외가 과수원 추억이 떠올랐던지 예전에 써두었던 형의 글 하나를 보내왔습니다.
외가 과수원은 저희 남매들 모두에게 추억을 많이 남겨주었는데, 제가 그 과수원에 가본 것은 그 과수원이 다른 사람에게 넘어간 한참 후에 딱 한번 뿐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한번의 인상이 강렬하게 남아 훗날 단편 소설의 소재로 삼아 쓴 글을 5060 아름문학 2022 응모에 '제임스 덕만'이란 제목으로 올린 적도 있습니다.
큰형의 글을 읽다보니 예전에 큰형에게 그 일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던 기억도 나고, 그 내용이 수필방의 글을 읽으시는 분들에게도 옛 추억을 불러일으키기에 참 좋은 소재 같기도 해서 수필방에 큰형의 글을 올려 공감을 나누고자 합니다.
<잊지 못할 작은 선행>
6.25 전쟁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았던 때인, 국민학교 3-4학년에 다닐 때부터 나는 매년 여름방학이 되면, 연례행사처럼 선산군 고아면에 있는 큰아버님 댁이나 칠곡군 약목면 관호동의 외갓집 중 한 곳을 찾아갔었다. 큰아버님 댁은 벼농사를 짓는 집이었고, 외갓집은 사과밭을 가지고 과수원 농사를 짓는 집이었다.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나는 과수원이 있는 외갓집에 갈 때가 훨씬 더 좋았다. 그 당시를 돌이켜 보면, 외갓집 과수원은 경상북도 칠곡군 가산면 다부동 전격기념관 근처에 있는 낙동강 건너편 강변에 있었기 때문에 과수원은 외갓집이 있는 약목 관호동 마을에서는 10리 이상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셈이었다. 그래서 과수원에 가려면 경부선 열차가 다니는 철뚝길을 넘어가야 하고, 또 논들이 끝없이 펼쳐져 있는 칠곡군 약목면의 넓은 들판길을 다리가 아프도록 걸어가야만 했었다. 더구나 과수원에 가는 도중에 있는 네 곳의 하천에는 다리가 놓여있지 않았으므로 하천을 건너려면 바지를 무릎 위까지 걷어 올리고 건너가야만 했었다. 그렇지만 나는 큰 사과나무가 대략 100그루 넘게 심겨져 있는 낙동강 강변의 넓은 과수원이 좋아서, 외갓집에 있을 때에는 사들이 멀다 하고 과수원을 찾아갔었다. 과수원에는 부엌과 방 하나만 딸린 작고 아담한 황토 토담집이 있었는데, 이 집에는 과수원을 관리하시던 연세가 예순이 넘으신 외할아버님 내외가 기거하고 계셨다. 관호동의 외갓집 본가에는 과수댁인 외숙모님과 두 딸이 함께 살았는데, 한 명은 나에게 누이가 되었고, 다른 한 명은 여동생이 되었다. 그러니까 농사일을 할 수 있는 남자는 외할아버지 한 분밖에 안 계셨다.
그 당시 내가 아침 일찍 일어나 과수원을 찾아가면, 외할머니는 늘 외손주를 반갑게 맞이해 주셨고, 곧 수박밭에 들어가 수박 한 덩이를 따와서 절반으로 자른 다음, 수박 반쪽을 나에게 주시며 '점심때까지 수박을 먹고 놀다가 오너라'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면 나는 신명이 나서 수박 반쪽을 들고 낙동강의 넓은 모래사장을 지나 낙동강 강물 가에 가서 놀았다. 그리고 그곳에는 언제나 사람이라고는 나밖에 없었다. 그런데 어찌 된 셈인지 강물 가에는 오랜 세월 동안 물에 씻기어서 매끄럽고 둥그스름하게 된 작은 차돌들이 많았다. 그중에는 흔히 보는 검거나 흰 차돌들 외에 무지개의 일곱 색깔로 물들어 있는 정말 예쁜 색깔의 차돌들이 군데군데 섞여 있었다. 그래서 사람이라고는 나밖에 없는 낙동강 물가에서 수박을 먹으면서 예쁜 색으로 물든 차돌들을 찾아서 줍다가 보면 시간 가는 것도 모른 채 꽤 멀리까지 걸어가 있곤 했었다. 그렇게 물가를 걸어 다닐 때에 나는 늘 혼자서 뭘 묻고, 또 혼자서 대답하는 식으로 계속 뭔가를 중얼거리며 돌아다녔다. 그래서 혼자 있는데도 심심한 줄을 전혀 몰랐다.
또 과수원에서 놀 때에는 큰 사과나무에 기어 올라가는 것을 좋아했다. 그 당시 외갓집 과수원의 사과나무 종류는 국광 품종의 사과나무가 대부분이었고, 그 외에 골덴 품종의 사과나무도 약간 있었다. 여름방학 때쯤에는 사과나무에 열린 국장 사과는 아직도 너무 시어서 먹을 수가 없었지만, 골덴 사과는 색깔은 아직 시퍼렇지만 맛은 먹기에 딱 좋았다. 그래서 나는 골덴 사과나무에만 높이 올라가서는 가장 먹음직해 보이는 사과만 골라서 따먹곤 했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과나무에는 수없이 많은 매미들이 붙어 있었는데, 이런 매미들이 사과나무에는 해충에 속하기 때문에 될 수 있으면 많이 잡아서 없애도록 해야 했었다. 그래서 저녁때가 되어 외갓집으로 돌아가야 할 때에는, 나는 맨손으로 매미들을 많이 잡아서 양쪽 바지 주머니에 한가득 씩 집어넣어가지고 과수원을 떠나는 것이었다. 그러면 매미들은 주머니 속에서 정말 시끄럽게 울어대었는데, 그 매미들의 합창 울음소리를 나는 음악을 듣는 셈 치고 즐겼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오다가 넓은 들판의 한가운데쯤 오면 슬그머니 바지 주머니를 열어 주었다. 그러면 매미들은 살금살금 주머니 밖으로 기어 나와서는 한 놈씩 큰 소리를 지르면서 하늘로 날아올랐다. 매미들은 일단 하늘로 솟아오른 다음에는 까마득하게 멀리 떨어진 산들을 향하여 정말 한 번도 쉬지 않고 놀라운 속도로 날아갔었다.
외갓집의 구조를 보면, 부엌 하나에 방 3개가 달린 큰 몸체가 집터의 중앙 안쪽으로 자리 잡고 있었고, 또 이 몸체에는 기다란 마루와 높은 뜨락이 딸려 있었다. 몸체 뜨락 앞으로는 매우 넓은 황토색의 마당이 펼쳐져 있었고, 마당의 왼편에는 헛간과 방 하나가 딸린 사랑채가 있었는데, 그 사랑채의 앞쪽에는 늘 열어 놓은 채로 있는 싸리 대문이 있었다. 또 마당의 우측에는 외양간이 딸린 창고 건물이 있었는데, 이 건물 지하에는 가을에 수확한 사과들을 겨우내 저장하는 사과 저장고가 있었다. 그리고 싸리 대문을 나서면, 거기서부터 근처 산골짝으로 올라가는 좁은 길이 있고, 그 길을 따라 작은 실개천이 흘러내렸다. 외갓집 식구들은 아침에 일어나면 누구나 이 실개천에서 양치질과 세수를 하였는데, 그 정도로 이 실개천의 물은 맑았다. 여름철 비가 온 후에 이 실개천 옆으로 난 길을 따라 산골짜기로 올라가 보면 개울가 풀섶에는 정말 맛있는 빨간 산딸기들이 많이 열려 있었고, 이때쯤 근처 산에서는 뻐꾸기가 처량하게 울곤 했었다. 또 실개천의 반대쪽 담장 옆의 좁은 골목길을 따라 동네의 뒷동산에 올라가 보면, 외갓집 과수원에 갈 때, 가로질러 넘어가야 하는 왜관과 약목 사이의 경부선 철로가 훤하게 내려다 보였다. 이 철길을 따라 기차들이 시커먼 연기를 내뿜으며 달리는 모습을 볼 때면, 나도 나중에 커서 어른이 되면 저런 기차를 타고 멀리 여행을 해봐야겠다는 꿈을 꿔 보기도 했었다.
아무튼 외갓집은 나의 어린 시절의 그립고 아름다운 추억들을 많이 간직한 곳이었다. 그리고 지금 '잊지 못할 작은 선행'이라고 말하는 일은 내가 15살이던 중학교 2학년 때에 일어났었다. 그 당시 나는 대구에서 제일 좋다는 경북중학교에 다니고 있었는데, 여름방학이 시작되자마자 나는 예년처럼 외갓집엘 갔었다. 그런데 그 당시에는 불행하게도 외할아버지께서 치매에 걸리시는 바람에 외갓집의 사는 형편은 별로 좋지가 않았었다. 치매에 걸리신 외할아버지는 외갓집 사랑채의 문간방에 감금된 것처럼 늘 혼자 계셨다. 외할머니는 과수원의 토담집에 혼자 떨어져 기거하시며 과수원 일을 돌보고 계셨다. 그러던 어느 날 외할아버지가 나를 찾으시더니 '나를 과수원에 데려다 달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어린 내 생각에도 치매에 걸리셨으니 외할아버지가 과수원에 가서는 안 될 것 같았다. 그래서 "안 됩니다"라고 대답했더니, 외할아버지는 화를 벌컥 내시며 "지금 당장 가자"고 말씀하셨다. 치매에 걸리기 전의 외할아버지는 정말 인자하시고, 성격이 온화한 분이셔서 화를 내는 모습을 나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러시던 외할아버지가 이렇게 화를 내시며 과수원에 가자고 하시니 나로서는 어쨌든 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15살 밖에 안된 어린 내가 치매에 걸려서 걸음도 제대로 못 걸으시는 외할아버지를 10리가 넘는 과수원까지 어떻게 모시고 가야 할지 정말 눈앞이 캄캄하였다. 혼자서 궁리를 해보니까 외갓집에 마침 리어카가 하나 있던 것이 생각이 났다. 리어카는 고무 타이어 바퀴가 2개 달려 있고, 앞뒤와 좌우에는 나무 칸막이가 되어 있어서 가운데에 외할아버지가 앉아 계시면 내가 어떻게든 리어카를 끌고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궁리 끝에 리어카의 가운데 자리에 외할아버지를 앉혀 태우고서 외갓집을 출발하였다. 외할아버지가 탄 리어카를 그렇게 혼자서 끌고 가보니까 평지에서는 그런대로 별문제 없이 끌고 갈 수가 있었다. 그렇지만 외갓집 과수원까지 가기 위해서는 우선 경부선 철뚝길을 힘겹게 넘어가야 했었고, 또 한없이 넓은 약목 관호동 들판의 들길은 멀기도 했지만, 빗물이나 소달구지의 바퀴 자국 때문에 길이 울퉁불퉁 하여서 어린 내가 혼자서 외할아버지가 앉아 계신 리어카를 끌고 가는 것이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더구나 무릎까지 물이 차는 하천을 네 곳이나 건너야 했으니까 정말 눈물이 나는 고생을 했었다. 그렇게 해서 천신만고 끝에 과수원에 도착했더니, 외할머니가 화가 머리꼭지까지 나셔서 "내가 과수원에 오면 안 된다고 그렇게 많이 이야기를 했었는데, 이렇게 오면 어떻게 하느냐"며 할아버지를 무참하게 꾸중하였다. 외할아버지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아무 말씀도 못하였다. 나는 두 분 옆에서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내 속으로는, 외할머니가 보고 싶어서 천신만고 끝에 이곳까지 오신 외할아버지가 너무 불쌍해 보였고, 외할머니가 너무 무정해 보여서 야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당장 돌아가라고 고함을 치시는 외할머니의 말씀을 거역할 수가 없어서, 과수원의 토담집에는 한번 들어가 보지도 못한 채, 힘들게 갔던 길을 되돌아와야만 했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외할아버지는 결국 돌아가셨다. 외할머니가 보고 싶어서 어린 외손자가 끄는 리어카에 실려서 울퉁불퉁한 먼 들판길을 불평 한마디 없이 앉아 계시던 인자한 외할아버지의 모습이 지금도 내 기억 속에 선명하게 떠 오른다. 이미 돌아가 신지가 벌써 오래되었지만 새삼스럽게 다시 한번 더 외할아버지의 명복을 빌어본다.
***
큰형의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첫댓글 새벽에 눈 뜨면 물 한잔 마시고 이어폰에 좋아하는 음악 틀고 걷기나가는게 하루 시작의 루틴이었는데.
이 카페를 접하고 부터는 올리시는 생동감과 웃음, 이렇게 감동이 있는 글을 접하는 일상이 추가 되었습니다.
형님의 글을 올리셨네요.
아련한 그 시대의 들판, 다리없는 하천, 여름방학의 외갓집 풍경이 고스란히 전해집니다.
외 할아버지의 마지막 작은 소망이 안타깝고 가슴아프게 다가옵니다.
잘 읽었습니다.
늘 안전운전 하세요.
밝은 이미지의 커쇼님이 수필방에 합류하셔서 수필방 분위기가 한결 더 밝아진 것 같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글을 읽어 내려오다
치매에 걸리신 외할아버지를
리어카에 모시고, 10리 길을
간 이야기가
가슴 찡하게 와닿습니다.
열 다섯 살 소년한테는 너무도
버거운 일이었을 텐데요.
그래도 외할머니를 보고싶어 하시는
할아버지를 모시고 과수원까지 간 형님.
마음자리 님 가족은 모두 심성이
고우신 분들 같습니다.
옛날에 시골에서 과수원하는
집들은 그래도 형편이 넉넉했지요.
약목에서 과수원하던 친구네가
있어서 놀러 갔던 기억이 납니다.
형님이 공부를 잘 하셨던가 봅니다.
경북중학교는 명문이었지요.
형님의 글, 수필인 듯 단편 소설인 듯
아름다운 글 잘 읽었습니다.
큰형의 옛이야기는 많이 들었어도 큰형이 쓴 글은 별로 접해보지 못했었는데, 형이 추억 글 하나를 보내준 덕분에 여기 계신 님들과도 같이 나누고 싶은 욕심이 생겼습니다.
이베리아님 고향 주변에도 낙동강이 흐르고 과수원도 많았지요?
@마음자리 낙동강이 참 아름다운 곳이었습니다.
대구에서 고향에 가면
낙동강으로 먼저 달려 가곤 했지요.
@이베리아 네. 그러셨을 것 같았습니다.
성주가 마주보이는 다산 쪽 낙동강은 저도 자주 찾아갔던 곳입니다.
간밤에 오랜만에 단잠을 자고 일어나서
습관처럼 카페 문을 열었다.
잊지 못할 선행의 글을
시냇물 맑게 졸졸 흐르듯
졸랑졸랑 따라서 외가댁 과수원 구경도 하고
덩달아 내 어린시절 첩첩산중 빗갱이 외가댁도
다녀오게 되었다.
빗갱이는 오랑캐가 비켜지나간 곳이라서
지역
이름이 빗갱이라고 외삼촌이 말씀해 주셨다.
대나무 산으로 둘러쌓인 나의 외가댁을
갔다와서
마음자리님 외가댁으로 다시 왔더니
외할아버지 과수원 가신 길
할머니의 화 나신 모습이 이해도고
할아버지 가 할머니 그리워 찾아가고프셨을
심정이 이해되니
눈물이 왈칵 솟구친다.
곁에 있는 내남편에게 더 잘해야 되겠다고
마음속에 단단히 다짐도 해본다.
끝
마음자리님 형님 글을 잘 지으십니다.
단편소설 정말 잘읽었습니다.
형제들 글을 어찌그리 잘 쓰시는지요.
오늘도 새벽이랑 평안하시기를
기원드립니다.
저도 오늘 종일 한국무용 연마 갑니다.
사진은 잠실에서 강동지역 지나는 워커힐 근처에서 찍은 하늘 입니다,
조윤정님의 댓글을 보며 제가 큰형의 글을 잘 올렸구나... 하고 안심을 했습니다.
제가 쓴 글이 아니라서 혹 언짢아하실 수도 있을 것 같아서요.
여기 계신 형님들과 누님들이 제 글보다 형 글에 더 공감을 하실 것 같았습니다. ㅎ
지난 주 캘리포니아 다녀오며 만난 새벽 먼동 전해드립니다.
두고두고 잊지 못할 선행이군요.
작지 않고
아주 큰 선행이란 생각이 드네요.
외할아버지의
마지막 간절한 바람을
들어주셨으니까요.
평생 함께 한 풍경을
열다섯 살 손자가
힘겹게 끄는
리어카에 실려
바라보는 할아버지의
심정이 어떠셨을지...
감동하며 읽었습니다.
저도 어린 나이의 큰형이 외할아버지를 태운 그 리어카를 끌고 거친 길을 오고가는 모습이 영화 장면처럼 떠올라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마음자리님의 큰형은 치매에 걸린 외할아버지 에게 훌륭한 일을 했군요
외할아버지는 몇살에 돌아가셨는지 궁금합니다
돌아가시기 직전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주위 사람들을 불편하게 합디다
우리는 그러지 말아야 될텐데?
그게 내 마음대로 될런지?
자신이 없습니다
충성 우하하하하하
저는 외할아버지가 제 태어나기 전에 돌아가셨다고 알고 있었는데, 이번 큰형의 글을 읽으며 제가 돌 지났을 때쯤 돌아가신 것을 알았습니다.
돌아가신 연세는 모르겠습니다.
태평성대님은 건강도 좋으시고 총기도 많으시니 염려 안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ㅎ
글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두 형제분. 글을 정말 잘 쓰셨네요 눈 앞에 본 것처럼 그려집니다.
제 작은형의 글은 자주 접했는데 큰형의 글은 거의 못 보다가, 같이 공유할 수 있는 글을 보내주어 저도 참 반가웠습니다.
긴 글 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의 어린시절에도 여름방학이면 외갓집에 갔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외손주들이 잔뜩 몰려온 여름이 외숙모에게 얼마나 부담스러웠을까 하는 생각에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보다 더 고맙게 느껴집니다.
내가 중학생이던 여름방학에 외갓집에 갔는데, 외할아버지께서 술을 거나하게 드시고 리어카에 타고 동네길을 돌고 싶다고 하셔서 그리했습니다. 외갓집에서 돌아온 후 며칠만에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에 어린 마음에도 망연자실했던 기억이 납니다. 옛 추억은 언제나 보물창고이고 가다듬는 거울이기도 하네요 ^^
저도 어려서 방학이면 외가 친척들 집에 찾아가 며칠씩 지내다 오곤했는데... ㅎㅎ 외숙모님들께 힘든 일인 줄 나이 들고서야 알았습니다. ㅎ
저는 아버지가 막내셨고 저도 막내라 할아버지 외할아버지는 뵙지도 못했고, 할머니 외할머니 두 분만 뵈면서 자랐어요.
추억은 보물창고, 노다지 맞습니다. ㅎ
어릴 적 외갓집은 정말 요술 방망이
같았어요
부자집이였던 외가에 가면 맛있는 것도 많이 먹고
예쁜 옷도 마음대로 살 수 있었지요
마음자리 큰형님께서는
정말 글을 잘 쓰셨네요. 15살 어린 소년이
외할아버지의 소원을 들어 드리고자 리어카에 태우고 울퉁불퉁 들길따라
4개의 시냇물을 건너가는 험난하고 긴 여정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그 상황이 눈앞에
그려지네요
마음 따뜻해 지는 글입니다.
저도 그런 모습이 영화 장면처럼 떠올라 한참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그 가슴 먹먹함이 글을 공유해야겠다는 생각을 들게 했습니다.
누구에게나 외갓집은 늘 어린 시절을 평화로운 옛 정경으로 돌아가게 합니다.
외할머니는 어머니 다음으로 포근함. 따뜻함으로 다가옵니다.
마음자리님의 큰형님의 글은
우리 모두를 아련한 과거로 돌아가게 하고 그리움이 밀려들게 합니다.
마음자리님. 큰형님. 모두 문학에 재능이 많으신 분들 같습니다.
우습게도 저희 삼형제는 다 이과 전공을 했는데 글 쓰기를 좋아하네요. ㅎㅎ.
작은형인 가람과뫼형의 글은 쉽게 접하고 나눌 기회가 많았는데, 큰형의 글은 큰형의 삼십대에 유럽 여행을 했던 여행기만 한번 접하고 다른 글은 접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이번에 추억 서정글을 모처럼 읽을 기회가 생겼고, 읽고나니 님들과 나누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푸근하고 넉넉한,
아름다움만이 존재하는 세상에
제가 그 속에서 존재하는
행복감에 젖었습니다.
낙동강 줄기 700리 길
곳곳 마을에는
서정 짙은 풍경이 평화로웠습니다.
이 글을 읽는 순간
제일 먼저 다가오는 느낌은
마음자리님 형제 우애였습니다.
가족의 카톡에 마음자리님 글을 올리고
형님이 쓴 옛날 글을 올려주시는 마음~
세상에는 많은 형제들이 존재하나,
지금 나이까지 이런 소통을 한다는 것은
보통 형제와는 다릅니다.
형님의 글 올려 주시고,
그시절로 돌아가게 해주는 외가와의 정감 어린 글,
많은 분들에게 감동을 주셨네요.
감사합니다.^^
저야말로 큰형의 글을 소개하고 공감할 수 있는 이런 자리가 있어감사할 일이지요.
멀리 떨어져 살지만 공유하는 추억이 있고 나눌 수 있는 인터넷 공간이 있어 남매간의 정을 유지하기 쉬운 지금 세상에 살아 참 다행입니다.
또 공감 공간을 열어주시느라 늘 애쓰시는 콩꽃님께도 감사드립니다.
6.25가 끝난지 얼마안됐는데 국민학교 4.5학년이라 해서
이상해서 다시보니 큰형님의 글이었군요
과수원 사과나무에 매달린 매미들을 잡아서 바지주머니에 넣었다가
올때는 모두 날려보내주신 큰 형님의 따뜻한 마음을 닮아 마음자리님도
글도 잘쓰시고 마음도 따뜻하신거 같습니다
저와 나이 차가 많이 나는 큰형의 추억 글입니다. 동생들에게 정을 많이 준 덕분에 저희 남매가 큰형을 많이 따르며 자랐습니다.
15세의 형님이 외할아버지의 마지막
소원을 힘겹게 들어 드렸으니
마음 뿌듯하고 그리운 추억이 되겠군요
지금도 낙동강변엔 과수원이 많지요.
글을 보면서 어릴때 엄마 손잡고
창녕 외가에 갔던 기억이 새롭네요
우물옆 찬물에 담겨있던 수박도 생각나고..
잠시 유년의 추억에 잠겨 봅니다
외가, 강, 과수원, 수박, 철길, 리어카...
추억을 공유할 포인트가 많아보여
큰형의 글이라 밝히며 올렸습니다.
추억 공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도 리어카를 끌고 가는 동안 내리막길이 없어서
다행이었네요.
경사로를 바퀴가 구르면 어린아이 힘으로는 막지 못하고
다칠 수도 있기 때문에 위험하지요.
어른 말씀에 거역을 모르고 순종하시는 형님의 바른 심성을 보며
마음님의 부모님 인품까지 짐작이 되어집니다.
감동이 함께하는 글 감사히 읽었습니다.
저도 그 과수원 가는 길 걸어보았던 기억이 나는데 울퉁불퉁해도 대부분 평지였어요. 다행히 내리막길은 없었습니다.
아마도 철길 건너며, 냇물 건너며 형은 많이 힘들었을 겁니다.
공감 나누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장마비가 오락가락하는 습한 날, 습기를 말려주는 마음자리님의
훈훈한 글을 대합니다.. 효심이라기에는 무모할 정도로 큰형님께서
외조부를 모시고 비틀비틀 리어카를 몰던 비슷한 길을 과수원집
손자였던 저는 유치원 시절 할아버지 자전거 뒤에 실려 과수원을
오갔습니다..
열다섯 형님이 용을 쓰던 그 길이 빛바랜 흑백사진처럼 이 저녁
이 노인을 안스럽게 해주는데 덕분에 어린 날 과수원 옆 낙동강
백사장에 누워 넓은 프라타나스 이파리 사이로 쳐다보던 하늘이
선명하게 떠오릅니다
제게도 동향의 대선배이신 큰 형님의 건강하심을 소원합니다..
구봉선배님, 안부 많이 궁금했는데 소식 주셔서 감사합니다~
치매를 앓으시는 외할아버지를 리어커에
태우시고 과수원을 가는 소년의 맘
씀씀이가 천사같아요.
넘나 좋은 이야기 들려주셔서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이 아침
힐링하면서 감사의 맘 놓고 갑니다.
큰형이 참 정 많고 심성이 착하다는
칭찬을 많이 들었습니다.
나무랑님 댓글 마음 전해드리면 좋아하실 거 같습니다.
글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마음을 헤아려 보았습니다 .
마음자리님 큰 형님 . 외 할아버지 , 외 할머니 ,
그리고 남편도 없이 치매 걸린 시아버지를 모시는
마음자리님 외숙모.
마음자리님 형제분들은 모두 선하시고
글도 잘 쓰시네요 .
부러운 가족 입니다 .
제가 복이 많았던가 봅니다.
가까운 분들이 어질고 선한 분들이
많았으니까요.
감사합니다.